diff --git "a/synthdog/resources/corpus/kowiki.txt" "b/synthdog/resources/corpus/kowiki.txt" new file mode 100644--- /dev/null +++ "b/synthdog/resources/corpus/kowiki.txt" @@ -0,0 +1,100 @@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는 민주당 출신 미국 39대 대통령 이며, 독재자의 사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지미 카터는 조지아주 섬터 카운티 플레인스 마을에서 태어났다.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해군에 들어가 전함원자력잠수함의 승무원으로 일하였다. 1953년 미국 해군 대위로 예편하였고 이후 땅콩면화 등을 가꿔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별명이 로 알려졌다.1962년 조지아 주 상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나 그 선거가 부정선거 였음을 입증하게 되어 당선되고, 1966년 조지아 주지사 선거에 낙선하지만, 1970년 조지아 주지사를 역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조지아주 상원의원을 두번 연임했으며,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지사로 근무했다. 조지아 주지사로 지내면서, 미국에 사는 흑인 등용법을 내세웠다.1976년 미합중국 제39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도덕주의 정책으로 내세워서, 많은 지지를 받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었다.카터 대통령은 에너지 개발을 촉구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카터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조정하여 캠프 데이비드에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수상과 함께 중동 평화를 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공화당과 미국의 유대인 단체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1979년, 양국 간의 평화조약이 백악관에서 이루어졌다.소련과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SALT II)에 조인했다.카터는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한민국 등 인권 후진국의 국민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취임 이후 계속해서 도덕정치를 내세웠다.임기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으로 인해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반공국가들의 보이콧을 하였다.그는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의 인질 구출 실패로 인한 원인으로, 1980년 제40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하며 재선에 실패하였다.지미 카터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대통령 중 하나다.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한때 한미 관계가 불편하기도 했다. 1978년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1982년까지 3단계에 걸쳐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와 정보기관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주한미군은 완전철수 대신 6000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 등과의 논란으로 불협화음을 냈으나 1979년 6월 하순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관계가 다소 회복되었다.1979년 ~ 1980년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변기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후에 대한민국 내에서 고조되는 반미 운동의 한 원인이 됐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 그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을 조문사절로 파견했다.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에 대해 초기에는 강하게 비난했으나, 미국 정부가 신군부를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됐다.퇴임 이후 민간 자원을 적극 활용한 비영리 기구인 카터 재단을 설립한 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제 3세계의 선거 감시 활동 및 기니 벌레에 의한 드라쿤쿠르스 질병 방재를 위해 힘썼다. 미국의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도 했다.카터는 카터 행정부 이후 미국이 북핵 위기 코소보 전쟁 이라크 전쟁과 같이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최후로 선택하는 전통적 사고를 버리고 군사적 행동을 선행하는 행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 하며 미국의 군사적 활동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특히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해 북한의 김일성, 아이티의 세드라스 장군, 팔레인스타인의 하마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정권 같이 미국 정부에 대해 협상을 거부하면서 사태의 위기를 초래한 인물 및 단체를 직접 만나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힘썼다. 이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와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직 대통령의 권한과 재야 유명 인사들의 활약으로 해결해 나갔다.1978년에 채결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이행이 지지부진 하자 중동 분쟁 분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3년 퇴임 후 직접 이스라엘과 팔레인스타인의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19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행��이 임박했으나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미국과 북 양국의 중재에 큰 기여를 해 위기를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주선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주일 후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여 김일성과 김영삼의 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세계의 인권문제에서도 관심이 깊어 유엔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제도를 시행하도록 노력하여 독재자들의 인권 유린에 대해 제약을 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만드는 데 기여하여 독재자들 같은 인권유린범죄자를 재판소로 회부하여 국제적인 처벌을 받게 하는 등 인권 신장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2011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북한을 3일간 방문했다.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발목이 잡혀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지만 이란 사태는 미국 내 이란 재산을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서 사실상 카터가 해결한 것이었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으로 퇴임 후에 훨씬 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 중에 특이한 인물로 남았다.그는 2002년 말 인권과 중재 역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이외에도,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퇴임 후에 지속적으로 여러 장기집권 독재자들을 만나왔는데, 그와 만난 독재자들중 절대 다수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며 지미 카터는 '독재자의 사신'이라는 말이 붙기도 한다. +수학은 수 양 구조 공간 변화 등의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명확한 정의는 없으나 현대 수학은 일반적으로 엄밀한 논리에 근거하여 추상적 대상을 탐구하며 이는 규칙의 발견과 문제의 제시 및 해결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수학은 그 발전 과정에 있어서 철학 과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다만 엄밀한 논리와 특유의 추상성 보편성에 의해 다른 학문들과 구별된다. 특히 수학은 과학의 여느 분야들과는 달리 자연계에서 관측되지 않는 개념들에 대해서까지 이론을 추상화시키는 특징을 보이는데 수학자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추측을 제시하고 적절하게 선택된 정의와 공리로부터 엄밀한 연역을 거쳐 그 진위를 파악한다.수학의 개념들은 기원전 600년 경에 활동하며 최초의 수학자로도 여겨지는 탈레스의 기록은 물론 다른 고대 문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인류의 문명과 함께 발전해왔다. 오늘날 수학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공학 의학 등 다른 여러 학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된다.수학을 의미하는 매스매틱스라는 단어는 및 그 활용형 mathmatiks에서 유래되었다.역사적으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에 필수적인 건축, 천문학, 정치, 상업 등에 수학적 개념들이 응용되어 왔다. 교역·분배·과세 등 인류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계산에 수학이 관여해 왔고, 농경 생활에 필수적인 천문 관측과 달력의 제정, 토지의 측량 또한 수학이 직접적으로 사용된 분야이다. 고대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문명으로는 이집트, 인도, 중국, 그리스 등이 있다.특히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는 처음으로 방정식에서 변수를 문자로 쓰는 등 추상화가 발전하였고 유클리드의 원론에서는 최초로 엄밀한 논증에 근거한 수학이 나타난다. 수학의 발전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16세기의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과학적 방법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수학과 자연과학에 있어서 혁명적인 연구들이 진척되었고, 이는 인류 문명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수학의 각 분야들은 상업에 필요한 계산을 하기 위해, 숫자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그리고 천문학적 사건들을 예견하기 위해 발전되어왔다. 이 네 가지 목적은 대략적으로 수학이 다루는 대상인 양, 구조, 공간 및 변화에 대응되며, 이들을 다루는 수학의 분야를 각각 산술,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이라 한다. 또한 이 밖에도 근대 이후에 나타난 수학기초론과 이산수학 및 응용수학 등이 있다.산술은 자연수와 정수 및 이에 대한 사칙연산에 대한 연구로서 시작했다. 수론은 이런 주제들을 보다 깊게 다루는 학문으로, 그 결과로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등이 유명하다. 또한 쌍둥이 소수 추측과 골드바흐 추측 등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문제들도 여럿 있다.수의 체계가 보다 발전하면서, 정수의 집��을 유리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유리수의 집합은 실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이며, 이는 또다시 복소수 집합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사원수와 팔원수 등의 개념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자연수를 무한대까지 세어나간다는 개념을 형식화하여 순서수의 개념을 얻으며, 집합의 크기 비교를 이용하여 무한대를 다루기 위한 또다른 방법으로는 기수의 개념도 있다.수 대신 문자를 써서 문제해결을 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적 법칙을 일반적이고 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포함한다. 고전대수학은 대수방정식 및 연립방정식의 해법에서 시작하여 군 환 체 등의 추상대수학을 거쳐 현대에 와서는 대수계의 구조를 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선형대수학으로 전개되었다. 수의 집합이나 함수와 같은 많은 수학적 대상들은 내재적인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대상들의 구조적 특성들이 군론 환론 체론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대수적 구조들을 연구하면서 다루어지며 그것들 하나하나가 내재적 구조를 지닌 수학적 대상이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은 벡터 벡터 공간으로의 일반화 그리고 선형대수학에서의 지식들이다. 벡터의 연구에는 산술 대수 기하라는 수학의 중요한 세개의 분야가 조합되어 있다. 벡터 미적분학은 여기에 해석학의 영역이 추가된다. 텐서 미적분학은 대칭성과 회전축의 영향 아래에서 벡터의 움직임을 연구한다.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와 관련된 많은 고대의 미해결 문제들이 갈루아 이론을 사용하여 비로소 해결되었다.공간에 대한 연구는 기하학에서 시작되었고,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비롯되었다. 삼각법은 공간과 수들을 결합하였고,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포함한다. 현대에 와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개념들은 더 높은 차원의 기하학을 다루기 위해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위상수학으로 일반화되었다. 수론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모두 해석 기하학, 미분기하학, 대수기하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 군도 공간과 구조, 변화를 다루는데 사용된다. 위상수학은 20세기 수학의 다양한 지류속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분야이며, 푸앵카레 추측과 인간에 의해서 증명되지 못하고 오직 컴퓨터로만 증명된 4색정리를 포함한다.변화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일반적인 주제이며, 미적분학은 변화를 탐구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발전되었다. 함수는 변화하는 양을 묘사함에 있어서 중추적인 개념으로써 떠오르게 된다. 실수와 실변수로 구성된 함수의 엄밀한 탐구가 실해석학이라는 분야로 알려지게 되었고, 복소수에 대한 이와 같은 탐구 분야는 복소해석학이라고 한다. 함수해석학은 함수의 공간의 탐구에 주목한다. 함수해석학의 많은 응용분야 중 하나가 양자역학이다. 많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양과 그 양의 변화율의 관계로 귀착되고, 이러한 문제들이 미분방정식으로 다루어진다. 자연의 많은 현상들이 동역학계로 기술될 수 있다. 혼돈 이론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현상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수학기초론 관련 분야.수학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수리논리학과 집합론이 발전하였고 이와 더불어 범주론이 최근에도 발전되고 있다. 라는 말은 대략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탐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몇 가지 의견 불일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학의 기초에 대한 위기는 그 당시 수많은 논쟁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 논쟁에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브라우어-힐베르트 논쟁이 포함되었다.오늘날 수학은 자연과학, 공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에서도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미적분학과 선형대수학은 자연과학과 공학, 경제학을 하는데에 필수적 과목으로 여겨지며, 확률론은 계량경제학에 응용된다. 통계학은 사회과학 이론에 근거를 마련하는데 필수적이다. 16세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주장과 함께 물리학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하였고, 17세기에 아이작 뉴턴이 고전 역학의 기본 물리학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정립하여 물리학 이론에서 수학적 모델링은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과학적 방법이 정립되는 시기이기도 한데, 많은 과학적 현상들이 수학적 관계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과학적 방법에도 수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유진 위그너는 그의 에세이 "The unreasonable effectiveness of mathematics in natural sciences"에서 인간 세상과 동떨어져있고 현실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던 수학 중 극히 일부는 뜻밖에도 자연과학과 연관성이 드러나고 과학이론에 효과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는데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3차원 이상의 임의의 차원에서 기하학을 탐구했던 미분 기하학은 당시에는 현실과 연관성을 가지지 않았으나 먼 훗날 일반상대성이론이 4차원 기하학을 필요로 함에 따라, 물리적 세상과 연관이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게이지이론, 양자장론 등에도 미분 기하학은 필수적이다.또한 수학은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과도 관련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두 정수의 비율이 듣기 좋은 소리가 난다는 점을 가지고 피타고라스 음계를 만들었다. 중세시대에도 음악과 수학을 밀접하게 연관시켰으며 성 빅토르의 후고는 “음악은 조화다”라고 했고, 성 트론드의 루돌프는 “음악은 조화의 토대다”라고 쓴 바 있다. 조화가 반드시 소리로 표현될 필요는 없고 소리의 음악은 음악의 형식 중 하나에 불과했다. 소리에 대해 다루었던 중세의 저술가들이 있는가 하면, 조화와 비례의 추상적 이론만을 다루고 소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저술가들도 있었다. 청각적인 면과 추상적인 면이라는 음악의 이런 이중적 측면은 고대의 음악이론보다는 중세의 음악이론에서 큰 특징이 되었다. 또한 현대 음악을 군같은 수학적 대상을 이용해 분석하기도 한다. 원근법은 사영 기하학에 해당한다. 미술 사조 중 하나인 입체파도 기하학의 영향을 받았다. +수학에서 상수란 그 값이 변하지 않는 불변량으로 변수의 반대말이다. 물리 상수와는 달리 수학 상수는 물리적 측정과는 상관없이 정의된다.수학 상수는 대개 실수체나 복소수체의 원소이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상수는 정의가능한 수이다.특정 수학 상수, 예를 들면 골롬-딕맨 상수, 프랑세즈-로빈슨 상수, formula_1, 레비 상수와 같은 상수는 다른 수학상수 또는 함수와 약한 상관관계 또는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문학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의 하위분야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미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은 원래 문예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며 문학을 학문의 대상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의 명칭 역시 문예학이다. 문예학은 음악사학 미술사학 등과 함께 예술학의 핵심분야로서 인문학의 하위범주에 포함된다.일반적으로 문학의 정의는 텍스트들의 집합이다. 각각의 국가들은 고유한 문학을 가질 수 있으며, 이는 기업이나 철학 조류,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한 국가의 문학을 묶어서 분류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어, 성서, 베오울프, 일리아드, 그리고 미국 헌법 등이 그러한 분류의 범주에 들어간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문학은 특정한 주제를 가진 이야기, 시, 희곡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이야기, 시, 그리고 희곡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띨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한 아이템을 구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은 어떠한 상징적인 기록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문학은 오직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구성된 것만을 포함한다. 좀 더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 개념이 꼭 물리적인 형태를 가진 텍스트여야 하고, 대개 그러한 형태는 종이 등의 눈에 보이는 매체에서 디지털 미디어까지 다양할 수 있다.더 나아가 보면 의 범주에 포함된다.일반적인 문학의 분류.문학은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이 외에도 편의에 따라 발생적으로 대별하기도 한다.문학은 처음은 유일한 종류 즉 노래하고 말하고 춤춘다는 것이 분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춤추는 것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연극이며 노래하는 것이 발달하여 시 말하는 것이 발달하여 산문의 이야기가 되었다. 시는 정형시자유시산문시로 또한 서사시와 서정시로 나뉜다. 산문은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진 이야기 근대 리얼리즘의 수법 ��후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 있다. 이야기나 소설과 같이 특별한 구상에 의하지 않고 작자의 흥미에 의해서 씌어지는 것이 잡문 또는 수필이며 이것이 날짜에 따라 씌어지는 것이 일기 여행의 과정에 따라 씌어지는 것이 기행문이다. 일기와 마찬가지로 발표의 의도가 작은 것에 서간이 있다. 이 밖에 사건의 경험에 따른 회고록 사건 등의 특정시에 한정되지 않는 자서전 제삼자에 의해서 씌어지는 전기가 있다. 또한 이것들을 포함하는 예술작품의 가치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평론이다.대중문학이란 상업성을 띠며 대중을 겨냥하여 그들의 통속적인 흥미와 욕구를 채워주는 문학을 말한다. 대중문학의 하위장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문학과 관련된 직업.문학을 창작하는 예술가를 문예가라고 부른다. 문예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문예학자라고 부른다.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을 따로 저술가라고 한다. 문예학자와 언어학자를 합쳐 어문학자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와 언어를 사용한 예술인 문학은 현격한 차이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반영론적 관점에 의한 감상은 작품을 창작된 당시 시대 정황과 연결시켜 감상하는 입장이고 내재적 관점의 감상은 작품의 형식 내용에 국한하여 감상하는 것이다. 표현론적 관점의 감상은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작품을 연결시켜 감상하는 것이고 수용론적 관점의 감상은 독자와 작품을 연결시켜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 목록에 실린 국가 기준은 1933년 몬테비데오 협약 1장을 참고로 하였다. 협정에 따르면, 국가는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특히 마지막 조건은 국제 공동체의 참여 용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승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목록에 포함된 모든 국가는 보통 이 기준을 만족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국가이다. 하지만 몬테비데오 협약 기준을 만족하는지의 여부는 많은 국가가 논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몬테비데오 협약 기준만이 국가 지위의 충분한 자격이든 아니든 국제법의 견해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다른 이론에 대한 고리는 아래에서 볼 수 있다.위 기준에 논거하여 이 목록은 다음 206개 국가를 포함하고 있다.다음 국가는 몬테비데오 협약의 모든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거나, 자주적이고 독립적임을 주장하지 않는 국가이다.국제적으로 승인 받은 나라.이 목록은 주권을 주장하고 점유한 영토를 실제로 관리하고 있으나, 많은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지 못한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극소형 국가는 이 목록에 포함하지 않는다.화학은 물질의 성질, 조성, 구조, 변화 및 그에 수반하는 에너지의 변화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학도 역시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물리학이 원소와 화합물을 모두 포함한 물체의 운동과 에너지, 열적·전기적·광학적·기계적 속성을 다루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통일된 이론을 구축하려는 것과는 달리 화학에서는 물질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화학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목적에 맞는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길을 제공하며, 이는 농작물의 증산, 질병의 치료 및 예방, 에너지 효율 증대, 환경오염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화학을 뜻하는 영어 ‘케미스트리’는 연금술사들이 물질을 섞으며 발전시켰기 때문에 연금술을 뜻하는 단어 ‘알케미’에서 비롯하였다. 이는 다시 아랍어 ‘알 키미야’에서 왔는데 이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화학(化學)’이란 단어는 물질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점에 착안한 번역어이다. 이 번역어는 의 《항해술기(航海述奇)》(1866) 의 자연과학 교과서 《격물입문(格物入門)》(1866) 등에서 처음 쓰였다.인간에 의해 발견된 최초의 기록된 금속은 금인 것으로 보이며 구석기 후기에 스페인 동굴에서 소량의 천연 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은, 구리, 주석 및 유성 철 또한 고대 문화에서 일부 제한된 양의 금속 가공을 허용하면서 고대문화로 발견 될 수 있었다. 기원전 3000년경 유성 철제로 만든 이집트 무기는 으로 높이 평가 받았다.아마도 통제 된 방식으로 사용 된 최초의 화학 반응은 불이였다. 그러나 천년 동안 불은 단순히 열과 빛을 생성하면서 한 물질을 다른 물질 (타는 나무 또는 끓는 물)로 변형시킬 수있는 신비한 힘으로만 알려졌다. 불은 초기 사회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요리 및 서식지 조명과 같은 일상 생활의 가장 단순한면에서 도기, 벽돌 및 금속을 녹여 도구를 만드는 것과 같은 고급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유리의 발견과 금속의 정화로 이어지는 불로 인해 야금이 부상했다. 야금의 초기 단계에서 금속의 정화 방법이 요구되었고, 금은 BC 2900년 초기의 고대 이집트의 귀중한 금속이되었다.17 세기와 18 세기 초기 화학영국계 미국인 화학자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 1627-1691)은 연금술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정제하고 화학을 연금술과 분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연구가 연금술 전통에 뿌리를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일은 오늘날 현대의 화학자이자 현대화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실험 과학 방법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보일이 원래 발견자가 아님에도 보일은 1662년에 제시한 보일의 법칙으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보일의 법칙은 온도만 폐쇄된 시스템 내에서 일정하게 유지된다면 가스의 절대 압력과 부피가 반비례함을 의미한다. 보일은 또한 화학 분야의 초석으로 간주되는 1661년의 《의심 많은 화학자》 에 대한 획기적인 저서로 인정받고 있다. 작품에서 보일은 모든 현상이 움직이는 입자의 충돌의 결과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보일 (Boyle)은 화학자들에게 실험을 호소했으며 실험은 지구 화염 공기 및 물과 같은 고전적인 4 가지 원소만으로 화학 원소를 제한한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또한 화학이 의학이나 연금술에 종속되어 과학의 지위로 부상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요한 것은 과학 실험에 대한 엄격한 접근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이론이 사실로 간주되기 전에 실험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작품은 원자 분자 및 화학 반응의 가장 초기의 현대적인 아이디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현대 화학의 역사의 시작을 나타낸다. 보일은 또한 화학 물질을 정제하여 재현 가능한 반응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재료 물질의 물리적 특성과 상호 작용을 설명하고 정량화하기 위해 Ren Descartes가 제안한 기계 철학의 보컬 지지자였다. 보일은 원자핵론자였지만 원자보다 더 많은 입자를 선호했다. 그는 속성이 유지되는 물질의 가장 정밀한 부분은 미립자의 수준에 있다고 논평했다. 그는 또한 공기 펌프로 수 많은 조사를 수행했으며 공기가 펌프로 퍼져 나감에 따라 수은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또한 컨테이너에서 공기를 펌핑하면 화염을 없애고 내부에 있는 작은 동물을 죽일 수 있음을 관찰했다.과거 화학에서 더 이상 나뉘지 않는 기초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 기초적인 요소를 원자라 한다. 원자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입자로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에서부터 그 존재가 주장되었는데, 1803년 존 돌턴에 의해서 원자론으로 정리되었다. 20세기 초, 화학자들은 원자를 구성하는 더 작은 입자들, 즉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전자는 음전하를 띠고 있고,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고 있으며, 중성자는 전하를 띠지 않고 있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핵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는 이 주변에 오비탈을 이루며 분포되어 있다.원소는 일반적인 화학적, 물리학적 방법으로는 분해되지 않는 물질을 의미한다. 원소는 원자핵에 존재하는 양성자 수로 정의되는 원자 번호로 구별된다. 산소, 황, 주석, 철 등은 원소이다. 19세기 중엽까지 약 80가지의 원소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주기율에 따라 배열될 수 있다.동위원소는 아이소토프 또는 동위체라고도 한다. 서로 화학적으로는 거의 구별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질량이 서로 다른 원소를 동위원소라고 한다. 영어의 isotope는 그리스어인 isos(같은)와 topos(장소)의 합성어인데, 질량은 서로 달라도 원소의 주기율표에서 같은 장소에 배열되는 데서 1901년 영국의 화학자 F. 소디가 isotope라는 명칭을 붙였다. 대부분의 원소는 동위 원소를 가진다. 동위 원소는 원자 번호는 같으나, 중성자수가 다른 원소를 뜻한다. 동위 원소는 화학적인 성질은 동일하나, 원자량의 차이를 이용하여 분리할 수 있다. 자연에서도 발견되는 92개의 원소 중 88개는 동위 원소가 지표면 상에 존재한다.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더라도 동위 원소는 핵반응을 이용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동위 원소는 방사능을 가��기도 하는데, 이 경우 동위 원소의 원자핵은 불안정하고 방사선을 방출하며 자연적으로 붕괴된다.동중 원소(isobar)는 원자 질량은 같으나 양성자수가 다른 원소를 뜻한다. 동중 원소는 화학적 물리적 성질이 다르며 40S 40Cl 40Ar 40K 40Ca등이 있다.분자란 원자의 결합체 중 독립 입자로서 작용하는 단위체이다. 일정한 개수의 원자가 특정하게 정렬되어 서로 결합해 분자가 형성된다. 원자가 원소의 최소단위이듯 분자는 화합물의 최소단위가 된다. 원자가 결합될 때 전자의 재배치가 일어나는데 이는 화학에서의 중요한 관심사중 하나이다.화학 반응은 원자 혹은 분자가 화학적인 변화를 겪는 일을 말한다. 화학 반응은 원자간의 결합이 끊어지는 일과 다시 이어지는 일을 포함한다. 결합이 끊어질 때는 에너지가 흡수되고, 결합이 이어질 때는 에너지가 방출된다. 화학 반응의 간단한 예로는 수소와 산소가 반응하여 물이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반응식에서 알 수 있듯이 화학 반응에서는 원자가 새로 생성되거나 나타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H는 에너지 또는 엔탈피 변화를 뜻한다. 반응은 발열반응일 수도 있고 흡열반응일 수도 있다. 발열반응은 주위로 열을 방출하는 반응으로 엔탈피 변화가 음수로 나타난다. 반면에 흡열반응은 주위 열을 흡수하는 반응으로 엔탈피 변화가 양수로 나타난다. 위 반응의 경우는 발열반응인데 이는 계로부터 주위로 열이 이동하였다는 의미이다.화학 결합을 주된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보면 이온 결합 공유 결합 그리고 금속결합으로 나눌 수 있다. 이온이란 전하를 띤 원자 또는 분자를 뜻한다. 이온 결합은 양전하와 음전하의 전기적인 인력에 의해서 생성되는 화학 결합이다. 예를 들면 염화 나트륨은 양전하를 띤 나트륨 이온과 음전하를 띤 염화 이온 사이의 전기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온 화합물이다. 이러한 물질을 물에 녹이면 이온은 물 분자에 의해 수화되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용액은 전기전도도를 가진다.공유 결합은 원자 궤도|오비탈이 겹쳐진 결과 두 원자가 전자쌍을 공유하게 되어 생성되는 결합을 의미한다. 공유 결합이 형성되는 결합은 발열반응인데 이때 방출되는 에너지의 양이 그 결합의 결합 에너지이다. 결합 에너지만큼의 에너지를 그 결합에 가해주면 결합은 끊어질 수 있다.금속 결합은 금속 원자에서 전자들이 떨어져 나와 자유전자를 생성하게 되어 생성되는 결합을 의미한다. 금속의 특성인 연성과 전성이 생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화합물은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종류 수 배치에 의해서 그 특성이 결정된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거나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 화합물의 수는 엄청나고 이들 중 대부분은 유기 화합물이다. 유기 화합물을 이루는 주된 화학 원소인 탄소는 다른 화학 원소와는 다르게 매우 긴 사슬 형태로 정렬될 수 있으며 같은 수많은 이성질체를 형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분자식 C8H16O는 약 천 개의 서로 다른 화합물을 뜻할 수 있다.화학은 취급 대상 및 대상의 취급 방법에 따라서 몇 가지 분과로 구분될 수 있다. 물질을 분석하는 분석화학은 크게 물질의 존재를 취급하는 정성 분석과 물질의 양을 결정하는 정량 분석으로 나눌 수 있다. 탄소를 포함한 유기 화합물을 다루는 유기화학과 유기 화합물을 제외한 무기 화합물을 다루는 무기화학도 있다.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에는 물리화학이 있고 생물학과의 경계에는 생화학이 있다. 물리화학에서 특히 분자의 구조와 성질과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을 구조화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방사성 물질을 다루는 방사화학이 발전하였고 화학 공업을 다루는 공업화학도 있다. 이 외에도 화학의 분과는 매우 다양하다.화학의 분과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5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의 분과는 더욱 세분화될 수 있다.무기화학은 유기화학에서 다루지 않는 물질을 다루며 주로 금속이나 준금속이 포함된 물질에 대해서 연구한다. 따라서 무기화학에서는 매우 넓은 범위의 화합물을 다루게 된다. 초기에는 광물의 구성이나 새 원소의 발견이 주요 관심사였고 여기서부터 지구화학이 분기되었다. 주로 전이 금속 등을 이용한 촉매나 생물에서 산소 수송, 광합성, 질소 고정 등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금속 원자들에 대해 연구하며 이 외에도 세라믹, 복합재료, 초전���체등에 대한 연구를 한다.물리화학은 화학적 현상에 대한 해석과 이를 설명하기 위한 물리적 원리들에 대해 다루는 분과이다. 화학반응에 관련된 열역학적 원리와 물질의 물리학적 성질에 대한 설명은 물리화학이 다루는 고전적인 주제이다. 물리화학은 양자화학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분광계나 자기 공명, 회절 기기 등 물리화학에서 사용하는 실험 장비나 실험 방법들은 다른 화학의 분과에서도 매우 많이 사용된다. 물리화학이 다루는 대상은 유기 화합물, 무기 화합물, 혼합물을 모두 포함한다.분석화학은 물질의 조성이나 혼합물의 구성요소 등을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는 화학의 분과이다. 혼합물을 이루고 있는 성분의 탐색 분리 정량과 분자를 이루고 있는 원자의 비율을 측정하여 분자식을 결정하는 일 등이 분석화학에서 행해진다. 1950년대의 분석화학의 발전은 많은 질량 분석계를 포함한 분석 기구의 등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외에도 고해상도 크로마토그래피 전기화학에서의 많은 실험방법 등은 분석화학에 있어서 중요한 분석법이다. 분석화학에 있어서 최종 목표는 더 정확한 측정법이나 측정기기 등을 개발하는 것이다. 분석화학의 발전으로 인해 환경오염 물질 등을 피코그램의 수준에서도 감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파일Haemoglobin-3D-ribbons.png|섬네일|right|250px|헤모글로빈. 생화학에서는 이와 같이 생물체에서 기능하는 물질들을 다룬다.화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문이다. [[식물]]이나 [[동물]]의 [[세포]]에서 발견되는 [[물질]]이나 일어나는 [[화학 반응]]들이 주 관심사이다.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핵산]] [[호르몬]] 등은 [[유기 화합물]]이라서 [[유기화학]]에서도 다루어지기도 하나 이들 [[화합물]]에 관련된 [[물질대사]] 과정이나 조절 과정에 대한 연구는 [[생화학]]의 고유 분야이다. [[효소]]와 [[조효소]] 그리고 이들의 작용 과정에 대해서도 연구하며 [[세포막]]을 통과하는 [[이온]]과 [[분자]] [[신경전달물질]]과 다른 조절 물질들의 작용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생화학]]은 [[내분비학]] [[유전학]] [[면역학]] [[바이러스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체첸 공화국, 또는 줄여서 체첸은 연방국가인 러시아를 이루는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북캅카스 지역에 위치하여 있으며, 인구 다수는 체첸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거의 대부분이 체첸인이다. 일부는 러시아인, 인구시인과 기타 북코카서스계 민족도 섞여있다. 체첸에서는 체첸인들의 토착 언어인 체첸어와 러시아어가 모두 사용된다. 체첸어는 캅카스 제어 중 북동 캅카스어족으로 불리는 그룹에 속하는데 인근의 인구시인들이 쓰는 인구시어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1989년에 행해진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의 통계에서는 체첸인이 956879명 인구시인이 237438명으로 269000명의 러시아인은 인구의 약 23%로 소수 민족이었다. 그 후 서부가 잉구슈 공화국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인구시인들의 수가 절반 가까이 감소하고 내전과 사회불안으로 거의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체첸공화국에서 거의 대부분 떠났다. 1990년대 체첸 공화국에 남아 있던 러시아인은 약 6만 명이었다.체첸 공화국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연방 중에서도 젊은 층이 가장 많은 인구 구성을 가진다. 1990년대에는 몇몇 지방에서 인구증가가 있었다.다게스탄 지역을 통해 16세기에서 19세기를 기점으로, 체첸인들은 절대다수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으며 러시아 정교회도 소수 존재한다.1830년에서 1859년에 이르는 동안, 러시아군은 오스만 제국과의 접경지역 안보를 이유로 체첸에 진주했다. 체첸은 1859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됐다.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소련 정부는 체첸이 나치군과 협력했다고 맹비난하였고 스탈린은 체첸 국민 전체에게 카자흐스탄으로의 강제이주를 명령했다. 그 후 스탈린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957년에 이르러서야 체첸인의 귀환이 허용되었다.소련 붕괴 이후 체첸인들의 분리주의 운동이 벌어져 수 차례 제1차 체첸 전쟁, 제2차 체첸 전쟁이 벌어졌으며, 이때 러시아의 엄청난 공세로 체첸 전역은 초토화되었다. 혼란기 동안 일시적인 독립 이후 재병합된 체첸에는 현재 친러파 성향의 대통령이 세워져 분리주의가 억제되고 있다.맥스웰 방정식(-方程式, s)은 전기와 자기의 발생, 전기장과 자기장, 전하 밀도와 전류 밀도의 형성을 나타내는 4개의 편미분 방정식이��. 맥스웰 방정식은 빛 역시 전자기파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각각의 방정식은 가우스 법칙, 가우스 자기 법칙,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앙페르 회로 법칙으로 불린다. 각각의 방정식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종합한 이후 맥스웰 방정식으로 불리게 되었다.전자기역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 법칙으로 요약된다. 로랜츠 힘은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맥스웰의 방정식은 네 개의 법칙을 모아 종합하여 구성한 것이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빛과 같은 전자기파의 특성을 설명한다. 각 방정식의 수학적 표현은 공식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은 방정식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맥스웰의 방정식에 나타난 각 식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된 전기와 자기의 특성을 종합한 것이다. 인류는 고대 시대부터 이미 정전기에 의한 인력과 방전 현상을 알고 있었고 자석의 특징을 이용한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해 왔다. 근대에 이르러 전기와 자기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쿨롱 법칙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앙페르 회로 법칙과 같은 법칙들이 발견되었다. 맥스웰은 이러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전기와 자기가 하나의 상호작용 즉 전자기력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면서 빛역시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혔고 전자기 복사의 발견을 예언하였다.맥스웰 이전의 연구 성과.앞서 밝힌 바와 같이 두 전하 사이에 인력과 척력이 작용한다는 것은 고대 이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관계와 크기는 측정하기 매우 어려웠는데 그 까닭은 작용하는 힘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이었다. 1784년 샤를 드 쿨롱은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실험장치를 고안하여 대전된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었다.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쿨롱 법칙을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한편, 쿨롱 힘은 전하 사이의 작용뿐만 아니라 자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두 자극의 세기를 각각 mA, mB라 할 때, 이 두 자극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자극의 세기 단위는 웨버로 쿨롱은 세기가 같은 두 개의 자극을 1m 떨어뜨려 놓았을 때 작용하는 힘의 세기가 formula_5인 경우를 1Wb로 정의했다. 따라서 상수 k의 값은 다음과 같다.자극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는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으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즉 전하는 양전하이든 음전하이든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데 반해 자극은 홀극으로 존재할 수 없고 N극과 S극이 언제나 쌍으로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각각 독립적으로 다루어져 오던 전기와 자기의 법칙들을 종합하여 맥스웰 방정식을 수립하였다. 맥스웰은 마이클 패러데이의 개념과 앙드레마리 앙페르의 회로 이론을 근간으로 방정식을 정리하였다.1861년 맥스웰은 논문 《물리적인 역선에 대해》를 발표하여 모두 4개의 방정식으로 구성된 맥스웰 방정식을 소개하였다. 이 방정식은 1865년 발표된 논문 《전자기장의 역학 이론》과 1873년 출간된 《전기와 자기에 관한 논문집》제2권의 9장에서 다시 소개되었다.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이 방정식에 비하면 남북전쟁조차 큰 의미없는 지엽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맥스웰 방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맥스웰 방정식의 정리.1865년 맥스웰 자신에 의해 발표된 맥스웰 방정식의 원래 형태는 8개의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1884년 올리버 헤비사이드가 4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한 형태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와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 역시 헤비사이드와 동일한 작업을 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맥스웰 방정식은 헤르츠-헤비사이드 방정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란 이름이 더 폭넓게 쓰이고 있다.1861년 맥스웰은 에서는 전자기파 방정식을 기술하면서 빛이 전자기파임을 제시하였다. 맥스웰의 이론은 1887년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의 실험에 의해 증명되었다."장"이란 개념은 마이클 패러데이가 도입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이 장 개념을 도입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였다.당시 이 방정식은 헤르츠-헤비사이드 방정식 또는 멕스웰-헤비사이드 방정식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사이언스에의 기고문에서 이를 이라 부르며 이 방정식들이 이론물리학의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맥스웰은 방정식을 정리하면서 헤비사이드의 전위와 벡터 위치 등 위치 요소를 중요한 개념으로 도입하였다. 1884년 맥스웰은 전자기파의 전달을 중력과 같이 원격에서 상호작용하는 힘이 아닌 전자기장에서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전위로 파악하였다. 라디오 안테나에 대한 현대의 분석에서도 맥스웰의 백터와 스칼라 위키에 대한 수식만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안테나 사이에 작용하는 전파의 영향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맥스웰 방정식과 관련한 헤비사이드의 업적은 맥스웰이 여러 논문과 책에서 서술한 맥스웰 방정식을 오늘날과 같은 4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는 것이다.오늘날 4개의 방정식으로 정리된 맥스웰의 방정식은 1861년 발표된 논문인 에 기반한 것이다. 이 논문에는 전자기장에 대한 다수의 방정식이 실려있다.1855년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철학 학회에서 을 발표하면서 formula_8와 formula_9 벡터의 차이점을 설명하였다. 이 논문은 오늘날에도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에 대한 가장 간결한 모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 맥스웰은 전류에 관한 모든 지식을 미분 방정식으로 나타내었다.1855년 맥스웰이 제안한 분자 와동의 바다란 개념은 1861년 에서 보다 분명하게 소개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자기장이 형성되는 분자 규모의 와동에서 formula_8의 밀도에 따라 formula_9의 순 와동 운동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맥스웰은 와동의 밀도를 측정하기 위한 값으로 투자율 을 정의하였다. 이 논문에서 밝힌 맥스웰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이 때 formula_14 는 전하 밀도이다. formula_8는 축을 이루어 회전하는 자기 전류이고 formula_9는 그 주위를 돌게 되는 자기력선의 자기 선속이다. 투자율 는 결국 자기장 formula_8에 의해 유도되는 자기 선속 formula_9의 비가 된다.전류 방정식은 전하의 대류 전류가 선형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자기 방정식은 유도 전류의 회전에 의해 발생하는 자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formula_8 벡터의 방향성으로 인해 비선형 방정식이 된다. 따라서 자기 유도 전류는 역선으로 표현된다. 자기력선은 역제곱 법칙에 의해 전류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지게 된다.1864년 맥스웰은 《전자기장의 역학이론》을 출간하였다. 맥스웰은 이 책에서 빛이 전자기파임을 제시하였다. 이 책에서 맥스웰은 8개의 방정식을 전자기장에 대한 일반적인 방정식으로 제시하였다. 이 때문에 훗날 "맥스웰 방정식"이라는 표현이 오늘날의 4개의 방정식을 가리키는 것인지 1864년 제시된 8개의 방정식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혼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4개로 구성된 방정식을 분명히 하기 위해 헤비사이드가 정리한 맥스웰 방정식(멕스웰-헤비사이드 방정식)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현대 벡터 표기를 사용하여 정리한 멕스웰의 8개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이 책에서 표현된 방정식 D는 로런츠 힘의 효과를 나타낸 것으로 1861년 논문의 방정식 77번을 보다 간략하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맥스웰은 1865년 논문에서 전자기파 방정식을 정의하였는데 이 책의 방정식 D를 전자기 유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는 방정식 D 대신 패러데이전자기 유도 법칙이 쓰인다. 맥스웰은 전자기파 방정식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방정식 D의 formula_36를 버렸다.1873년 맥스웰이 출간한 에서 방정식은 두 개의 묶음으로 나뉘었다.다음은 국제단위계를 사용하여 수식으로 표현한 맥스웰 방정식이다.발산정리와 스토크스의 정리를 이용하면 미분형과 적분형 방정식이 같음을 알 수 있다.아래 표는 각 기호의 뜻과 단위를 나타낸다.formula_41는 발산 연산자(단위: 1 / 미터), formula_42는 회전 연산자(단위: 1 / 미터)이다. 두 번째 방정식은 자기 홀극이 없음을 뜻한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대전된 입자에 미치는 힘은 리엑턴스 힘에 따라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44는 입자의 전하량이고 formula_45 는 입자의 속도다. 위의 수식은 국제단위계로 표현되었지만 다른 단위계에서도 맥스웰 방정식은 변하지 않거나 약간의 상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과 공학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국제단위계 이외에도 특수한 경우 CGS 단위계가 쓰인다. +초월수는 수학에서 대수학적이지 않은 수를 의미한다. 어떤 다항 방정식의 해도 될 수 없는 복소수이자 유리수인 계수를 가진 유한한 0이 아닌 근을 의미한다. 가장 잘 알려진 초월수는 과 이다.소수의 초월수들만 알려져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주어진 수가 초월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극히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월수들은 드물지 않다. 실제로 대수적 수들이 가산 집합을 구성하는 반면 실수의 집합 복소수의 집합은 모두 비가산 집합이므로 거의 모든 실수들과 복소수들은 초월적이다. 모든 초월실수는 모든 유리수가 대수학적이기 때문에 무리수이다. 그 반대는 사실이 아니다. 모든 무리수가 초월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수의 집합은 겹치지 않는 유리수 대수적인 무리수 초월적인 실수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제곱근 2는 무리수이지만 다항식 의 근인 만큼 초월수는 아니다. 황금비은 다항식 의 근으로서 초월적이지 않은 또다른 무리수이다."초월적"이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넘어오거나 넘어서거나"를 뜻하는 '트란스켄데레'(transcendre)에서 유래되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82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에서 수학적 개념을 처음 사용했는데 가 의 대수함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18세기에 "초월수"를 현대적 의미로 정의한 최초의 수학자로 여겨지고 있다.요한 람베르트는 1768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에서 와 둘 다 초월수라고 추측했고 무리수인 의 초월수 증명에 대한 잠정적인 스케치를 제안했다. 조제프 리우빌은 1844년에 초월수의 존재를 처음으로 증명했고 1851년에 리우빌 수와 같은 소수점 1번째 자리의 사례를 제시했다.이 인 경우에는 소수점 뒤의 번째 자리가 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다. 즉 이 숫자 가운데 하나일 경우에만 이 숫자의 번째 자릿수가 이다. 리우빌은 이 숫자가 특정한 무리수인 대수적 수보다 유리수에 의해 보다 가깝게 근사할 수 있는 초월수의 종류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 종류의 숫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리우빌 수라고 불린다. 리우빌은 모든 리우빌 수가 초월수라는 것을 증명했다. 1873년에는 샤를 에르미트가 초월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가 특별히 구성되지 않은 초월수임을 증명했다.1874년에는 게오르크 칸토어가 대수적 수들은 셀 수 있고 실수는 셀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초월수를 구성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비록 이것이 대수적 수의 계산 가능성에 대한 그의 증명에 의해 이미 암시되었지만 칸토어는 실수들만큼 초월적인 숫자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성을 공개했다. 칸토어의 연구는 초월수의 보편성을 확립했다.1882년에는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의 초월성에 대한 최초의 완전한 증거를 출판했다. 그는 먼저 가 0이 아닌 대수적 수일 경우 가 초월수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은 대수적이므로 는 초월수이어야 한다. 그러나 가 대수적 수이기 때문에 는 초월수이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에 의해 일반화되었는데 오늘날에는 린데만-바이어슈트라스 정리로 알려져 있다. 의 초월은 원적문제와 같이 가장 유명한 것을 포함하여 컴퍼스와 자 작도를 포함한 여러 고대 기하학 구조들이 갖고 있던 불가능성의 증거를 가능하게 했다.1900년에는 다비트 힐베르트가 힐베르트의 7번째 문제인 초월수에 대해 영향력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은 1934년에 겔폰트-슈나이더 정리를 통해 제공되었다. 이 연구는 1960년대에 앨런 베이커가 진행한 로그에서 선형 형태의 하한에 대한 연구를 통해 확장되었다.초월수의 집합은 셀 수 없이 무한하다. 유리수인 계수를 갖는 다항식은 셀 수 있고 각각의 다항식은 유한한 근을 가지기 때문에 대수적 수도 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칸토어가 제시한 대각선 논법은 실수자 실수는 대수적 수와 초월수 간의 결합이기 때문에, 후자는 둘 다 셀 수 없다. 이것은 초월수를 셀 수 없게 만든다.어떠한 유리수도 초월적이지 않고 모든 실제 초월수는 무리수이다. 무리수는 2차 무리수 및 그 외의 형태를 가진 대수적 무리수를 포함하여 모든 실제 초월수와 대수적 수의 부분집합을 포함한다. 단일 변수의 일정하지 않은 대수함수는 초월 인수에 적용될 때 초월 값을 산출한다.단일 변수의 일정하지 않은 대수함수는 초월 인수에 적용될 때 ��월 값을 산출한다. 예를 들어 가 초월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와 같은 숫자들을 즉시 추론할 수 있다. 도 초월수이다.그러나 여러 변수의 대수함수는 초월수에 적용될 때 대수적 수를 산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와 는 둘 다 초월적이지만 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가 초월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와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초월적인 것이어야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어떤 2가지 초월수 와 의 경우 적어도 와 가운데 하나는 초월수여야 한다. 이를 확인하려면 다항식 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와 가 둘 다 대수적이라면 이것은 대수적 계수를 갖는 다항식이 될 것이다. 대수적 수는 대수적으로 닫힌 체를 형성하기 때문에 다항식인 와 의 근은 대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적어도 하나의 계수가 초월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계산 불가능한 수는 초월수의 진부분집합이다. 모든 리우빌 수는 초월적이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모든 리우빌 수는 지속적인 연분수에서 제한 없는 부분적인 몫을 가져야 한다. 계산 인수를 사용하면 제한된 부분적인 몫을 가진 초월수가 존재하므로 리우빌 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의 지속적인 연분수를 사용하여 가 리우빌 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쿠르트 말러는 1953년에 또한 리우빌 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주기적이지 않은 경계 항을 갖는 모든 무한 연분수는 초월적이라고 추측된다.초월수로 입증된 수.초월수일 가능성이 있는 수.초월수 또는 대수적 수로 아직 입증되지 않은 수 +음계(音階)는 음악에서 음높이(pitch) 순서로 된 음의 집합을 말한다. 악곡을 주로 구성하는 음을 나타낸 것이며 음계의 종류에 따라 곡의 분위기가 달라진다.음계의 각각의 음에는 위치에 따라 도수가 붙는다.음계는 음계가 포함하고 있는 음정에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또는 음계가 포함하고 있는 서로 다른 피치 클래스의 수에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음계의 음정 뿐만 아니라 음계를 만드는 음의 수가 한 문화권의 음악에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지니게 한다" "어떤 음계의 음의 수보다 음의 거리가 음악의 소리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온음계와 반음계는 서양 음악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자체로는 음계에 관한 말이지만 온음계적반음계적인 선율 화음 화성 진행 등의 표현으로도 쓰인다. 대부분의 경우 온음계는 7개 음으로 이루어진 장음계를 말한다. 20세기 음악론에서는 반음계가 아닌 모든 음계를 말할 때 쓰이기도 한다.반음계는 12개의 반음으로 이루어진 음계를 말한다.계이름은 음계를 기준으로 한 음의 이름이다. 장음계를 이루는 음의 계이름은 으뜸음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각각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가 된다.한국과 중국의 전통 음계.서양 음악에서는 도·레·미·파·솔·라·시로 된 7음계가 많이 쓰이지만 한국 전통 음악에는 황종-미♭·태주-파·중려-라♭·임종-시♭·무역-레♭으로 된 5음계가 많이 쓰이고, 중국 전통 음악에는 궁-도·상-레·각-미·변치-올림화·치-솔·우-라·변궁-시로 7음계를 많이 쓴다.한국 전통 음악에서는 5음계 외에도 3음계 또는 악계통에서는 7음계 등이 쓰인다.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2002년 12월 19일 목요일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로 치러졌다.16대 대선은 지난 15대 대선에서 간발의 차로 낙선하고 재도전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사상 최초의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다.대선 재수생인 이회창 후보는 경험이나 세력 면에서 노무현 후보보다 대권 고지에 좀 더 유리할 것으로 점쳐졌으나 이전 대선부터 불거진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노사모를 비롯한 네티즌들의 열성적인 노무현 지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성공 등에 힘입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이 있었다. 즉 198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투표를 할 자격이 있었다.만 4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피선거권을 가졌다. 즉, 196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후보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새천년민주당은 3월 9일부터 4월 27일까지 한국 정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고 과반 득표자인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한나라당은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고 최다 득표자인 이회창 전 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민주노동당은 9월 8일 당원들에 의한 단일 후보 찬반 투표를 통해 권영길 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통합21은 11월 5일 창당대회를 열고 정몽준 의원을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사회당은 10월 27일 전당대회를 열고 김영규 전 인하대학교 교수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김영규 후보는 대의원 찬반투표 결과 전체 투표수의 95%를 득표하였다.하나로국민연합은 11월 15일 재적 대의원 8500명 중 81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이한동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개혁국민정당 추진위원회.개혁당 추진위는 독자 후보를 내는 대신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고 이를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창당 발기인 28,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모바일 찬반 투표에 부친 결과 총투표수 16,733표 중 15,723표가 찬성으로 나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와의 대선 연대가 결정되었다. 개혁당 추진위는 10월 20일 창당 발기인 대회에서 이를 발표하였으며, 대회에 참석한 노무현 후보는 수락을 선언하였다.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는 2001년 12월 11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그러나 박근혜 부총재는 2월 28일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였으며 이후 신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대선에 출마할 뜻을 밝혔다. 결국 5월 17일 박근혜 대표가 이끄는 미래연합이 창당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미련은 613 지방선거에서 대참패를 당한 뒤 동력을 잃었으며 그 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다가 대선 한 달 전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장세동 무소속 후보.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10월 21일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장세동 후보는 12월 18일 당선 가능성이 없다며 사퇴를 선언하였다.호국당은 11월 25일 재적 대의원 645명 중 5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김길수 법륜사 주지를 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제16대 대선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두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로 진행되어 1971년 제7대 대선 이후 최초로 3자 4자가 아닌 양자 구도로 치러진 대선이 되었다. 그러나 제15대 대선에서 패한 후 차근차근 대권 재도전을 준비해오던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진보 성향 인사이면서 보수 정당 민주당의 후보가 된 노무현 후보는 끊임없이 당 내부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이같은 상황에서 이회창의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었으나 제15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아들 병역기피 의혹에 시달리며 난관에 봉착한데다 노무현 후보가 이른바 '노풍'을 일으키며 선풍적 인기를 끌어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통합21 후보와 극적으로 단일화에 성공 이를 발판 삼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맹추격했다.민주당 후보 재신임.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공약했다.선거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되는 등 참패를 기록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개혁 포럼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후보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이인제 등 민주당 내 반노무현 세력의 후보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는 모습을 보였다.대한축구협회장이던 정몽준 무소속 의원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해내고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얻어 유력 대권 주자가 되었다. 정몽준이 대선에 출마하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토막났고 안 그래도 노무현 후보와 갈등이 있던 당내 상당수 의원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 적극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그러던 10월 17일 김민석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민주당 탈당 및 통합21 합류를 선언했는데, 노무현에게 큰 타격이 되리라는 관측과 달리 오히려 이는 노무현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동정론이 불었고, 결국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노무현정몽준 단일화.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제시되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정몽준 캠프는 11월 1일 양 캠프가 협상·담판을 통해 단일 후보를 정할 것을 제안했고, 노무현 캠프는 11월 3일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로 국민 경선을 실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한 여론조사상 노무현 후보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정몽준 후보 측은 여론조사로 단일 후보를 정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통합21은 노무현 캠프의 국민경선 실시 주장에 대해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를 표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꾸준히 회복해 이미 판세는 이회창 후보가 독주하고 노·정 두 후보가 2위 싸움을 벌이는 1강 2중 구도로 재편되고 있었으므로, 정몽준 캠프로서도 하루 빨리 단일화를 성사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정식으로 제의하였다. 또한 여론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일정 수준에 미달할 시 그 여론조사는 무효 처리하자는 정몽준 캠프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주요 언론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결과보다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더 낮게 나올 시 그 결과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역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무효 처리하기로 하였다.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것은 국민일보-월드리서치가 11월 25일 실시한 결과에서의 30.4%였다. 따라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30.4%보다 낮을 시 그 조사 결과는 무효 처리하도록 했다.단일화 협의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단일화 방식 등 쟁점 사항에 있어 통큰 양보를 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이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효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단일화의 방식은 합의되었으나, 여론조사의 설문 내용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는데, 는 경쟁력 질문에는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양 캠프는 조율을 거친 결과 지지도 질문과 경쟁력 질문을 조금씩 섞은 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두 후보는 여론조사 실시에 앞서 텔레비전 토론을 가지기로 했는데,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사전 선거 운동이 될 수 있다며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한 차례에 한해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하였고, 두 후보 간 토론은 11월 22일 실시되었다.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는 11월 24일 오후 1시부터 8시 30분까지 7시간 반에 걸쳐 실시되었다. 여론조사는 월드리서치와 리서치앤리서치, 2개 업체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한 업체가 각각 2,000명, 총 4,000명을 상대로 실시되었다.민주당과 통합21은 11월 24일 자정 공동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리서치앤리서치 조사는 응답자 중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32.1%가 나와 무효 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월드리서치 조사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8.7%로 무효화 기준인 30.4%에 미달하여 무효 처리되었다. 리서치앤리서치 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46.8% 정몽준 후보가 42.2%를 얻음으로써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무효 처리된 월드 리서치 조사 결과 또한 노무현 후보가 38.8% 정몽준 후보가 37.0%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정몽준 후보는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에서 패배함에 따라 사퇴를 선언하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계기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였다.이인제와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2위를 했던 이인제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12월 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데 이어 이틀 뒤인 12월 3일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으며 입당과 동시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지명을 받아 총재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이인제는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할 계획으로 자민련에 입당했으나 김종필 총재의 강력한 의지로 자민련은 12월 12일 당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다. 다만 당원 및 당직자들이 개별적인 지지를 하는 것은 막지 않기로 해 이인제는 다수 자민련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 지원 활동에 나섰다.정몽준 역시 대선 전날인 12월 18일 밤 10시 긴급 발표를 통해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를 선언하였다. 정몽준은 지지 철회 발표문에서 그 날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한 것에 노무현 후보의 외교안보 의식에 문제를 느껴 지지를 철회했다고 밝혔다. 노무현 후보와 정대철 민주당 선대위원장 등은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정몽준의 자택 앞까지 찾아갔으나, 정몽준 대표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습이 전파를 타며 당시 진보 진영이 민노당 권영길 후보 대신 민주당 노무현 후보로 결집하는 의외의 효과가 일어났다는 분석도 있었다.이 선거는 본격적인 세대론의 대두와 함께 노사모의 등장 등 인터넷 정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이회창 후보는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7년 전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신주류 소장파와 구주류파가 중심인 민주당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결국 임기 중이던 2003년 9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함으로써 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은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지만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맞고 총선에서 참패하며 몰락하고 만다. +함석헌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다.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민권운동가이자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 활약한 그의 본관은 강릉이며 호는 신천, 씨알, 바보새이다.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 당한 후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교육 언론 활동 등에 종사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다. 이후에는 성서 강해 등을 하다가 1956년부터는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 시사 등에 대한 평론 활동 신앙 활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 등을 하였다.그의 종교는 초기에는 일본 유학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자였다가 중기에는 기독교였으나 후기에는 장로회로 바꾼것이다,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당숙 함일형이 세운 한학 서당인 삼천재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덕일소학교에 입학 1914년에 덕일소학교를 수료하고 그 해에 양시공립소학교에 편입하였다가 1916년 양시공립소학교를 졸업했다.그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17년에 황득순과 결혼하고 1919년 평양 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6촌 형 함석은 등의 영향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31 운동에 참가한 후 3.1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되어 2년간 학업을 중단한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게 된다.1921년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했으며, 그곳에서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이때 안창호, 이승훈, 이광수, 조만식 등과도 알게되어 그들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후일 그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다. 1934년~1935년에 동인지 에서 그의 주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되었다.이후 1938년 3월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사임하였다.1940년 평안남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의 이사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계우회 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남도 대동경찰서에 체포 유치장에서 1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초 풀려났다. 그러나 1942년 5월 《성서조선》(聖書朝鮮) 제 158호(폐간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우화로 관련자가 모두 투옥되는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1943년 4월 1일까지 1년간 복역하였다(수형번호1588번).1945년 혈맹의 친구였던, 김교신이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 그는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평하였다.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탈출 전 그는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1947년 3월부터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고, 이후 성서 강해와 신학, 종교적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조만식의 추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1950년 한국 전쟁 때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상경하였다. 이후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천거로 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는 견해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평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1958년 5월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칼럼 하나는 화제가 되었다.이 일로 그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또 1959년 6.25 전쟁 관련자들에 대한 훈장 서훈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라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한국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전쟁하는 국가와 거리를 두어보려는 목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1961년 장면이 국토건설단을 창설하고 강사를 초빙할 때, 국토건설요원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자 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갔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있자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해 7월 사상계에 발표한 정치평론인 라는 글을 통해 신랄한 비판을 하여 군정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1962년 미국 국무성내 기독교 신자 정치인들의 특별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파 인사들과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돌아왔다.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미국 정계의 기독교인사들의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제3공화국 출범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1967년 장준하의 국회의원 총선거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 즉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좌익 운동에 참여하여 3선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1970년에는 정치, 시사평론을 실은 월간잡지 를 창간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이후 씨알의 소리의 발행인, 편집인, 주간 등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등 재야 언론인들을 필진으로 영입하고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신진 문인들을 발간하였으며,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폈다.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10·26 사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도 했다.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사건에 연루���어 윤보선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1980년 1월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복권되었다. 1980년 신군부 즉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 복간되어 2011년 7월 현재 217호까지 출간되어오고 있다.제5공화국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에 위촉됐다. 또한 동아일보로부터 제1회 인촌상을 수여받았다.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여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하였다.장지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의 가족산에 매장되었다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 수훈 이후 묘소가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 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1961년과 1967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 상훈으로 1987년 제1회 인촌상과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그는 김교신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유학 시절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귀국 후에도 무교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후 줄곧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사회진화론 추종자 논란.2010년 함석헌이 사회진화론 추종자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을 두고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2009년 3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인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한길사에서 30권으로 발간한 ’함석헌 저작집’에 실은 글 에서 그가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했다. 당시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이던 김영호는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로 소개하며, 함석헌 사상에서 거듭 반복되는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사회진화론을 들었다.이에 대해 함석헌이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씨알의 소리' 2010년 1~2월호에 반론인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의 문제'를 실어 “함석헌의 철학과 사회진화론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반박했다. 김상봉 교수는 “사회진화론은 전쟁으로 열등한 종족이 도태되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종족들만이 살아남아 인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라며 “사회진화론자들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적인 필연이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이어 그는 고 강조했다.2010년 김영호는 3월 16일 열린 함석헌학회 창립총회 기념 학술발표에���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을 재반박하고 나섰다. 김영호 교수는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자신이 쓴 '사회 진화론'을 '사회다윈주의'로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에는 김상봉 교수가 받아들인 '사회다윈주의'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일반론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함석헌이 쓴 “지금까지 생각의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라는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이 전체사회, 곧 인류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진화를 통찰했다고 강조하였다.투사론에 대한 반론.함석헌은 라고 하기도 했다.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철학자 김용준은 함석헌이 철학자라고 하였다. 그는 "나는 화학 빼고는 다 함선생님한테 배웠다고.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넌센스야. 그건 함선생님의 일부분이고 80퍼센트는 도를 찾아 헤맸던 구도자"라고 하였다. +백남준은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예술가 작곡가 전위 예술가이다. 본관은 수원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생전에 뉴욕, 쾰른, 도쿄, 마이애미와 서울에 주로 거주한 그는 여러 가지 매체로 예술 활동을 하였다. 특히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범주를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예술가로서 로 알려져 있다.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출신이다. 친일파인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후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소위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이때 한국이 낳은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했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으로 전공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1956년 백남준은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쇤베르크 이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 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후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가 특히 유명하다. 이 초기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스스로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 기타 등등을 보여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심플 머리를 위한 선율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목적이 없는 자유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전위음악에 주력했고 곧 유럽과 아시아 및 미국 등 세계로 퍼져나갔다.1961년 백남준은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이때 1950년대부터 노버트 위너에 의해 제안된 같은 우상파괴적 설치 작업 및 참여예술 형태의 퍼포먼스가 함께 펼쳐졌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전시 내용을 등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정리하는 종합적인 큐레이팅 전시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전시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면서 아카이빙 작업과 연구가 점차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다.1964년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로봇 K-456'을 제작했으며 곧 세계 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시네마테크 필름메이커스에 관여했으며 스스로 영상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1965년 소니의 포타팩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한동안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1963년 첫번째 전시를 비디오아트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뉴욕의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진전이 일어난다. 이후에도 미디어 아트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서서히 득세해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활동을 전개했다.1974년부터 백남준은 영상으로서의 비디오 아트를 새로운 미술적 방법인 설치 미술로 변환하여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그에 따라 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했고, 이는 네트워크 방송을 끌어들여 예술 세계의 영역 확장을 꾀한 놀라운 시도였다. 나아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와 서울까지 연결된 이 국제적인 규모의 위성 아트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오잉고 보잉고,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 이브 몽탕 등의 예술가과 대중문화의 스타가 다수 참여했으며, 전 세계 2천 5백만명이 시청하였다. 이로써 전세계적인 차원의 대중적 각인이 이루어졌고, 마치 대중스타처럼 성가를 높였다. 이후에도 ‘위성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 ‘손에 손잡고’ 등이 이어져 위성 연결을 통한 전세계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새로운 부족사회를 낳는지 실감시켰다.1984년 일본 도쿄 소게쓰[草月]홀에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공동으로 참여한 퍼포먼스 '코요테 콘서트 II'가 펼쳐졌으며, 이들이 각각 몽골의 늑대 울음소리와 초원의 달빛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을 통해 1961년 첫 만남부터 계속 이어온 공동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후 퍼포먼스 계획은 요셉 보이스의 죽음과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1992년 이라는 주제의 이 전시에서 그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전자적 소통을 시도하는 비디오 로봇 형태의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내놓았다.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태동의 산파 역할을 하며,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는 국내외 총 관람객이 160만 명에 달하는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백남준이 직접 관여한 등을 전시한 바 있다.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75세로 별세, 유해가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2002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며 이 해는 21세기의 첫 대규모 행사의 해이다.12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3번째 날에 해당한다.5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1번째 날에 해당한다.6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1번째 날에 해당하며, 6월의 마지막 날이다.우크라이나는 동유럽의 국가이다. 남쪽과 ��동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 해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남서쪽으로는 루마니아 몰도바와 접한다. 키예프가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이다. 동유럽 평원과 이어져 있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법적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인구의 절반이 러시아어 사용자이며 일반적으로 학교/회사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두 언어 모두 사용하고 있으며 사실상 러시아어가 제2의 공용어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키예프 도네츠크 드니프로 하르키우 리비우 오데사 자포리자가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함에 따라 행정력이 크림반도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제사회는 대체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일부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대공국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는 튀르크족·몽골족 등의 오랜 지배를 받았다. 19세기까지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부분이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제하에 놓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여 1917년에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합병되었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의 적용을 받았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군사력 운영의 질적 수준은 아직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중간사이다.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한다. 산업으로는 석탄·철광·선철의 생산에 있어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풍부한 수력전기를 이용하여 기계제조공업·화학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유수의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석탄업, 철강업, 기계제조업, 화학공업의 중심은 돈바스·드네프르 주이며, 드네프르강의 하구에서 키이우까지의 사이에는 6개소의 수력발전소가 단계상(段階狀)으로 건설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지율은 약 70%에 이르고 있어, 겨울밀·옥수수·보리·사탕무·해바라기·포도의 재배, 가축사양 등에서는 구 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난한 크림반도 남단과 광천(鑛泉)이 솟는 카르파트 지방은 중요한 관광·보양지이다.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타라스 부리바〉의 배경이 되기로도 알려졌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 및 러시아어가 쓰이고, 국민의 절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이다.국토 면적 603,700km에 576,700km 해안선 길이는 2,782km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44번째로 큰 국가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중심이 우크라이나 서쪽의 라키브 마을 인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의 지리적 중심을 보는 관점에 대해 논쟁이 있다.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평원 스텝 고원이 있으며 그들을 지나가는 강이 흑해로 흘러들어간다. 거의 남쪽 만으로 강이 빠져나가고 남동부 지방에는 다뉴브 삼각지가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산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호베를라 산으로 높이는 2061m이다. 크림 반도를 따라서 넓은 해안선이 펼쳐진다.우크라이나에 분포하고 있는 초르노젬 지대는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아스팔트, 무연탄, 철, 망가니즈, 크롬, 타이타늄, 납, 아연, 알루미늄, 수은, 니켈, 천연 가스, 석유 등 70여 가지의 종류에 달하는 천연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대개 온화한 대륙성 기후를 보이는데 남쪽의 크림 반도 인근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비는 북서부 지방에 가장 많이 내리고 동부와 남동부 지역은 덜 오는 편이다. 겨울은 흑해 인근 지방이라면 따뜻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대체로 추워진다. 여름에는 전반적으로 따뜻하지만 남쪽 지방은 무덥다.동슬라브족의 역사에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건너와 동유럽을 정복한 튀르크 민족들의 관계를 빼 놓을 수 없다. 3세기부터 시작한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의 유럽 침공과 동슬라브족 정복 그리고 이주는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사바르 카간국에 이어 아바르 카간국 그리고 하자르 카간국까지 이어진다. 동유럽 동슬라브 원주민들은 사바르 카간국에 정복당해 프랑크족들과 대립하기도 하였고 하자르 카간국의 우크라이나 초원 정복으로 인해 동슬라브 문화는 서유럽의 문화와는 조금 이질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고대 투르크어인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북게르만족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인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인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인들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키예프 대공국은 10세기까지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862년경 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한 루스인들이 페르시아 사서와 동, 서 로마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에 원초연대기의 기록에서는 루스인들의 카간으로 알려진 류리크가 동슬라브족 지역에 정착하면서 류리크 왕조와 키예프 대공국이 나타나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크냐지 또는 벨리키 크냐지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된다.<ref>< „ “ „“ +가위는 손으로 잡아 종이 등을 쉽게 자를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두 장의 얇은 금속 날을 결리지 않도록 엇갈리게 나사로 엮어 그 두 날이 지레의 원리로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면 절단력이 발생한다. 플라스틱 판 얇은 철판 머리카락 끈 종이 옷감 강삭 등을 자를 때 쓰인다.핑킹가위는 무늬를 내며 자를 때 사용하는 가위이다. 무늬의 종류는 여러가지이며 물결무늬 지그재그 톱니모양 등이 있다.쪽가위는 실 따위를 자를 때 사용하는 가위이다. 발견된 가위 중 가장 오래된 가위가 쪽가위 형태로 제작되었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쪽가위의 형태를 변형한 가위를 찾을 수 있다.X자 형태의 날을 지닌 가위이다. 서기 100년경 고대 로마에서 쪽가위 디자인을 각색하면서 발명되었다.지렛대의 원리로 구분.지렛대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지레의 작용점 · 받침점 · 힘점의 상호관계에 의하여, 힘점이 작용점과 받침점 사이에 있는 원지점식, 지레의 받침점이 힘점과 작용점의 사이에 있는 중간지점식, 작용점이 힘점과 받침점 사이에 있는 선지점식의 3가지로 구별된다.따라서 이것을 응용한 가위도 3종으로 대별된다. 원지점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손자수용 가위 잎따기가위 망(綱)베기가위 등이 있고 중간지점식에 속하는 것으로는 재단가위 꽃가위 전정가위 전지가위 잔디가위 양철가위 버튼홀가위 의료가위 이용(理容)가위 등이 있다. 선지점식에 속하는 것은 눌러서 자르는 가위와 과일따기 가위 등이 있다.지금까지 발견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가위는 기원전 1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 가위다. 특히 로마 시대의 유물로 가위가 많이 발견되었으며, 이 시대 가위는 라틴 문화 중기에 중부 및 북유럽 등으로 전해졌다. 라틴 문화의 가위는 남자의 무덤에 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려져있던 양모를 깎기 위한 것이 아니고 수염을 깎는 데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로마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된 날이 짧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가위는 철사나 튼튼한 실, 얇은 철판등을 자르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가위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발견된 가위이며, 모양이나 쓰임새가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걸로 보아 중국에서 건너왔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유물을 비교해볼 때 가위는 서양에서 처음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중국에 전해졌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위키는 불특정 다수가 협업을 통해 직접 내용과 구조를 수정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일컫는다.또한 일반적인 위키에서 텍스트는 단순화된 마크업 언어을 이용하여 작성되며, 리치 텍스트 에디터의 도움을 받아 편집하기도 한다. 위키는 지식경영이나 기록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된다. 공동체용 웹사이트나 조직 내 인트라넷에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개인적인 용도로 이용되는 위키도 있는데, 이를 개인 위키라고 한다.최초의 위키 소프트웨어인 위키위키웹을 만든 워드 커닝엄은 위키를 "동작하는 가장 단순한 온라��� 데이터베이스" 라고 설명했다. "위키"는 "빠른"을 뜻하는 하와이어 "wiki"에서 따왔다.워드 커닝엄이 보 뢰프와 같이 쓴 《위키 방식: 웹 상의 빠른 협업()》이라는 책에서, 위키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위키는 간단한 마크업 언어와 웹 브라우저를 이용, 함께 문서를 작성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위키 웹사이트의 한 문서는 라 한다. 위키는 본질적으로 정보를 만들고, 찾아보고, 검색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다. 위키는 비선형적인, 진화하는, 복잡하게 얽힌 문서, 토론, 상호 작용을 할 수 있게 돕는다.위키 기술을 정의하는 특징은 문서를 간단히 만들고 고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수정이 반영되기 전에 승인이나 검토의 과정이 없다. 대부분의 위키는 사용자 등록을 요구하지 않고,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많은 편집자가 실시간으로 만들며, 즉시 온라인으로 배포된다. 단 이는 시스템의 남용을 유발할 수 있지만 주로 장점이 더 많다. 개인 위키는 문서를 고치거나 읽기 위해 사용자 인증을 요구하기도 한다.위키 문서 편집하기.일반적으로 위키 문서는 위키 마크업이라 불리는 간단한 마크업 언어로 이뤄져 있다. 예를 들어 별표로 시작하는 줄은 목록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 위키 마크업의 문법은 위키 소프트웨어마다 다르며, 일부는 HTML을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점차 사용자가 위지위그 편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위키가 늘고 있다. 위지위그 편집은 위키 마크업의 모든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므로 이들 사이트에서는 편집자가 위키 문서를 직접 수정하는 방법을 제공하기도 한다.대부분의 위키는 위키 문서의 변경 이력을 보존하고 있다. 편집자는 쉽게 문서를 예전 판의 내용으로 되돌릴 수 있으며, 이는 사용자의 실수나 고의적 훼손 때문에 필요한 기능이기도 하다. 미디어위키를 비롯한 많은 위키 소프트웨어는 문서를 편집할 때, "편집 요약"을 남길 수 있도록 한다. 이 편집 요약은 문서 본문에는 남지 않으나, 문서의 이력에서 편집 이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대부분의 문서는 다른 문서를 가리키는 수많은 하이퍼링크를 포함하고 있다. 사용자는 필요에 따라 다른 문서의 목차나 색인을 따로 구축할 수도 있다. 여러 편집자가 임의로 문서를 만들고 삭제하기 때문에 수동으로 이런 목차나 색인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위키 소프트웨어는 이를 돕기 위해 분류나 태그 기능을 제공한다.대부분의 위키는 현 문서를 가리키는 다른 문서를 찾는 백링크 기능을 제공한다.위키에서 존재하지 않는 문서를 가리키는 링크를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일로 다른 사용자가 자신이 아는 내용을 채울 수 있도록 유도한다.위키의 문서는 문서의 제목과 표기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등의 경우에 해당되면 그 문서의 제목과 거의 같은 명칭, 혹은 그 문서의 제목과 같은 명칭이 아니지만 그 문서가 설명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있는 경우 넘겨주기를 이용해서 넘겨주기 문서를 만들어 그 명칭으로도 그 문서가 설명하는 대상의 원래 제목과 같은 내용의 문서에 들어갈 수 있다.문서를 연결하고 만들기.다른 문서에 대한 링크는 등을 링크로 사용하므로 쉽게 알아챌 수 있다.일부 소프트웨어는 두 단어 사이에 다시 공백을 넣어서 사용자가 보기 좋게 표시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문자 표기를 되돌리는 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로 표시되어야 한다. 일부 위키는 괄호를 이용한 자유 링크 기능을 지원하기도 하며 일부는 낙타 표기법 링크 기능을 막기도 한다.대부분의 위키는 문서 제목을 이용한 검색을 지원하며, 일부 위키는 본문 검색을 지원하기도 한다. 검색의 확장성은 위키 엔진이 사용하는 데이터베이스에 따라 좌우된다. 일부 위키는 일반 파일을 사용하기도 한다. 미디어위키도 초기 버전에서는 일반 파일을 저장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2000년대 초에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도록 다시 작성되었다. 데이터베이스의 색인 기능은 대형 위키에서 빠른 검색을 위해 필요하다. 대안으로 일부 위키는 구글 검색 등 외부의 웹 검색 엔진을 이용하기도 한다.최초의 위키 소프트웨어는 위키위키웹으로, 워드 커닝엄이 창안했다. 커닝엄은 1995년에 위키위키웹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위키의 개념을 고안했고, 위키라는 이름도 지었다. 또한 최초의 위키 서버를 만들기까지 했���. 위키 소프트웨어는 디자인 패턴 모임에서 패턴 언어를 쓰면서 생겼으며, Portland Pattern Repository가 최초의 위키였었다. +지구과학(地球科學)은 행성인 지구와 그 주위의 천체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지구의 환경은 크게 육지, 바다, 대기로 나누어지며, 이러한 환경들은 각각 지구과학의 주요분야라고 할 수 있는 지질과학, 수문과학, 대기과학 분야의 주요연구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지구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은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기상학, 지구 표면의 물질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지질학, 바다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해양학, 지구의 깊은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지구물리학과 실용적인 응용분야로서 환경공학 등이 있다.지구과학에는 많은 전문 분야가 포괄되지만 대체로 여섯 가지로 나뉜다.아오조라 문고는 ‘일본어판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로 불리는 일본의 인터넷 전자도서관으로 저작권이 풀린 문학작품을 수집 전자문서화해서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저자 사후 50년이 지난 메이지 쇼와 시대 초기의 일본 문학 작품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일본어 외 문학 작품의 일본어 번역 작품도 다수 있다. 1997년 2월 도미타 미치오 노구치 에이치 야마키 미에 란무로 사테이 등 4명이 창설하여 시작되었다. 2016년 연간 방문객수는 940만 건 이상이다.아오조라 문고에 수록된 작품은 JIS X 0208에 해당되는 한자 범위 내에서 자원봉사자에 의해 아오조라 문고 형식 텍스트파일이나 HTML 파일로 전자화된다. 또 아오조라 문고 수록파일 취급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수록된 작품을 PC는 물론 PDA와 휴대전화로도 볼 수 있다. 텍스트 파일을 큰 글자로 인쇄하거나 전용 소프트웨어에 불러들여 시각장애인용으로 이용하는 방안도 기대되고 있다. 아오조라 문고의 열람 소프트웨어는 따로 개발 및 제공되고 있는 것은 없지만, 전자사전이나 아이폰용 어플리케이션 등은 타사에서 개발하여 출시되어 있다.저자 사망 이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한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의 서적 대부분이 존재한다. 외국 번역작품이나 저자가 무료보기를 인정한 현대작품도 포함된다. 장르는 정치부터 취미까지 다양하지만, 비교적 문학작품(시대소설, 추리소설등의 오락작품 포함)이 많다. 유명작가의 작품이 모두 갖춰져있진 않지만 그래도 일본어작품에 관련해서는 충실하게 갖춰진 편이다. (번역작품의 경우 번역저작권을 문제로 수가 많지 않다.)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보존 소개하는 장점도 있다. 작품 텍스트화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며 2011년 3월 15일 현재 등록작품수가 1만권이 넘었다.고전작가인 모리 오가이, 나츠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최근의 작가로는 나카지마 아츠시, 다자이 오사무, 하야시 후미코, 미야모토 유리코, 호리 다쓰오, 사카구치 안고, 다카무라 고타로, 나가이 가후, 요시카와 에이지 등 인물의 작품이 있다.아오조라 문고는 자원봉사로 운영되며 열람 역시 무료이다. 서비스 개시 초반에는 보이저 사에서 서버를 제공하였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는 토미타가 작업 수칙과 매뉴얼을 만들었다.자원봉사로 운영되기 때문에 작품의 입력과 교정 역시 자원봉사자가 한다. 입력은 원본을 보면서 타자입력이나 스캐너로 입력하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또 작품을 입력하는 상태인 작품이 증가하고있다. 이는 입력에 비해 교정 작업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아오조라 문고 출범 당시부터 안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작품의 교정작업을 하지 않고 공개하는 방안과 입력자가 교정한 것도 인정하자는 방안이 제기된 적이 있지만 현재까지도 이 방안은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2011년 12월 16일 공개분부터는 기부금을 재원으로 삼은 '유상교정' 서비스가 진행되고 있다.2013년 8월 아오조라 문고의 설립자인 토미타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아오조라 문고에 지속적인 지원을 해줄 '책의 미래 기금' 이 설립됐다. 하지만 2015년부터는 엔지니어가 없는 상태로 서버를 강제로 돌리고 있으며 서버 자체도 노후화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2015년 5월 "'Code for 아오조라 문고' 아이디어 송"이 개최되어 향후 시스템 운용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다. 그 이후에는 해당 모임을 바탕으로 시스템 관리와 코드수정 등을 맡�� 'aozorahack'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텍스트 파일을 아오조라 문고에 수록할 때, 텍스트 파일이 갖추어야 할 서식을 '아오조라 문고' 형식이라 부른다.아오조라 문고 형식은 텍스트 파일로서 많은 환경에서 읽을 수 있도록 규격화되어있다. 때문에 가능한 한 원본의 충실한 재현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줄 바꿈이나 삽화 등의 정보는 원칙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아오조라 문고 형식에 대응하는 텍스트 뷰어와 텍스트 편집기도 존재하며 올림문자와 방점 등도 재현할 수 있다. 또 이러한 텍스트 뷰어에서는 본래 아오조라 문고 형식에 포함되지 않았던 삽화 정보를 삽입하거나 세로쓰기로 표시할 수 있으며 텍스트를 읽기 쉽도록 만드는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소프트웨어는 유료와 무료를 불문하고 종류가 다양하다.일본어 표기에 많이 쓰이는 올림문자 는 그대로 올려쓰지 않고 로 묶거나 |로 올릴 문자열을 특정하는 방식은 일본 시각장애인 독서지원협회 의 원문입력 수칙에 따른 것이다.이 같은 방식을 예시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라고 표기했다면 '' (분코)라는 올림표기가 '文庫' 부분에 걸려 있는 것이다. 다만처럼 올림표기를 쓸 한자가 가나로 충분히 구분된다면 |를 써서 분리할 필요가 없으므로 쓰지 않는다. 또한처럼 가나에 올림표기를 강제로 쓰는 것도 가능하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PG)는 인류의 자료를 모아서 전자정보로 저장하고 배포하는 프로젝트로 1971년 미국인 마이클 하트(Michael Hart)가 시작했다.인쇄술을 대중화도로 확장시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인터넷에 전자화된 문서를 저장해 놓고 누구나 무료로 책을 받아 읽을 수 있는 가상 도서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기여하여 만들어지는 프로젝트로 수많은 고전의 원문이 모여 있다.2006년 3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발표에 따르면 프로젝트는 18000개 항목 이상의 전자문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매주 50여개의 새로운 전자책이 새롭게 등록되고 있다고 한다.프로젝트에 등록된 전자책은 대부분이 서구의 문학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시 단편소설 드라마 등의 문학작품 외에 요리책 사전류 정기간행물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부 오디오 파일과 음악 악보 파일도 갖고 있다.대부분은 영문 서적이지만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네덜란드어 핀란드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스웨덴어 라틴어 에스페란토로 된 책도 있으며 여타 언어 문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문서는 주로 아스키 문자 집합 때때로 ISO-8859-1 문자 집합으로 인코딩된 텍스트문서를 언제나 내려받을 수 있으며 HTML등의 다른 형식의 문서도 받을 수 있다. 편집이 어려운 PDF등의 문서형식은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바와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PDF형식을 이용할 수 있는 문서도 있다. 최근 수년동안 XML형식을 도입할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지만 토론은 지지부진하다.1990년대 들어 스캐닝과 OCR기술에 힘입어 마이클 하트는 컴퓨터 제조회사에서 스캐닝장비를 기증받아 문서를 스캐닝한후 OCR소프트웨어로 이를 텍스트화하는 작업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발전된 프로세스는 현재 주요한 작업기술이다. 한편 PG는 다중원본제공을 지원하며 또한 사용자 제공 콘텐츠 절차를 지원한다. 이는 셀프 출판을 의미한다.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라이선스는 아래와 같은 2개의 큰 맥락을 갖는다.이러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라이선스는 이후 몇몇 추가된 라이선스를 도입했으며 이전의 라이선스와 추가변형된 라이선스는 의 공식웹사이트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는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에 무라사키 시키부가 지은 소설이다. 54첩에 달하는 장편으로 800여 수의 와카가 들어있다. 고대의 일본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야기는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천황의 황자로 태어나 신하 계급으로 강하한 히카루 겐지와 그의 아들 세대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등장인물은 500명에 가깝고 4대의 임금 70여 년에 걸친 장편이다. 작자는 궁정 귀족사회의 진상을 포착하고 인간의 운명을 깊고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다. 성격묘사라든지 자연묘사에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빛을 발하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헤이안 시대 중기 11세기 초에 성립된 장편 소설이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오랫동안 특정��� 명칭 없이 ≪源氏物語≫ ≪光源氏物語≫ ≪紫物語≫ ≪光源氏≫ ≪源氏≫ ≪源語≫ ≪紫文≫ 등으로 불려 오다가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源氏物語≫라는 서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체 54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200자 원고지 5000매가 넘는 세계 최고 최장의 고전 소설로 치밀한 구성과 인간의 심리 묘사 표현의 정교함과 미의식 등으로 일본 문학사상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당시의 전형적인 이야기가 보통 ‘옛날에 남자가 있었다’라고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겐지 모노가타리≫는 ‘어느 천황의 치세 때였는지’라는 독창적인 서두로 시작된다. 작품 전체는 400여 명의 등장인물과 기리쓰보, 스자쿠, 레이제이, 금상에 이르는 4대 천황에 걸친 70여 년간의 이야기로, 히카루겐지라고 하는 주인공의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이상적인 일생과 그 후손인 가오루와 니오미야 등의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다. 또한 본문은 수많은 전기적 화형과 함께 795수의 와카가 산재되어 있어 긴장감 있는 문체를 이루고 있다.귄터 그라스는 독일의 소설가이자 극작가다.독일 단치히 자유시에서 식료품 상인이었던 독일계 아버지와 슬라브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제2차 세계 대전과 그라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노동봉사대에서 근무하던 중, 1944년에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여 10 SS기갑사단 프른즈베르크로 발령받아 참전했다. 징집당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당시 친위대의 독일인 대원들은 징집 대상이 아니라 자원 입대가 기본이었다. 종전후 부상당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런 사실은 그라스 자신이 최근 발간한 자서전에서 인정했다.전후 1947~48년에는 광산에서 일하며 석공 기술 과정을 마친다. 이어 1948년부터 1952년까지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그래픽과 조각을,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웠다.1955년 슈투트가르트 방송국의 서정시 경연대회에 입상하고, 1956~57년에 예술 작품 전시와 별도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58년까지 단문, 시, 희곡 등을 발표한다. 1954년에 결혼을 하고, 1960년부터 계속 베를린에 산다. 1959년에 매우 묘사적인 언어로 나중에 영화화 되기까지 한 을 발표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처음으로 세계 문학계에 이름을 날린 독일 작가가 된다. 이어 <고양이와 쥐> <개의 해>에서도 전쟁 전과 전쟁 후에 걸친 시대의 과오와 대결하고 있으며, 무대는 다같이 단치히이다. 이밖의 작품에 <달팽이의 일기에서> <넙치> 등이 있다. 1996년 유럽문화공로상을 받았다.그는 소설가로 활약하는 한편 부조리극적인 소품인 <요리사> <홍수> <버팔로까지 앞으로 10분> 등을 발표한 바 있는데 현대정치에도 직접 행동으로 참가하여 동서 독일의 분열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대담하게 도전한 <천민의 폭동연습>을 발표했다. 1953년 동독의 폭동 당시 브레히트를 모델로 하여 예술과 정치의 관련을 추구한 작품으로 <독일의 비극>이 있다.그라스는 전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요 지지자가 되어 외국인 혐오증, 신나치주의 등에 반대하는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반 상대성이론 또는 일반상대론은 마르셀 그로스만, 다비드 힐베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에 의해 발전되고 아인슈타인이 1915년에 발표한, 중력을 상대론적으로 다루는 물리 이론이다. 핀란드의 이론물리학자 노르드스트룀도 일반 상대론의 많은 부분을 논문으로 발표했었다. 일반 상대론은 현재까지 알려진, 중력을 다루는 이론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실험적으로 검증되었다.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가 민코프스키 공간을 도입하여 평평한 시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다루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의 영향을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기술한다. 일반상대론에서 시공간의 수학적 구조는 특별한 종류의 준 리만 다양체이며 국소적으로 민코프스키 공간이다. 시공간의 휘어짐은 수학적으로 준 리만 다양체의 곡률에 해당한다. 즉 일반상대론은 1850년대에 만들어진 수학인 리만 기하학으로 기술된다. 시공의 곡률은 4차원 운동량 밀도에 비례하는데 이를 아인슈타인 방정식이라고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성계뿐만 아니라 비관성계를 포함한 임의의 좌표��에 대해 물리 법칙이 동등한 형태를 유지하여야 한다.자유낙하하는 승강기와 승강기 바닥에서 승강기 천장으로 쏘여진 빛을 떠올려보면, 승강기 안에서 승강기와 같이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빛에서 어떠한 도플러 효과도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등가원리를 따르면, 중력장 내에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중력장이 없는 관성계의 관찰자와 같으며, 중력장이 없는 관성계에서는 빛에 어떠한 변형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승강기 천장에 설치된 빛 감지기에서 어떠한 도플러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승강기 밖에서 땅 위에 서있는 관찰자는 빛에서 도플러 효과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승강기가 자유낙하를 시작할 때 빛이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빛이 승강기 바닥에서 승강기 천장으로 가는 시간 formula_1 동안 승강기 천장은 formula_2만큼 빠르게 되고, 이 속도에 따라 빛에 대한 청색편이를 감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청색편이는 느린 속도 근사식 formula_3만큼 일어났다고 가정한다.감지기가 어떤 관찰자에게는 도플러 효과가 없다고 감지하고 어떤 관찰자에게는 청색편이의 도플러 효과가 있다고 감지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청색편이의 결과를 상쇄시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의 결과와 일치시킬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다행히 중력장이란 존재가 있으므로 중력장이 청색편이를 상쇄시키는 적색편이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중력 적색편이는 formula_4만큼 일어나며 여기에 빛이 감지되었을 때의 승강기 천장의 속도와 빛이 승강기 천장으로 가는 시간을 대입하면 formula_5라는 중력 퍼텐셜의 차이 formula_6에 따른 적색편이의 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승강기에서처럼 빛 방출기와 빛 감지기가 서로 상대적인 운동에 있는 상황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 정지해있는 상황이라면 빛의 감지기는 청색편이로 상쇄되지 않는 중력 적색편이를 감지할 것이다.빛의 감지기가 빛의 방출기에 대해서 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진동수를 얻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빛의 감지기와 빛의 방출기가 단위 시간 당 서로 다른 개수의 파면을 받아들일까?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대해서 파면의 개수는 동일하지만 빛의 감지기와 빛의 방출기가 서로 다른 시간 단위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즉 서로 다른 중력 퍼텐셜에 위치한 시계에서는 서로 다른 빠르기로 시침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진동수는 그 곳의 고유 시간에 반비례 하므로 formula_7이며 이를 중력 적색편이 식에 집어넣으면 formula_8의 식을 얻을 수 있다.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공을 특수 상대성 이론의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임의의 준 리만 다양체로 확장한다. 다양체의 계량 텐서 formula_9로서 시공간의 곡률을 정의하고, 이 곡률을 중력으로 재해석한다. 뉴턴 역학에서 중력은 질량의 밀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질량의 밀도를 자연스럽게 상대화하면 에너지-운동량 텐서를 얻는다. 아인슈타인과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 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장 방정식을 얻었으며, 이는 오늘날 아인슈타인 방정식으로 알려져 있다.여기서 기호는 다음과 같다.이 식으로부터 중력장이 약하다고 가정하면 뉴턴의 역제곱 법칙을 비상대론적 극한으로 얻는다.공간 좌표를 formula_17으로 하고 시간 좌표를 formula_18로 하면 세계선의 선소 formula_19는 formula_20 로 표시된다.formula_21와 formula_22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나타내는 인덱스로 0은 시간, 1,2,3은 공간 성분을 표시한다. formula_9는 시공간 사이의 변환을 나타내는 계량 텐서이다. 예를 들어 가장 평탄한 시공간을 나타내는 민코프스키 계량 텐서의 경우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중력 밖의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고 그 무게가 무시할 만큼 작은 입자는 시공간의 측지선을 따라 움직인다. 측지선은 시공에서 고유 시간을 극대화하는 경로이다. 즉 formula_25이다.일반적으로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량이 큰 물체는 시공간을 휘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일반 상대성 이론은 실험적으로 성공적이나 이를 주로 양자장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확장할 수 있다. 일반상대론에 비틀림을 더한 이론은 아인슈타인-카르탕 이론이고 중력상수를 스칼라장으로 승진시키면 브랜스-딕 이론을 얻는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추가 차원을 도입하여 다른 상호작용을 포함시키는 이론은 칼루차-클라인 이론이며 초대칭을 도입하면 초중력 이론을 얻는다. 또한 초끈이론 에서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으며 고리 양자 중력에서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을 가지고 이를 양자화 한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데니스 매캘리스터 리치는 미국의 저명한 전산학자이자 현대 컴퓨터의 선구자이다. C와 유닉스의 개발자로 알려져 있다.미국의 뉴욕 주 브롱크스빌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응용수학 학위를 얻었다. 1968년부터 벨 연구소 컴퓨터 연구 센터에서 일했다. 2007년 루슨트 테크놀로지의 시스템 소프트웨어 연구부장으로 은퇴했다. 홀로 살고 있던 그는 미국 시각으로 2011년 10월 12일 뉴저지 주 버클리 헤이츠의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켄 톰슨 등과 함께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을 개발했고 1971년 최초의 〈Unix Programmer's Manual〉을 썼다. 또한 C 언어를 개발한 후 브라이언 커니핸과 함께 〈C 프로그래밍 언어〉를 기술했다. 커니핸과 〈C 프로그래밍 언어〉책을 썼기에 커니핸이 C 언어 개발에 참여한 것으로 종종 오해받으나 커니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C언어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ALTRAN, B언어, BCPL, Multics 등의 개발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1983년에 켄 톰프슨과 로 튜링상을 수상했다.미국의 경제 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에서는 '현재의 애플 컴퓨터는 거의 모두 데니스 리치의 업적에 기반하고 있다'이라며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현재 애플 매킨토시의 OS X와 아이폰의 iOS는 모두 유닉스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다.주기율표 또는 주기표는 원소를 구분하기 쉽게 성질에 따라 배열한 표로, 러시아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처음 제안했다. 1913년 헨리 모즐리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를 개량시켜서 원자번호순으로 배열했는데, 이는 현대의 원소 주기율표와 유사하다.가장 많이 쓰이는 주기율표에는 단주기형과 장주기형이 있다. 단주기형 주기율표는 1주기와 3주기를 기준으로 하고, 4주기 아래로는 전형원소와 전이원소가 같은 칸에 있다. 이 단주기형 주기율표는 초기에 쓴 모델로 원자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많이 사용하였다. 장주기형 주기율표는 현재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주기율표이다.주기율표의 오른쪽에 있는 이 원소들은 다른 원소들과 다르게 화학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활성 기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17족의 원소들로 구성되어있다. 전자를 가져오려는 성질이 강하다. 수소와 반응한다.준금속은 금속과 비금속 사이에 있어 금속과 비금속의 성질을 모두 갖고 있다. 특히 규소나 저마늄은 반도체의 주 원료이다.알칼리 금속은 수소를 제외한 1족 원소들이다. 칼로 잘릴 정도로 무른 금속이며, 물과 격렬하게 반응을 하여 때론 폭발을 하기도 한다.알칼리 토금속은 2족 원소들이다. 알칼리 금속과 희토류 원소의 중간 성질을 띤다.란타넘족은 란타넘 에서 루테튬 까지의 희토류 원소이다. 란타넘족은 원자번호가 늘어나면서 4f 오비탈을 채운다.악티늄족은 악티늄 에서 로렌슘 까지인 족이다. 악티늄족은 원자번호가 늘어나면서 5f 오비탈을 채운다.전이금속은 주기율표에서 4~7주기 3~12족 까지의 원소들을 말한다. 원자번호가 늘어나면서 d 오비탈이 채워진다.전이후 금속은 주기율표의 p-구역에 있는 금속 원소를 말한다. 전이 금속에 비해 녹는 점과 끓는 점이 낮고, 무르다.되베라이너의 세 쌍 원소.주기율표의 역사는 요한 볼프강 되베라이너의 "세 쌍 원소"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실험을 통해 세 개의 원소로 이루어진 무리 중 어떤 원소들은 첫 번째 원소와 세 번째 원소의 물리량 평균이 두 번째 원소의 물리량과 같음을 확인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칼슘 스트론튬 바륨'의 세 원소가 있다 여기서 스트론튬의 물리량은 칼슘과 바륨 원소의 물리량을 합하여 2로 나눈 평균값과 비슷하거나 같다. 되베라이너는 이들을 세 쌍의 원소라고 불렀다. 이러한 세 쌍 원소 관계를 만족하는 원소들은 칼슘-스트론튬-바륨 염소-브로민-아이오딘 그리고 리튬-나트륨-칼륨이 대표적인데 이를 만족하는 원소수가 적어 인정받지 못하였다. 세 쌍 원소는 현대 주기율표에서 같은 족에 해당된다.뉴랜즈의 옥타브 설.영국의 과학자 존 뉴랜즈는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으로 배열하면 8번째 원소마다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를 피아노의 개념에 대입하여 옥타브 법칙을 세웠다. 하지만 이 대응성은 3번째 줄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고 처음 이 이론이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이후 여러가지 실험이 뉴랜즈의 법칙의 중요성을 보였다. 현대 주기율표에서 주기개념의 시초가 되었다.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화학 교수였다. 멘델레예프는 원소의 규칙을 밝히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결국 원소들을 원자량순으로 나열하면 되베라이너의 세쌍원소, 뉴랜즈의 옥타브 법칙을 만족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원소가 어떤 함수의 결과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지만 비활성 기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주기율표는 바뀌기 시작했다. 멘델레예프가 만든 주기율표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언젠가는 빈 칸을 채울 원소가 발견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멘델레예프의 문제는 영국의 모즐리에 의해 풀렸다. 그는 음극선관을 이용하여 생성되는 X선의 파장을 연구하여 양성자 수에 따라 화학적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를 모즐리의 법칙이라하며, 이것을 기본으로 현대적 의미의 주기율표가 탄생하였다.수소와 헬륨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주기율표에서는 수소를 알칼리 금속과 마찬가지로 가장 바깥쪽 껍질에 전자를 하나 가진 리튬 위에 배열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수소는 금속 원소가 아니며 수소가 전자의 구조 면에서는 알칼리 금속이 아닌 할로겐에게 가깝고 할로젠 원소와 성질이 비슷하다고 주장하며, 수소의 위치를 17족 원소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마찬가지로 생각해서 수소가 1족 원소라면 헬륨도 베릴륨 위에 2족 원소로 배치해야 한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헬륨은 비활성 기체이므로 현재처럼 네온 위인 18족 원소가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아미노산은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기본 구성 단위로, 단백질을 완전히 가수분해하면 암모니아와 함께 생성된다. 화학적으로 아미노기와 카복시기를 포함한 모든 분자를 지칭하기도 하며 화학식은NH2CHRnCOOH이다.생화학에서는 흔히 -아미노산을 간단히 아미노산이라 부른다. -아미노산은 아미노기와 카복시기가 하나의 탄소에 붙어있다. 아미노산의 일종인 프롤린은 실제로는 아미노기 대신 이차 아미노기를 포함한 2차 아민인데 생화학적으로 보통의 아미노산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2차 아미노기를 가진 프롤린도 아미노산으로 분류한다.일반적인 -아미노산의 구조는 오른쪽 그림과 같다.아미노기와 카복실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아미노산은 중성에서 양쪽성 이온으로 존재하며, 카복실기가 공명 상태로 안정화를 취한다. 오른쪽의 구조에서 R은 나머지라는 뜻의 "Residue" 혹은 "Remainder"의 머릿글자로 곁사슬을 나타내고, 곁사슬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 아미노산의 종류가 결정된다. 아미노산은 곁사슬의 성질에 따라 산성, 염기성, 친수성, 소수성의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곁사슬이 수소 원자뿐인 글라이신을 제외하고, 다른 아미노산은 모두 두가지 광학 활성을 가져, D형과 L형으로 구분된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거의 대부분은 L-아미노산 형태로 존재한다. 청자고둥같은 일부 특이한 바다생물에서 D-아미노산이 발견되기도 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탈수반응이자 펩타이드 결합인 축합 중합을 통해 만들어진다.A,B,C는 친수성이며 D는 소수성이다. 21개의 주요 아미노산중에서 파란색은 비필수 아미노산이며 빨간색은 필수아미노산이다.히라가나()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두 가지 가나 가운데 하나다. 가타카나는 주로 외래어 표기 등에 쓰고, 히라가나는 다음과 같은 용도로 쓴다.히라가나는 여성이 많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온나데라고 불린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히라가나는 여자들만 쓰는 글이라 하여 오랫동안 일본의 공용 문서에선 가타카나와 한자만이 사용되었다. 현재 일본 철도의 역명판에는 히라가나와 칸지가 적혀 있다. 히라가나는 헤이안 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유아들도 가나를 배울 때는 히라가나를 먼저 배우고 가타카나를 나중에 배우기 때문에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쓰인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음절문자이다.한영 자판 상태에서 히라가나를 입력할 경우 ㄸ+한자 키를 누르면 된다. 가타카나의 경우 장음 등 일부 문자를 제외하면, 꼭 ㅃ+한자 조합을 해야 한다.히라가나는 만요가나에서 왔다.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히라가나의 모양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고 여러 형태의 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학제 시행 후에야 위와 같은 자형이 표준화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위 이외의 구식 자형은 헨타이가나(変体仮名)라고 부른다. +토마스 만( 1875년 6월 6일 ~ 1955년 8월 12일)은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비롯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토마스 만의 형은 급진적인 작가 하인리히 만이다. 그리고 6명의 자식 중 3명인 Erika Mann 클라우스 만 Golo Mann들도 또한 독일의 중요한 작가로 성장했다.토마스 만은 평의원이며 곡물 상인이었던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 부부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독일의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율리아는 7살 때 독일로 망명한 부분적 독일계 브라질리안이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가 1891년에 돌아가시면서 회사는 청산되었다. 1893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보험 회사의 견습 사원이 되었다. 이때 첫 작품 <호의>가 잡지에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토마스 만은 뤼베크 체육관 기술 분야에 참가하면서 뮌헨 대학과 기술대학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당시 그는 역사 경제학 미술역사 문학등을 공부하게 되면서 언론계로 커리어를 준비하게 된다. 그는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서 살았던 1년을 제외하면 1891년부터 1933년까지 형이자 소설가인 하인리히와 함께 뮌헨에 거주하게 된다. 토마스 만은 보험회사에서 1894년에서 1895년까지 일을 하게 된다. 그가 Simplicissimus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토마스 만의 첫 번째 소설은 1898년에 출판된 이다.1901년 부유한 상인의 집안이 4대에 걸쳐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장편 <부덴브로크스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여 문단에서의 자리를 굳혔다.그가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여러 정황이 있으나 종국에는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사랑에 빠졌다. 1905년, 그는 그녀와 결혼을 하며, 6명의 아이들을 낳았다.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프리드리히와 대동맹>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 등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고, 점차 구낭만주의적인 반지성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휴머니즘을 품기 시작하였다. 1924년 12년간의 노력의 결정인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손꼽히는 발전 소설로서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929년 토마스 만은 Nidden에 있는 어촌에 오두막을 가진다. 그 곳에는 독일 예술 공동체가 있었으며 1930년에서 1932년 여름에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집필한다. 현재 이 오두막은 소규모 전시를 하면서 토마스 만에 대한 문화적인 중심이 됐다.1933년 나치스 정권 성립으로 조국을 떠나, 남프랑스·스위스 등을 거쳐, 1938년 미국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업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높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옹호를 위해 싸웠다.1942년 그의 가족들은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로 이사를 한다. 그 곳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게 된다. 1944년 6월 23일 토마스 만은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된다. 1952년에 스위스 취리히 근처에 있는 에서 살게 된다.그는 독일을 규칙적으로 여행하긴 했지만 그 후로 살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독일 방문은 1949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200주년이다.1955년 취리히에 있는 한 병원에서 아테롬선 동맥 경화증으로 죽고 Kilchberg에 묻힌다. 많은 협회들이 그의 이름을 기린다.토마스 만의 작품은 처음으로 H. T. Lowe-Porter가 번역했다. 그녀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영어권 사회에 크게 전파시켰다.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토마스 만은 카이저의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진보주의를 공격한다.1930년 토마스 만은 베를린에서 "An Appeal to Reason" 라는 연설을 한다. 그는 강하게 나치중심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운동권들에 의한 반대를 격려한다. 이것은 그가 집필한 수많은 평론과 문학에서 나치를 공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에 대해서 늘어나는 동정을 표현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을 했을 당시, 토마스 만과 아내는 스위스에서 주말을 보냈다. 나치 정책에 대한 그의 매우 강력한 비난 때문에, 아들 클라우스는 돌아가지 말자고 권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책은 하인리히나 클라우스의 책들과는 달리, 히틀러 정권에 의해서 태워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1929년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1936년 나치 정권이 공식적으로 토마스 만의 독일 시민권을 빼앗아간다. 몇 달 후,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게 된다.그러나 1933년 8월 26일이라고 기록된 개인적인 편지에서, 이미, 토마스 만은 나치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하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와 일치한다. 이 소설에서, 토마스 만은 2차 대전에서 모든 잔인함에 대한 독일 국민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감을 가진 몇몇 지역들을 언급한다.전쟁 동안 토마스 만은 반-나치 라디오 연설 시리즈를 만든다. 이것은 미국에서 녹음돼서 영국에 전해지고 BBC가 방송을 하게 되면서 독일 청취자들이 듣기를 원한다.사회 비판가 의 컬렉션 는 토마스 만의 정치적 성형이 바뀌는 것을 설명한다. +하인리히 뵐(Heinrich Bll , 쾰른, 1917년 12월 21일 - 랑엔브로이히 1985년 7월 16일)은 독일의 남성 소설가다.1917년 쾰른에서 목공예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후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독일작가들 중 하나. 청소년기 나치 하에서 히틀러 유겐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참여하지 않는다. 서점의 견습공으로 있다가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프랑스 루마니아 헝가리 러시아 등지에서 복무한다. 4차례 부상당한 후 1945년 4월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2년이 지나 그의 나이 30에 전업작가가 된다. 전후 귀향하여 ‘전쟁에서 본 것’과 전후의 ‘폐허’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1949년 병사들의 절망적인 삶을 묘사한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1967년에는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을 수상했다.1970년대에는 사회 참여가 더욱 적극적이 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 사회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특히 1969년과 1972년 뵐은 귄터 그라스와 함께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위해 선거 유세에 직접 참여하며 빌리 브란트를 적극 지지했다. 또한 1971년 독일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1971년에는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여인과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29년의 토마스 만 이후 독일이 이 상을 받은 것은 43년 만이었다. 그의 작품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는 아직까지 독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활동에 진력했던 뵐은 1985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그의 죽음 이후 독일 녹색당은 그의 저항적 삶을 기리기 위하여 당의 정책 연구소 이름을 라고 짓기로 결정하였다.방정식은 미지수가 포함된 식에서 그 미지수에 특정한 값을 주었을 때만 성립하는 등식이다. 이때 방정식을 참이 되게 하는 특정 문자의 값을 해 또는 근이라 한다. 방정식의 해는 없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고 모든 값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불능이라고 하고 중자의 경우는 방정식 후자의 경우는 항등식이라 한다.은 문자 formula_2가 어떤 값이든 항상 등호가 성립하므로 항등식인 반면,은 방정식이고 그 해는 formula_4와 formula_5이다. 또한방정식의 방정은 고대 중국의 산학서인 구장산술의 여덟 번째 장의 제목인 方程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方은 연립방정식의 계수를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한다는 뜻이고 程은 이렇게 배열한 계수를 조작하여 해를 구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 해법은 약 1500년 뒤에 등장하는 가우스 소거법에 해당한다. 고대 중국의 수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음수의 계산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방정식에서 해를 구하려는 문자, 즉 미지수로는 보통 formula_2를 사용한다. 미지수로 알파벳의 뒤쪽 문자 formula_9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의 수학자겸 철학자인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되었다.방정식의 항에 무리식(루트)을 포함하는 다항식으로 이루어진 방정식을 무리 방정식이라 한다.그러니, 무리방정식은 해에 대해서 무연근 검사로 마무리검산을 해야하므로,위의 두 근인 formula_21을원래의 식인 formula_10에 대입해보면우선 양변으로 놓으면 formula_24이어서 formula_25일때formula_26따라서, formula_10 방정식의 근은 formula_25이다.그러나 무리방정식은 해에 대해서 무연근 검사로 마무리검산을 해야하므로위의 두 근인 formula_42는 1보다 작지 않으므로 무연근이다.연립 방정식은 서로 다른 2개의 미지수가 주어진 방정식들에 모두 적합할 때 이 방정식의 쌍을 의미한다. 연립 방정식도 미지수의 차수에 따라 연립 일차 방정식, 연립 이차 방정식 등으로 나뉜다. 연립 일차 방정식에선 y=ax+b와 같이 한 미지수를 어떠한 값으로 나타내어 이 값을 그 미지수에 대입하는 방법인 대입법과 미지수의 계수를 같게 곱하여 둘을 더하거나 빼서 그 미지수를 없애는 가감법, 그리고 행렬을 이용한 가우스 소거법이 주로 사용된다.방정식은 2x+3=0과 같이 x(미지수)의 값에 따라 등식이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한다. 방정식은 중국의 구장산술이라는 산학서에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방정식에도 원 방정식 직선의 방정식 미분 방정식 등 여러가지가 있고 또 미지수의 차수에 따라 일차 방정식 이차 방정식 삼차 방정식 고차 방정식... 등으로 나뉜다. 특히 이차 방정식에는 미지수의 값을 구하는 근의 공식이라는 식이 있다. 이차방정식 ax^2+bx+c=0(a≠0)의 근의 공식은 -b±√b^2-4ac/2a 이고 ax^2+2b'x+c=0(a≠0)의 근의 공식은 -b'±√b'^2-ac/a이다. 삼차 방정식과 사차 방정식은 특수한 경우에 성립하는 근의 공식이 있다. 오차 방정식부턴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벨이 증명) 갈루아 이론을 이용하면 아벨과는 다른 방법으로 증명 이 가능하다. +수학에서 삼각함수 항등식은 삼각함수가 나오는 항등식을 말한다. 이 공식들은 삼각함수가 나오는 복잡한 식을 간단히 정리하는 데 유용하며 특히 치환적분에서 매우 자주 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참고로 아래에서 formula_1 formula_2 등의 함수는 formula_3와 같이 정의된다.주기성, 대칭성, 이동.다음 관계는 단위원을 사용하면 쉽게 보일 수 있다.다음 식은 삼각함수의 주기성을 나타낸다.다음 식은 삼각함수의 대칭성을 나타낸다.다음은 삼각함수의 이동 성질을 나타낸다.또한 주기가 같지만 상이 다른 사인파들의 선형결합은 또 다른 상의 동일주기의 사인파가 된다. 즉 다음과 같다.다음 식들은 삼각함수의 정의와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면 쉽게 보일 수 있다.다음의 삼각함수의 덧셈정리를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오일러의 공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탄젠트 공식은 위의 둘을 결합하여 얻는다.다음 공식은 바로 위 덧셈 공식에서 formula_22로 놓으면 바로 얻어진다. 피타고라스의 식을 쓰면 변형을 얻는다. 또한 드무아브르의 공식에서 formula_23로 놓아도 된다.아래 공식들은 덧셈정리에서 한 각을 2x, 다른 한 각을 x로 놓고 전개하면 얻을 수 있다.아래 공식들은 배각의 공식에서 x를 2x로 두고 전개하여 풀면 얻을 수 있다.formula_40이 formula_41번째 체비쇼프 다항식일 때디리클레 핵formula_44 은 다음의 항등식의 양변에서 도출되는 함수이다. 디리클레 핵을 갖는 2n차의 어떤 제곱적분 가능함수의 합성곱은 함수의 n차 푸리에 근사와 함께 동시에 일어난다.n차 제곱한 삼각함수를 일차식의 삼각함수 식으로 바꾼다.두배각 공식의 코사인 공식을 formula_46 과 formula_47으로 푼다.차수 줄이기 이차식 공식에서 formula_58에 formula_59을 대입하고, formula_60 과 formula_61으로 푼다.또한, formula_65는 formula_66과 같고, 여기에 분자 분모에 같은 formula_67을 곱한다. 그러면, 분자는 사인의 두배각 공식에 의해 formula_68이 되고, 분모는 formula_69 이므로 코사인 두배각 공식을 쓰면 formula_70 이 된다. 두 번째 식은 분자와 분모에 다시 formula_68를 곱하고, 피타고라스 공식으로 간단히 하면 얻어진다.곱을 합으로 바꾸는 공식.우변을 덧셈정리로 전개하면 증명된다.합을 곱으로 바꾸는 공식.위 식의 formula_58를 formula_78로, formula_79를 formula_80 로 바꾼다.그리고 또 다른 식들로 다음과 같이 있다.다음 식들은 아마 변수가 있는 일반화된 식을 찾기가 위 보다 어려울 것이다.21을 택해서 각을 나누면, 도로 표현한 각이 더이상 깔끔하지 않다. 다음 식을 보자.1 2 4 5 8 10 이란 인자를 보면 차츰 답이 드러난다. 이 수들은 모두 보다 작고 21과의 공약수가 1인 수 들이다. 사실 위 세 가지 예는 더 인수분해되지 않는 원분다항식(cyclotomic polynomial)에 대한 기본정리의 따름정리이다. 코사인값은 다항식의 영(zero)들의 실수부이고 그들의 합은 21(가장 마지막 예)의 뫼비우스 함수값이다. (식에선 값의 반만이 나타난다.)미적분학의 삼각함수에선 각을 라디안(radian)으로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관계식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선 삼각함수가 기하학적으로 정의된 후에 함수들의 미분을 구하기 위해선 우선을 증명한다. 그리고 미분의 극한 정의와 덧셈정리를 이용한다. 삼각함수가 테일러 급수로 정의되었다면 각 항을 미분하여 알아낼 수 있다.(참고 formula_92나머지 삼각함수의 미분은 위 항등식과 미분법칙으로 얻어진다.적분식은 적분표를 참고하라.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이후 정계에 입문해 제1315대 국회의원직을 역임했다.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김대중 정부에서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역임했다.본관은 광주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생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재벌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대기업 총수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시행한 것, 대기업 간 불공정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을 강화한 것 등이 높게 평가받는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지만 역대 대한민국 정부 중 OECD의 성장률을 하회한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수치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정부의 2.8%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나, IMF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세계 경제성장률 대비 국내 경제성장률이 노무현 정부 -0.7%, 이명박 정부 +0.0%, 박근혜 정부 -0.5%로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는 골디락스 호황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성장률을 상회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를 가장 크게 하회한 대한민국 정부로 기록되었다.주요 실책으로는 정치적으로 친인척 및 측근비리, 사회적으로 교육 정책 및 부동산 정책의 실패, 경제적으로 양극화 심화에 따른 민생경제 파탄, 외교적으로 햇볕정책의 실패 등이 꼽힌다. 부동산 정책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소득 분배 지표가 더욱 악화되어 서민경제의 파탄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게다가 반미적 입장, 편협한 국수주의, 친북적 정책으로 인한 외교적 모순으로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이렇듯 서민 생활과 직결되는 분야에서의 정책적 과오와 외교·안보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여론 조사가 정례화 된 제6공화국 이래 노태우를 제치고 임기 평균 국정 지지율 최하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가 부족했던 대통령으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재임 시 국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듣고 대중적 인기가 부족했으며 적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합법화, 국가보안법 폐지 검토,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보 언론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고, 보수 언론에게는 반미주의자라며 양측 진영에서 모두 비판받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노무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무현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으며,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아내가 받았다는 노무현의 주장과는 달리,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와 조카사위 연철호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노무현 일가의 640만 달러 수수 의혹은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이같은 뇌물 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노무현은 그 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노무현이 사망하면서 법무부는 노무현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시켰다. 사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노무현 재단의 주장에 따르면 500만여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대통령이 되기 이전.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에 경상남도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있는 형 2명 중 맏형 영현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작은 형 건평은 현재까지 살아있다. 노건평은 1968년 세무직 9급 공무원이 되어 10년간 지방 세무서에서 근무하였다. 노무현은 광주 노씨 광주군파 31대 손으로 광주 노씨는 광주광역시 일곡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가문이다.1953년에 진영대창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6학년 때 담임교사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다. 1959년 3월에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재학 당시 노무현은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는 외상으로 입학하였다고 한다. 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일으키다가 정학을 당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간 휴학한 뒤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1963년에 가까스로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여 1966년에 졸업하였다.고등학교 졸업 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과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결국 그만두었다. 이후 막노동과 사시 공부를 병행하였다.1968년 군에 입대하여 제12사단 을지부대에서 육군 상병으로 만기전역하였다. 1972년 27세에 권양숙과 결혼하였고 1973년에 아들 건호를, 1975년에 딸 정연을 낳았다.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는 4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고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하게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 이후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직하였다.1978년 5월 무렵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이후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롭게 생활하였다.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라고 밝혔다.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서,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 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1987년 부산 추도회에서 연행된 노무현에 대해 부산지방법원 한기춘 판사가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하자 검찰은 한밤 중에 기각된 영장기록 보따리를 들고 3명의 부장판사를 찾아다니며 영장불부를 중용하다 사회적 물의을 일으키기도 했다.안기부 직원을 가르치다.한편 노무현은 자신을 감시하던 안기부 직원에게 광주항쟁 비디오와 노동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강의하였다. 안기부 직원 이화춘은 이러면 우리가 당신을 잡아가야 된다면서 오히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안기부 직원들에게 민중 노동운동 관련 비디오 자료들을 태연히 보여주었다.안기부에 들어와 8년 동안 미국 자료를 수집하는 내근 업무를 하던 이화춘은 85년 5월 안기부 부산지부로 파견돼 법조를 담당하게 됐다. 전임자는 며 밤에 집으로 오라고 했다.노무현이 보여준 자료들을 보고 안기부의 직원들은 당황해했다. 이화춘 등은 고 답했다. 이화춘과 안기부 직원들은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가 같이 운영하는 은 무뎌져 갔고, 그와 노무현은 서로의 애환을 챙기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재야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로 불렸다. 한편, 1987년 12월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에 라고 했던 구절이 문제가 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았다.청문회 스타로 등극.1988년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가 되었다.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9년 초 국회 5공 비리광주 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번복하고 사퇴서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 김영삼은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3당 합당 거부와 야당 정치인.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3당 합당 선언을 하였다. 이에 노무현은 3당 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노무현은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고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 등과 함께 민주당 을 창당하였다. 김영삼 총재가 3당 합당 당시 "구국의 차원에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이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노무현이 일어나 오른손을 번쩍 들며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이후 그는 김영삼의 3당 합당 참여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1990년 7월 5일 민주당 중앙당 기획조정실장이 되었다.한편 노무현은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군 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했다. 이�� 1990년 10월 4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돼 프락치로서 수사에 협조해 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밝혀졌다.1991년 10월 14대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주간조선'이 게재한 ‘노 의원은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인권 변호사로 알려진 당시 노무현 의원이 부동산 투기의 전력이 있고 호화 요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등 재산 규모 및 형성 과정의 의혹을 보도했다. 노무현 의원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1년여 만에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이 기사가 선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계량할 수 없으나 결국 노무현은 1992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2위로 낙선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민주당 후보로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새정치국민회의 입당.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이 1995년에 정계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 행태'라고 비난하면서 합류하지 않았다. 많은 의원들이 민주당를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로 가면서 민주당은 제2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민주당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는데 노무현도 이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였다.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이 지역등권론을 주장하자 노무현은 이부영 등과 함께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을 비판하였다.1995년 노무현은 민주당 부산시장 경선에 출마하여 황백현 부산진을 위원장을 13표 차로 누르고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1996년 4월 11일에 시행된 15대 총선에서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노무현은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통추 활동기간 동안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3김 정치에 한 번도 저항하지 않은 이인제 후보는 세대교체를 논할 자격도 없다"라며 이인제가 주장한 세대교체에 대해 강력 비판하는 뜻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흐른 후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철회하게 되는데 이는 통추의 '노무현 대선 출마'에 대한 강력한 비토로 인한 것이었다.15대 대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순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면서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부영·이철 등은 라는 말로 과거의 일을 반성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최종 선고 받기 직전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서울시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무현은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고,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2002년 대통령 선거.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들과 국민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예비 후보 지명전에서 승리.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당시 이인제 대세론이 있었고 호남 출신으로 오랫동안 김대중을 보좌해온 한화갑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당시의 분위기는 노무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영남 출신인데다 새천년민주당 내에서는 이렇다 할 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거세게 불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무너지면서 광주 경선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정작 1위를 장담했던 호남 출신인 한화갑 후보는 3위를 기록했고 영남 출신 후보가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노무현은 당시 연단에 서서 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민주진보세력 대통합론과 위기.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 세력 대통합론'을 내놓았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 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젖히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대통합론의 취지를 전달하고 김영삼에게 지방 선거 후보 추천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 세력 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보이면서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의 노무현에게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한편 노무현은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새천년민주당은 지방 선거에서 광역 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의 4석만 건지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친이인제 성향의 반노, 노무현의 집권 가능성에 회의적이던 비노 의원들은 지방 선거에 참패하자 집단으로 신당 창당, 후보 사퇴를 주장하며 라고 말했다.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10월 들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이때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후보 단일화는 정 대표로의 단일화를 염두에 둔 민주당 내 반노무현, 비노무현 측의 요구에서 비롯하였다.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국민통합21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판세는 1강 2중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민주당 김원기 고문은 노무현의 결단은 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시행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노 후보 측은 이날 승리 원인에 대해 이라고 말했다.단일화가 되고 나서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이 이회창 후보를 역전한 직후 이인제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 후 이회창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는 등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2002년 11월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에 참석했다가 성난 농부들이 던진 달걀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았다.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파기.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지지 철회 발표문에 따르면 노무현 후보가 라는 표현을 했는데 국민통합21은 면서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노무현 후보는 설득을 위해 심야에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노무현은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과 함께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기다렸으나 정몽준 대표는 만나주지 않았고 심야 회동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정몽준의 지지철회로 위기감을 느낀 진보 진영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고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주는 의외의 효과가 나타난다.제16대 대통령 당선.노무현은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역전극을 반복하다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이듬해인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선 과정에서 인터넷의 젊은 지지층을 만들어 이끌어냈다. 대통령 취임 전인 2003년 1월 14일, 대통령 당선자인 노무현은 라고 덧붙였다.취임 초 노무현은 노무현 정부, 즉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은 크게 12개의 국정 과제로 제시됐다. 외교안보 분야와 정치행정 분야의 기조로 부패 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 참여와 통합의 정치 개혁이 경제 분야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이 제시되었다. 사회 문화 여성 보건 분야로는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교육 개혁과 지식문화 강국 실현, 국민 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등을 제시하였다.외교 방식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표방하였다.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 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여겨졌는데,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 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며 대미 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 행정부와 대북 정책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 정책 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었던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실리는 챙기지 못했다.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당시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자 부시가 짜증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워싱턴 정가의 소식을 전하는 넬슨리포트는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에 대해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현장의 기자들도 놀란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양국의 외교관들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두 정상 간의 껄끄러운 궁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2008년 2월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하였다.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 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 언론 및 야당으로부터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 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대북 유화 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 일본의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 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는 또 3월 23일에 일본의 행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태"로 규정하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날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성토하면서 외교적 갈등이 시작되었다.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 신조 총리와의 양자 회담에서 동해를 예를 들어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의 한 예로 든 것을 언론이 전격 제안으로 보도했다"라고 해명했다.미국의 UPI 통신은 의 한글 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이와는 별개로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 언론들이 이를 고 불쾌감을 드러냈다.취임 1년차 (2003년 2월 25일 ~ 2004년 2월 24일).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이튿날에는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또 이튿날에는 참여정부 조각 발표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취임식 당일인 2003년 2월 25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한편 3월 9일 검���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노무현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인사 개입을 하는 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며 대통령 검찰 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했으나 노무현은 "지금 인사위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 대상"이라며 "여기서 인사하지 않으면 낡은 검찰로 몇 달 더 가자는 것"이라며 검찰 인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사들의 친인척 의혹 등 부적절한 발언이 거론되자 대통령이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죠”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보수 언론은 이를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구설수에 올렸다. 검사들은 토론회의 의도에 대해 "대통령께서 토론의 달인으로 알고 있는데 토론의 아마추어인 검사들을 말로써 제압하려 한다면 무의미하다"는 비판을 했다. 당시 이 토론회는 권위적이고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닌 탈권위적인 '토론하는 대통령'을 보여준 모습으로 평가받았다.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그는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라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한편 3월 24일에는 원칙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운용되거나 국회의원들이 유용해 온 특별 교부금에 대해 폐지 또는 보통 교부금에 통합하는 등 개선을 명령했다. 그러나 2008년 12월까지 이러한 관행은 개선되지 않았다. 4월 18일에는 노무현의 지시에 따라 청남대가 개방되고 모든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관하였으며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그러나 노무현은 초기 어려움을 겪에 되었다.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자 그는 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편 2003년 9월에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2004년 2월 25일 민주당은 참여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실패한 1년, 잃어버린 1년이라는 제목의 국정평가 보고서를 배포했다. 보고서에는 참여정부의 7대 비리의혹을 꼽았으며,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11가지 자질부족 사례를 꼽았다.불법 관권선거 개입 사례로는 노무현의 양강구도 언급 등 총선관련 발언들과 군복무기간 추가단축 검토를 비롯한 행정부의 총선용 선심성 공약 남발 사례 민주당 파괴공작 총선 올인 등을 꼽았으며 이와함께 장관임기 보장 약속 파기 대북송금 특검 수용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자살을 비롯한 사례 21가지 등 총 43가지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1년을 혹평했다.위기돌파와 신행정 수도론.10월 청와대 총무비서관인 최도술이 SK그룹으로부터 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터지고10월 10일에는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에다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되었고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 동의안 부결 등의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노무현은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2003년 12월 29일 국회는 여야의 합의로 신행정수도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2004년 1월 14일 그는 연두 기자 회견에서 라고 말했다. 그해 1월 16일에는 2003년 말에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신행정수도법을 공포했다.2004년 1월에 노무현의 며느리인 배정민이 개인 홈페이지에 "150만 원짜리 유모차가 사고 싶은데 엄마 아빠(노무현 권양숙 추정)에게 사 달라고 졸라야겠다."라는 글을 올린 이른바 유모차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뒤 항의가 일자 배정민은 결국 홈페이지를 폐쇄했다.취임 2년차 (2004년 2월 25일 ~ 2005년 2월 24일).2004년 노무현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하던 국회는 새천년민주당의 주도 하에 그를 탄핵하였고, 이로써 헌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이 여파로 좌파진영이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2004년 3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당이 고발한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 있다고 인정하고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을 했다. 민주당은 이 조치를 근거로 노무현이 선거법 위반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을 발의하겠다며 야3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같은 달 그의 형인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노무현은 언론 브리핑에서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남상국을 질타했고, 2004년 3월 11일 남상국은 한강에서 투신했다. 이 사건으로 노건평은 유죄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남상국의 자살이 노무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을 펴면서 노무현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사건의 본질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마녀사냥하는 언론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형에 대한 인사청탁에 대해서 관련된 당사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한 부분에 대해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당시 송영길 의원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탄핵반대투쟁에 참가하였다.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그로 말미암아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 권한 대행의 역할을 맡았다.그러나 노무현의 탄핵은 국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요인으로 적용되었다. 탄핵 당일인 3월 12일부터 3월 27일 보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이 주도하는 탄핵 찬성 집회도 3월 27일에 2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다.이후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 이 영향으로 인 열린우리당이 탄핵 후폭풍으로 지지도가 크게 상승하였고, 4월 15일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단숨에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이로써 헌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진보세력이 중심이 되는 국회가 출범하였고,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었다. 이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새로운 여당의 탄생.같은 해 5월 20일 노무현은 1당이 된 열린우리당에 "수석 당원"으로 입당하여 열린우리당은 공식적인 여당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11일에는 1월에 공포한 신행정수도법에 따라 국회는 신행정수도를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신행정수도의 입지로 정했다.한편 8월에는 노무현에게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악성 댓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된 H 씨에 대해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의 증거 조사 결과 그런 사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 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수도가 서울이라는 법적 확신이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이라는 일반에 생소한 개념까지 동원하며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자 수긍할 수 없다는 일부 여론이 있기도 했다. 어쨌든 이에 따라 그가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게 된다.같은 해 12월 16일 FTA 추진 지시를 내렸다.대통령직 퇴임 이후.2008년 2월 25일 차기 대통령인 이명박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KTX를 타고 밀양을 거쳐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 봉하 마을로 귀향했다. 그는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꼽혔으며 봉하 마을에 대한 관심이 누리꾼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노무현의 귀향으로 김해시 봉하 마을에 지지자 및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언론에 비친 모습을 통해 특정 누리꾼들에게 친근한 대통령으로 다가왔다. 또한 특정 네티즌들은 '노간지'라는 애칭을 붙여 줬다. 노무현이 봉하 마을 귀향 이후 관심을 갖고 추진한 사업으로 오리쌀 농법과 화포천 정화 생태숲 조성 등 친환경친농촌 생태사업이 있다.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2009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 토론글을 게시하자 곧바로 심리전단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2009년 3월 1일 홈페이지 라는 제목으로 이라는 내용을 게시하였다. 2009년 3월 3일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은 내부 회의에서 심리전단에 해당 글을 언급하면서 적극적인 대응 심리전을 펼치라고 지시했다.그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사저인 봉하 마을로 귀향하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날에 노무현 정권 인사들이 고의적으로 청와대의 컴퓨터 시스템에 보안 장치를 걸어 새 정권이 시스템을 사용 못하게 막아 놓았다는 뉴스가 나왔고, 그 후 약 2주간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단순히 화면 보호기에 암호가 걸렸으며, 이는 남아 있는 'e-지원' 담당자에게 물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2008년 4월 20일 그는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위치한 노씨 문중 선산에서 열린 종친회 삼릉단 제종회 대제에 참석해 제관인 초헌관 자격으로 제를 지냈다. 같은 날 오후에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2008년 7월, 국가기록원과 뉴라이트 전국연합에서 대통령 기록물을 사사로이 봉하 마을로 옮긴 건에 대하여 검찰에 불법적인 로 기록물에 관련된 전 비서관과 행정관들을 고발하여 수사가 진행되었다. 기록원의 고발 조치에 대해 노무현 측 비서관인 김경수는 라고 말했다. 검찰이 대통령 기록물 유출 실체 규명에 나서게 됨에 따라 신·구 정권 간 대립과 갈등이 격해질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편 회수 조치를 하는 와중에 기록이 담긴 하드디스크뿐만 아니라 노무현이 개인 자금으로 구매한 e-지원 시스템 서버까지 반환하라고 요구했고, 노무현 측은 개인 재산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때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7조 5항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 및 전직 대통령이 지정한 대리인은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고, 그것이 비밀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을 출판하거나 언론매체에 공표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법률 내용에도 불구하고 외부로 반출하여 지정되지 않은 장소에 보관하는 것은 기록물의 관리 및 보안상 유출 우려가 있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법학자들의 다수 견해가 있었다.2008년 9월 18일 그는 건전한 토론 문화 조성을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에서 착안한 이름으로 체계적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민주주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2008년 10월 17일, 한국 정치학회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보수주의를 비판하였다. 2008년 10월 21일, 보수적 성향의 시민단체인 자유시민연대는 노무현을 국가보안법 및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노무현과 관련한 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은 훗날 2009년 10월 29일 노무현의 자살로 인하여 검찰에서 불기소 종결했다.뇌물 수수 혐의 검찰 수사.2007년 12월 이명박은 대통령 당선 직후,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피력하여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 가능성을 배제하였고, 복수의 정관계 관계자들은 이 시기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2008년 5월부터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와 광우병 괴담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국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되자 상황은 바뀌게 된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박 정부는 정황상 이 사태의 배후의 중심에 친노세력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2008년 7월 한상률 국세청장으로 하여금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주변의 측근들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하도록 하여, 전임자에 대한 방침을 급선회하였다.이후 노무현은 부인과 자녀 등이 노무현의 퇴임 후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2008년 10월 박연차가 정관계 인사 등에게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때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 의원이 로비 상대로 거론되었다. 2008년 12월 4일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은 세종증권 매각비리 의혹과 관련 농협의 인수 청탁과 함께 29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영장 실질 심사를 거쳐 구속 수감되었다.2008년 12월 5일, 자신의 친형인 노건평의 비리 사건에 대해 이라며 대국민 사과를 거부하였다.2009년 3월 26일,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윤재 전 비서관이 금품을 수수했다는 오보를 문화일보 등에서 보도하였다. 이때 노무현 게이트라는 말을 문화일보에서 처음으로 사용했고, 이로 말미암아 이호철 및 정윤재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그해 4월 7일, 노무현은 검찰이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을 체포하자 자신의 개인 공식 홈페이지에 부인 권양숙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아 사용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재했다. 그러나 사과문에 대해 한나라당 최고위원 박순자는 같은 날 기자 회견에서 라며 비판하였다.2009년 4월 9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박연차가 정상문 전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을 거쳐 10억여원을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에게 전달한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돈은 차용증이 포함되지 않았고, 박연차는 빌려준 것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검찰은 정상문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4월 10일 새벽 법원은 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2009년 4월 10일 오전 9시, 검찰은 박연차의 홍콩 비자금 500만 달러를 송금받은 혐의로 노무현의 조카사위인 연철호를 체포했다.2009년 4월 12일 뇌물 수수 관련 혐의로 그의 부인인 권양숙이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이때 문재인은 변호인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같은 날 아들 노건호가 소환 조사 받았다. 4월 19일 권양숙 여사가 빌려 썼다는 3억 원에 대해 ‘검찰이 거짓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권양숙 여사가 정상문 비서관에게 말해 박연차로부터 돈을 빌렸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12월 18일 정상문 유죄 판결문에서는 노무현이 3억 원을 빌렸다는 사실을 적시했다.2009년 4월 22일, 검찰이 노무현에게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와 관련된 서면 질의서 7장을 발송했다. 그에 대한 답변서를 4월 25일 노무현이 검찰에 전자 우편으로 먼저 제출했고, 검찰은 이것을 검토하였다.2009년 4월 30일 오전 8시 노무현은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출발, 오후 1시 20분 경 대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120호 특별조사실에서 오후 11시 20분 경까지 조사를 받았다. 노무현은 진술조서를 검토한 뒤 익일 오전 2시 10분쯤 청사를 나와 귀가했다. 노무현은 박연차로부터 2007년 6월 말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을 통해 100만 달러를 받고, 2008년 2월 말 조카사위 연철호를 통해 500만 달러를 받은 혐의를 받았다. 또한 검찰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횡령한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 5천만원에 대해 보고를 받았는지, 박연차의 명품 시계 선물과 15억원의 차용증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노무현의 조사는 주임검사인 우병우 중수1과장이 신문을 하였고, 직무관련성 부분은 김형욱 검사가, 100만달러 수수 혐의에 대해서는 이주형 검사가 조사했다. 또한 500만달러 수수 혐의와 특수활동비 12억 5000만원 수수 혐의에 대해서는 이선봉 검사가 조사했고, 이인규 중수부장과 홍만표 수사기획관은 조사 상황을 모니터로 지켜보며 실시간으로 지휘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자정까지 청사에 남아 수사 내용을 보고 받았으며, 노무현의 변호인 측은 문재인과 전해철 변호사가 번갈아 가며 변호했다. 수사팀은 오후 1시 40분 경부터 4시 10분까지 대통령의 직무와 권한, 박연차와의 관계에 대해 조사하였으며, 10분간 휴식한 뒤 박연차로부터 100만달러를 수수한 혐의에 대해 오후 6시 30분까지 조사를 진행했다. 저녁 식사 후 오후 7시35분부터 박연차로부터 500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 정상문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이 횡령한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천만원, 박연차가 노무현 측에게 선물한 명품시계 등에 대해 조사했다. 검찰은 박연차의 베트남 화력발전소 사업 등에 도움을 준 대가로 600만 달러를 받은 게 아니냐고 신문했으나, 노무현은 대통령이 한국 기업의 해외 사업에 도움을 준 게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무현은 2007년 박연차로부터 받은 100만 달러에 대해 채무를 갚는데 자신의 배우자 권양숙이 쓴 것이며, 대통령 재임 중 이같은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100만 달러의 구체적인 사용처에 대해서는 서면 답변과 마찬가지로 밝힐 수 없다고 진술했다. 2008년 500만 달러를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대통령 퇴임 후에 알게 된 사실이며, 호의적인 투자일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정상문이 횡령한 12억 5000만원에 대해서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노무현의 조사에 앞서 금융정보분석원에서 외화송금 거래 내역을 건네받아 2006∼2007년 권양숙이 다른 사람을 시켜 30만 달러 이상을 미국에 체류하던 장남 노건호와 딸 노정연에게 송금한 사실을 확인했다. 노무현은 기존 서면 답변과 같이 사실이 아니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했으나, 검찰이 확보한 금융정보분석원 자료 앞에서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노무현이 전반적으로 혐의를 부인함에 따라 검찰은 오후 11시경 노무현과 박연���의 대질 조사를 시도했으나, 노무현과 변호사 문재인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아니며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거부해 11시 20분 경 조사를 종료했다.2009년 5월 13일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이 노무현의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검찰에 진술하였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에 라고 진술했다고 확인했다. 2009년 5월 14일 노무현의 딸 노정연이 받은 40만 달러를 놓고 검찰과 노무현 측이 진실 공방을 벌였으며 검찰은 권양숙을 5월 16일 재소환하기로 했다.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이 자살함으로써 노무현에 대한 검찰 수사를 종료하였다.2009년 6월 12일, 검찰은 23일 박연차 사건과 관련하여 노무현을 조사하던 부분을 '공소권 없음' 처분을 하고, 관련된 수사를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에 관한 수사도 노무현의 장례가 마무리될 때까지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다.2009년 9월 9일 해운회사로부터 비자금과 관련해 세무 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거액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3심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9년 9월 17일 박연차가 여러 정치인에게 뇌물을 준 뇌물공여죄의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노무현 및 그 가족과 관련해서는 뇌물 수수 혐의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으나 기소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보수 언론은 라고 추정했다.2009년 12월 16일,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윤재 전 비서관이 금품을 수수했다는 문화일보의 기사 내용이 오보이므로 손해배상 및 정정 보도를 하라고 판결했다. 2009년 12월 18일,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 15억 원이나 관리하면서 박연차로부터 노무현이 3억 원이나 빌릴 때에도 그 돈을 내놓지 않고 차명 계좌에 은닉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을 국민은 없다"라고 판시하였다.2009년 12월 18일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상문의 재판 판결문에서 노무현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2010년 1월 8일 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관련자 가운데 다수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1월 14일 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노건평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3년 1월 11일 창원지검 결심공판에서 노건평은 변호사법 위반업무상 횡령 혐의로 징역 5년에 추징금 13억5000만원을 구형 받았다.2013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노정연에게 외화 100만 달러를 불법 송금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징역 4월과 집행유예 1년의 형을 선고했다.2013년 2월 20일 노무현이 자살한 것은 전날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됐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노무현재단에 의해 고소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2013년 3월 29일 외화 밀반출 혐의로 재판을 받아온 노정연이 항소를 취하해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항소가 취하됨에 따라 이 재판은 1심 선고인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이 확정됐다.2013년 9월 4일 노무현의 딸 노정연의 '13억원 불법송금' 사건에 연루된 재미교포 경연희가 1심에서 벌금 1500만원을 선고 받았다.검찰 수사에 대한 평가.검찰 수사가 형평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여론 조사에서도 검찰 책임론이 대두되었으나, 검찰은 원칙대로 수사하였을 뿐이라 주장하였다. 사망 이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는 말은 공공연해졌다. 또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말하여 보수 언론과 함께 검찰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박연차 태광그룹 회장으로부터 시작된 검찰 수사는 노무현의 일가와 주변 인물에만 집중됐다는 지적이 있다. 정상문 전 비서관 구속으로 이어졌고 대부분의 언론은 봉하 마을에 있는 노무현의 사저 앞에서 24시간 대기에 들어갔다. 노무현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라고 괴로운 심경을 드러냈다. 검찰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세무 조사 무마 청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 대해서는 혐의가 없어 수사 초기 단계에서 제외됐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번 검찰 수사는 2008년 7월 '태광실업 특별 세무 조사'에 대한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의 청와대 보고 후 시작됐다. 그리고 검찰이 수사 과정을 언론에 피의사실을 공표하여 피의 사실 공표 금지법을 검찰 스스로 위반하였으며 그 뒤 수사 과정에서 노무현 및 그 가족의 피의 사실 입증에 실패하자 스스로 '빨대' 논쟁을 일으키는 등의 무리수를 두었다는 지적이 있다. 검찰의 수사에 대한 비판은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나는 가장 큰 실수가 노 대통령에 대한 신병처리 결정을 빨리 하지 않은 거라고 본다. 구속 여부를 신속하게 했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이래저래 모욕감을 주는 행동을 한 셈"이라며 검찰을 비판했다.그러나 이는 노무현 측근들의 지속된 거짓 증언 및 증거 인멸로 의심되는 행위를 하는 등 노무현 측근들이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편에서는 그 물품 자체를 받은 사람이 노무현 부처가 아니라 노건평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이후 검찰 책임론이 거세지자 임채진 검찰총장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해 퇴임했고 이인규 대검찰청 중수부장도 사표를 내 퇴임했다.야당과 진보 성향의 시민 단체들은 검찰 수사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가했으며, 검찰 수사와 관련된 시국 선언도 줄을 이었다. 대검찰청 홈페이지에는 검찰을 비하하는 '떡검'이라는 표현이 넘치며,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공직자 부패 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보수 언론 및 시민단체에서는 전직 대통령이라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죄를 지으면 누구나 처벌받을 수 있다는 원칙을 다시 세움으로써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임을 재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노무현과 관련한 인물에 대해 그가 죽었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은 데 대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는 예전에 노건평과 남상국 사이에 벌어졌던 뇌물 수수 사건에서 남상국이 자살했음에도 노건평을 기소한 예 와도 모순이 된다는 의견도 있으며, 검찰이 노무현과 관련한 사항에서 유죄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소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이와 별개로 검찰은 노무현의 아내인 권양숙의 거짓 증언이 사법 방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근거로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하려 했으나 노무현의 자살에 따른 동정 여론으로 인해 기소조차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앞서의 남상국 예와 같이 과거에 자살한 사람에 대해 그 상대방을 기소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박연차와 권양숙이 관련된 자금에 대해서는 뇌물이 아닌 빌린 돈이라고 정상문 유죄 판결문에서 적시했다.2015년 1월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이인규는 그 당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한 진술은 국정원의 조작이었으며 피의사실을 과장하여 언론에 흘린 주체가 국정원이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이인규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검찰은 구속 수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국정원이 망신주기 여론전을 제안하였으며 이에 수사권 침해라며 검찰이 국정원 직원의 멱살까지 잡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인규는 그 당시 국정원의 행태는 공작 수준이었다고 주장했다.2009년 5월 23일 11시 양산 부산대학교 병원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의 직접 원인은 두부외상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공식 발표에 의하면 23일 8시 13분 경 인공호흡을 시행하며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센터로 이송됐다. "도착 당시 의식과 자발 호흡이 없었으며 심전도 모니터 상 박동이 없었다"라고 백승완 원장은 밝혔다. 백 원장은 "두개골 골절 등이 관찰됐으며 두부의 외상이 직접 사망원인으로 판단되고 늑골골절 척추골절 등 다발성 골절도 관찰됐다"라고 말했다.경남지방경찰청장은 고 설명했다. 노무현이 정확하게 언제 투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후 인터넷을 통해 일부 네티즌이 타살설과 유서 조작설 등 음모론을 언급하자 노무현의 유족과 측근은 이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경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전 8시50분께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사망 원인이 로 최종 확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전 6시 40분께 경호원과 함께 간단한 복장으로 사저 인근 뒷산으로 등산하던 중 10분 뒤 벼랑에 떨어져 크게 다쳤다. 노 전 대통령은 7시 인근 김해 세영 병원과 양산 부산대 병원(오전 8시10분)으로 호송됐으나 이미 상태가 다발성 골절로 소생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망했다. 경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을 실족사에 무게를 두고 조사했으나 집을 나설 당시 평소와 달리 권양숙 여사, 보좌관 등 측��에게 알리지 않고 경호원만을 대동한 점, 뒷산의 경사가 완만하다는 점 등을 종합해 투신 자살로 최종 공식 확인했다.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원인과 관련 유서를 남겼다고 밝힘에 따라 자살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문 전 실장은 기자들과 만나 라고 확인했다. 김경수 비서관도 노 전 대통령이 유서를 남겼다고 밝혔다.노무현이 5월 22일 검찰 소환 조사를 응하면서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결벽증에 가까운 정치적 자산이자 무기인 '도덕성'이 상처를 입고 검찰의 수사 내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인간적인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면서 이와 함께 노무현은 자신으로 인해 자신들의 참모와 가족들까지 고초를 당하고 있는 것이 대해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전직 대통령의 오욕과 비운의 역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가 반복되는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평도 있으며 '정치적 타살'이라는 비판도 있다.각계 반응 및 애도.이명박 대통령은 "참으로 믿기 어렵고 비통한 일"이라고 애도의 뜻을 표하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라고 지시했다. 정계나 학계, 시민단체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잇따라 공식 논평을 발표하고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서울에서는 네티즌과 시민들이 서울 도심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조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나의 오래된 친구"라며 "재임 기간에 중국과 한국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및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라고 밝혔다. 원자바오 총리는 애도하면서 노무현의 대(對)중국 관계의 중시, 노무현의 솔직함과 성실함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한중 관계의 전면적 발전 추진을 위해 기울인 공헌을 기억하겠다는 소회를 덧붙였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긴급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노무현 재임 기간에 한국과 미국 간의 '강력하고 활기찬'(strong and vital)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외상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청와대에 애도 조문을 보내어, "지난 2004년 노 전 대통령의 영국 공식 방문은 한·영 양국 관계 증진에 중요한 이정표였다"라고 전했다. 반기문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사망 관련 성명을 발표하고 애도의 뜻을 표명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촉진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노 전 대통령을 칭송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역시 애도의 뜻을 전했다.아래는 그가 투신 자살하기 전에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서 전문이다. 이 유서는 사저의 컴퓨터에 라며 평했다.그의 사망은 또한 '언론 책임론'을 불러 일으켰다. 검찰의 몰아붙이기식 수사도 문제였지만, 이를 "받아쓰기"하듯이 그대로 전달하거나, 한발 앞서 검찰 수사의 방향까지 제시한 언론 은 여론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에 언론의 책임이 크다"는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한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말하여 검찰과 함께 보수 언론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보수 신문은 "일부 세력은 신문과 방송이 노 전 대통령의 혐의를 중계하듯 보도해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갔다"라고 주장하지만 2009년 9월 17일 판결이 나오자 "이번 판결을 보더라도 노 전 대통령이 근거 없는 모함을 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또 "언론이 신속 정확한 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자신들을 비롯한 언론이 검찰의 모욕 주기 수사흘리기 수사를 받아쓰고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를 했던 것을 정당화했다.한겨레는 보수지의 노무현과 관련된 보도를 란 제목의 기사에선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때 진보 신문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노무현을 비판하고 희화화해 이전의 우호적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사망 전후 확연히 다른 보도 행태를 보였다며 고 비판했다.한겨레신문에서 조사한 여론 조사에서 누가 가장 큰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 라고 보도했다. 이에 빅뉴스는 한겨레 여론 조사는 응답 1순위에서 노 전 대통령 자신을 꼽은 응답이 가장 많았는데도 여론 조사 항목을 자의적으로 배치하고 1,2,3순위를 합산하여 결과를 왜곡했다며 비난했다.이렇듯 언론 책임론이 나오자 신문들은 즉각 보수·진보 양쪽으로 헤쳐 모여서 상대편의 책임이 더 크며, 상대편의 사망 전·후 보도 행태가 완전히 상반된다는 식의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노무현의 서거일 이틀 후인 2009년 5월 25일에 위원회가 결성된 뒤, 5월 29일까지 거행되었다. 당초 유족들은 가족장을 추진하였으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전 국민적인 추모열기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노무현의 영결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져 전국적으로 500만이 넘는 인파가 각지에 시민들이 마련한 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봉하 마을을 찾은 조문객의 수는 100만으로 사망 직후부터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총 301곳 이 설치되었다. 일주일간의 추도 기간 동안 인터넷 포털, 언론사, 기업의 로고는 검은색으로 바뀐 추도배너가 내걸렸고, 대다수의 방송사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이 결방 하였으며, 지지 세력들이 이웃처럼 느껴지던 서민 출신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자결에 충격과 슬픔과 정부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따른 분노가 함께 표출되었고, 여론 조사에서도 60%가 넘는 사람들이 이명박과 검찰의 책임이라고 응답하였다. 한편으로는 위법 행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자살을 택한 것에 대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며, 한나라당에서는 추모 열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덕수궁 앞 대한문 앞에 마련된 장례 기간 동안 시민 분향소에서는 2킬로미터가 넘는 장례 행렬이 밤새 이어졌다. 임시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일대에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시청 앞 서울 광장을 원천 봉쇄하여 전의경 버스가 시민들의 추모발길을 막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문행렬을 잠재적 폭력 시위대로 간주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정부는 "애석하고 비통하다"라고 조의를 표할 때와 말과 행동이 다르다며 진정성과 이중성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처럼 정부가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도 서울 광장과 청계 광장의 민간 분향소 설치를 막으면서 ‘과잉 통제’ 논란이 일었다. 정부와 경찰 측은 장례식 참석자들의 돌출 행동으로 인한 폭력 사태가 우려되어 부득이한 통제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노무현 수사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고 과잉 통제 논란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정 운영 지지율이 이명박이 집권한 이후 가장 낮은 20%대까지 폭락하였다.이날 영결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세계 150여 해외 공관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각국 주요 인사가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미국 백악관의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 보좌관과 성 김 대북 특사가 분향소가 차려진 주미 한국 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국 정부를 대표해 조문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 일본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분향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는 노무현의 사망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장례위원회에 보냈다.영결식은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시신은 봉하 마을에서 새벽 5시에 출발 5월 29일 오전 11시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가족 정부 종교단체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일본에서는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미국은 스티븐스 주한 대사를 단장으로 알렉스 아비주 국무성 동아태 부차관보 마이클 그린 국가 안보회의 선임보좌관 빅터차 전 NSC 보좌관이 영결식에 참석했다.빈소 및 분향소 설치.5월 23일 서거한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의 시신은 당일 오후 6시 30분 봉하마을 마을회관으로 옮겨져 빈소가 마련되었다. 임시 분향소에서 5월 23일 오후 10시부터 조문객을 맞았으며 이튿날 마을회관 앞 광장에 공식 분향소가 세워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뒤 곳곳에서 추모객이 몰려 들었으며 5월 29일 국민장 기간이 끝날 때까지 100만명 이상의 추모객이 봉하마을 분향소를 방문하였다.정부에서 세운 공식 분향소는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해 102개소에 마련되었으며 총 조문인원은 5월 29일 18시까지 98만 5331명에 달���였다.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분향소는 대한문 앞을 비롯해 알려진 것만 150여곳에 달하였다. 5월 29일 새벽까지 조문객은 500만여명에 달하였다.정부는 5월 23일 관계 국무위원 간담회를 개최해 국민장을 거행하기로 뜻을 모았고, 5월 24일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위원회의를 개최하여 국민장 거행을 의결하였다. 장의위원장은 관례에 따라 국무총리인 한승수가 선정되기로 하였으나 유가족 측이 공동위원장을 제의, 5월 25일 현직 국무총리 한승수와 전 국무총리 한명숙이 선정되었다. 장의위원은 전·현직 고위공무원, 사회지도층 인사, 유족이 추천한 친지 및 친분이 있는 인사 총 1,383명으로 구성되어 역대 최대 규모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5월 27일 국민장 영결식을 5월 29일 경복궁 흥례문 앞 뜰에서 거행하기로 공고하였다.한명숙 전 총리의 추도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가 영결식 동안 진행되었다.2009년 5월 29일 오전 많은 주민들과 지지자들의 애도 속에서 운구차량이 출발하였다. 주민들과 지지자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표하는 색깔인 노란 풍선과 종이 비행기를 운구차량에 날렸다. 주민들의 슬픔을 뒤로하고 고속도로를 5시간을 달려 경복궁 영결식장에 도착하였다.노무현의 시신은 당초 예정보다 약 2시간여 늦게 경기도 수원 연화장에 도착해 화장되었다. 화장 후 수습된 유골은 고향인 경남 김해 봉화산의 정토원에 49재가 끝나고 매장되기 전까지 안치되었다. 당초 작은 비석을 세워달라고 유언하였으며 한때 국립묘지 안장 여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바로 고인돌 형태의 묘소에 납골당 형태로 안장되었다.경찰의 분향소 강제 철거 논란.경찰은 덕수궁 분향소에 조문가는 일반 시민들이 촛불을 켜 들고 이동하는 것을 ' 시위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면서 제지하기도 하여 시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또한 한편 시민분향소 주변을 시청 앞 서울광장을 전경 및 의경 버스로 둘러 막아 이곳에서의 추모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문행렬을 잠재적 폭력시위대로 간주하여 시민들과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국민행동본부의 분향소 파괴와 영정 강탈.6월 24일 오전 5시 30~40분경 국민행동 본부 50여명이 비공식 분향소를 파괴 및 강제철거하고 영정사진을 강탈했다. 국민행동본부는 고엽제 전우회와 함께 분향소를 철거했다고 밝혔다. 서정갑 본부장은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불법 시설물을 치운 것이라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경찰이 이를 방치한 것은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시민분향소 운영진은 오전 10시 30분 기자회견을 열어 분향소 파괴 및 철거와 영정 강탈을 규탄했으며, 49재가 끝나는 날까지 분향소를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특별시 중구청은 직원 30여명을 동원해 오후 2시 20분부터 50여분간 파괴된 분향소 잔해를 철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시민 5명이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 8시 30분쯤 분향소 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 28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분향소 파괴 관련자를 수사하겠다고 밝히고 서정갑을 불구속 입건했다. 한편 분향소를 파괴한 애국기동단 측은 경찰의 조사를 받은 뒤 표창장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행동본부 등이 절도한 영정은 당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북핵도발 총궐기대회에서 서정갑의 연설도중 등장하였으며, 이후 영정은 택배편으로 봉하마을에 보내졌다. 서정갑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분향소 철거를 위해 사전답사를 하고 파트별 임무를 부여하는 등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2009년 9월 23일 이 출범했다.2009년 9월 24일 노무현의 생가가 복원과 함께 일반인에게 공개됐다.2009년 10월 1일 노무현의 회고록인 은 출간한 지 열흘 만에 베스트셀러로 판매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2009년 12월 2일 전국 7개 도시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에 대한 설문조사에 41.1%로 노무현이 1위를 기록했다. 서울 41.4%, 경기도 39.5%, 경상도 41.5%, 전라도 36.7%, 충청도 47.2%, 강원도 30%, 제주도 45%로 전국적으로 고른 인기를 얻었다. 또한 에는 12%로 2위를 기록했다. 2009년 12월 19일 중국의 반관영 통신사인 중국 신문사가 선정한 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2010년 5월 23일 노무현 사망 1주기를 맞아 광주, 대구, 대전, 창원, 인천, 대전, 충남 등 전국 각지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김제동이 사회를 보기도 했으며, 봉하마을에 7만명, 서울��도 2만 5천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또한 2010년 6월 2일에는 전국 지방선거가 있는 날인데 노무현 추모 열기로 인해 지지율 하락을 걱정하던 한나라당의 이른바 에는 는 내용이 공개되기도 하였다.노무현 묘소 배설물 투척 문제.2010년 11월 14일 오후 1시경 봉하마을 노무현 묘소에 인분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62세의 정모씨는 노무현 묘소에 인분을 투척하고 유인물 22장을 살포하였는데 그가 뿌린 유인물은 노무현 그대 무덤에 똥물을 부으며고 주장했다.2016년 7월 21일에도 노무현 묘소에 소변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41세의 최모씨는 노무현 묘역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 게 무엇이 있느냐"며 500ml 페트병 2통에 담긴 소변을 너럭바위 위로 뿌리고, 묘역에서 경비를 서던 의무경찰이 제지를 하자 들고 있던 페트병으로 의경을 폭행하였다. 경찰은 최씨를 재물손괴, 사체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하였다. 계속되는 배설물 투척 사건에 대해 묘역을 관리하는 노무현재단 측은 경비와 시설 강화는 노무현 생전의 뜻과 배치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토로하였다.1980년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의 정치 인생은 원칙을 굽히지 않으면서 권위주의와 지역주의 정치 타파를 위해 애쓴 노력의 연속이었다. 재임 중에는 대연정 제안과 사법 개혁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와 권위주의를 탈피하려고 애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지지 정당으로부터도 비판받으면서 원칙과 소신에 입각해서 당정 분리라는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있다.하지만 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 이 양립하고 있다. 이런 파병결정에 대해 훗날 문재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대북 제한폭격을 거론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파병을 했다고 털어놓았다.2010년 9월에 시행된 묻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올랐다. 전체 지지율은 25.3%로 나타났으며 특히 20~30대 젊은층과 화이트칼라 직종 대학재학 이상의 고학력층에서는 박정희를 능가하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법치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노무현은 대통령 취임 뒤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를 없앴고 사법 고시 23회인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사법부에 뿌리 깊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 2003년 구태의연한 대법관 선발 관행에 제동을 걸었고 사법 사상 최초로 여성 헌법재판관과 서열을 무시한 여성 대법관을 탄생시켰다. 또 사법 개혁 위원회를 통해 법조 일원화 국민의 사법 참여 등의 사법부 개혁을 위한 밑거름을 쌓았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의전 등으로 문제가 되던 법원들의 재판 사무 감사가 2006년 폐지된 이유가 김영란 대법관이 기수를 파괴하며 올라갔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언론인 강준식은 "선거공영제를 확대하여 돈이 들지 않는 선거제를 확립한 것이라든지 부작용은 있었지만 시민단체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유도한 것이라든지 시장 개입을 없앰으로써 정경유착의 고리를 상당 부분 끊은 것이라든지 인권을 신장시킨 것이라든지 권위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했지만 권위주의를 청산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 등은 다 그의 공이다."라고 말했다.해양수산부 장관 출신으로 연안 어족자원 복원에 노력했다.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저인망식 불법어로를 근절하기 위해 촘촘한 그물을 제조하는 업체에 영업정지를 가하는 등 강경책을 사용했으며 연안에 인공 어초를 대량 투입하는 등의 대책을 시행하였다.문민정부 출범 이후로 군생활을 제대로 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대접을 받았다. 참여정부 당시에 김대중은 해안경비대 대원으로 군생활을 하였다고 알려졌었고 학도병 김영삼의 이야기는 전혀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최전방에서 초병 근무를 하였다는 진지가 '노무현 벙커'로 명명이 되었다고 유명해지며 그 진지에서 근무를 서며 자랑스러워하는 초병들이 언론에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UN 평화유지군으로 지속적인 해외 파병은 있었으나 미군에 항구적 자유 작전과 관련하여 이라크전이 발발함에 따라 추가적으로 자이툰부대의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었다. 파병 동의 기간에는 국회에서 전투병 파병이냐 비전투병 파병이냐는 뜨거운 논란이 있었다. UN군이 아닌 국군으로서 해외 파병을 군사 정권이 아닌 행정부에서 최초로 결정한 수장이 되었다.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 이 양립하고 있다. 이런 파병결정에 대해 훗날 문재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대북 제한폭격을 거론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파병을 했다고 털어놓았다.그는 스스로 지역주의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주류의 그늘에서 벗어나 개혁 정당인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국회에서의 그는 자신의 지지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과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같은 기존 정치 세력과의 타협이 부족해 다수당의 횡포로 탄핵 사태에 이르러 정치적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국회의원 김경재는 그의 정치력 자체를 의심하였다. 2004년 김경재는 노무현을 가리켜 어떻게 현충일에 일본에 가서 '김구(金九) 선생은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측근 · 친인척 비리 논란.노무현은 대선 당시 깨끗한 정치, 낡은 정치 타파를 기치로 내걸어 집권에 성공했으며, 재임 중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도덕성을 강조했다. 참여정부가 내건 제일의 기치 또한 도덕성이었다. 그러나 친형인 노건평을 비롯하여 안희정, 이광재 등의 측근 비리에 연루되었다. 항상 도덕성을 토대로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하던 노무현이었지만 측근과 친인척의 비리를 막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이러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취임 첫 해부터 대선 자금 문제로 안희정, 최도술 등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는 상황에 몰리지만 특유의 공세적 대응으로 불법 대선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밖에 2004년 3월에는 전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에게서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형 노건평이 불구속 기소되자 기자 회견을 열어 라고 형을 두둔하였고, 이 발언 이후 남 전 사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또한 변양균-신정아 의혹이 터졌을 때는 "요즘 깜도 안 되는 의혹들이 많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참여정부의 도덕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 상대를 비난하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결국 2007년 11월 "대통령 취임 후 새살림을 꾸리려고 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 마지막 청소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는 설거지 정부"라고 평가하면서 참여정부 시절 불거나온 비리 의혹들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국회의원 이종걸은 고 밝히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증(愛憎)을 피력했다.그는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민정수석도 구속됐다"면서 "법의 형평성 차원에서, 임채진 검찰총장 입장에서 본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속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포괄적 뇌물죄 적용과 관련, "돈의 액수가 적다는 게 문제는 안 된다. 대통령 위치에서도 돈을 받았다면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까지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김지태와 인연 논란.노무현은 60년 김해 진영중학교 2학년 재학중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 김지태가 설립한 부일장학�� 시험에 합격해 1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상고에 입학해서도 동문회장인 김지태가 교내에 만든 에서 이 과정을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또한 1984년엔 김지태 회장의 유족들이 부탁한 117억원 짜리 상속세 소송을 맡아 전액을 취소 시키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바 있으며 그는 착수금 2000만원 승소 사례금 4000만원을 포함 총 6000만원을 김지태 유족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정수장학회 논란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22일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노무현과 부일장학회의 원소유자인 김지태와의 이와 같은 인연을 들어 논란을 촉발 시켰다. 이정현은 "김지태씨는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데 민주당이 언제부터 그런 의혹이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됐냐"라고 말했다. 같은날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이정현의 발언을 비판하며 "민주당이 '왜 강압과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재산을 강탈하고 그 위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냐'고 묻자 느닷없이 새누리당 이 단장이 '너도 한패냐'고 윽박지르고 나섰다"라고 말했다.실패한 부동산 정책.참여정부 5년간 가장 실패한 정책으로 부동산 정책이 꼽힌다. 참여정부 시절 전국 미분양 주택은 2003년 3월 2만 3000여 가구에 불과했 것이 참여정부 말기 2007년 12월 11만여 가구로 약 4.7배 이상 증가하였다. 또한 참여정부 5년 동안 신도시 집값은 56% 상승했으며 전국 집값은 36%나 상승했다.참여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시장의 해법을 경제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소득 계층간 갈등구조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서울 강남권 등 일부 부유층을 향해 반 시장적 규제를 가했고 이는 결국 주변집값마저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전국토의 난개발로 인해 토지가격 급등과 저금리 기조에 따른 과잉 유동성에 대한 대처 등 부동산시장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수요가 몰리는 곳에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이 아닌 단순히 투기적 수요를 근절해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는 수요측면에서만 접근함으로써 불씨를 키웠다. 정상적인 수요도 투기로 간주해 수요를 차단시켰고 공급은 지나친 가격 규제를 도입해 공급을 더욱 줄어들게 만들었다.빈부 격차 및 소득 양극화 심화.노무현 정부 때는 임기 내내 소득 분배가 악화됐다. 지니계수는 2002년 0.293에서 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0.283으로 낮아졌다가 이후 2004년 0.293 2005년 0.298 2006년 0.305 2007년 0.316으로 올랐다. 반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0.319에서 2009년 0.320으로 올랐으나 2010년 0.315 2011년 0.313 2012년 0.310으로 내려 소득 분배가 소폭이지만 개선됐다. 박근혜 정부에선 2013년 0.307 2014년 0.308 2015년 0.305로 비슷했다.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했던 참여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증가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었고 참여정부보다 성장을 강조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감소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개선되는 모습이 나타났다.2018년 8월 23일 통계청이 발표한 2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무현정부에서의 1분위 가구 연평균 소득성장률은 4.0%였으며 5분위 가구는 5.0%를 기록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보수정권으로 분류되는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는 오히려 1분위 가구의 소득성장률이 높게 나타났다. 이명박정부에서 1분위 가구의 가계소득은 연평균 6.6%나 오른 반면 5분위 가구 성장률은 4.6%에 그쳤다. 박근혜정부는 1분위 가구가 2.5% 5분위 가구는 2.0%의 성장률을 보였다. 보수 정권기에는 소득 5분위 배율과 지니계수가 개선되었으나 진보 정권기에는 도리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소득주도성장은 이번 2분기 가계소득 통계를 통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평가된다. 그동안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취약계층의 소득을 올려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지난 1분기에 이어 이번 2분기에도 저소득층의 소득이 절대적으로는 물론 상대적으로도 큰 폭으로 감소한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2003년 7.23배였던 소득 5분위 배율은 해마다 증가해 2006년 7.64배까지 벌어졌고 지니계수는 2003년 0.341에서 2006년 0.351로 증가해 소득 불평등이 심화됐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상위 20% 소득을 하위 20% 소득으로 나눈 값이고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고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함을 나타낸다. 양극화를 해소할 참여정부의 정책이 없었다는 비판이 있으며 관료들이 주도한 정책은 양극화를 더 심화시켰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유종일 한국개발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에 이라는 성장우선주의 담론을 내걸었고 집권하자마자 법인세 인하 조치를 취했다고 비판했다.2003년 4월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의 논쟁이 뜨거웠다. 토론회 집회 등에 여러 가지 양상으로 도입 반대 의견들이 쏟아졌다. 결국 출결 성적만 관리하는 형태인 호주의 경우와 달리 모든 업무를 관리하는 초기 설계로 관철 되었다. 반대측에 우려대로 운영 초기 시스템 부하 문제 등이 발생하였으나 일선 교사들은 전산화로 업무가 편해졌다고 찬사를 보낸다. 산간 벽지에 폐교 위기의 학교가 아닌 부촌에 사립 학교 조차 IoT Cloud 등을 도입하여 전산 시스템을 증설하기 힘든 결함이 존재한다.황우석 사건에서의 태도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5년 11월 2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라는 말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비판이 있다.이후 2006년 12월 28일에는 황우석 사건을 통해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같은 해 1월에 물러난 박기영 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으로 발탁되었는데, 라고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한편 2007년 12월 노동운동계에서는 노무현 정권에서 구속되거나 희생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권의 두 배라며 비판하였다. 일부 노동단체는 노무현 정권에게 인권을 유린당했다고 주장하였으며 20여 명의 구속 노동자가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한 일도 있었다. 단식 농성에 참여한 구속 노동자들은 관련 싸움을 진행했던 포항건설 노조의 9명 타워크레인 노동자 5명 뉴코아-이랜드 관련 2명 비정규직 철폐와 한미 FTA 반대 집회에서 연행 구속된 3명 노사관계 로드맵 야합에 반대하며 한국노총 점거 농성을 진행한 2명의 노동자 등이다. 언론에서는 이렇게 많은 수가 감옥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한 것은 독재 타도를 외치던 80년대 이후 처음이라는 주장도 나왔다.한편 언론지 '참세상'의 조사에 따르면 구속 노동자 후원회가 집계한 2007년 11월 30일 당시 구속 노동자는 총계 62명으로 집계하였으며 노무현 정권에만 1천 37명의 노동자가 구속된 바 있다고 주장했다. 그중 2007년 11월에만 17명이 구속되었다. 이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는 김영삼 정권 때 632명보다 두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구속 노동자들은 그 외에 "강제 구금당한 이주 노동자의 수는 너무 많아서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노무현은 2003년 6월의 일본 방문에서 한 로 규정하였다.2004년 한일정상회담 직후에는 한나라당 이상배 정책위의장이 그의 외교를 라고 비판하자 청와대와 민주당이 강력 반발, 국회 본회의를 거부하는 등 여야가 정면 충돌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국회 의사 진행이 중단되는 등의 파행이 벌어지기도 했다.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면서 NLL에 대한 새로운 합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설명했다고 한다.이에 송대성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노무현의 민주평통 NLL발언에 대해 "어떻게 국군통수권자로서 농담처럼 NLL문제를 얘기할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영토문제에 대해 통수권자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북측은 NLL이 일방적으로 그어졌다고 주장하면서도 70년대 중반까지 실제적인 영토선으로 준수해왔으나 대북햇볕정책이 실시되면서부터 북한이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을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말했다. 이어 "NLL이 무너질 경우 수도권 방어가 어렵고 국익과 안보에 위해가 올 것이기 때문에 NLL 준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데 대통령은 국민들보다도 안보의식이 해이한 것 같다"면서 "노 대통령이 임기말 대북관계에서 억지 성과를 내려는 데 집착해 누가 봐도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한 망언들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이렇게 보수적인 색채를 띄는 사람들이 NLL(북방한계선)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영토선적인 인식을 가지고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지만 이런 문제는 김영삼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한 발언을 볼 때 단순히 '트집잡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건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한편 대북低(저)자세 외교라는 비판과 함께 민간 차원의 북한 반대 운동을 탄압하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민간단체의 인공기 소각 퍼포먼스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북한에 사과한 것에 대해서도 대북 굴종 외교 논란이 있다.이런 태도에 대하여 반론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헌법 제66조 제3항)를 다하여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 대북 적대를 하여 괜히 국익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남북관계개선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는 남북신뢰를 다지기 위한 전략적 발언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결과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진보적 가치 실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등등을 노무현 정신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노무현 정신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보 노무현의 삶처럼 사람 냄새 나는 삶의 실현이었던 듯하다. 로 말하고 서민의 몸짓으로 행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행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도 많았고 그로 인해 안티도 많았다. 이 모든 해프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도 털어내지 못한 서민적 언행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민적 풍모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낙향해 살면서 보여준 봉하마을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2011년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노무현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는 노무현을 고 평가했다.2010년 10월, 30여개 분야 전문가 1,500여명을 대상으로 시행된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11.1%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으로 꼽았다.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또한 정치, 통일, 국제, 외교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이어 12월 4일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정치발전에 대한 긍정 평가가 67.9%에 달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남북 화해 부분에서는 80% 이상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2011년 5월 12일에 더 좋은 민주주의 연구소가 리서치뷰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시 대선에 출마할 경우 다시 뽑겠다는 응답이 47.4%로 나타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또한 전현직 대통령들 중 가장 호감 가는 인물을 묻는 단순 호감도 조사에서도 30.3%로, 31.9%를 기록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신행정 수도이전 공약 논란.2002년 12월 11일 당시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이날 인천을 방문해 유세를 하면서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 공약을 내세웠다.당시 그의 이같은 발언을 두고 대전일보는 다음날 1면 머릿기사로 대서특필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노 후보는 이날 인천 유세에서 정치 행정은 충청권으로 분산시키고 경제금융비즈니스는 수도권에 남는다"면서 "돈 되는 것은 여기서하고 돈 안되고 시끄럽고 싸움하는 것은 충청권으로 보내자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샀다"고 보도했다.2006년 1월 18일 그는 2006년도 대국민 신년연설을 통해 한미 FTA 협상 의지를 발표 하였다. 2월 3일 당시 미국시각으로는 2월 2일 그는 미국으로 간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을 통해 미국 의회에서 협상 출범을 선언했다.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에 재임 중인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타결되었다.6월 5일부터 6월 9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협상이 개최되었다.2006년부터 그는 한미 FTA 추진을 강행한다. 그러나 한미 FTA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허세욱은 결국 협상이 타결 직전에 이르러 가자 2007년 4월 1일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 호텔 정문 부근에서 분신하였다. 그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실려 가면서까지 한미FTA 중단과 노무현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4월 3일 민주노동당은 지역위원회별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고 언론에 밝혔고, 4월 4일 참여연대 등도 며 성금 모금 활동이 있었다. 참여연대 게시판 등에도 많은 네티즌들의 격려와 후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망하면서 모두가 비정규직이니 모금성금은 하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2007년 3월 8일부터 3월 12일 한미 FTA 8차 협상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협상은 1개월만에 체결된다.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최종 타결된다. 그러나 6월 16일 미국 측에서 노동 환경 등 7개 분야 수정안 제의하여 6월 21일부터 6월 22일 FTA 추가협상 1차 협상을 개최하여 6월 29일 추가협상도 최종타결되었다.한편 분신자살기도로 입원중인 허세욱을 문병왔다가 허세욱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은 경제학자이자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경제비서관 출신정태인은 그의 뜻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정태인은 이후 노무현 정부와 결별했고 더불어 그의 30년 친구인 유시민 등과도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이후 정태인은 진보신당에 입당하였다.남상국 실명 언급 논란.2003년 그의 둘째 형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과 관련 언론에 출연하여 남상국의 실명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있다. 노무현의 남상국 비난 발언은 언론을 통해 공식 보도되었다. 이 사건 직후 남상국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 13일만에 시신이 발견되었다.사돈 배병렬의 권력형 비리 의혹.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돈인 배병렬 전 NH-CA자산운용 상임감사가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2005년 자신의 삼촌이 회장으로 있던 회사가 농협에서 수십억원대의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개입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경남 김해시 소재 농협 내외동지점 부지점장을 역임한 김모 씨 주장에 따르면, 배씨는 자신의 삼촌 배OO이 회장으로 일하던 T개발이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농협 대출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자 농협 김해 내외동지점과 심사를 맡은 농협중앙회 등에 압력을 행사해 대출이 가능토록 했다. 김 전 부지점장은 당시 대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배 전 감사를 만났고 압력에 가까운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당시 T개발에 대한 대출이 문제가 있었음은 이 대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농협 인사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김구에 대한 관점 논란.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그러나 언론들 사이에서는 노무현이 고 분개했다.김근태는 그가 외교 문제에서 실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는 것이다.그러나 노무현의 발언을 지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정치인 김구선생이 바르게 평가돼야'라는 글을 게시한 네티즌은 "외세의 힘에 의해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야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백범 김구선생의 중립적인 민족주의 국가는 어디에 세워야하고 국민은 어떻게 김구를 선택하고 어떻게 따라야했던가"라며 정치 지도자로서 김구 선생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티즌은 "결국 김구는 훌륭한 인격자이자 지도자이지만 남에도 북에도 설자리가 없었던 비운의 지도자였고 우리 국민은 훌륭한 지도자 김구를 두고 북에서는 공산주의를 따라갔고 남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따라갔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강조했다. 성균관대 교수 김삼웅은 "일왕이나 수상과 공식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은 존경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다는 발언 하나 가지고 왈가불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더 이상의 코멘트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발언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비판거리의 하나로 활용되었다.다케시마 발언 논란.2004년 7월 한일 정상회담 당시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라며 부르는 호칭인 다케시마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7월 21일 한.일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 과정에 일본 기자의 질문에 다케시마(竹島)이나 일본 언론들이 이를 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고 야당도 이를 문제삼고 나와 논란이 되었다.노무현의 다케시마 발언은 곧 일본 언론들에게도 보도되었다. 지지통신은 "영토와 역사문제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일본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무심코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눈살을 찌푸리는 한국인 기자도 있었다"고 비꼬았다. 그의 다케시마 발언을 일본 극우 인사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다케시마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북방한계선 포기 논란.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상 북방한계선을 포기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새누리당 서상기, 정문헌 의원이 주장하여 논란이 일었다. 당시 공세를 주도했던 윤상현 새누리당 의���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 포기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훗날 밝혔다.노무현이 3당 합당을 거부하고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된 직후인 1991년 10월 조선일보는 주간조선 보도를 통해 이력과 재산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 정치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에 나서 승소했다. 국민의 정부 때 해양수산부 장관으로서 언론사 세무조사를 앞장서 지지하고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에 공개 찬성했다. 보수 언론과의 적대적 관계가 고착화되기 시작했다.처음 '이인제 대세론'에 묻혀 있다가 2002년 3월 16일 광주 지역 경선부터 본격적인 노풍을 일으켰고 언론들은 이 현상을 신기한 듯 부쩍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 바람에 심상치 않은 무게가 실리자 보수 언론의 견제가 본격화됐다. 대선 당일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라며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라고 방점을 찍은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대권을 잡은 이후에는 집권 1년 만에 보수 언론의 포화 속에 헌정 사상 유례없는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탄핵 반대 촛불 여론으로 권좌를 되찾은 후에도 보수 언론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으며, 여기에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협정 추진, 대연정 구상 등으로 인해 진보 언론도 노무현에게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임기 말에는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기자실 폐쇄로 이어지면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은 모든 언론이 비판을 퍼부었다.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진보 언론마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언론들은 검찰발로 노무현의 가족과 관련된 비리를 낱낱이 보도하며 노무현을 부도덕과 비리의 몸통인 양 매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사망으로 노무현의 생애가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면서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들이 등장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언론과의 관계가 가장 순탄치 않았던 정치인으로 평가되었다.1986년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 당감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의 종교란에는 무교로 쓴다고 밝힌 적이 있다.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6월 20일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이던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노무현이 먼저 신앙 문제를 화제로 꺼냈다. 노무현은 라고 고백했다.이에 김수환은 고 대답했다.노무현은 자택 옆에 있던 정토원이라는 사찰에서 사시 공부를 하였다. 이후에는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에 머무르면서 사시를 준비했으며 틈틈이 불교 경전을 탐독했다. 9년간 사시 공부를 하여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소 불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아내 권양숙은 2002년 10월 1일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받은 법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세 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은 아내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지키게 못하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또한 노무현은 2005년 8월 30일에 T-50 골든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목조 불상인 쌍둥이 비로자나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2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고 해인사 대비로전 건립에 30여억 원의 국고 지원을 즉석에서 약속했다. 2007년 11월 24일 해인사 대비로전 낙성 대법회에 참석하면서 축사를 하였는데 3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다.2009년 5월 23일에 과거 사시 공부를 했던 정토원의 법당에 모셔진 부모와 장인의 위패에 예를 표한 뒤 그 옆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봉하마을 뒤편 봉화산에 자리 잡은 정토원은 그가 투신한 부엉이 바위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한 사찰이다.2009년 5월 24일 해인사의 승려 300여 명이 분향소를 찾아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했다.노무현은 청와대 온라인 행정업무 처리 표준화 시스템인 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e지원으로 인해 행정관이나 비서관의 업무 기안이 온라인에서 이뤄지고 대통령을 비롯해 간부들은 실시간으로 추진 중인 업무에 대해 댓글로 지시, 보완하고 결재까지 해서 간소화되었다. 노무현은 임기 후 e지원의 복사본을 제작해 봉하 마을에 설치하였는데, 국가정보 보안과 관련하여 문제가 제기되었고, 복사본을 제작하여 사유하는 것에 대하여 법적 근거가 없다는 법제처의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차후 국가기록원에 반납 처리되었다.사법 시험 준비생 시절 그는 도 발명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했다. 퇴임 후에는 인터넷 토론 사이트 을 개설했다.'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은 노무현의 개인 홈페이지이며, 줄여서 '사람사는 세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9년 5월 홈페이지 개편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다가 5월 23일에 노무현이 사망하자 개편알림 내용을 추모 이미지로 깔아놓기도 했다. 청와대로 연결되는 주소 "맞습니다 맞고요", "맞습니다", "맞고요"는 넷피아에 의해 넘어가기도 했었다. 한명숙이 서울본부 이사장, 권양숙이 경남본부 이사장이며, 경남본부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있으며, 서울본부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해 있다.일베저장소와 디시인사이드 합성 갤러리의 합성 및 비하.격식 없는 그의 발언이 인기를 끌면서 일베와 합필갤 이용자들은 그의 사진과 동영상을 합성하여 비하하고 희화화하였다. 노무현 사후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합필갤에서 자살 장면과 운지버섯 자양강장제 광고를 합성한 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추락을 뜻하는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일베저장소에서 노무현을 교묘하게 합성한 사진이 사진 검색 결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탓에 공식적인 곳에 실수로 사용되어 관련자들이 물의를 빚는 일이 잦다. 노무현은 여전히 일베저장소에서 폄하되고 있다. +수론에서 곱셈적 함수(-的函數 ) 또는 곱산술 함수(-算術函數)는 서로소인 두 정수의 곱셈을 보존하는 수론적 함수이다.함수 formula_1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곱셈적 함수라고 한다.함수 formula_1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완전 곱셈적 함수라고 한다. 곱셈적 함수의 정의역은 formula_8의 곱셈에 대하여 닫혀있는 부분 집합일 수도 있다.곱셈적 함수 formula_1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함수들 역시 곱셈적 함수이다.곱셈적 함수 formula_1에 대하여 만약 formula_13의 소인수 분해가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만약 추가로 formula_16가 완전 곱셈적 함수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즉 곱셈적 함수는 소수의 거듭제곱의 상에 의하여 결정되며 완전 곱셈적 함수는 소수의 상에 의하여 결정된다.곱셈적 함수 formula_18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항등식이 성립한다.여기서 formula_23는 뫼비우스 함수이다.곱셈적 함수 formula_24의 정의역 formula_25이 formula_26를 만족한다면,곱셈적 함수는 디리클레 합성곱에 대하여 아벨 군을 이룬다. 즉 곱셈적 함수 formula_18의 디리클레 합성곱은 곱셈적 함수이다.곱셈적 함수 formula_1에 대하여, 만약 formula_13의 소인수 분해가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만약 추가로 formula_16가 완전 곱셈적 함수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다음과 같은 수론적 함수들은 완전 곱셈적 함수이다.다음과 같은 수론적 함수들은 곱셈적 함수이나 완전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양의 정수를 두 정수의 제곱의 합으로 나타내는 방법의 가짓수를 구하는 함수는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 예를 들어, 1을 제곱수로 나타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4가지가 있다.는 formula_46이 어떤 소수 formula_48의 양의 정수 제곱일 경우 formula_75를, 소수의 거듭제곱이 아닐 경우 0을 값으로 취한다.이므로 이는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수학에서, 체비쇼프 다항식은 삼각 함수의 항등식에 등장하는 직교 다항식열이다.실수 formula_1차 다항식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네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formula_5을 formula_1차 체비쇼프 다항식이라고 한다.드무아브르의 공식의 실수부를 비교하면 formula_17가 formula_18의 formula_1차 다항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변의 실수부는 formula_17 우변의 ���수부는 formula_18와 formula_22의 다항식이다.체비쇼프 다항식들은 다음의 무게 함수에 대해 구간 formula_14에서 직교한다.즉, 다음이 성립한다.짝수 차수의 체비쇼프 다항식은 짝함수이며 홀수 차수의 체비쇼프 다항식은 홀함수이다.formula_1차 체비쇼프 다항식 formula_5은 닫힌구간 formula_14 속에서 formula_1개의 서로 다른 근을 가지며 이들은 다음과 같다.체비쇼프 다항식을 복소수 함수로 여길 때, formula_33의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의 경우 이는 분지 지표 2의 두 분지점 formula_39를 가지며 그 값은 formula_40 및 formula_41이다. 마찬가지로의 경우 분지 지표 2의 두 분지점 formula_43 및 분지 지표 3의 분지점 formula_44를 가지며 그 값은 각각 formula_45 및 formula_46이다.이에 따라 formula_32는 벨리 사상을 이루며 이에 대응하는 데생당팡은 formula_15개의 꼭짓점을 갖는 선형 그래프이다.낮은 차수의 체비쇼프 다항식들은 다음과 같다.파프누티 체비쇼프가 1854년에 도입하였다.체비쇼프 다항식의 통상적인 기호 T는 체비쇼프의 이름의 프랑스어 표기 또는 독일어 표기 에서 딴 것이다. +파이의 날은 원주율을 기념하는 날이다. 파이의 날은 원주율의 근삿값이 3.14이어서 3월 14일에 치러진다. 보통 3.14159에 맞추기 위해 오후 1시 59분에 기념하는데, 오후 1시 59분은 엄밀히 말하면 13시 59분이기 때문에 오전 1시 59분 혹은 15시 9분에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 각국의 수학과에서 기념행사를 연다.3월 14일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생일이면서 스티븐 호킹의 기일이기도 하다. 이 날은 여러 방법으로 기념된다. 사람들이 모여서 원주율이 생활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야기하고 원주율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모임에서는 보통 파이를 먹는다. 또한 많은 행사에서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의 숫자를 얼마나 많이 외우는지 겨루는 대회가 열린다.분수 3과 7분의 1을 가분수로 나타내면 7분의 22가 되는데 이를 무한소수로 나타내면 3.142857...로 의 근삿값이 되므로 7월 22일을 파이 근삿값 날로 부르기도 한다.기하학에서 코사인 법칙(cosine法則 )은 삼각형의 세 변과 한 각의 코사인 사이에 성립하는 정리이다. 이에 따르면 삼각형의 두 변의 제곱합에서 사잇각의 코사인과 그 두 변의 곱의 2배를 빼면 남은 변의 제곱과 같아진다. 삼각형의 두 변의 직각 삼각형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일반화이다. 코사인 법칙은 삼각형의 두 변과 그 사잇각을 알 때 남은 한 변을 구하거나 세 변을 알 때 세 각을 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삼각형 formula_1의 세 각 formula_2가 마주하는 변이 각각 formula_3라고 하면 다음이 성립한다.여기서 formula_5은 삼각 함수의 하나인 코사인이다. 이를 코사인 법칙이라고 한다.코사인 법칙을 통해 삼각형의 두 변과 그 사잇각으로부터 제3의 변을 구할 수 있다. 또한 삼각형의 세 변으로부터 세 각을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코사인 법칙에서 formula_7가 직각일 경우, formula_8이므로, 다음과 같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얻는다.유클리드의 2권 명제12 및 명제 13은 코사인 법칙과 동치인 명제를 서술한다.레기오몬타누스는 1462~3년에 작성한 에서 제2 구면 코사인 법칙을 제시하였다.유클리드의 에서의 증명.그림과 같이, formula_7를 둔각으로 하는 둔각 삼각형 formula_1의 높이선 formula_12를 긋자. 그렇다면, formula_13는 formula_14를 직각으로 하는 직각 삼각형이므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또한 formula_16이므로 다음이 성립한다.마지막 두 항을 직각 삼각형 formula_18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 정리하면 다음을 얻는다.이로써 유클리드의 2권 명제12가 증명된다. 코사인의 정의에 따라이 formula_7가 둔각일 경우 성립함을 알 수 있다. formula_7가 예각일 경우의 증명은 이와 비슷하다.삼각법을 통한 증명.삼각형의 세 변을 각각 높이선으로 안에서 또는 밖에서 나누면 다음을 얻는다.세 등식의 양변에 각각 formula_3를 곱하면 다음을 얻는다.이제 첫째 등식에 둘째 등식을 더한 뒤 셋째 등식을 빼면 다음을 얻는다.이로써 코사인 법칙이 증명된다.벡터와 스칼라곱을 사용한 증명.다음과 같은 세 벡터를 정의하자.그렇다면, 벡터 formula_33의 길이는 각각 formula_3이며, 벡터 formula_35와 formula_36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이다. 따라서, 코사인 법칙을 벡터의 스칼라곱의 성질에 따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경우.단위 구면 위의 구면 삼각형 formula_1의 세 각 formula_2가 마주하는 세 변이 각각 formula_3라고 하면, 다음이 성립한다.여기서 formula_43은 각각 코사인 사인이다. 이를 구면 코사인 법칙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쌍대 명제는 다음과 같다.이를 제2 구면 코사인 법칙이라고 한다.이 둘은 각각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의 증명 .다음과 같은 벡터들을 정의하자.즉, formula_48는 각각 formula_7에서 formula_50를 향하는 구면의 단위 접벡터이다. 그렇다면, formula_48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이다. 또한, formula_53는 각각 평면 formula_54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루므로, formula_55를 각각 다음과 같이 분해할 수 있다.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의 증명 (비네-코시 항등식 사용).단위 구면의 중심을 formula_59라고 하자. 또한, 다음과 같은 세 벡터를 정의하자.그렇다면 formula_33의 길이는 모두 1이며 formula_62 사이의 각도는 formula_63이며 formula_64 사이의 각도는 formula_65이며 formula_66 사이의 각도는 formula_67이다. 따라서 벡터곱 formula_68 formula_69 formula_70의 길이는 각각 formula_71 formula_72 formula_73이다. 또한 formula_68와 formula_69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6이며 formula_77와 formula_70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9이며 formula_80와 formula_81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이다. 이제 비네-코시 항등식에 따라 다음이 성립함에 주의하자.여기에 위의 결과들을 대입하면 다음을 얻는다.이로써 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이 증명된다.제2 구면 코사인 법칙의 증명.구면 삼각형 formula_1의 극삼각형을 formula_86라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이 성립한다.따라서 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을 극삼각형 formula_86에 적용하면, 구면 삼각형 formula_1에 대한 제2 구면 코사인 법칙을 얻는다.가우스 곡률 -1의 쌍곡면 위의 쌍곡 삼각형 formula_1의 세 각 formula_2이 마주하는 변이 각각 formula_3라고 하면, 다음이 성립한다.여기서 formula_95는 각각 쌍곡 코사인 쌍곡 사인이다. 이를 쌍곡 코사인 법칙(雙曲cosine法則 )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다음이 성립한다.이를 제2 쌍곡 코사인 법칙이라고 한다.이 두 법칙은 각각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특히, formula_7가 직각일 경우의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은 쌍곡 피타고라스 정리가 된다.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의 증명.복소 평면 formula_101 위의 열린 단위 원판 formula_102 위에서 푸앵카레 원판 모형을 취하자. 쌍곡 삼각형 formula_103의 세 각의 크기를 formula_2, 세 변의 길이를 formula_3라고 하자. formula_106 위에 적절한 등거리 변환을 가하여 formula_107을 각각 원점 0, 양의 실수 formula_108, 허수부 formula_109가 0보다 큰 복소수 formula_110로 옮길 수 있다. 등거리 변환의 성질에 따라 새로운 삼각형 formula_111의 세 변 및 세 각은 원래의 삼각형 formula_103와 같으므로, 새로운 삼각형 formula_111에 대하여 증명하는 것으로 족하다. 쌍곡 거리의 정의에 따라, 세 변은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117은 자연 로그이며, formula_118은 복소수의 절댓값이다. 이 셋을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다.여기서 formula_122는 쌍곡 탄젠트이다. 쌍곡선 함수의 항등식을 사용한 뒤 위의 결과를 대입하여 정리하면 다음을 얻는다.제2 쌍곡 코사인 법칙의 증명.쌍곡 사인 법칙에 나오는 비율의 구체적인 값은 다음과 같다.이에 따라 각 formula_2의 사인 값은 다음과 같다.또한,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에 따라 formula_2의 코사인 값은 다음과 같다.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마지막 등호에는 항등식 formula_135이 사용되었다. 이로써 제2 쌍곡 코사인 법칙이 증명된다.평면 코사인 법칙과의 관계.평면 코사인 법칙은 제1 구면 및 쌍곡 코사인 법칙의 극한이다. 예를 들어, 평면 코사인 법칙이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의 극한임을 다음과 같이 보일 수 있다. 푸앵카레 원판의 반지름이 formula_136일 경우,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은 다음과 같이 된다.이 경우, formula_138일 때 쌍곡 거리 formula_139는 유클리드 거리의 2배 formula_140로 수렴하며, 쌍곡각 formula_141은 유클리드 각 formula_142로 수렴한다. 테일러 정리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이를 법칙에 대입하면 다음을 얻는다.다음에 주의하여, 양변에 formula_147을 곱한 뒤 극한 formula_138을 취하고 다시 양변에 4를 나누자.그러면 평면 코사인 법칙을 얻는다.제2 쌍곡 코사인 법칙에 극한 formula_138을 취하면 다음과 같은 자명한 항등식이 된다.이는 formula_156이므로 자명하다.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에는 제2 코사인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하학에서, 사�� 법칙(-法則) 혹은 라미의 정리는 삼각형의 변의 길이와 각의 사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리이다. 이에 따라 삼각형의 두 각의 크기와 한 변의 길이를 알 때 남은 두 변의 길이를 구할 수 있다.삼각형 formula_1의 각 formula_2을 마주보는 변을 formula_3라고 하자. 사인 법칙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여기서 formula_5은 삼각형 formula_1의 외접원의 반지름이다.삼각형의 넓이를 통한 증명.삼각형 formula_1의 변 formula_8 위의 높이를 formula_9라고 하자. 삼각법에 따라 formula_10이므로 삼각형 formula_1의 넓이 formula_12는 다음과 같다.자모를 치환하면 다음과 같은 등식을 얻는다.양변에 formula_15를 나누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외접원을 통한 증명.삼각형 formula_1의 외접원을 그리자. formula_18를 지나는 지름을 formula_19라고 하자. 따라서 formula_20는 직각 삼각형이며 빗변은 formula_21이다. 삼각법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만약 formula_23가 예각일 경우 formula_23와 formula_25는 같은 호의 원주각이므로 formula_26이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만약 formula_23가 직각일 경우 formula_29와 formula_25는 같은 점이므로 formula_31이며 formula_32이다. 따라서 역시 위와 같은 식이 성립한다. 만약 formula_23가 둔각일 경우 formula_23와 formula_25는 내접 사각형의 두 마주보는 각이므로 formula_36이다. 따라서 역시 위와 같은 식이 성립한다. 남은 두 각 formula_37에 대한 식 역시 마찬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코사인 법칙을 통한 증명.코사인 법칙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결과가 formula_3에 대하여 대칭적이므로 변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세 변과 세 각의 사인은 모두 양수이므로 사인 법칙이 성립한다.단위 구면 위의 구면 삼각형 formula_1의 각 formula_2가 마주보는 변을 formula_3라고 하자. 구면 사인 법칙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구면 사인 법칙의 증명.구의 중심을 formula_44라고 하자. formula_45에서 아무 점 formula_46를 취하자. formula_46를 지나는 평면 formula_48의 수선을 formula_49라고 하자. formula_25를 지나는 직선 formula_51의 수선을 각각 formula_52라고 하자. 삼수선 정리에 따라 formula_53는 각각 formula_51와 수직이다. 삼각법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두 식에서 formula_57를 소거하면 다음을 얻는다.남은 한 등식 역시 같은 방법으로 증명하면 구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구의 중심과 세 꼭짓점 formula_2를 잇는 벡터를 각각 formula_60라고 하자. 삼중곱의 정의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여기에 다음을 대입하면 구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구면 코사인 법칙을 통한 증명.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을 사용하여 구면 사인 법칙을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가우스 곡률이 -1인 쌍곡면 위의 쌍곡 삼각형 formula_1의 각 formula_2가 마주보는 변을 formula_3라고 하자. 쌍곡 사인 법칙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여기서 formula_73는 쌍곡 사인이다.쌍곡 사인 법칙의 증명.쌍곡 코사인 법칙을 통한 증명.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을 사용하여 쌍곡 사인 법칙을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선형대수학에서 벡터 공간 또는 선형 공간은 원소를 서로 더하거나 주어진 배수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공간이다. 체에 대한 가군의 특수한 경우다. 벡터 공간의 원소를 벡터라고 하며 이는 직관적으로 방향 및 길이의 비가 정의된 대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노름이 주어지지 않은 일반적인 벡터 공간에서는 벡터의 길이 자체는 정의되지 않는다.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2은 formula_1에 대한 가군이다. 즉, 다음과 같은 튜플이다.이 데이터는 다음과 같은 공리들을 만족시켜야 한다.실수체 formula_30에 대한 벡터 공간을 실수 벡터 공간이라고 하며 복소수체 formula_31에 대한 벡터 공간을 복소수 벡터 공간이라고 한다.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4의 부분 집합 formula_34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formula_35가 formula_4의 부분 벡터 공간이라고 한다.즉 부분 벡터 공간은 formula_4의 연산들을 제한시켜 새로운 더 작은 벡터 공간을 이룰 수 있는 부분 집합이다.벡터 공간 formula_4의 부분 집합 formula_45에 대하여, formula_45의 생성 formula_47는 formula_45를 포함하는 모든 부분 공간들의 교집합이다. 만약 formula_45에서, formula_50인 원소 formula_51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formula_45가 선형 독립 집합이라고 한다. 생성이 벡터 공간 전체인 선형 독립 집합을 기저라고 한다.선택 공리를 가정하면 모든 벡터 공간은 하나 이상의 기저를 가지며 모든 기저들은 항상 같은 크기를 갖는다. 벡터 공간 formula_4의 기저의 크기를 벡터 공간의 차원(次元 ) formula_54이라고 한다.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은 벡터 덧셈과 스칼라 곱셈을 보존하는 사상이다. 만약 두 벡터 공간 사이에 가역 선형 변환이 존재한다면 그 두 벡터 공간이 서로 동형이라고 한다. 주어진 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의 집합은 점별 벡터 덧셈과 점별 스칼라 곱셈에 의하여 벡터 공간을 이룬다. 두 유한 차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은 주어진 기저에 대한 행렬로 나타낼 수 있다.선택 공리를 가정하자. 체 formula_1에 대한 벡터 공간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즉, 주어진 체에 대한 벡터 공간은 그 차원에 따라서 완전히 분류된다. 이는 선택 공리를 필요로 하며, 선택 공리가 없으면 모든 벡터 공간이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 여기서 formula_58는 formula_1의 formula_60개의 직합이며, formula_61인 경우 이는 곱집합과 다르다.같은 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들이 주어졌을 때 다음과 같은 연산들을 정의할 수 있다.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4와 그 임의의 부분 공간 formula_35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4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다.이 동치 관계에 대한 동치류는 다음과 같다.몫공간 formula_69는 집합으로서 이 동치 관계에 대한 몫집합이다.그 위의 벡터 공간 연산은 다음과 같다.이 정의는 동치류의 대표원을 선택하는 방식과 무관하다. 또한, 이들 연산은 집합으로서의 연산과 일치하지 않는다.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formula_74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직접곱은 집합으로서 formula_76들의 곱집합이다. 이 위에는 자연스러운 formula_1-벡터 공간의 구조가 존재한다. 즉이는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곱이며 대수 구조로서의 직접곱이다. 즉 자연스러운 사영 사상이 존재하며 이는 선형 변환을 이룬다.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formula_74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직합은 다음과 같다.즉 직접곱에서 오직 유한 개의 성분만 0이 아닌 원소들로 구성된 부분 집합이다. 이는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쌍대곱이며 가군의 직합의 특수한 경우이다. 즉 자연스러운 포함 사상가 존재하며 따라서 각 formula_76는 formula_86의 부분 공간을 이룬다.유한 직합은 직접곱과 같으나, 무한 직합은 일반적으로 직접곱의 부분 공간이다. 만약 formula_87가 formula_76의 기저라면,는 formula_86의 기저를 이룬다. 따라서,이다. 여기서 우변은 기수의 합이다.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formula_74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텐서곱이 존재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다중 선형 사상을 가지며, 또한 임의의 다른 다중 선형 사상이 주어졌을 때 유일한 선형 사상가 존재한다. 텐서곱은 이 보편 성질로부터 유일하게 정의되며, 또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무한 개의 벡터 공간들의 텐서곱은 직접 정의하기 힘들다.임의의 두 벡터 공간 formula_4 formula_35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여기서 formula_102은 기수의 곱셈이다.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1는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즉, 체 위에서는 모든 가군이 자유 가군이 된다.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4의 집합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벡터 공간에 성질을 추가하여 만든 구조로는 거리의 개념을 준 노름 공간 · 바나흐 공간, 각의 개념을 준 내적 공간 · 힐베르트 공간, 위상적 성질을 가진 위상 벡터 공간 · 국소 볼록 공간 · 프레셰 공간, 벡터 곱을 준 체 위의 대수 등이 있다.벡터 공간은 임의의 환 위의 가군의 개념의 특수한 경우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환 위의 일반적인 가군은 벡터 공간과 매우 다른 성질을 보인다. 벡터 공간과 비슷한 성질을 보이는 가군을 자유 가군이라고 한다. +펜로즈 삼각형는 불가능한 물체의 일종이다. 1934년 스웨덴의 화가 오스카르 레우테르스베르드가 처음 쓰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 영국의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그와는 독자적으로 고안하여, 널리 알렸다. 그 후에도 펜로즈 삼각형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판화에서 쓰이기 시작하여,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가능한 물체에 영향을 주었다.이 삼각형은 단면이 사각형인 입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2차원 그림으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각 변을 이루는 평행한 면들은 각 꼭짓점에 이르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본 직각의 모서리이기 때문이다. 각 변을 이루는 막대는 모두 서로 직각을 이루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각��을 만든다.이 방법을 일반화 시켜서 펜로즈 다각형으로 확대할 수 있다. 하지만 펜로즈 사각형은 그 시각적 효과가 삼각형만큼 충격적이진 않다.펜로즈 삼각형처럼 보이는 입체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때에 각 변은 꼬이거나 끊어져야 한다.정수론에서 수론적 함수(數論的函數 )는 모든 양의 정수에 대해 정의된 함수이며 복소수 함수값을 가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수론적 함수는 복소수의 수열에 지나지 않는다.중요한 수론적 함수로 덧셈적 함수와 곱셈적 함수가 있으며, 수론적 함수 사이의 연산으로는 디리클레 합성곱이 중요하다.곱셈적 함수와 덧셈적 함수에 몇몇 수론적 함수의 예가 수록되어 있다. 아래 예들은 곱셈적이지도, 덧셈적이지도 않은 함수들이다.물리 상수는 물리학에 나오는 값이 변하지 않는 물리량을 말한다. 물리 상수는 실제적인 물리적 측정과는 관계없이 고정된 값을 갖는 수학 상수와 대비되어, 대부분이 그 값이 실험을 통한 측정을 통해 얻어진다.물리 상수들 중에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플랑크 상수, 중력 상수, 아보가드로 상수 등이 있다.물리 상수는 여러가지 양을 의미한다. 플랑크 길이는 자연의 기본적인 거리 광속은 가능한 최고 속력 미세 구조 상수는 차원이 없는 양으로 전자와 광자 사이의 상호작용의 정도를 각각 의미한다.유효자리는 굵게 표시했다.aPeter J. Mohr and Barry N. Taylor Vol. 72 No. 2 2000. +대수학의 기본 정리란 상수가 아닌 복소계수 다항식은 적어도 하나의 영점을 갖는다는 정리이다.즉, 복소계수 다항식에 대해 formula_2 인 복소수 formula_3 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이 정리는 복소수체가 실수체와는 달리 대수적으로 닫힌 체임을 뜻한다.수학자들은 17세기에 이미 이 정리가 옳으리라 생각하였으나 증명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복소수의 개념이 없던 당시에는 “모든 실계수 다항식은 실계수 일차식들과 실계수 이차식들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라는 예상이었다. 장 르 롱 달랑베르와 레온하르트 오일러 등이 증명하였으나 보충적인 정리의 증명을 필요로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모두 불완전하였고, 보다 엄밀한 증명에 성공한 수학자는 19세기 초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장-로버트 아르간드 등이였다. 그 이후 이 정리는 복소수 계수 다항식으로 확장되었다. 한편 가우스는 추후 생애 동안 몇 가지의 다른 증명을 발표했다. 또한 장-로버트 아르간드의 증명은 오귀스탱 루이 코시가 그의 저술 Cours d'Analyse(Cours d'Analyse de l’cole Royale Polytechnique; I.re Partie. Analyse algbrique)에서 이를 언급한바있다. 현재까지 순수하게 대수적인 증명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약간의 해석학 또는 위상수학을 도입해야 증명할 수 있다.다음은 복소해석학을 이용한 증명이다.가 영점을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즉 모든 복소수 formula_5에 대해 formula_6 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formula_7 는 전해석함수이다. 이제 삼각 부등식을 이용하여를 얻고, formula_9라 하면, 양수 formula_10에 대해 formula_11이면이 성립하므로 식 로부터을 얻는다. 즉 formula_7 는 유계인 전해석함수이다. 따라서 리우빌 정리에 의해 formula_15는 상수함수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formula_16는 상수가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formula_15 도 상수함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formula_16 는 적어도 하나의 영점을 갖는다.대수학의 기본 정리로부터 다음의 유용한 따름정리를 얻을 수 있다. 이 따름정리를 대수학의 기본정리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모든 formula_19차 복소 다항식은 중근까지 고려하여 formula_19개의 근을 갖는다.따름정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복소 다항식에 대해 복소수 formula_22이 존재하여와 같이 쓸 수 있다.대수학의 기본 정리에 의해 formula_24인 점 formula_25이 존재하므로와 같이 쓸 수 있다. 그런데 formula_27은 formula_28차의 다항식이므로, 다항식의 차수에 대한 귀납법을 사용하면 증명이 끝난다.실계수 다항식의 표현.실계수 formula_19차 다항식의 경우, 위의 따름정리를 적용하면 이 역시 복소수체 위에서 중근을 고려할 경우 formula_19개의 근을 갖는다. 이 표현 형식은 곱하는 순서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유일하므로, 만약 허수부가 0이 아닌 근을 갖는다면 실수체 위에서는 그 근을 표현할 수 없다. 즉 실수체 위에서는 반드시 formula_19개의 근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실수체 위에서 실계수 다항식을 기약다항식들로 인수분해할 때 기약다항식�� 갖는 최대의 차수는 formula_32이다. 이는 실계수 다항식의 근이 갖는 켤레성 즉 formula_33가 실계수 다항식의 근이면 이의 복소켤레 formula_34도 그 다항식의 근이 되는 성질 때문이다. 두 개의 복소계수 일차식의 곱은와 같이 실계수 이차식으로 환원된다.실계수 다항식의 근의 켤레성.만일formula_37가 실계수 다항식의 복소수 근이면 즉, formula_39이면 formula_40이다.복소켤레 연산의 성질에 의해대수학의 기본정리에 의해 formula_19 차의 실계수 다항식은 반드시 복소수의 범위에서 formula_19개의 근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실계수 다항식의 근의 켤레성에 의해 복소수 근을 갖지 않거나, 갖는다면 짝수개이어야 하므로 차수가 홀수인 다항식은 적어도 하나의 실근을 가져야함을 알 수 있다. +\; \exp\left(-\frac{\left^2}{2\sigma^2} \right) \!</math>확률론과 통계학에서 정규 분포 또는 가우스 분포는 연속 확률 분포의 하나이다. 정규분포는 수집된 자료의 분포를 근사하는 데에 자주 사용되며, 이것은 중심극한정리에 의하여 독립적인 확률변수들의 평균은 정규분포에 가까워지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정규분포는 2개의 매개 변수 평균 formula_2과 표준편차 formula_10에 대해 모양이 결정되고 이때의 분포를 formula_11로 표기한다. 특히 평균이 0이고 표준편차가 1인 정규분포 formula_12을 표준 정규 분포라고 한다.정규분포는 아브라암 드무아브르가 1733년 쓴 글에서 특정 이항 분포의 formula_13이 클 때 그 분포의 근사치를 계산하는 것과 관련하여 처음 소개되었고 이 글은 그의 저서 《우연의 교의》(The Doctrine of Chances) 2판(1738년)에 다시 실렸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그의 저서 《확률론의 해석이론》(Thorie analytique des probabilits)(1812년)에서 이 결과를 확장하였고 이는 오늘날 드무아브르-라플라스의 정리로 알려져있다.라플라스는 실험 오차를 분석하면서 정규분포를 사용했다. 1805년에는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가 매우 중요한 방법인 최소제곱법을 도입했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이 방법을 1794년부터 사용해왔다고 주장했는데 1809년에는 실험 오차가 정규분포를 따른다는 가정하에 최소제곱법을 이론적으로 엄밀히 정당화했다.위에서 첫 번째 적분은 홀함수의 적분으로 0이고 두 번째 적분은 가우스 적분으로 적분값이 formula_16로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기댓값은 formula_2다.정규 분포 밀도 함수에서 formula_18를 통해 X를 Z로 정규화함으로써 평균이 0 표준편차가 1인 표준정규분포를 얻을 수 있다.z-분포라고도 부른다. z-분포로 하는 검정을 z검정이라고 한다.formula_19에서 k값이 변화함에 따라 구해지는 formula_20값을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formula_21를 90% 불확실성, formula_22는 95% 불확실성, formula_23은 99% 불확실성이다. 특히, formula_24를 50% 불확실성이라고 하며, 확률오차(probable error)라고도 한다. 이는 관측값이 전체 관측값의 50%에 있을 확률을 의미한다. +공각기동대는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에서 만들어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한 무리의 작품들을 가리킨다. 공각기동대는 극장판 영화,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소설,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만들어졌다.수론에서의 뫼비우스 반전 공식은 19세기 수학자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의 이름을 딴 공식이다."g" 과 "f"이 수론적 함수이며 1보다 큰 모든 formula_1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고 하자.이 때, 1보다 큰 모든 formula_1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여기서 formula_5는 뫼비우스 함수이고 덧셈은 "n"의 양의 약수 "d" 전체에 대해 이루어진다.수론적 함수 formula_6는 formula_7의 누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역으로 formula_6를 통해 formula_7를 꺼내는 공식이므로 반전 공식이라 불린다."f"와 "g"가 자연수에서 어떤 아벨 군으로의 함수일 때에도 공식은 성립한다.디리클레 합성곱과의 관계.디리클레 합성곱을 사용하여 공식을 써 보면 다음과 같다.여기서 * 는 디리클레 합성곱이고, 1은 모든 formula_1에 대해 항상 1인 수론적 함수이다. 이 경우,가 성립한다. 즉 뫼비우스 함수는 모든 함수값이 1인 수론적 함수의 역원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14은 formula_15일 때만 1이고 나머지는 모두 0인 수론적 함수이다.다양한 수론적 함수의 계산의 예는 Apostol의 책을 참조하면 좋다.조합론에서 자주 쓰이는 동치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F"와 "G"가 구간 [1∞)에서 복소수로의 함수이고 1보다 크거나 같은 모든 formula_16에 대해을 만족하면, 1보다 크거나 같은 모든 formula_16에 대해여기서 합은 "x"보다 작거나 같은 모든 양의 정수 "n"에 대해서 이루어진다.수학에서 푸리에 급수는 주기 함수를 삼각함수의 가중치로 분해한 급수다. 대부분의 경우 급수의 계수는 본래 함수와 일대일로 대응한다.함수의 푸리에 계수는 본래 함수보다 다루기 쉽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인다. 푸리에 급수는 전자 공학 진동 해석 음향학 광학 신호처리와 화상처리 데이터 압축 등에 쓰인다. 천문학에서는 분광기를 통해 별빛의 진동수를 분해하여 별을 이루는 화학 물질을 알아내는 데 쓰이고 통신 공학에서는 전송해야 하는 데이터 신호의 스펙트럼을 이용하여 통신 시스템 설계를 최적화하는 데 쓰인다.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조제프 푸리에가 열 방정식을 풀기 위하여 도입하였다.푸리에 급수는 주기함수를 기본적인 조화함수인 삼각함수 또는 복소 지수 함수의 급수로 나타낸 것이다. 주기함수 formula_1가 formula_2의 주기를 가진다고 하자. 즉라고 하자. 또한, formula_4가 모든 유한 구간에서 제곱적분 가능하다고 하자. 즉, 임의의 formula_5에 대하여,가 유한한 값으로 존재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4의 푸리에 계수 formula_8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그렇다면 다음이 성립한다. 임의의 formula_10에 대하여 다음 식이 성립하지 않는 formula_11의 집합은 르베그 측도 0을 가진다.만약 formula_4가 연속미분가능 함수라면 formula_4의 푸리에 급수는 모든 formula_11에서 formula_18로 수렴한다. +가수는 목소리를 이용해서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을 말한다. 고전음악이나 오페라에서 목소리는 악기와 동일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수학에서 감마 함수는 계승 함수의 해석적 연속이다.감마 함수의 기호는 감마라는 그리스 대문자를 사용한다.양의 정수 n에 대하여 formula_1이 성립한다.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동치임을 보일 수 있다.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은 적분으로 정의된다. 이 적분을 오일러 적분이라고 한다.오일러 적분은 상반평면 formula_3 인 영역에서 절대수렴한다. 여기에 해석적 연속을 사용해 이 함수의 정의역을 위의 단순극을 제외한 전 복소평면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 확장된 함수를 감마 함수라 부른다.이 정의는 오일러의 이름을 따 오일러 극한 형태라고도 불리기도 한다.바이어슈트라스 무한곱.여기서 formula_6 는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이다. 이 정의는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의 이름을 따 바이어슈트라스 무한곱 형태라고도 불리기도 한다.계승의 일반화에서 주의점.만약 감마함수를 자연수 formula_7에 대해을 만족하는 함수로 정의하면 감마 함수는 유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또한 위 성질을 만족함을 확인할 수 있다. 감마 함수는 이중 유일하게 formula_10가 양의 실수축상에서 볼록함수이다.감마 함수는 정의역에서 정칙 함수이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감마 함수는 복소평면에서 유리형 함수이며 양이 아닌 정수 formula_12에서 단순극을 가진다. 단순극 formula_13에서 유수의 값은 formula_14이다.감마 함수는 영점을 갖지 않는다. 즉 그 역수 formula_15는 전해석 함수이다.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은 함수 방정식을 만족시킨다.두 번째 공식은 오일러 반사 공식이라고 불린다.특히, 이 정리의 특수한 경우로 다음과 같은 두 배 공식을 유도할 수 있다.감마 함수의 미분은 다음과 같이 폴리감마 함수 formula_20로 주어진다.특별히 양수 m에서의 감마 함수의 미분은 아래와 같이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를 사용해 나타낼 수 있다.일반적으로 감마 함수의 n차 미분은 다음과 같다.감마 함수의 극, z가 음수인 경우에서의 유수의 값은 다음과 같다.반정수에서 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다. 음이 아닌 정수 "n"에 대하여이 공식들은 formula_27로부터 수학적 귀납법으로 유도할 수 있다.몇몇 경우의 감마 함수의 값은 다음과 같다.감마 함수는 확률 분포를 비롯한 여러 확률과 통계, 조합론, 그 외 여러 공학 분야들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반지름이 formula_30인 formula_7차원 초구의 부피는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감마 함수의 피적분 함수를 감마 함수의 적분값으로 나눈 함수를 실수의 양수축에서 적분을 하면 1이 된다. 따라서 이를 이용해 새로운 분포를 정의할 수 있다. 이 분포를 감마분포라 하고, 그 확률 밀도 함수 formula_33는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35는 감마 함수의 매개 변수로 양수이다.큐-감마 함수는 감마 함수가 큐-아날로그화 된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의 근대 소설가이다. 호는 징강당주인이며 하이쿠 작가로서의 호는 가키이다.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단편 소설이다. 「참마죽」, 「덤불 속」, 「지옥변」 등 주로 일본의 《곤자쿠 이야기집》·《우지슈이 이야기》 등 전통적인 고전들에서 제재를 취하였다. 또한 「거미줄(원제: 蜘蛛糸)」, 「두자춘(杜子春)」 등 어린이를 위한 작품도 남겼으며, 예수를 학대한 유대인이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방황한다는 상상력을 발휘한 「방황하는 유대인」도 있다.1892년 3월 1일 도쿄에서 우유 판매업자였던 아버지 니하라 도시조와 어머니 후쿠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 태어난 시간이 공교롭게도 진년 진월 진일 진시였기 때문에 로 되어 있다.원래 류노스케의 위로는 하쓰와 히사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큰누나였던 하쓰는 류노스케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겪어서 류노스케를 양육할 수 없었다. 생후 7개월 된 류노스케는 도쿄시 혼죠구 고이즈미쵸에 있던 외가 아쿠타가와 집안에 맡겨졌고, 백모 후키가 양육을 맡았다. 11살 때인 1902년에 어머니가 끝내 사망하자 이듬해에 그는 외삼촌으로 도쿄시의 토목과장을 지내기도 했던 아쿠타가와 미치아키의 양자가 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쓰게 된다. 아쿠타가와 집안은 에도 시대에는 사족으로서 대대로 도쿠가와 집안을 섬겨 다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스키야호즈 집안이었고, 예술·연예를 애호하던 에도의 문인적 취미가 집안에 남아 있었다.도쿄부립 제3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성적우수자라는 상장을 받기도 했고 덕분에 제1고등학교는 시험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제1고등학교 제1부 을류에 입학한 류노스케의 동기 가운데는 기쿠치 간도 있었다. 2학년으로 오르면서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기숙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한 방을 쓰던 이가와 쿄와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4년 2월에 고등학교 동창이던 기쿠치 간·구메 마사오 등과 함께 동인지 가 폐간될 때까지 그의 초기작 을 동잡지에 발표하는데, 이것이 그의 작가 활동의 시작이었다.1915년 10월 를 발간하고 있다.마이니치 신문 입사.1916년의 가을 의 동인으로서 친하게 지내던 고지마 마사지로의 알선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 취직 제의를 받고 이력서도 제출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917년 3월에 해군 기관 학교의 교직을 물러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아쿠타가와는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에서 하숙생활을 했으며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오오 정에 거주했다.1919년 3월 12일에 친구 야마모토 기요시의 조카이었던 쓰카모토 후미와 결혼하였고 이듬해 3월 30일에 장남 히로시가 태어났다. 1921년 2월에 요코스카카이 해군 대학교를 퇴직하고 기쿠치 간과 함께 오사카 마이니치의 객외 사원이 되어 본래 거주하던 가마쿠라에서 도쿄부 기타토시마 군 다키노가와초로 돌아온다. 동년 5월에는 기쿠치와 함께 나가사키를 여행했고 친구인 화가 곤도 고이치로로부터 극작가 나가미 도쿠타로를 소개받기도 했다.또한 이 해에 해외 특파원으로서 중화민국을 방문하였고,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는 후스를 만나 그와 검열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7월에 귀국한 그는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문화학원 문학부 강사.1925년경에 아쿠타가와는 문화학원 문학부 강사로 취임하였는데, 1926년부터 위궤양에 신경쇠약과 불면증이 다시 심해져 유가와라에서 요양해야 했다. 한편 아내 후미도 남동생 쓰카모토 핫슈(塚本八洲)와 함께 요양을 위해 구게누마(鵠沼)에 있던 친가 소유의 별장으로 이주했다. 2월 22일, 류노스케도 구게누마의 여관 아즈마야(東屋)에 머무르며 그곳으로 처자를 불러온다. 7월 12일에 3남 야스시(也寸志)가 태어났고, 20일에는 아즈마야의 대별장 「이-4호」를 빌려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들 야스시와 살았다(여름방학이 되면서는 히로시나 다카시도 불러왔다). 그 사이에 「집을 빌리고 나서(원제: 家借)」, 「구게누마 잡기(鵠沼雑記)」, 나아가 「점귀부(點鬼簿)」 등의 작품을 탈고하였고, 또한 구게��마의 개업 의사 후지 다카시(富士山)의 병원에 통원치료를 다녔다. 9월 20일에 류노스케 일가는 「이-4호」의 서쪽에 있던 '시산노 니카이케(柴二階家)'를 연말까지 빌려 옮긴다. 여기서 구게누마를 무대로 한 「유유장(悠々荘)」을 탈고한다. 이는 간토대지진이 있기 전에는 기시다 류세(岸田劉生)가 살았고 지진 후에 재건되어 시인 구니키다 도라오(国木田虎雄)가 빌리고 있던 대별장을 돌아봤을 때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류노스케 일가가 구게누마에 정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또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사이토 모키지(斎藤茂吉)나 쓰치야 분메이(土屋文明), 쓰네토 야스시(恒藤恭),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쿠치 간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연호가 쇼와로 바뀐 뒤 류노스케는 「이-4호」로 돌아왔다. 조카이자 문예평론가였던 구즈마키 요시토시(葛巻義敏)와 가마쿠라에서 섣달 그믐을 지새고 나서 처자가 가있던 다바타(田端)로 돌아오지만, 구게누마에서 살던 집은 4월까지 빌려두고서 때때로 방문하고 있다.1927년 1월, 의형 니시카와 유타카가 방화와 보험금 사기 혐의로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바람에 아쿠타가와는 니시카와가 남긴 빚이나 가족을 떠맡아야 했다. 4월부터 순수한 소설의 명수로서 시가 나오야를 칭찬했다.1927년 4월 7일, 부인의 동창생으로 아쿠타가와 자신의 비서로 있던 히라마쓰 마쓰코(平松麻素子)와 데이코쿠(帝國) 호텔에서 함께 동반 자살을 약속하였으나 여자가 변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7월 24일 새벽, 「속(續) 서방의 사람(원제: 続西方人)」를 모두 쓴 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사이토 모키지로부터 받아온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막연한 불안(不安)'이 그가 밝힌 자살 이유였다. 그의 계명(戒名)은 의문원용지개일숭거사(懿文院龍之介日崇居士). 묘소는 지금의 도쿄 도 도시마구(豊島区) 스가모(巣鴨)에 있는 자안사(慈眼寺)이다. 그가 죽은 지 8년 후인 1935년 친구이며 문예춘추사 사주였던 기쿠치 간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딴 아쿠타가와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현재 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다.아쿠타가와의 초기 작품에서는 서양의 문학을 일역한 것도 존재하며(「발타자알」등) 영어과 출신의 특성으로서 번역문학 특유의 논리적으로 정리된 간결하고 공정한 영문학적인 필치가 특징이다. 작가의 생애 경험이 많이 드러나며 화자와 자신을 분리하지 않은 풍의 작품이 많다.그는 주로 단편소설을 썼으며 오늘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걸작으로 알려진 작품 또한 대부분 단편소설이다. 그런 반면에 장편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 또한 생활과 예술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연주의류의 자기 고백에 대해서 알몸뚱이를 사람 앞에 내놓는 것과 같다고 하여 멀리하고 진실한 자기는 허구의 세계에서만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삶과 예술을 분리한다는 이상으로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다른 작가보다 표현이나 시점이 생생하다. 말년엔 시가 나오야의 는 심경소설을 긍정하고 스토리성이 있던 자신의 문학을 완전히 부인하였다.초기와 중기, 후기로 작품의 시기를 나누며, 각 시기에 따라 특성이 두드러진다. 대부분 초기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중기 이후에는 아동용 작품의 집필이 늘어 폭넓은 장르의 작품을 다루었다. 후기, 특히 말년에는 사람의 생사에 대해 다룬 작품이 늘어나, 자살 직전 어떻게 죽음을 마주하며 집필했는지 알 수 있다. 등은 에서 제재를 얻었다. 또한 아포리즘의 제작이나 한문에도 뛰어났다.좌익 반군부적인 자기 주장을 펼쳤고 실제로 그런 작품도 다수 발표하고 있는데 군인의 계급 투쟁을 에서 아쿠타가와가 자신의 강사직 알선 및 협상에 어느 정도 역할을 맡았던 것을 적고 있다.작품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등장시킬 때는 별명인 "오히루메무치"(大日孁貴)을 이용했는데 이는 "아마테라스"라는 호칭이 당시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기도 했던 아마테라스를 그대로 글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 되어 불경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기에 태양신 그것도 자연신의 성격을 가진 신으로써 "오히루메무치"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담배를 몹시 좋아해서 하루 180개피씩 피웠다고 하며, 에도 시키시마 종목의 담배가 등장한다.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당시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무자비한 학살 첫날 밤 후 그 경험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공포스러워서 자경단 활동을 접었다고 한다. +장국영은 홍콩의 배우이자 가수이다.하카계의 중산층 집안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홍콩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중국 광둥성 메이저우 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도 있다. 영국 북부의 리즈 대학교에서 섬유직물관리학을 공부했으나 졸업하지는 못했다. 홍콩으로 귀국한 후 우연히 나간 노래 콘테스트에서 〈AMERICAN PIE〉를 불러 2위로 입상하며 데뷔했다.1970년대에 홍콩 RTV 에 가입하여, 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1976년 홍콩 ATV의 Asian Music Contest에서 2등상을 수상. 가수 활동으로 슈퍼스타가 된 후 TV 브라운관으로 시작해서 영화와 가요계를 넘나들어 활동했다. 그러다 1990년 고별콘서트를 끝으로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캐나다에서 1년간 휴식 후 귀국하여 영화배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 후로 영화속 O.S.T.제작 등에 한하여 음악활동을 해오다 1995년 앨범 총애 (寵愛)를 발매함으로 다시 가수로 재개 2000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여러 아시아 지역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그러나 2000년에 가수 분야에서 다시 은퇴하고 2003년 사망할 때까지 영화배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다음은 그의 앨범목록이다.지와의 인터뷰에서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다. 22세 쯤에 여배우 모순균과 교제했었으며 1981년 영화 를 촬영하면서 만난 여배우 예시배와도 2년 동안 교제한 바 있다1997년 콘서트에서 남자 애인 탕허더와 함께 나타났으며, 탕허더는 장국영이 죽을 때까지 관계를 지속했다.2003년 4월 1일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투신 자살하여 향년 4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국영이 투신한 이후 홍콩에서만 그의 팬 9명이 투신자살을 시도했고 이 중 6명이 사망했다. 4월 5일 열린 추도식에는 많은 팬들이 SARS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홍콩으로 찾아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웅본색에 함께 출연했던 주윤발 성룡 유덕화 매염방 이연걸 등 동료 배우들 역시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죽음을 기렸다. 공교롭게도 장국영이 죽은 4월 1일은 만우절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언론사들의 만우절 거짓말 이벤트라고 의심하기도 하였다.2004년 홍콩 문화의 거리에 그의 핸드프린팅 석판이 설치되었으나 설치 전 사망했기에 빈 석판으로 설치되었다.홍콩 경찰은 장국영이 24층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였다고 밝혔는데 여러가지 부분에서 논란이 있으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장국영의 전 재산 460억을 상속받은 애인 당학덕이 지목된다. +통계학은 산술적 방법을 기초로 하여 주로 다량의 데이터를 관찰하고 정리 및 분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근대 과학으로서의 통계학은 19세기 중반 벨기에의 케틀레가 독일의 과 결합하여 수립한 학문에서 발전되었다.통계학은 관찰 및 조사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로부터 응용 수학의 기법을 이용해 수치상의 성질 규칙성 또는 불규칙성을 찾아낸다. 통계적 기법은 실험 계획 데이터의 요약이나 해석을 실시하는데 있어서의 근거를 제공하는 학문이며 폭넓은 분야에서 응용되어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통계학은 실증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실질적 활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흔히 순수수학과는 다소 구분되는 응용수학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통계학의 방법을 통해 실제의 수치들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을 막고 연구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통계학은 과학 산업 또는 사회의 문제에 적용되며 모집단을 연구하는 과정이 우선시된다. 모집단은 와 같이 일정한 특성을 지닌 집단이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통계학자들은 전체인구(인구조사를 하는 기업)에 대한 데이터를 편집한다. 이것은 정부의 통계관련 법률요약집같은 조직화된 방법으로 수행될 수도 있다. 기술통계학은 모집단의 데이터를 요약하는데 사용된다. 도수 및 비율 (경주 등) 범주 형 데이터를 설명하는 측면에서 더 유용할 동안 수치 기술자는 연속적인 데이터 유형 (소득 등)에 대한 평균과 표준 편차를 포함한다. 데이터 분석 방법 엄청난 자료가 연구되는 현대 사회에서 경제지표연구 마케팅 여론조사 농업 생명과학 의료의 임상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는 통계는 단연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하고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다.수리통계학은 수학의 방법을 통계학에 적용한 것이다. 통계학은 원래 국가에 대한 과학으로 생각되었는데 즉 국가의 땅 경제 군력 인구 등에 관한 사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었다. 사용되는 수학적 방법은 해석학 선형 대수학 확률분석 미분 방정식과 측도 이론적 확률이론 등을 포함한다.영어의 스태티스틱스는 확률을 뜻하는 라틴어의 "statisticus" 또는 "statisticum", 이탈리아어의 "statista" 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국가라는 의미가 담긴 이탈리아 어 "statista"의 영향을 받아, 국가의 인력, 재력 등 국가적 자료를 비교 검토하는 학문을 의미하게 되었다. 근대에서의 통계학은 벨기에의 천문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근대 통계학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 받는 케틀레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통계학자들로 구성된 9개의 회의를 소집한 것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수집되고 분류된 숫자 데이터"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1829년부터이고 약자로 stats가 처음 기록된 것은 1961년부터이다. 또 통계학자의 의미인 statistician이 사용된 것은 1825년부터이다.한자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통계(統計)라는 단어의 기원은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천황 초년에 걸쳐 양학자인 야나가와 슌친(柳川春三)이 현재의 의미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여겨진다. 그가 1869년에 편찬한 책자에서 통계가 현재의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 1871년에는 대장성에 통계사(統計司)와 통계요(統計寮)가 설치되면서 통계라는 단어의 사용이 대중화되었다.매우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서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적절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해답을 구하는 과정은 아주 중요하다. 이런 방법을 연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가 통계학이다. 통계학을 필요로 하는 연구분야는 농업, 생명과학, 환경과학, 산업연구, 품질보증, 시장조사 등 매우 많다. 또한 이러한 연구방식은 기업체와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필요한 자료의 형태,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 문제에 대한 최선의 답을 구하기 위한 분석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통계학자의 역할이다.자료는 어떤 특정한 현상(주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하여 설계하고 계획한 실험에서 나온다. 이런 종류의 자료, 즉 실험자료는 농업연구와 같은 분야에 흔히 있다. 통계학자들은 이미 나온 실험자료를 분석하는데만 관심이 있지않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주어진 문제를 실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실험을 계획하는데 관심이 있다.또 다른 형태의 자료를 관측으로부터 얻는다. 조사자들은 연구실 밖으로 나가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조사한다. 이런 예로는 인구 및 주택센서스와 같은 전수조사, 여론조사, 교통량조사 등등이 있다. 이 경우 조사방법과 설문지 작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설문지 조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설문지 작성 요령이다. 묻고자 하는 질문을 짧고 명확하게 물어야 하고 응답자가 고민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설문지는 묻고자 하는 질문이면 무엇이든지 다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변인: 변수라고도 부르며,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일련의 개체를 말한다.실험의 기본적인 형태는 어떤 변인이 다른 어떤 변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조사대상을 기준으로하면 대상이 되는 통계 집단의 단위를 하나하나 전부 조사하는 관찰 방법인 전수조사와 모집단의 일부를 표본으로 추출하여 조사한 결과로써 모집단 전체의 성질을 추측하는 통계 조사 방법인 표본조사가 대표적인 조사 방법이다.이러한 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할 때에는 자료의 양질이 측정수준에 따라 분류된다. 자료의 측정수준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측정수준에 따라 통계에 이용해야 할 요약 통계량이나 통계 검정법이 다르게 된다.리커트법(Likert法) 또는 리커트 척도(Likert scale)는 1932년 리커트(Likert, R.)가 고안한 태도 측정법이다. 응답자가 동의나 반대의 정도를 나타내도록 질문을 하는 형태이다.조직적인 통계 조사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질문서를 만들어 선정된 가구에 배포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실험계획은 자료수집전에 미리 어떻게 실험할것인지 계획하여 원하는 자료를 정확하게 수집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자료 수집의 규모와 대상 할당 방법을 바르게 결정하고 정당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검토한다. 설문지 작성법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설문지 작성은 실험계획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대개 별개의 실습을 통해 체득하여야 한다. 설문지는 "앙케이트(Enquete)"라고도 하며 통계 자료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을 기록하는 하나의 서식이다. 이를 이용해 설문지 작성자 응답자들의 객관적인 생각 각자의 가치와 신념 태도 등과 같은 여러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설문지는 가능한 표준화 되도록 작성해야한다. 필요한 정보를 더욱 포괄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설문지는 다섯 가지 요소 응답자에 대한 협조요청 식별자료 지시사항 설문문항 응답자의 분류를 위한 자료로 구성된다. 설문지는 여러 번 수정 검토 과정을 거쳐야 의도한 자료의 수집이 가능하다. 설문지를 이용한 통계자료 수집은 비교적 비용이 적게들고 큰 표본에도 쉽게 적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수집 방법에 비해 무응답률이 높은 편이며 응답에 대한 보충설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추론 통계는 기술통계로 어떤 모집단에서 구한 표본정보를 가지고 그 모집단의 특성 및 가능성 등을 추론해내는 통계적 방법이다. 보통 수집된 자료는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미리 정해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획득한 자료을 가지고 여러 그래프를 그려보는 와중에 또다른 별개의 분석방법을 추가로 채택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모집단에 대한 전체적 조감을 해보고 또다른 분석방향을 모색해 보는 과정에 해당한다. 추론 통계는 바탕인 기술 통계량이 있어야 한다. 이 추론 통계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검사를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대규모 집단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 소수의 집단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추론 통계는 기술 통계량의 정확성을 유지하는 작업으로서 사용한다. 보통 일반적인 추론은 실험 결과가 기존의 방식, 또는 다른 품종간 비교 등에서 차이점이 유의한지를 검증하는 것이다.기술통계는 측정이나 실험에서 수집한 자료의 정리, 표현, 요약, 해석 등을 통해 자료의 특성을 규명하는 통계적 방법이다. 기술통계에는 분석방향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단순한 평균 분산 등의 기초적인 분석 이외에, 모집단에서 어떤인자들이 있는지 뽑아내보는 인자분석과, 특정표본이 어떤모집단에 속하는지 판단하는 판별분석, 두 인자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정준상관분석, 인자들의 숫자를 줄여 단순화 하는 주성분분석, 그 외 군집분석 등, 다양한 분석방법이 존재한다.통계분석 소프트웨어.다양한 통계분석을 할 수 있고 사회과학, 의학 등 전 분야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프로그램이나 계산 속도가 느려 큰 규모의 자료를 다루기에는 편리하지 않다.통계학은 컴퓨터 과학 프로그래밍 언어 선형대수학 해석학 분포론 수치해석 확률론 등 여러 학문과 관련되어 있다.통계학과 사회과학의 발전에 따라 분산분석회귀분석 요인분석 등과 같은 평가모형들이 발전되고 이들이 정책평가에 응용됨으로써 정책영향의 평가에 공헌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특히 정보화사회와 빅데이터 시대를 맞아 다양한 사회정보의 수집분석활용을 담당하는 새로운 직종으로 기업 정당 지방자치단체 중앙정부 등 각종 단체의 시장조사 및 여론조사 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조사를 수행하며 그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는 관련 학문이 필요하게 되어 사회조사분석학이 등장하게 된다.사회조사분석사란 기업이나 정당, 지자체, 중앙정부 등 각종 단체가 필요로 하는 조사를 수행해 분석, 보고하는 전문 인력군이다. 주로 경영, 조사기획, 자료분석,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므로 조사방법론, 사회통계, SPSS 통계분석 실무 등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현대에 들어와 데이터 과학자들로 구성된 통계 조직은 기관과 단체 그리고 기업의 수익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데이터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결론을 얻어낸다. 미래를 예측해 더 나은 결과물을 처방한다. 수많은 데이터 가운데 의미 있는 데이터를 찾아냄으로써 더 나은 의사결정을 돕는 작업이 있는데 데이터 클리닝 데이터 마이닝 등이다.기업과 기관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생산·판매와 서비스 등 핵심 직무에서 영업력 개���과 사원 복지 등 전 영역에 걸쳐 이같은 데이터 과학 조직의 역할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주요 데이터에 대한 분석과 통계가 이뤄지는 비즈니스인텔리전스 조직이라 부른다. 데이터 분석 조직을 운영하는 IT 조직은 시스템에서 나오는 각종 데이터를 분석해 기업의 핵심 영역에 가치를 더하는 조직으로 변모 중이다.전사자원관리고객관계관리생산관리시스템경영 정보 시스템전략적 기업 경영 등 각종 시스템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데이터에 대한 분석능력이 미래를 예측하는 핵심 경쟁력인 시대, 이른바 `데이터 경영` 시대의 개막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기술의 시대라고 하는데 미국의 유명 경제 출판 및 미디어 기업인 포브스도 미래의 유망직업 중 하나로 를 선정하기도 했다.포브스에 의하면 빅 데이터 데이터 마이닝이란 기존 데이터베이스 관리도구의 데이터 수집·저장·관리·분석의 역량을 넘어서는 대량의 정형 또는 비정형 데이터 세트 및 이러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로되는 를 보완, 마케팅, 시청률조사, 경영 등으로부터 체계화해 분류, 예측, 연관분석 등의 데이터 마이닝을 거쳐 통계학적으로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다.대한민국에서는 2000년부터 정보통신부의 산하단체로 사단법인 한국BI데이터마이닝학회가 설립되어 데이터 마이닝에 관한 학술과 기술을 발전, 보급, 응용하고 있다. 또한 국내·외 통계분야에서 서서히 빅 데이터 활용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국가통계 업무를 계획하고 방대한 통계자료를 처리하는 국가기관인 통계청이 빅 데이터를 연구하고 활용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빅 데이터 연구회'를 발족하였다.하지만 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빅 데이터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조직의 전략방향을 제시하는 데이터과학자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와 일부 기업이 데이터과학자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에 있어 아직 걸음마 단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컴퓨터 과학 또는 전산학은 알고리즘 과정, 계산 기계 그리고 계산 자체에 대한 학문이다.컴퓨터 과학은 알고리즘, 계산 및 정보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서부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계산 시스템 구현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쳐 있다.전산 이론 및 시스템 설계를 다루는 전문가를 컴퓨터 과학자 또는 전산학자라 부른다.컴퓨터 과학의 분야는 이론적인 분야와 실용적인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그래픽스이나 계산 기하학은 보다 구체적인 응용을 강조하는 반면, 계산 이론은 추상적인 계산 모델과 그것들을 사용하여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종류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조는 컴퓨터 과학의 심장이라고 불려왔다.프로그래밍 언어 이론은 계산 프로세스의 설명에 대한 접근 방식을 고려하는 반면,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컴퓨터 구조는 컴퓨터 구성요소와 컴퓨터 작동원리를 설명한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문제 해결, 의사결정, 환경 적응, 계획, 학습과 같은 목표 지향적인 과정을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디지털 컴퓨터는 다양한 정보 과정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컴퓨터 과학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자동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컴퓨터 과학자들은 보통 학술 연구에 집중한다. 튜링상은 일반적으로 컴퓨터 과학에서 가장 뛰어난 상으로 인정받고 있다.컴퓨터 과학은 정보 및 전산의 이론적 기초와 그것의 구현 및 응용을 위한 실용적인 기술을 다룬다.1960년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몇몇 선각자의 상상 속에서만 자리하고 있었다. 1946년 최초의 컴퓨터인 ENIAC이 출현한 이래 EDSAC·UNIVAC·MARK 등의 진보를 거쳐 작금에 이르러서는 정보화 사회·정보산업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폭발적인 수요확대로 초고속성장·진보를 거듭한 컴퓨터는 이용범위도 확대되어 산업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됨은 물론 일반 가정에서도 이용되고 있다. 제2차 대전 후 처음으로 산업에 이용되기 시작한 컴퓨터는 단순한 계산대체기능(計算代替機能)에서, 의사결정기능(意思決定機能)에 참여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고, 경영행동(經營行動)의 본질조차도 바꾸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경영정보시스템(MIS) 지향(志向)의 많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에 있어서 컴퓨터 이용의 최종 목표로서의 전략적 의사결정으로의 효과적 이용을 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병행적 개발·이용의 진전과 더불어 컴퓨터는 직접 라인 업무의 일부로 되어 있고, 더욱이 수치제어(數値制御:numerical control) 등에서 실증되는 바와 같이 프로세스 제어의 활용분야를 확대하고 있다. 공정자동화, 사무자동화, 혁명으로 지칭되는 경영구조의 개선은 퍼스털 컴퓨터의 보급확대로 나타난 가정의 정보화와 연결되어 공공·금융·유통 서비스가 일체화된 사회·정보통신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어 원재료의 구매에서 판매시점에 이르는 총체적 관리와 EFTS(전자식 동시결제시스템)의 구축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프로그래밍의 개발의 가속화(加速化) 또는 문제 해결 기술의 진보로 컴퓨터가 기업경영에의 정착을 확고히 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역시 계산기 개발상에서 애로가 되는 것은 소프트웨어(software)의 문제이며, 이와 같은 소프트웨어(software)·하드웨어(hardware) 또는 여러 인자간의 발전에 있어서 갭을 어떻게 메우느냐 하는 문제가 야기되어 결국 계산기를 독립적인 학문으로 연구·개발시키려는 계산기 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태동되는 것이다.이 말은 새크먼(H. Sackman)에 의하면 '컴퓨터 과학이란 수학·논리학·언어분석·프로그래밍·컴퓨터디자인·정보시스템·시스템스 엔지니어링 등의 공헌과 컴퓨터 개발과 이것의 응용에 관한 이론적·응용적인 훈련교육(訓練敎育)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걸친 연구분야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컴퓨터에 상관되는 모든 활동은 '컴퓨터 과학'이라고 하는 인터디시플리너리(interdisciplinary)한 연구영역을 형성하고, 급속한 발전을 가져온 것이라 하고, 1964년에 애치슨(W. H. Atchison) 및 햄블렌(G.W. Hamblen) 등이 개발한 상관영역도(相關領域圖)를 소개하였다. 컴퓨터 과학이라는 하나의 체계의 학문적 인정은 별문제로 하고 그것이 나날이 기성과학에의 참획(參劃), 공헌을 확대하여 인터디스플리너리한 특질을 급속히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애치슨 및 햄블렌은 '컴퓨터 과학'에 대해서 미국·캐나다·멕시코의 93개 대학을 대상으로 해서 앙케트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로서 거의 모든 대학이 '정보과학'이나 '시스템 엔지니어링'보다 '컴퓨터 과학'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1965년 미국의 컴퓨팅기기협회(Association of Computer Machinery)는 이 협회가 조직한 컴퓨터 과학에 관한 커리큘렴(curriculum) 위원회의 권고서(勸告書)를 공개하고 컴퓨터 과학이 단지 컴퓨팅 디바이스나 수치계산의 기술(art)이 아니고, 물리학이 에너지에 관련되는 것과 같은 의의 이상으로 정보문제를 보다 광의(廣義)로 다루는 과학체계임을 논증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 1965년 9월에 캐나다의 서(西)온트리오 대학이 주최한 '시스템과 컴퓨터 과학 콘퍼런스'가 열렸다. 여기서 캐나다의 모든 대학에서의 컴퓨터 과학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 토론이 있었고, 새로운 과학의 정의를 비롯해서 경계영역·교수방법 등의 연구·개발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성과의 일단으로서 컴퓨터 과학이 수치분석·응용통계·OR·데이터 처리 등의 여러 영역에 있어서 순수연구보다는 오히려 응용과학으로서의 프레임워크제에 서서의 설정을 목표로 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또 이러한 전제에서 정보과학(information science)과 컴퓨터 과학의 상관성(相關性)에 관한 이론적 분석, 또는 컴퓨터 연구에 있어서의 이론과 응용간의 불균형 문제가 논구되었다. 이 콘퍼런스는 세계적으로 최초의 시도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캐나다의 대학교육에서 '컴퓨터 과학'의 커리큘럼에의 편입은 다른 나라에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컴퓨터 과학의 정의의 문제점.컴퓨터가 미국의 산업 사회에서도 불가결한 존재로서 실제로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라는 학문체계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본질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점이 거론된다.컴퓨터 과학의 본질.1967년 사이먼(H. A. Simon) 교수는 이와 같은 기본적 의문에 대해서 뉴웰(A. Newell)펠리스(A.G. Pelris)와의 연명으로 『사이언스』지의 공개장(公開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현상(現象)이 있는 곳에는 이 현상을 기술하는 과학이 존재한다. 예컨대 식물학이 식물연구의 과학이고 또 천문학이 별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과학인 것처럼 모든 과학은 현상에 의해서 창조된다. 따라서 컴퓨터가 있는 한 컴퓨터를 연구하는 과학으로서의 '컴퓨터 과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컴퓨터를 둘러싼 환경현상이 여러 갈래고 복잡하며 문제점이 다수 존재하는 오늘날 그런 것의 과학적인 추구의 중요성은 다른 모든 과학의 그것에 비해 다름이 없음을 명백히 하고 회의론자(懷疑論者)에 의해서 제기된 반론(反論)에 대해서 논리적인 6가지 점을 열거하여 과학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 자연현상만이 과학을 창조하며 컴퓨터는 인위(人爲) 인공적인 데다 그에 대한 불변의 법칙이 없다. 따라서 과학적인 논거가 불비하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컴퓨터나 컴퓨터 프로그램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또한 컴퓨터의 정의(定義)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 뜻이 새로운 개발에 의해서 변화한다고 해도 과학의 현상 영역은 모두 항상 변화하는 것이며 컴퓨터 과학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천문학도 당초에는 천체 사이의 가스는 그 영역 밖에 있었고 물리학에도 방사선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심리학도 동물행동의 연구를 범위 외로 하였던 시대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또 수학이 지난날에는 '수량의 과학'이라고 정의되었던 사실을 예증(例證)하고 있다. '컴퓨터 과학'은 어디까지나 컴퓨터를 둘러싼 현상의 연구를 하려는 과학이지 컴퓨터를 온도계와 같이 단지 기기(機器)로서 파악하는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과학을 일렉트로닉스나 수학심리학 등의 분지과학(分枝科學)이라고 하는 반론에 대해서 컴퓨터의 연구에는 위에 든 기존과학의 연구도 필요하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현상이 과학의 중심(中心)을 정의하고 타과학과의 경계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며 그 예증(例證)으로서 생화학(生化學)이 동물학화학의 어느 것의 존재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 컴퓨터가 엔지니어링에 귀속하며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 않은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전기가 물리학과 엔지니어링 식물(植物)이 식물학과 농학(農學)에 각각 상관되는 것과 같이 컴퓨터도 엔지니어링과 과학의 양자에 상관한다. '컴퓨터 과학'은 그것의 전문적인 과학으로서의 발전과정에서 더욱 더 분석(分析)과 가설(假設)과의 조합(組合) 순수연구와 애플리케이션 분석의 통합적(統合的) 그리고 상관적 전개를 통해서 학문적 체계의 특성을 명확히 할 필연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하간 '컴퓨터 과학'이 생명력을 갖춘 컴퓨터의 추구를 목적으로 한 과학체계로서 발전할 것은 사실이며 컴퓨터 과학자의 과제는 여러 인접과학자와의 상관활동을 활발히 하고 '컴퓨터 과학'으로 하여금 인간사회 진보를 위해 유효한 과학체계로서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컴퓨터 과학의 역사는 현대의 디지털 컴퓨터의 역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주판과 같이 계산을 수행하는 기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1623년에는 최초의 계산기계가 만들어졌고, 찰스 배비지는 19세기 초에 차분기관을 만들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 IBM사가 펀치카드 시스템을 개발하여 회계에 관련된 일을 하도록 보급하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주어진 한 가지의 일만 수행할 수 있었다.1920년 이전까지 '컴퓨터'는 계산을 담당하는 사무관을 일컫는 용어였다. 쿠르트 괴델 알론조 처치 앨런 튜링과 같은 컴퓨터 과학 초기의 학자들은 계산 가능성 문제에 흥미를 느꼈다. 이러한 흥미는 계산이라고 하는 지겨울 수도 있고 오류율이 높은 작업을 자동화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은 이리하여 한 가지의 종류의 작업만 수행할 수 있었던 기존의 기계들과는 다른 이론적으로 어떠한 계산도 가능한 기계를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이 현대 컴퓨터 과학의 지평을 열었다.1940년대에 들어서자 더욱 강력한 기능을 지닌 계산기들이 등장했고, 이때부터 '컴퓨터'는 사람이 아닌 이들 기계를 부르는 용어로 굳어졌다. 컴퓨터가 단순한 숫자 계산보다 더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들이 알려지면서 컴퓨터 과학이라는 분야가 더욱 넓어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여러 대학에 컴퓨터 과학 학과와 전공 과정이 생기면서 컴퓨터 과학이 학문으로 인정받기 시��하였으며, 학문의 쓰임새에 따라 세분되었다.미국의 컴퓨터 과학.컴퓨터는 이제 의 침투가 늦어지고 있는 이유로서는 경영과학의 응용성의 결여 인터디시플리너리한 어프로치에 있어서의 통합이론 또는 기술상의 미발달 등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영관리의 환경 적응성의 이론적 프레임워크의 설정 곤란 교육시스템의 개발 지체에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 정보과학 또는 MIS의 발달과정을 정사하는 것도 중요하다. 즉 MIS의 조속한 이용을 기대한 경영자의 실망에 비추어 보아 컴퓨터 사이언스에 대한 의문이나 재고의식이 나온 것도 부정할 수 있다. 컴퓨터 과학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그 전체로서 컴퓨터 과학이 경영관리의 혁신에 있어서 진실로 가치 있는 과학체계임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캐나다의 컴퓨터 교육의 발전을 논하기 이전에 미국에서의 논쟁을 추적함으로써 그 본질과 방향에 대해 고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되겠다.다른 분야와의 관계.컴퓨터 과학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기계에 대한 학문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유명한 컴퓨터 과학자 에츠허르 데이크스트라는 라고 하였다.컴퓨터 과학 연구는 수학, 인지 과학, 물리학, 그리고 언어학과 같은 학문과 공생한다.많은 과학 분야와 비슷하게 컴퓨터 과학도 수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수학에 기초를 둔 과학의 한 분야이다. 컴퓨터 과학의 기초에 큰 영향을 미친 수학이 조지 불의 불 대수이다. 불 대수는 이진법을 기반으로 한 대수학으로, 그 외에 체론과 환론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의 컴퓨터 과학은 쿠르트 괴델과 앨런 튜링 등의 수학자들이 큰 영향을 끼쳤고, 수리논리학, 범주론, 도메인 이론, 대수학과 같은 수학 분류들은 컴퓨터 과학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스탠 켈리-부틀은 라고 말하였다. 이는 컴퓨터 과학이 과학의 특성을 충분히 갖지 않는다는 오해에 기인한다.컴퓨터 과학과 소프트웨어 공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컴퓨터 과학과 소프트웨어 공학의 용어 정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모호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공학은 컴퓨터 과학의 한 분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소프트웨어 공학은 다른 분야에 대한 응용이나 자원을 운용하는 방법 등 실용적인 특징에서 컴퓨터 과학의 다른 분야와 잘 구분된다.컴퓨터 과학과 경영 관리.사이먼은 컴퓨터와 사상의 관계에 대해서 '컴퓨터가 인간의 이미지에 따라서 조직되는 것이라면 컴퓨터는 명백히 인간행동에 대한 택일적 조직상의 가설에서 생기는 결과를 개발하는 기기이다'라고 말하고 인간행동의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중요한 역할과 의의를 밝히고 있다. 이 뜻을 경영관리의 향상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경우 맨머신 시스템의 원의가 밝혀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컴퓨터의 본질과 적용분야의 과학적 추구를 적극화하고 컴퓨터에 대한 투자의 최적 효과의 창출에 체계적으로 노력함이 경영관리의 도전적 과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방향설정이 긍정된다면 경영교육 커리큘럼 편성에 있어서의 '컴퓨터 과학'의 위치 설정도 명백해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교육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업조직에서 과학으로서의 컴퓨터 사고는 가속적 보편화를 이룰 것이 명확하다. 경영관리에 대한 컴퓨터의 임팩트의 본질적 이해와 대응책도 컴퓨터의 과학적 추구에 크게 의존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과 동시에 '컴퓨터 과학'이 경영학 혁신의 에이전트적 기능을 다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컴퓨터 과학은 그 이론의 적용법에 따라 여러 분야로 나뉜다. 일반적인 분류는 다음과 같다. +위키백과(위키百科 ) 또는 위키피디아( )는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다언어판 인터넷 백과사전이다. 2001년 1월 15일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가 창립하였으며 대표적인 집단 지성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위키백과는 자유 저작물을 보유하고 상업적인 광고가 없으며 주로 기부금을 통해 지원을 받는 비영리 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에 의해 소유되고 지원을 받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 영어판 약 600만여 개 한국어판 개를 비롯하여 300여 언어판을 합하면 전체 위키백과의 일반 문서(넘겨주기와 막다른 문서 제외) 수는 5500만 개 이상이며 한 달 순수 방문자 수는 약 17억��이다. 위키백과의 저작권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와 GNU 자유 문서(GFDL)의 2중 라이선스를 따른다. 두 라이선스 모두 자유 콘텐츠를 위한 것으로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사용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위키백과 이전에도 온라인 백과사전을 운영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위키백과 영어판은 전문가들이 작성했던 백과사전인 누피디아에서 비롯하였다. 누피디아는 웹 포털 회사인 보미스가 2000년 3월 9일에 개시하였다. 보미스의 CEO였던 지미 웨일스와 편집장 래리 생어는 누피디아의 글들을 오픈 콘텐츠로 제시하기로 하였고 리처드 스톨먼이 주도한 GNU 자유 문서 라이선스로 제공하였다. 누피디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고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백과사전으로 위키백과를 개설하였다. 생어는 모두의 백과사전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름에 위키를 넣었다. 2001년 1월 10일 생어는 누피디어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누피디아 프로젝트를 보완하기 위해 위키를 도입했다고 밝혔다.위키백과는 2001년 1월 15일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도메인은 www.wikipedia.com을 사용하였고 사용 언어는 영어 하나뿐이었다. 래리 생어는 위키백과의 출범 소식 역시 누피디아 메일링 리스트를 통하여 알렸다. 위키백과가 시작한지 한 달 안에 정책이 수립되었다. 이후 몇 가지 정책이 수립되면서 위키백과는 누피디아와는 별개인 서비스가 되었다. 애초에 보미스는 위키백과를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위키백과의 초기 편집자들은 누피디아, 슬래시닷, 그리고 웹 검색 엔진을 통해 유입되었다. 2001년 8월 8일 위키백과의 문서수는 약 8,000개가 되었다. 2001년 말이 되자 위키백과는 18개 언어판으로 늘었고, 문서 수는 2만여 개까지 늘어났다. 위키백과를 서비스 하는 언어는 2002년 말에는 26개, 2003년 말에는 46개, 2004년 말에는 161개로 늘어났다. 누피디아는 위키백과와 병립하여 운영되다가 컨텐츠를 위키백과로 넘기고 2003년 서버를 다운시켜 마감하였다.2002년 사용자 사이에서 위키백과의 광고 수주와 그에 따른 상업적 운용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이에 따라 스페인어 위키백과 사용자들은 위키백과 소스를 포크하여 별도의 위키백과인 엔시클로페디아 리브레를 개설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지미 웨일스는 위키백과에 광고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도메인을 wikipedia.com에서 wikipedia.org로 변경하였다.영어 위키백과의 증대 속도는 2007년 초 정점을 찍었고, 2009년 8월 3백만 문서를 넘겼다. 위키백과 전체의 문서수는 2006년 가장 빠르게 늘어 매일 약 1,800 개의 문서가 새로 생겨났다. 그 뒤로 문서 증가 속도는 둔화되어 2013년의 경우 연평균으로 보았을 때 매일 약 800개의 문서가 새로 생겨났다. 위키백과의 성장 둔화 원인에 대해 팰로앨토 연구소는 프로젝트의 품질이 고급화되면서 변화에 대한 저항이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성장 둔화에 대한 다른 분석으로는 처럼 주제나 가치가 분명하여 쉽게 만들 수 있는 문서는 이미 다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2009년 11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 대학교의 연구자는 2009년 1분기 동안 영어 위키백과가 49,000여 명의 기여자를 잃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2008년의 같은 기간에 줄어든 기여자 수가 4,900여 명이었던 것에 비해 열 배나 더 많은 수치였다. 의 캐서린 워드는 “여섯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웹사이트인 위키백과가 내부 비판에 휩싸였다”는 기사를 내보냈다.2007년 1월 위키백과는 처음으로 가장 인기있는 웹사이트 리스트 Top10에 이름을 올렸다. 컴스코어는 위키백과의 연간 방문자를 4290만 명으로 집계하며 9위로 올렸고 는 10위로 올렸다. 애플은 11위로 집계하였다. 2006년도의 순위가 33위였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부상이었다. 2015년 3월 위키백과는 5위를 기록하였다. 이 시기 순위는 알렉사 인터넷의 조사에 의한 것으로 위키백과는 2014년 내내 매 월 8억 이상의 페이지 뷰를 기록하였다.2012년 1월 영어 위키백과는 미국 의회의 온라인 저작권 침해 금지 법안와 지적 재산권 보호 법안의 제정 시도에 맞어 SOPA와 PIPA 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24시간 블랙아웃 시위를 벌였다.2014년 1월 20일 수보드 바르마는 에 투고한 글을 통해 위키백과가 2012년 12월에서 2013년 12월 사이에 전체적으로 페이지 뷰가 10퍼센트에 달하는 2억 번 이상의 페이지뷰를 잃었다고 발표하였다. 주요 언어판에 따라 나누면 영어 위키백과의 페이지뷰 감소율은 12% 독일어가 17% 일본어는 9%였다. 바르마는 라고 반문하였다.2016년 12월 위키백과는 가장 인기있는 웹사이트 리스트에 5위로 기록되었다.위키백과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나 편집과 관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글을 고칠 수 있는 체계인 위키로 만들어져 있어 집단 지성적 특성을 가진다. 개방성은 위키백과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원칙적으로 사용자들은 누구든 거의 모든 문서를 새로 만들고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인증 사용자만 편집하고 수정할 수 있는 문서도 있다.그러나 이러한 강점은 동시에 악의적인 문서의 훼손이나 부정확한 내용의 수록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편집 규칙을 정하고 일부 문서에 대한 생성과 편집을 규제하고 있다. 2009년 이후 여러 언어마다 위키백과 편집에 대한 커뮤니티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대중적 관심이 높은 문서에 대한 편집을 위해서는 로그인이 필요하도록 하였고, 독일어 위키백과는 모든 문서에 대해 로그인 된 사용자만이 편집할 수 있도록 하였다.과도한 편집 규제는 위키백과 성장의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있고, 위키백과 커뮤니티 내에서도 은 가운데 하나로 새로운 사용자를 포용하기 위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한편 위키백과 커뮤니티 내에 존재하는 편향으로 인해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에 대한 개방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2014년 8월 게이머게이트 논쟁에서 영어 위키백과의 가 내린 5명의 여성주의 운동가 차단 결정은 위키백과의 개방성에 대한 많은 논란을 불러오기도 하였다.위키백과의 문서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에 의해 수정된다. 위키백과의 편집 시스템인 미디어위키는 다양한 방법으로 문서의 수정 사항을 사용자에게 알려주어 검토할 수 있도록 한다. 사용자는 문서의 역사를 확인하여 누가 언제 어떤 내용을 수정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변경 내용이 악의적인 문서 훼손이라면 사용자는 이를 손쉽게 되돌릴 수 있다. 또한 사용자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등의 기능을 통해 문서의 변경 사항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들은 위키백과가 으로부터 문서 훼손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돕는다.위키백과는 시작과 함께 문서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따라다녔다. 누군가 보다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사용자의 편집을 검토하고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늘 있다. 위키백과의 공동창립자인 래리 생어는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위키백과를 떠나 전문가의 검토를 거치는 시티즌디움을 창립하였다. 위키백과 역시 몇 차례의 명백한 오류와 특정 집단의 의도적인 개입으로 완전한 개방 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존 시겐설러가 존 F. 케네디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거짓 정보가 위키백과에 올라온 사례는 오랫동안 위키백과 문서의 오류에 대한 사례로 거론되었고, 2016년 1월에는 스위스의 정보 기관 공무원이 수년에 걸쳐 약 5,500 건에 달하는 문서를 악의적으로 편집하였다가 아이피가 차단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위키백과의 문서 품질은 사용자들의 지속적인 수정과 검토에 의해서 유지되고 향상된다. 2003년 안드레 시포릴리는 위키백과 컨텐츠의 유지는 파괴적 활동보다 창조적 활동량이 훨씬 많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교묘한 거짓 정보는 매우 오랫동안 검토되지 못하고 남아있기도 한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2005년 1월 31일 등재된 연쇄 강간범 잭 로비쇼라는 문서가 완전히 허구의 인물을 서술한 것이라는 것을 2015년이 되어서야 발견한 일도 있었다. 이 문서는 2015년 9월 3일 삭제되었다.위키백과의 컨텐츠는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용자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위키백과는 과 같은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위키백과의 모든 문서에는 탭이 있어서 사용자들 사이에 문서 개선을 위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위키백과 사용자들은 와 같은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기도 한다. 위키백과를 운영하고 있는 위키미디어 재단은 매년 세계적인 컨퍼런스인 위키마니아 행사를 갖고 있다. 2016년 위키마니아는 이탈리아의 에��노라리오에서 열렸다. 위키마니아에서는 위키백과뿐만 아니라 위키미디어 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데이터 위키책 위키문헌 위키낱말사전과 같은 여러 자매 프로젝트의 주요 관심사도 함께 논의된다. 위키미디어 재단은 이들 여러 프로젝트의 활성화를 위해 세계 각지의 지부나 사용자 모임을 지원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가 자발적 사용자 모임으로 활동중이다. 한국위키미디어협회는 2016년 1월 15일 위키백과 15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종종 컬트 문화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이 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것은 아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은 훌륭한 활동에 대해 를 부여하여 서로의 동기 유발을 하기도 한다.위키백과는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한다. 다중이 익명으로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커뮤니티가 활력을 띄면 정보의 질은 꾸준히 향상된다. 위키백과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크라우드 소싱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분야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위키백과에 정보를 추가하는 사람들은 전체 사용자 가운데 극히 소수라는 연구가 있고, 로그인 하지 않은 사용자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커뮤니티가 이등시민 취급을 한다는 비판도 있다. 다트머스 대학교 연구진은 이를 검증하기 위한 2007년 연구에서 "로그인 하지 않은 익명의 편집자나 기여 횟수가 적은 편집자의 활동 역시 로그인 사용자와 동등한 신뢰성을 보인다"고 밝혔다. 2009년 의 편집인 헨리 블라젯은 위키백과 문서에 대한 표집 조사 결과 대다수의 문서가 "아웃사이더"에 의해 생성된 뒤 "인사이더"에 의해 완성된다고 분석하였다.몇몇 언어의 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자체적으로 문서들을 엮어서 출판물을 제작하기도 하는데, 독일어 위키백과의 경우 독일어 위키백과의 문서를 모아 2004년에 CD로, 2005년, 2006년에는 DVD와 책으로 제작하였다.위키백과의 내용은 처음에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아래 배포되었으나 2009년 6월, 로 변경되었다.위키백과는 특별한 위계가 없는 사용자들의 집단 활동이라는 점에서 아나키즘의 요소를 갖는 민주주의 체계로 평가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내의 모든 문서는 직접 내용 편집에 참여한 사용자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위키백과의 이러한 은 커뮤니티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가치에 대한 사적 이익 추구를 억제함으로써 공유지의 비극을 방지하고자 만들어졌다.위키백과의 관리는 의 정신과 이를 구현하기 위한 에 따라 이루어진다. 정책과 지침은 커뮤니티의 에 의해 수립되거나 수정된다. 총의의 개념은 2005년 찰스 메튜의 위키미디어 메일링 리스트 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단순한 만장일치가 아닌 현시점에서 커뮤니티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이다. 위키백과의 커뮤니티는 각각의 언어마다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판마다 총의는 다를 수 있다. 위키백과 초창기 가장 큰 논란은 문서의 중립성 확보였고 이에 따라 위키백과가 시작된지 한 달 만에 이 정책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 역시 2004년 중립적 시각 정책을 도입하였다. 문서와 커뮤니티의 성장에 따라 지침이 필요한 다양한 사안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 역시 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늘어났다.위키백과 사용자들 사이의 논쟁 또는 분쟁은 모두 위키백과 커뮤니티 안에서 해결된다. 사용자들 사이의 문제는 서로간의 토론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문서의 훼손이나 악의적인 행위 등으로부터 선의의 편집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도 필요하다. 문서를 삭제하거나 악의적인 사용자를 차단하는 것과 같은 활동은 커뮤니티 안에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평가받아 로 선출 된 사용자가 실행한다. 한편 사용자 사이의 논쟁은 와 같은 기구를 통해 상호 조정을 이루기도 한다.위키백과는 위키미디어 재단이 운영하는 위키미디어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이다.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에는 위키백과 외에도 위키낱말사전 위키책 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문헌 위키인용집 위키데이터 등이 있다. 모든 위키미디어 프로젝트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용자들의 커뮤니티에 의해 운영되며 위키미디어 재단은 이들 프로젝트의 유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관리 사용자 커뮤니티에 대한 지원과 같은 일들을 담당한다.위키미디어 재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비영리 기구로 위키백과를 비롯한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의 유지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호스팅하고 있다. 위키백과가 시작된 지 2년 후인 2003년 6월 20일 플로리다 주 법인으로 설립되었으며 2007년 본부를 샌프란시코로 이전하였다. 2013년 귀속분 국세청 신고서에 따르면 재단의 기금 수익은 3천9백7십만 달러이고 지출된 경비는 2천9백만 달러이다. 또한 총 자산은 3천7백2십만 달러로 이 가운데 부채는 230만 달러이다.2014년 5월 위키미디어 재단은 초대 사무국장 슈 가드너가 퇴임하고 2대 사무국장으로 라일라 트레티코프를 지명하였다. 은 2014년 5월 1일자 보도를 통해 새로운 사무국장의 취임을 소개하면서 트레티코프의 “정보는 공기와 같이 자유를 좋아한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2016년 6월 3대 사무국장으로 캐서린 마허가 취임하였다. 마허는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의 운영 방향에 대해 커뮤니티 내에서 상호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위키백과의 운영 프로그램은 미디어위키이다. 오픈 소스로 배포되는 자유 소프트웨어인 미디어위키는 PHP 기반의 위키 소프트웨어로 MySQL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다. 위키백과 초기에는 펄로 작성된 유스모드위키를 사용하였으나 2002년 1월에 마그누스 만스커가 개발한 PHP와 MySQL 기반의 위키가 도입되었고 다시 2002년 7월 리 다니엘 크로커가 개발한 미디어위키를 3세대 소프트웨어로 도입하였다. 미디어위키는 이후로도 여러차례 업데이트 되어 위키백과를 비롯한 여러 위키미디어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가 되었다.위키백과는 낮 시간을 기준으로 1초에 25,000~60,000페이지 요청을 수신한다. 페이지 요청은 먼저 스퀴드 캐시 서버의 프론트엔드 계층으로 내보낸다. 스퀴드 캐시가 처리할 수 없는 요청은 리눅스 가상 서버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고 있는 부하 제어 서버로 내보낸다. 즉,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렌더링한 페이지를 보여 주기 위해 아파치 웹 서버들 가운데 하나로 요청을 내보낸다는 뜻이다. 웹 서버는 요청한 페이지를 전달하여 모든 언어판의 위키백과에 대한 페이지 렌더링을 수행한다. 속도를 더 빠르게 하기 위해 렌더링 된 페이지는 만료될 때까지 분산 메모리 캐시에 캐시 처리되며 이로써 대부분의 동일한 페이지 접근을 위해 페이지 렌더링을 완전히 생략할 수 있다.현재 사용되고 있는 위키백과의 서버는 주로 우분투로 이루어진 리눅스 서버들의 컴퓨터 클러스터로 운영되고 있다. 2009년을 기준으로 위키미디어 재단은 미국 플로리다주에 300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44대의 서버를 운영하였다. 2013년 1월 22일 위키백과는 중요 데이터를 미국의 데이터 센터 공기업인 에퀴닉스로 이전하였다.위키백과에서는 단순 반복적인 활동을 위해 봇으로 불리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봇은 자주 혼동되는 오탈자를 바로잡거나 자동으로 생성될 수 있는 반복적인 문구의 삽입과 같은 일을 담당한다. 봇 역시 위키백과 커뮤니티의 사용자들이 작성하여 운영하며 잘못된 사용을 막기 위해 별도의 등록 절차를 거친다.2005년에 영국의 네이처 지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위키백과의 42가지 난해한 과학 기사를 비교한 평가 리뷰를 발표하였다. 그 결과는 위키백과의 정확도 수준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근접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비평가들은 모든 범위의 기사에 대한 무작위 표본 추출을 하였거나 사회과학 또는 논쟁적인 사회 문제에 중점을 둔 유사한 연구의 경우에서는 그렇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또 2006년 기사에서 타임 지는 위키백과는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개방 정책을 갖고 있으며 이로써 위키백과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백과사전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고 지미 웨일즈의 비전을 실현한다고 밝혔다.위키백과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편집자의 시각에 따라 누군가가 악의적인 의도등으로 잘못된 정보를 입력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잘못된 정보가 퍼져나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어 2005년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존 시겐설러라는 미국의 전직 언론인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올려져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으며 한 익명 사용자가 신바드라는 미국의 코미디언이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올려 인터넷 전반에 잘못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또한 ��키백과는 미국 내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로 인해 컨서버피디아가 2006년에 개설되었다.미 연구팀에 의하면 영어판 위키백과에 등록된 문서 중 회사 관련 내용의 약 60% 정도가 잘못된 사실을 담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연구팀의 교수는 이를 특정 회사들이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위키백과에 회사에 유리한 내용을 삽입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고대 그리스 종교에 등장하는 신 반신으로 구성된 가계도이다.광자(光子 photon) 또는 빛알은 기본입자의 일종으로 가시광선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파를 구성하는 양자이자 전자기력의 매개입자이다. 기호는 그리스 문자 formula_1이다. 전자기력의 효과는 미시적 거시적인 수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데 광자가 질량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에서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다른 기본입자들과 같이 광자는 양자역학과 입자-파동 이중성 이론을 통해 가장 잘 설명된다. 하나의 현상임에도 파동과 양자라는 두 가지 관측 가능한 모습을 가진 광자의 진짜 성질은 어떤 역학적 모델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빛의 이중성의 묘사 전자기파에서의 에너지의 위상을 파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전자기파의 양자의 위치는 공간적으로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광자 한 개의 에너지는 플랑크 상수(formula_2)에 빛의 진동수(formula_3)를 곱한 값 즉 formula_4 이고 운동량은 formula_5(formula_6는 광속)이다.아이작 뉴턴은 빛이 입자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전적인 입자론은 빛의 파동적인 성질, 특히 간섭을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18세기에 와서는 이중 슬릿 실험을 설명할 수 있는 토머스 영의 파동설이 우세하였고, 제임스 맥스웰의 고전전자기학의 완성으로 파동설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와서 고전적인 파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자외선 파탄이 그중 한 예인데, 이에 따르면 열적 평형에 있고 유한한 온도를 가진 고전적 흑체는 무한한 양의 전자기파를 방출하여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스 플랑크는 전자기파가 양자화 되었다는 가설을 도입하였다 . 그러나 그는 실제로 빛이 입자로 구성되었다기보다는, 어떤 알 수 없는 현상에 의해 파동의 에너지가 양자화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힐베르트의 가설에서 시작하여, 빛이 실제로 입자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하면서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 이후 양자역학의 발전과 양자전기역학의 도입으로, 빛이 양자화되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빨간색의 광자에너지는 formula_10이다. 따라서 단위물질량당 광자에너지는 +보손는 스핀이 정수고,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매개 입자다. 인도의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의 이름을 땄다. 페르미온의 반대말이다. 모든 입자는 스핀이 정수이거나 반정수이다. 스핀-통계 법칙에 따라 전자의 경우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고, 후자는 페르미-디랙 통계를 따른다. 전자를 보손, 후자를 "페르미온"이라고 부른다. 보손은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므로,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즉, 여러 입자가 동일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예를 들면, 광자는 스핀이 1인 보손이다. 따라서, 들어온 빛을 완전히 흡수하는 흑체가 복사하는 전자기파의 파장 분포는 보스 통계를 따른다. 또 응집물질물리에 나오는 준입자 포논도 보스 통계를 따른다.현재 알려진 기본 입자 가운데 보손은 다음과 같다.초대칭이나 각종 대통일 이론 등 표준 모형을 확장하는 모형들은 대부분 추가 보손을 예측하나 이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짝수개의 페르미온으로 구성된 합성 보손이 구성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구성된 합성 보손이다. 이 밖에도 보손들로도 합성 보손이 구성될 수 있다.양자장론의 스핀-통계 정리에 따라, 로런츠 대칭이 깨지지 않는 이상 모든 보손은 항상 정수의 스핀을 갖는다. 즉, 가능한 스핀은 0, 1, 2, … 따위다. 기본 보손의 경우, 와인버그-위튼 정리에 따라 보통 0, 1, 2만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며, 스핀 2인 입자는 중력자, 스핀 1인 입자는 벡터 보손, 스핀 0인 입자는 스칼라 보손으로 불린다.페르미온과 달리, 보손은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즉, 한 양자 상��에 임의의 수의 보손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보손은 낮은 온도에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등의 특이한 성질을 보인다.디리클레 합성곱(Dirichlet convolution) 혹은 디리클레 포갬은 수론적 함수(arithmetic function)의 집합에서 정의되는 이항연산(binary operation)으로 수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독일 수학자 르죈 디리클레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수론적 함수이다.여기서 덧셈은 에 대해 이루어진다.이 연산의 일반적인 성질을 몇가지 나열해 보면:덧셈과 디리클레 포갬으로 수론적 함수의 전체집합은 을 곱셈에 대한 항등원으로 하는 가환환을 이루고 이를 디리클레 환이라 부른다. 이 환의 unit은 ≠ 0 을 만족하는 f들이다.나아가, 곱셈적 함수의 집합은 디리클레 포갬과 을 항등원으로 하는 가환군을 이룬다.곱셈적 함수에서 몇가지 중요한 곱셈적 함수들간의 포갬에의한 관계식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주어진 수론적 함수 formula_2에 대해 디리클레 합성곱을 연산으로 하는 역원 formula_3이 존재한다. 이 역원을 계산하는 계산식은 다음과 같다. 맨 첫 번째 항은 다음과 같다.그리고 formula_5일 경우는 다음과 같다.예를 들어, 모든 formula_7에 대해 1 인 수론적 함수의 역원은 뫼비우스 함수가 된다. 더 일반적인 관계는 뫼비우스 반전 공식에 의해 유도된다.디리클레 급수와의 관계.가 수론적 함수이면, L-급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급수가 수렴하는 복소수 s에 대해L-급수의 곱은 디리클레 포갬과 다음 관계가 있다.좌변이 존재하는 모든 s에 대해,위 관계식은 L-급수를 푸리에 변환과 비교해 보면, 포갬 정리과 긴밀하다.수론적 함수의 미분과의 관계.물론 수론적 함수는 연속함수가 아니므로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미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산술함수에서 따로 미분을 정의하여 디리클레 합성과 연계하여 사용한다.주어진 산술함수 formula_2의 미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물론 formula_11는 망골트 함수이다.예를 들어 모든 formula_7에 대해 1 인 수론적 함수 formula_14이 있다고 할 때 관계식 formula_15 때문에 다음이 성립한다위와 같이 미분을 정의할 경우 다음과 같은 성질들이 성립한다. +수학에서, 동치관계는 논리적 동치와 비슷한 성질들을 만족시키는 이항관계이다.집합 formula_1 위의 동치관계 formula_2는 반사관계이자 대칭관계이자 추이관계인 이항관계이다. 즉, 다음 조건들이 성립하여야 한다.집합 formula_1 위에 동치관계 formula_2이 주어졌을 때, 원소 formula_3의, 동치관계 formula_2에 대한 동치류(同値類) formula_16는 그 원소와 동치인 원소들의 집합이다 즉,집합 formula_1의 formula_2에 대한 상집합 formula_20은 formula_2에 대한 동치류들의 집합이다. 즉집합 위의 동치관계로부터 표준사상을 구성할 수 있다. 즉 집합 formula_1 위의 동치관계 formula_2에 대하여 함수를 표준사상이라고 한다.반대로, 전사함수 formula_30에 대하여, 이항관계는 동치관계이며 그 상집합은집합 위의 동치관계와 그 집합의 분할 사이에는 자연적인 일대일 대응이 존재한다. 즉, 다음과 같다.집합 formula_1 위의 동치관계 formula_2에 대하여, 그 상집합 formula_20은 formula_1의 분할이다. 즉,반대로 집합 formula_1의 분할 formula_44에 대하여 이항관계는 서양의 과학 혁명을 집대성한 책의 하나이다. 줄여서 '프린키피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1687년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세 권짜리 저작으로, 라틴어로 썼다.이 책에서 뉴턴은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루는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요하네스 케플러가 천체의 운동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알아낸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뉴턴은 자신의 위 두 법칙들로써 증명해 낸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되어 케플러 갈릴레오를 거치면서 이루어져 온 천문학의 혁명을 완성하는 한편 갈릴레오 이후 데카르트 하위헌스 등을 통해서 이루어져 온 근대 역학의 성공을 눈부시게 보여주고 있다.에드먼드 핼리도 이 책을 바탕으로 1530년 1607년 1682년에 나타났던 혜성들의 궤도를 계산해 이 혜성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천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일정한 주기에 따라 1750년대 말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예견했다. 뉴턴도 핼리도 죽은 뒤인 1758년에 수수께끼 같은 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핼리 혜성이다.제1편은 운동에 관한 일반적 명제를 논술하였고 제2편은 매질 속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다루고 마지막 제3편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케플러의 행성의 타원궤도 등의 행성의 운동을 증명하였다.뉴턴은 그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역학에 적용하였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기하학적인 증명 방법을 사용하고 미적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람들의 이해를 고려해서라고 한다.1687년에 초판, 1712년 증보 개정판, 그리고 1726년 제3판이 출간되었다.저항이 있는 공간 속에서 물질의 입자가 어떻게 운동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이 내용은 오늘날의 소위 우주관에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목적에 맞추어져 있다.가장 성과가 많은 부분이다. 태양과 다른 행성들의 질량이 추론되고 순전히 수량적인 방식을 이용해서 지구의 평평한 모습이 설명되며 조수의 이론 등이 상세히 제시되고 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비상대론적 양자역학적 계의 시간에 따른 진화를 나타내는 선형 편미분 방정식이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도입하였고 그가 발명한 파동역학의 기본 방정식이다.파동 함수 formula_1에 대한 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해밀토니언 연산자 formula_3는 고전적 해밀토니언에 해당하는 연산자로, 후자를 양자화하여 얻는다. formula_4는 폴 디랙의 브라-켓 표기를 사용해 나타낸, 슈뢰딩거 묘사에서의 힐베르트 공간의 상태 벡터이다. 이를 파동 함수 formula_5로 나타낼 수 있다. 해밀토니언 연산자 formula_6는 보통 미분 연산자이다. 예를 들어, 퍼텐셜 formula_7 속에 있는, 질량이 formula_8인 비상대론적 입자의 경우 해밀토니언은 다음과 같은 2차 미분 연산자이다.즉, 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2차 편미분 방정식이 된다.라그랑지언과 이차 양자화.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라그랑지언으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예를 들어, 퍼텐셜 formula_7 속에 있는, 질량이 formula_8인 비상대론적 입자의 경우 슈뢰딩거 라그랑지언은 다음과 같다.여기서 두 번째 표현은 전미분항을 무시하고 쓴 것이다.이 라그랑지언을 고전적 가환 또는 반가환 장의 라그랑지언으로 여겨 양자장론으로 이차 양자화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외부 배경장 속에서 움직이는 임의의 수의 비상대론적 보손 또는 페르미온을 나타내는 양자장론을 얻는다. 또한 이 경우 비선형 상호작용항을 추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로스-피타옙스키 방정식이 이러한 꼴이다.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광자의 에너지 E와 진동수 및 플랑크 상수 h 사이의 관계를로 나타내었다. 1924년 루이 드 브로이는 광자 뿐만 아니라 모든 입자가 대응되는 파동함수 formula_16를 가진다는 드 브로이 가설을 발표하고, 파동의 파장 와 입자의 운동량 p에 대해의 관계식을 제안했으며, 이 관계식이 특수상대론 및 위의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식과 일관됨을 보였다. 즉, E = h는 광자 뿐만 아니라 모든 입자에 대해 성립한다는 것이다.위 식들을 각진동수 formula_18와 파수 formula_19 및 formula_20를 이용해 표현하면p와 k를 벡터로 표현하면에르빈 슈뢰딩거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1925년 발표하였다. 슈뢰딩거는 평면파의 위상을 복소 위상인자로 나타내었다.및 각 방향의 부분들을 더하면이 성립함을 알았다. 이제 이를 총 에너지 E와 질량 m 및 위치에너지에 대한 고전역학적 공식에 대입하여, 당시에 슈뢰딩거가 얻었던 위치에너지가 주어진 3차원 공간 상의 단일입자에 대한 공식에 도달한다.슈뢰딩거 방정식은 비상대론적이므로 특수상대론과 불합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상대론적으로 일반화하면 스핀에 따라 클라인 고든 방정식이나 디랙 방정식 따위를 얻는다. 이들은 비상대론적인 극한에서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수렴한다.또한, 슈뢰딩거 방정식에 비인 항을 추가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응집물질물리학에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그로스-피타옙스키 방정식은 슈뢰딩거 방정식에 사승 상호작용을 추가한 것이다. +엔트로피는 열역학적 계의 유용하지 않은 에너지의 흐름을 설명할 때 이용되는 상태 함수다. 통계역학적으로, 주어진 거시적 상태에 대응하는 미시적 상태의 수의 로그로 생각할 수 있다. 엔트로피는 일반적으로 보존되지 않고,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시간에 따라 증가한다. 독일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1850년�� 초에 도입하였다. 대개 기호로 라틴 대문자 를 쓴다.엔트로피에는 열역학적 정의와 통계학적인 정의, 두 가지의 관련된 정의가 있다. 역사적으로, 고전 열역학적 정의가 먼저 발전하였다. 고전 열역학적인 관점에서, 그 이론은 원자나 분자 같은 수많은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학설의 안정성은 그러한 성분들의 평균적인 열특성으로 설명된다.이론을 구성하는 성분의 세부적인 성분들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특성은 온도 압력 엔트로피 열용량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평균적인 지표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 이론의 특성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는 평형 상태임을 가정하였다. 엔트로피의 고전 열역학적 정의는 최근 비평형 열역학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엔트로피를 포함한 열특성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세계에서의 움직임에 대한 정역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정의되었다. 그 예로 처음에는 기체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광자 음자 스핀과 같은 양자 역학적으로 생각되는 뉴턴 입자가 있다. 이 이론의 특성에 대한 통계학적 설명은 고전적인 열역학을 사용하여 이론의 특성을 정의하는 것이 몇몇 변수의 영향을 받는 이론의 최종적인 상태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점점 신뢰할 수 없는 예측 기술이 되어감으로 인하여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고전적 열역학에서는 엔트로피 "S"의 절대적 값은 정의할 수 없고, 대신 그 상대적 변화만 정의한다. 열적 평형을 이뤄 온도가 formula_1인 계에 열 formula_2를 가하였다고 하자. 이 경우 엔트로피의 증가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이 식을 적분하여 유한한 엔트로피 차이를 정의한다.엔트로피는 온도의 함수로써 주어진 열이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같은 크기의 열량이라도 고온의 계에 더해졌을 때보다 저온의 계에 더해졌을 경우에 계의 엔트로피가 크게 증가한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최대일 때 열에너지가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은 최소이고 반대로 엔트로피가 최소일 때 열에너지가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최대가 된다.실제로 외부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유용한 에너지", 존재하지만 외부적인 일을 하는 데에 쓰일 수 없는 에너지를 "사용불가능한 에너지"라고 한다. 계의 총 에너지를 "유용한 에너지"와 "사용불가능한 에너지"의 합으로 정의 할 때, 엔트로피는 전체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주어진 계의 절대 온도에 반비례하는 "사용불가능한 에너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깁스 자유 에너지 또는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와의 관계식에서 "TS" 로 나타나는 것을 생각해 보라.엔트로피는 계의 자유 에너지를 결정짓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온도는 평형 상태에 있는 계에서만 정의되는 값이므로, 이와 같은 엔트로피의 열역학적인 정의는 오직 평형 상태에 있는 계에서만 성립한다. 반면 통계역학적인 엔트로피의 정의는 모든 계에 적용된다 . 따라서 엔트로피의 보다 근본적인 정의로는 통계역학적인 정의를 꼽을 수 있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흔히 분자들의 무질서도의 증가로 정의되어 왔으며, 최근들어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으로 해석되고 있다.통계역학에서는 엔트로피의 차 뿐만 아니라 엔트로피의 절대적 값을 정의할 수 있다. 확률적 상태 분포를 가지는 어떤 계의 앙상블을 생각하자. 여기서 단일계의 상태 formula_5의 확률을 formula_6라고 하자. 이 경우 앙상블의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고립된 계의 경우, 통상적으로 모든 미시적 상태의 확률이 같다고 가정한다. 즉 formula_8 (여기서 formula_9는 가능한 미시적 상태의 수)다. 이 경우다. 여기서 "k"B 는 볼츠만 상수다. 이 식은 루트비히 볼츠만이 처음 발견하였다.열저장고와 열적 평형을 이룬 계의 미시상태는 볼츠만 분포 formula_11를 따른다. 이 경우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13는 분배함수다. formula_14를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로 정의하여 formula_15로 쓰기도 한다.양자역학적 앙상블은 밀도행렬 formula_16로 나타내어진다. 이 경우 폰노이만 엔트로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밀도행렬을 대각화하면 그 각 원소는 확률 formula_6가 되므로 이는 위의 통계역학적 정의와 동등하다. 이 정의는 존 폰 노이만이 발견하였다.블랙홀은 고전적으로 털없음 정리에 의하여 미시상태가 없다. 그러나 반고전으로 마치 어떤 유한한 엔트로피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이 엔트로��는다. 여기서 formula_20는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의 넓이다. 이를 베켄슈타인-호킹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이는 야콥 베켄슈타인( )이 가설을 세웠고 스티븐 호킹이 반고전적으로 유도하였다. 또한 특수한 경우 끈 이론이나 루프 양자 중력 등으로 미시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블랙홀을 포함하는 계의 경우 베켄슈타인-호킹 엔트로피를 무시하고 계산하면 일반적으로 열역학 제2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이를 포함하여 계산하여야만 성립한다.formula_21은 특정 온도 formula_22에서 시스템의 에너지 중에서 일로 변환할 수 없는 에너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전체 에너지에서 formula_21를 뺀 양이 자유 에너지가 된다.열 엔트로피와 위치 엔트로피.엔트로피란 우주 내부 어떤 시스템에서 생기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변화하는 량의 척도이다. 엔트로피를 계를 구성하는 성분들의 배열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위치 엔트로피와 열 엔트로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 열 엔트로피는 분자들 사이에서의 에너지 양자의 분포들에 의한 구별가능한 배열을 기준으로 하여 계산된 엔트로피를 말한다.위와 같이 분류한 엔트로피를 계의 관점에서 본 알짜엔트로피 변화를 나타낼 때 이용할 수 있다.계와 주위가 갖는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여기서 열 엔트로피는 계와 주위 모두에 존재하지만 계를 제외한 모든 곳을 지칭하는 주위에서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는 너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므로 그 변화를 무시할 수 있고 주위가 갖는 엔트로피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온도 즉 열 엔트로피이다. 이 때문에 주위의 엔트로피 변화를 열 엔트로피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계에서 열 엔트로피변화는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가 더욱 계의 엔트로피변화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계의 엔트로피 변화를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라 할 수 있다. +라플라스 방정식은 2차 편미분 방정식의 하나로, 고윳값이 0인 라플라스 연산자의 고유함수가 만족시키는 방정식이다. 전자기학, 천문학 등에서 전위 및 중력 퍼텐셜을 다룰 때 쓰인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의 이름을 땄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해를 조화함수라고 한다.formula_1차원 리만 다양체에서 formula_2가 라플라스-벨트라미 연산자라고 하자. 그렇다면 라플라스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2차 편미분방정식이다.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서는관련된 편미분 방정식.우변을 주어진 함수 formula_6로 바꾼 경우는 푸아송 방정식이라고 한다. 즉 라플라스 방정식은 formula_8인 푸아송 방정식의 특수한 경우다.우변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헬름홀츠 방정식을 얻는다. 라플라스 방정식은 formula_10인 경우다.코시-리만 방정식의 해의 두 성분 모두 각각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디리클레 문제란 어떤 영역 formula_11의 경계에서의 가 특정 함수로 주어졌을 때, 영역 formula_11위의 해 를 구하는 것이다. 열전도에서 등장하는 라플라스 방정식을 빗대어 보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경계면의 온도를 특정한 온도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내부의 온도가 더 이상 변화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후 내부의 온도 분포를 찾는 것이 디리클레 문제에 해당한다.라플라스 방정식의 노이만 경계 조건은 경계 D에서 함수 formula_13 자신이 아니라 법선 도함수를 조건으로 가진다. 물리학에서는 경계에서만 벡터장의 효과를 알고 있을 때 그 벡터장의 퍼텐셜을 구하는 데 사용한다.라플라스 방정식의 해를 조화 함수라고 한다. 조화 함수는 방정식의 해가 되는 영역에서는 항상 해석적이다. 만일 두 함수가 각각 라플라스 방정식의 해라면, 두 함수의 선형 결합도 해이다. 이 성질을 중첩의 원리라고 하며 복잡한 문제의 해를 간단한 해들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인다.2차원 라플라스 방정식.2차원에서 라플라스 방정식은 두 개의 의존변수의 형태로 나타난다.2차원 라플라스 방정식의 차분방정식.formula_16는 격하게 푸아송 방정식의 차분방정식은 다음과 같다.복소 범위의 해석적 함수 formula_18의 실수부와 허수부는 모두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formula_19이고라 하자. formula_21가 해석적이려면를 만족해야 한다. 여기서이다. 따라서 formula_24 는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 formula_25도 비슷한 방법으로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함을 보일 수 있다.2차원 라플라스 방정식과 푸리에 급수.극좌표계 formula_26에서 라플라스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따라서 그 일반해는 변수분리법으로 구할 수 있고 다음과 같다.이는 함수 formula_29의 푸리에 급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으로 나타낼 수 있다. 즉, 푸리에 급수의 계수는 로랑 급수의 계수와 같다.3차원 라플라스 방정식.3차원 공간에서 구면좌표계 formula_31에서 변수분리법을 적용하면 라플라스 방정식의 일반해는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33는 구면 조화 함수이고 formula_34와 formula_35은 임의의 계수다. 물론 formula_18가 원점에서 연속적이려면 formula_37이다. +적분은 미적분학의 두 기본연산 중의 하나이다. 적분은 미분처럼 복잡한 함수를 보다 간단한 함수들로 분해하여 계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여러 함수에 대한 적분을 모아 놓은 적분표는 유용하게 사용된다.아래의 식들에서 는 적분 상수이다.아래 문서들에서 다양한 적분 공식들을 찾아볼 수 있다.어떤 함수의 적분은 원시 함수로 나타낼 수 없지만 특정 구간에서의 적분값을 계산할 수는 있다. 다음은 그들 중 유용한 몇 정적분이다.수학에서 삼각함수는 각의 크기를 삼각비로 나타내는 함수이다. 예각 삼각함수는 직각 삼각형의 예각에 직각 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의 비를 대응시킨다. 임의의 각의 삼각함수 역시 정의할 수 있다. 삼각함수는 복소수의 지수 함수의 실수 허수 부분이며 따라서 복소수를 다룰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장 근본적인 주기 함수이며 각종 주기적 현상을 다룰 때 푸리에 급수의 형태로 등장한다.삼각함수에는 3개의 기본적인 함수가 있으며 이들은 사인 코사인 탄젠트라고 한다. 이들의 역수는 각각 코시컨트 시컨트 코탄젠트라고 한다.직각 삼각형을 통한 정의.C가 직각인 삼각형 ABC에서 각 A B C의 대변의 길이를 formula_7라고 할 때 사인 코사인 탄젠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또한 코시컨트 시컨트 코탄젠트는 위 세 함수의 역수가 되며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단위원을 통한 정의.좌표평면에서 원점을 중심으로 하고 반지름 r의 길이가 1인 원을 단위원이라고 한다. 이 단위원 위의 점 A formula_14에 대해, formula_15축과 점 A와 원점을 잇는 직선간의 각을 formula_16 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오일러의 공식 formula_23에 formula_24를 대입하면,formula_26를 대입하면,연립하여 풀면, 쌍곡선함수,사인 · 코사인 · 코시컨트 · 시컨트는 주기가 formula_31인 주기함수이다. 즉, 임의의 복소수 formula_32에 대하여,탄젠트 · 코탄젠트는 주기가 formula_37인 주기함수이다. 즉, 임의의 복소수 formula_32에 대하여,사인과 코사인은 실수선 위에서 해석함수이며, 복소 평면 위에서 정칙함수이다. 이들은 복소 무한대 formula_41에서 본질적 특이점을 갖는다.탄젠트는 실수선의 formula_42 에서 정의되지 않는다.특별한 각에서의 삼각 함수의 값은 다음과 같다.각 사분면에 따른 삼각함수의 부호는 다음과 같다.삼각함수 사이에는 많은 항등식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자주 쓰이는 것은 피타고라스 항등식으로, 어떤 각에 대해서도 사인의 제곱과 코사인의 제곱의 합은 1이다. 이는 반지름의 길이가 formula_45인 빗변이고 밑변이 formula_46 각 formula_15의 대변인 높이 formula_48에 대하여 formula_49를 만족한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삼각함수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이것은 다음과 같다.따라서 이것은 또한 단위원에서 다음과 같다.삼각함수의 덧셈정리.서로 다른 삼각함수의 관계는 삼각함수의 덧셈정리이다. 두 각의 합과 차의 사인과 코사인은 x y에 대한 사인과 코사인으로 구할 수 있다. 이는 제2 코사인 법칙과 두 점 사이의 거리 공식을 연립해 유도할 수 있고 제1 코사인 법칙과 사인 법칙을 연립해 유도할 수 있고 오일러의 공식을 이용해 유도할 수도 있다.두 각의 크기가 같을 경우에는 덧셈정리를 간단하게 배각공식을 이용할 수 있다.모든 삼각 함수는 다른 삼각 함수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다음은 6개의 기본 삼각함수에 대한 도함수와 부정적분이다.사인 법칙은 임의의 삼각형 ABC에서 각 A, B, C의 대변 "a", "b", "c"에 대해 다음과 같은 관계를 만족함을 나타낸다.도 성립한다. 여기서 은 삼각형의 외접원의 반지름의 길이를 나타낸다.코사인 법칙에는 총 두 가지의 법칙이 있다.코사인 제 1 법칙에 따르면양변의 길이와 알고자 하는 변 사이의 두 각의 크기를 알 경우, 다른 한 변의 길이를 알��낼 때 사용할 수 있다.코사인 제 2 법칙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확장한 것이다.가 성립하고, 위의 식을 변형하면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코사인법칙은 두 변의 길이와 끼인각의 크기를 알 때 삼각형의 나머지 한 변의 길이를 구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또한 모든 변의 길이를 알고 있을 때 각의 코사인값을 구할 때에도 사용할 수 있다.탄젠트법칙은 임의의 삼각형 ABC에서 각 A B의 대변 에 다음과 같은 식을 만족시킨다.기원전 2~1세기 그리스의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은 각도에 대해 달라지는 현의 길이를 다룬 적이 있다.현재 쓰는 것과 같은 삼각함수의 원형은 굽타 시대 인도 천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후 4~5세기 인도의 천문학 책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아랍어를 통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유럽에 전해졌다.삼각함수가 동아시아에 전해진 것은 16~17세기 때이다.영어 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를 음차한 것이다.는 뜻의 라틴어 에서 왔다. 각각 원에 접하는 선과 자르는 선에 빗대어 붙인 이름이다.코사인, 코탄젠트, 코시컨트의 ‘코’가 처음 쓰인 책으로는 의 이 있는데, ‘여각의 사인’을 ‘코사인’으로 줄여 부른 것이다.한자 문화권에서는 독일의 선교사과학자인 이 명나라에서 저술한 등의 책에서 사인코사인탄젠트를 각각 정현여현정절이라고 번역했다. 코탄젠트시컨트코시컨트는 각각 여절정할여할이라 한다. 이 이름은 근대화되기 전의 조선일본에서 쓰였고 지금도 중국에서 쓰인다. +르장드르 다항식() formula_1는 르장드르 미분 방정식()이라고 불리는 다음 미분 방정식의 해가 되는 함수들이다.스튀름-리우빌 형식으로 쓰면이다. 이 함수와 미분 방정식의 이름은 프랑스의 수학자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이 상미분 방정식은 물리와 공학의 여러 분야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구면좌표계에서 라플라스 방정식을 풀 때 등장한다.구체적인 몇몇 르장드르 다항식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formula_4인 경우의 구간 사이에서의 르장드르 다항식의 그래프는 다음과 같다.르장드르 다항식에는 다음과 같은 몇몇 간단한 성질이 있다.르장드르 다항식 끼리 구간 에서 formula_13 내적을 취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여기서 formula_15은 크로네커 델타를 의미한다. 따라서 르장드르 다항식은 구간 에서 서로 수직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르장드르 방정식이 스튀름-리우빌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르장드르 미분 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스튀름-리우빌 형식으로 놓을 수 있다.여기서 고윳값 formula_17이다. 스튀름-리우빌 문제의 해의 집합은 일반적으로 함수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루므로 르장드르 다항식도 마찬가지로 직교 기저를 이룬다. 르장드르 다항식의 계산 및 표현.르장드르 다항식은 점화식이나 선적분 생성 함수 등 여러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로드리게스 공식은 르장드르 다항식의 일반식이며, 다음과 같다.르장드르 다항식은 다음과 같은 점화식을 만족한다.르장드르 다항식은 다음과 같은 생성 함수를 가진다.선적분을 통한 표현.르장드르 다항식은 유수적분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적분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여기서 적분 경로는 원점을 중심으로 하는 임의의 반시계방향의 폐곡선이다.소수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로봇은 인간과 유사한 모습과 기능을 가진 기계 또는 한 개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동할 수 있고 자동적으로 복잡한 일련의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적 장치를 말한다. 또한 제조공장에서 조립 용접 핸들링 등을 수행하는 자동화된 로봇을 산업용 로봇이라 하고 환경을 인식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기능을 가진 로봇을 '지능형 로봇'이라 부른다. 사람과 닮은 모습을 한 로봇을 '안드로이드'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뜻은 형태가 있으며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계라고도 한다. 그리고 인공의 동력을 사용하는 로봇은 사람 대신 또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통상 로봇은 제작자가 계획한 일을 하도록 설계된다. 로봇'이란 용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 "R.U.R"에 쓴 것이 퍼져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또한 로봇의 어원은 체코어로 "노동"을 의미하는 "Robota"이다.Robot이라는 말은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 R.U.R.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로봇의 어원은 체코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 에서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차페크는 R.U.R.에서 모든 작업능력에서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면서 인간적 을 가지고 있지 않은 로봇이라고 불리는 인조인간을 등장시키고 있다. 로봇은 언젠가 쇠조각으로 변하여 반항하는 정신을 발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창조주인 인간을 전부 죽여 버린다고 하는 비극을 인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로보틱스라는 말은 로봇의 활용과 로봇 공학을 의미한다. 이 말은 미국 과학자이면서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가 1942년에 발간한 단편 Runaround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명사로서 로봇은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일할 수 있는 능력은 있어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을 닮은 것.아이작 아시모프가 1950년 발간한 소설인 'I'Robot'에서 제안된 로봇의 행동에 관한 3가지 원칙이다.군사용 로봇이 공격의 기능을 갖출 경우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게 된다. 하지만 3원칙만 듣게되면 만약 예시로 로봇에게 지구에 있는 나무를 다 없애주라고 할 때 나무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실행을 할 수가 있어 인간에게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를 바꾸려고 한다.그동안 인간이 해 오던 많은 일들을 지금은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는 단조로운 반복 작업이나 따분한 작업 불쾌한 작업들이 많은데 이와 같은 작업은 특히 로봇에게 맡기기에 적합하다. 조립 공장에서 리벳 박는 일 용접 자동차 차체를 칠하는 일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로봇 쪽이 인간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로봇은 언제나 일정한 수준의 정밀도와 정확도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으며 결코 지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품의 품질은 항상 일정하며 게다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많은 양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또한 로봇은 위험한 작업을 대신할 수가 있다. 방호복을 입지 않고 원자력 공장에서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거나 유독 화학 물질을 취급할 수가 있으며 인간에게는 너무 덥거나 추운 환경에서도 일할 수가 있다. 인간의 생명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곳에서도 로봇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폭발물을 수색하거나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일 그리고 우주 공간에서의 작업도 그중의 하나이다.로봇은 우주 공간에서의 작업에 특히 이상적이다. 지구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을 수리하거나 유지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보이저호와 같이 탐사와 발견을 목적으로 먼 천체까지 비행하는 데도 로봇이 사용된다.한편 가정에서도 점점 많은 로봇이 가사를 돕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도 많이 이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 간호보조자는 장애자나 노령으로 인해 체력이 약해진 사람들이 가족들에게서 독립하여 혼자서도 살 수 있도록 해주며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도와 주게 될 것이다.로봇이 사용되는 분야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주로 힘이나 정밀도를 요하는 작업 담당수치 제어 공작 기계.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때 컴퓨터를 이용하면, 제품의 생산 계획이나 설계·제조·보관·출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기계 공업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공작 기계는 금속 등을 가공할 때 사용된다. 과거에는 이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치 제어 공작 기계가 개발되어 기술이 없어도 금속을 가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치 제어 공작 기계는 가공하는 작업의 순서와 내용을 수치 정보로 만들어 기계에 입력시키면 기계가 자동적으로 가공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수치 제어 공작 기계와 자료의 입력 관리를 맡는 컴퓨터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컴퓨터 수치 제어 공작 기계이다. 이 수치 제어 기계에서 더 발전하여 복잡한 가공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가 공작 로봇이다.주로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 담당주로 위험한 환경에서의 작업 담당미국에서는 로봇이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계라기보다 앞으로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서 주로 터미네이터 등 영화에서 로봇이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로 나와 있다. 또 무인 조종 비행기 등 군사에서 쓰는 군사 로봇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2015년 미국의 로봇 제조사인 한슨 로보틱스에서 일상을 위한 최신 인공지능 로봇 을 공개하였다. 한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물론 사람의 표정 성 나이 등을 캐치할 수 있다. 한의 ��장 놀라운 점은 인간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일본 에도 시대에는 가라쿠리 인형 같은 로봇이 있었다. 일본은 아시모등과 같은 휴머노이드형 로봇이나 소니의 AIBO와 같은 애완용 로봇 그리고 산업용 로봇 외에도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로봇 개발에 힘쓰고 있다. 아톰, 건담 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중국에서는 로봇을 산업이나 가정에 도움을 주는 기계라보다는 사람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과 일본 심지어는 대한민국까지도 로봇공학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이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2000년에 선행자라는 이름의 직립보행형 로봇을 개발하기도 했으나 선행자의 양 다리 사이에 설치된 파이프 모양의 부속으로 인하여 일본에서 '최종중화병기 선행자'라는 애니메이션이 발표되는 등 개그캐릭터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조선시대에 물의 힘으로 여러 인형이 작동하는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를 제작하였다. 한국은 초기에는 산업과 경제에 필요한 기계를 제작하였고, 근래에 들어서는 휴머노이드형 로봇 개발에 힘쓰고 있다. 로봇은 산업 뿐만 아니라 대회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겨루는 용도로도 제작되고 있다. 또한 물리적인 움직임 없이 사람과 의사소통하며 감정을 교류하는 소셜 로봇도 있다. 예를 들면, 2015년 5월 글로벌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인디고고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된 뮤지오가 있다. +깊은 생각은 더글러스 애덤스의 과학소설 에 등장하는 상상의 컴퓨터이다.소설 속에서 깊은 생각은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기 위해 만들어졌다. 결국 컴퓨터는 750만 년 동안 계산을 한 결과 42라는 답을 계산해 내지만, 깊은 생각의 제작자들은 정작 이 답에 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깊은 생각 자신도 궁극의 질문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내놓지 못한 채, 결국 42라는 답에 대한 질문이 무엇인지를 계산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컴퓨터를 제작할 것을 제안한다. 천만 년 동안 계산을 하고 결과를 내어 놓기 5분을 남겨놓고 지구는 보곤 공병함대에 의해 파괴된다.원작 라디오 시리즈에선, Geoffrey McGivern이 그 목소리를 담당했고, 후의 LP 녹음과 TV 시리즈에선 Valentine Dyall가 목소리를 연기했다.체스 세계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던 컴퓨터 딥 블루의 이전 모델도 이 소설 속의 컴퓨터의 이름을 따라 딥 소트라 명명되었다. 이후 세대 체스 컴퓨터들의 이름은 딥 프리츠 딥 주니어 등으로 이어진다.소립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標準模型)은 자연계의 기본 입자와, 중력을 제외한 그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 전자기 상호작용)을 다루는 게이지 이론이다. 강력을 다루는 양자 색역학과, 약력과 전자기력을 다루는 와인버그-살람 이론으로 이루어진다. 표준 모형에 따르면, 전자와 중성미자 및 기타 렙톤은 기본 입자이나, 강입자는 쿼크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게이지 보손에 의하여 상호작용한다. 게이지 보손은 이론의 대칭을 나타낸다. 표준 모형의 대칭 가운데 강한 상호작용의 대칭은 색가둠으로 인하여 간접적으로만 관찰할 수 있고, 약한 상호작용의 대칭은 힉스 메커니즘으로 인하여 깨진다. 따라서 거시적으로는 전자기 상호작용의 대칭만 쉽게 관찰할 수 있다.표준 모형은 실험적으로 힉스 메커니즘을 제외하고 1980년대에 완성되었다. 힉스 메커니즘은 2010년대 초에 실험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표준 모형의 페르미온.표준 모형에서는 중성미자와 게이지 보손 힉스 보손을 제외한 모든 입자를 디랙 입자로 나타낸다. 이들 입자는 스핀 (즉 페르미온)을 가지며 질량과 전하를 가지고 그 반입자와 서로 다르다. 표준 모형은 이들 입자의 질량을 예측하지 못하나 대체로 세대가 높을 수록 더 무겁다. 표준 모형의 디랙 입자 중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입자는 쿼크 그렇지 않는 입자는 중성미자와 함께 렙톤으로 분류한다. 쿼크는 ± 혹은 ±의 전하를 가지고 중성미자가 아닌 렙톤은 ±1의 전하를 가진다. 이들 입자는 힉스 메커니즘으로 질량을 얻는다. 중성미자는 바일 입자(손지기 페르미온)으로 나타낸다. 즉 스핀 (즉 페르미온)을 가지며 질량과 전하가 없고 그 반입자와 다른 손지기(chirality)를 가진다.6종의 쿼크 맛깔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맛깔의 쿼크로 변할 수 있는데 이를 쿼크 섞임이라고 한다. 쿼크가 섞이는 정도는 CKM행렬이라는 수학적 개체로 나타낸다. 이는 이탈리아의 니콜라 카비보(Nicola Cabbibo)와 일본의 고바야시 마코토와 마스카와 도시히데가 도입하였다. 예를 들어 중성자는 양성자로 붕괴할 수 있다 (베타 붕괴). 이 과정에서 아래 쿼크는 위 쿼크로 바뀐다. 쿼크 섞임 때문에 표준 모형은 CP 대칭을 보존하지 않는다.렙톤의 경우 표준 모형에서는 렙톤이 섞이지 않는다. 즉 표준모형은 세 종류의 렙톤 수 를 개별적으로 보존한다.표준모형의 페르미온은 다음과 같이 세 세대로 나뉜다. 각 세대의 서로 대응되는 입자는 질량을 제외하고는 정확히 같은 성질을 지닌다. 표준 모형은 왜 세대 구조가 존재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표준 모형의 게이지 보손.표준 모형은 게이지군이 SUC×SUW×UY인 게이지 이론이다. 이 중 강력은 SUC 약전자기력은 SUW×UY에 해당한다. 낮은 에너지에서 약전자기력의 대칭은 힉스 메커니즘에 의해 자발적으로 깨져 전자기력의 UEM만 남고 나머지는 약력을 이룬다. 이 과정으로 인해 힉스 보손과 약력의 게이지 보손은 질량을 얻는다. (여기서 UY와 UEM은 서로 다른 군이다.)강력의 게이지 보손은 글루온이다. SU가 8차원이므로, 글루온은 총 여덟가지의 색을 지닌다. 강력은 오직 쿼크에만 작용하고, 렙톤에는 작용하지 않는다. 쿼크는 세가지의 색을 지닌다. 이를 가시광선의 삼원색을 따서 통상적으로 빨강, 초록, 파랑으로 부른다. 이 때문에 강한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양자장론을 양자 색역학이라고 일컫는다.글루온을 통하여 쿼크의 색이 바뀔 수 있다. 따라서 글루온의 색을 3가지의 색을 다른 색으로 바꾸는 조합 으로 볼 수 있다. 3가지의 색을 다른 3가지로 바꾸는 조합은 총 3×3=9가지이나, 그중 모든 색을 그대로 두는 변환을 제외하여 8가지의 색이 남는다.전약력의 게이지 보손은 SU×U이 4차원이므로 4종인데, 이는대칭 깨짐 이전의 W+ W- W0 (약한 아이소스핀 SU(2)) B (약한 초전하 U(1))에 해당한다.대칭 깨짐 이후, W0과 B는 광자와 Z보손으로 섞인다.전약력의 게이지 군 가운데 SU의 전하는 약한 아이소스핀, U의 전하는 약한 초전하이다. 대칭이 깨지면서, 약한 아이소스핀의 한 성분과 약한 초전하가 섞여 양자전기역학의 대칭군 U을 이룬다.표준 모형의 이론적 구성.표준 모형은 대부분의 양자장론처럼 많은 수의 대칭을 지닌다. 대칭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자연계에서 약력은 C 대칭과 P 대칭을 최대로 깬다. 따라서 표준 모형은 이들을 따르지 않는다. 강력의 경우 이론적으로 C 대칭을 깰 수 있으나 이는 관측 불가능할 정도로 작다. 약력은 2세대 이하에서는 CP 대칭을 보존하지만 3세대 이상으로는 CP 대칭을 깬다 . 표준 모형은 다른 모든 특수상대론적 이론과 같이 푸앵카레 대칭을 따르므로 CPT 정리에 따라 CPT 대칭을 따른다. CPT는 이산대칭이기 때문에 뇌터 정리에 해당하지 않고연관된 보존량도 없다.표준 모형은 SU×SU×U의 대칭군을 가진 게이지 이론이다. 여기서 SU은 색력에 해당하고, SU×U은 전약력에 해당한다. SU를 약한 아이소스핀, U을 약한 초전하라고 부른다. 이 중 SU×U은 U으로 깨지게 된다. 여기서 깨진 후 남은 U은 전자기 대칭으로, 약한 초전하의 U과는 다르다. 이에 따라 표준 모형은 색전하, 약한 아이소스핀, 약한 초전하를 보존한다.표준 모형은 건드림이론 수준에서 네 가지의 전반적 우연대칭 을 가진다. 이는 쿼크 위상 회전, 전자 위상 회전, 뮤온 위상 회전, 타우온 위상 회전이다. 이에 따라, 표준 모형은 바리온 수, 전자 수, 뮤온 수, 타우온 수를 보존한다. 이들은 우연대칭이기 때문에, 대통일 이론에서 깨질 수 있다. 실제로 전자 수, 뮤온 수, 타우온 수의 개별적인 보존은 중성미자 진동에 의하여 반증되었다. 또한, 우연대칭은 건드림이론에서는 성립하지만 비건드림적인 효과로 인해 깨질 수 있다. 실제로 표준 모형에서는 비건드림적 효과로 인하여 바리온 수와 렙톤 수가 개별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즉 은 비건드림적으로도 보존된다. 물론 모든 비건드림이론적 효과는 대부분의 경우 극히 미미하고, 빅뱅 초기 를 제외하고는 관측하기 힘들다. 이 밖에도, 표준 모형은 각종 근사적인 맛깔 대칭을 지닌다. 가장 기본적으로 아이소스핀의 SU와 이를 초전하로 확장한 SU이 있고, 이를 다른 쿼크를 도입하여 더 확장할 수 있다. 맛깔 대칭은 쿼크의 질량에 의하여 깨진다. 질량이 클 수록 깨지는 정도도 더 심하다.아래의 표는 표준 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마당을 정리한 것이다. 이 가운데 페르미온 장 은 질량을 제외하고 모든 성질이 같은 두 개의 세대가 더 존재하지만 생략하였다.이 표는 왼손 바일 스피너 대신에 오른손 바일 스피너로 적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쿼크를 반쿼크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약력은 전반성 대칭을 최대로 불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표준 모형에서 중성미자는 오직 왼손만 존재한다. 즉 모든 중성미자는 왼손잡이며, 반중성미자는 오른손잡이다.페르미온의 경우 왼손 입자(formula_1 formula_2)는 SU(2)L의 기본표현(fundamental representation)을 따르나 왼손 반입자(formula_3 formula_4 formula_5)는 SU(2)L에 따라 변환하자 않는다. (반)쿼크(formula_1 formula_7 formula_8)는 SU(3)c의 (반)기본표현을 따르나 렙톤(formula_2 formula_5)은 SU(3)c에 따라 변환하지 않는다.게이지 장은 해당 게이지 대칭에 대하여 딸림표현을 따르고, 로렌츠 벡터이며, 다른 게이지 대칭에는 변환하지 않는다.표준 모형은 19개의 상수를 포함한다.표준 모형은 이론적으로 여러가지의 결함을 가지고 있고, 또 현상론적으로 관측된 일부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이 때문에 학자들은 표준모형이 더 기본적인 이론을 근사하는 유효 이론이며, 더 높은 에너지에서는 표준모형이 다루지 않는 새 현상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한다. 거대 하드론 충돌기에서 행해지는 여러 실험은 표준모형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표준 모형은 이론적으로 여러 자연스러움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표준 모형에 등장하는 몇몇 상수가 너무나 큰 값 또는 작은 값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개 더 강력한 대칭을 도입하여 상수가 왜 그렇게 크거나 작은 값을 가지는지 설명해야한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대통일 이론이나 초대칭 따위가 있다.또한 표준 모형은 여러가지로 임의적인 면이 있다. 표준 모형은 3세대로 구성되어 있지만 왜 3세대로 구성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2세대가 발견되었을 때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는 라고 외칠 정도로 세대의 존재와 그 수는 언뜻 보면 불필요한 구조다.표준 모형은 전하의 양자화를 설명하지 않는다. 폴 디랙은 전하의 양자화를 설명하려면 자기 홀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였으나 표준 모형은 자기 홀극을 포함하지 않는다.또한 표준 모형은 19개의 자유 변수를 가진다. 이 자유 변수의 수는 기본 이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다.표준 모형은 입자 물리학의 거의 모든 실험 결과를 오차 범위 안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표준모형은 중력을 다루지 않는다. 또 표준 모형은 중성미자를 무질량 입자로 다루지만 실제로 중성미자는 아주 작지만 영이 아닌 질량을 가진다 . 이 질량이 어떤 종류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또한 표준 모형은 아무런 암흑 물질 입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표준 모형에서 암흑 물질로 간주할 수 있는 입자는 중성미자밖에 없는데, 중성미자는 이론적으로 전체 암흑 물질 양의 소량만을 차지한다. +쿼크는 경입자와 더불어 물질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다. 경입자가 아닌, 색전하를 띤 기본 페르미 입자이다. 중입자와 중간자를 이룬다. 이론 물리학자 머리 겔만은 자신이 발견한 우주의 기본 미립자를 '쿼크'로 명명했는데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12장 '신부선과 갈매기'에서 갈매기가 외치는 무의미한 조롱의 울음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우주 속의 입자들을 구성하는 쿼크는 세 개씩 같이 다닌다.쿼크는 총 6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다음과 같다.각 쿼크에는 이에 대응되는 반입자인 반쿼크가 존재한다. 반쿼크는 대응하는 쿼크와 질량이 같지만 전하와 색전하가 반대다. 각 쿼크는 빨강, 초록, 파랑 세 개의 색깔을 가질 수 있다. 쿼크는 3세대가 있는데 1세대는 위·아래 쿼크, 2세대에 맵시·기묘 쿼크, 3세대에 꼭대기·바닥 쿼크로 나눈다.쿼크는 기본 전하의 − 또는 +의 전하를 갖는다. 기본 전하의 정수배가 아닌 전하를 가진 입자는 쿼크가 유일하다. 전하량 외에도 쿼크는 색전하란 물리량을 갖는데, 이 양은 의 색전하를 갖는다.(색전하는 가시광선의 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양자 색역학의 대칭군인 SU의 3차원 표현의 기저를 나타내는 통상적인 용어일 뿐이다.)양자 색역학의 색가둠 현상에 의하여, 일상적인 에너지에서 쿼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중간자나 중입자를 이룬다.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이루어진 입자이고, 중입자는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진 입자다. 중간자와 중입자를 통틀어 강입자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홑 쿼크는 관측할 수 없으며, 관측 가능한 강입자는 항상 기본 전하의 정수배의 전하를 가지고, 항상 무색이다. 쿼크를 따로 관측할 수 없으므로, 위 표의 쿼크 질량은 정확한 값이 아니라 참값이 놓여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범위다.라는 이름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여기서 는 액체의 단위인 쿼트를 변형한 것으로 등장 인물인 마크에게 술을 권하는 대목이다.중력 상수 만유인력 상수 또는 뉴턴 상수는 중력의 세기를 나타내는 기초 물리 상수다. 중력을 다루는 모든 이론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등장한다. 과학 기술 데이터 위원회 2010년 자료에 따르면, 국제단위계에서의 값은 다음과 같다.그 밖에 국제 천문 연맹에서 제공하는 자료도 권위가 있다.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의 중력적 인력은 그 두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이 식에서 비례 상수 formula_2를 중력 상수라고 일컫는다.중력은 자연의 다른 세 상호작용보다 상대적으로 약하다. 예를 들어 두 대의 3000 kg의 자동차가 각각의 질량 중심에 대해 3 m 떨어져 있을 때 두 자동차에 작용하는 중력은 약 67 N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모래 알갱이의 무게 정도의 힘에 해당한다.중력 상수는 헨리 캐번디시가 캐번디시 실험을 통해 정교하게 처음으로 측정하였다. 실험을 위해 막대의 양 끝에 납으로 된 공을 매달고 이를 줄에 매달아 수평 방향으로만 회전하게 한다. 막대의 관성 모멘트는 막대가 복원력에 의해 진동하는 주기를 측정하여 알아낼 수 있다. 막대의 한쪽 끝에 다른 공을 가까이 대면 중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게 되고 막대가 회전한 각도를 측정하여 이 힘을 알아낼 수 있다. 중력 상수의 측정은 캐번디시의 실험 이후로 점차 정확도가 향상되어 왔다. 중력이 다른 기본 상호 작용에 대해 매우 약하고, 다른 물체의 영향을 없애기 어렵기 때문에 중력 상수 formula_3를 측정하는 것은 여러 모로 어렵다. 게다가 중력과 다른 상호 작용 사이에 알려진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이를 측정할 수 없다. 최근의 리뷰에 따르면, 중력 상수의 측정값은 크게 변해 왔고, 최근의 몇몇 측정값은 실제로는 서로 배타적이라고 한다.formula_4 곱 또는 표준 중력 변수는 여러가지 중력과 관계된 수식을 간단히 표현하는 데 자주 활용된다. 특히 태양계에 대해 중력 법칙을 이용할 때 매우 높은 정확도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빈번하게 사용된다. 중력 상수의 정확도가 높지 않은 데 반해 행성의 위치나 중력 가속도와 같은 양은 매우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따라서 중력 상수와 질량의 곱은 매우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 태양계에서의 중력을 계산할 때 거의 대부분의 계산에서 GM 값이 함께 붙어서 나오며, 대부분의 계산에서 이 둘을 따로 대입할 필요가 없어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표준 중력 변수의 값은 formula_5로도 표시하며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은 값을 갖는다.천체 역학에서는 주로 국제단위계의 킬로그램보다 태양 질량을 기준으로 한 단위계를 사용하는 것이 계산에 편하다. 이 단위계로 쓴 중력 상수를 가우스 중력 상수 formula_7라 부르며,그 값은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9는 천문 단위 formula_10는 평균 태양일 그리고 formula_11는 태양의 질량이다.중력 상수를 플랑크 상수와 광속을 이용하여, 임의적인 기본 단위가 전혀 없는 단위계를 만들 수 있다. 이를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따 플랑크 단위계라고 부른다. 플랑크 단위계에서 중력 상수는 플랑크 상수와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와 함께 모두 1로 맞추어진다. +변형력(變形力) 또는 스트레스()은 역학에서 단위면적당 작용하는 힘을 뜻한다. 응력(應力)이라고도 한다. 오귀스탱 루이 코시가 1822년 처음 고안했다.사실상 응력의 개념은 연속체라는 가정 아래 성립할 수 있다. 물체 내부의 경우, 가상의 단위부피를 설정해서 그 가상의 표면 바깥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상의 힘'은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표면힘과 몸체힘이다. 표면힘은 표면에 평행한 힘이며, 몸체힘은 표면에 대하여 수직 방향인 힘이다.응력의 SI단위는 파스칼이다. 압력과 같은 단위지만 압력과 응력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일반적인 단면봉(Prismatic Bar)의 경우 수직응력(Normal Stress)은 바깥쪽(Tension) 또는 안쪽(Compression)으로 작용한다. 변형률(Strain)과의 연관성 때문에 보통 바깥쪽 응력을 양으로 안쪽 응력을 음으로 본다. 이 경우 보통은 계산의 편리성을 위해 "모든 단면적에 고르게 힘이 작용한다"라고 가정하고 평균값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실제로는 모든 지점마다 작용하는 응력의 값이 다르다. 때문에 코시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텐서를 사용했다.이 방식은 축이 변할 경우 값이 어떻게 바뀌는지 계산하는 것이 힘들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Mohr's Circle을 사용한다. 또한 코시 텐서는 작은 변형에 맞는 방식이기 때문에 큰 변형의 경우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응력은 물체가 외부 힘의 작용에 저항하여 원형을 지키려는 힘을 말하며 전단응력과 깊은 관계를 가지있으며 고체역학,유체역학과도 연관있다. 한편 응력은 원자, 분자 또는 이온 사이에 작용하여 고체나 액체 따위의 물체를 이루게 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응력과 연관있다.대수학은 일련의 공리들을 만족하는 수학적 구조들의 일반적인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이렇게 일련의 추상적인 성질들로 정의되는 구조들을 대수 구조라고 하며, 그 예시로 반군, 군, 환, 가군, 체, 벡터 공간, 격자 등이 있다. 대수학은 취급하는 구조에 따라서 반군론, 군론, 환론, 선형대수학, 격자론, 정수론 등으로 분류된다.기하학, 해석학, 정수론과 함께 대수학은 수학의 대분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대수학이란 용어는 단순한 산술적 수학을 가리키기도 하나, 수학자들은 군, 환, 불변량 이론과 같이 수 체계 및 그 체계 내에서의 연산에 대한 추상적 연구에 대해서 "대수학"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algebra라는 명칭은 페르시아의 저명한 수학자인 콰리즈미가 쓴 에서 비롯되었다. 책의 원 제목에 있는 는 묶는다는 뜻으로 이 책에서는 방정식에서 항들을 묶어서 소거하는 것을 부르는 말로 쓰였다.라는 번역어는 드 모르간의 에서 처음 쓰였다.고대의 대수학에 대한 주요 저서로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이나 구장산술 디오판토스의 등이 있다. 9세기에 페르시아의 수학자 콰리즈미는 란 제목으로 라틴어로 번역한 뒤 다섯 세기에 걸쳐서 유럽의 대학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알게브라"와 "알무카발라"는 해당하는 아랍어 단어를 음역한 것이다. 또한 콰리즈미의 저서인 "인도 수의 계산법"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2차 방정식 사칙연산 십진법 0 등의 개념이 소개되었다.19세기 이후에는 에바리스트 갈루아가 대수 방정식을 연구하기 위해서 군이라는 대수적 구조를 도입하였고 조지 불은 논리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불 대수라는 대수적 구조를 정의하였다. 이후 현대 수학에서는 다비트 힐베르트의 공리 주의나 니콜라 부르바키 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고전적인 대수학에서 상당히 거리가 추상화되어 있으며 방정식의 해법은 이라는 대수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군론은 군에 대해 연구하는 대수학의 한 분야이다. 수학의 여러 분야의 기초가 되며, 대칭성을 다루는 특성 탓에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에서도 응용된다.4차 방정식까지는 대수적인 풀이 즉 근의 공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지만 5차 이상의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5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벨에 의해 증명되었으나 어떤 경우에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어지고 어떤 경우에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어지지 않는지를 일반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문제였다. 군론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려는 과정에서 갈루아에 의해 도입된 접근방식이었다. 갈루아는 군론을 이용해서 다항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에 대한 일반적인 관계를 증명하였다. 갈루아 이론으로 불리는 이 이론은 수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에서도 극히 아름다운 이론으로 손꼽힌다.선형 결합 또는 일차 결합은 수학에서 각 항에 상수를 곱하고 결과를 추가함으로써 일련의 항으로 구성된 표현식이다. 선형 결합의 개념은 선형대수학과 수학 관련 분야의 중심이다. 이 글의 대부분은 체 위의 벡터 공간의 맥락에서 선형 결합을 다루며 글의 끝에 주어진 일부 일반화를 다룬다."V"를 체 "K" ���의 벡터 공간이 되도록 한다. 우리는 평소와 같이 "V" 벡터 공간의 원소를 부르고 "K" 스칼라의 원소를 부른다. 만약 v1...v"n"이 벡터이고 "a"1..."a""n"이 스칼라인 경우에는 해당 스칼라와 계수의 선형 결합은 formula_1이라고 표현한다."선형 결합"이라는 용어가 표현식을 참조하는지 또는 그 값을 참조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한 점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v1...,v"n"은 항상 하위 공간을 형성한다"는 주장에서처럼 값이 강조된다. 그러나 "두 개의 서로 다른 선형 결합이 동일한 값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표현식에 대한 참조가 된다. 이러한 용도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는 선형 종속 집합의 본질이다. 벡터족 "F"는 값으로서 "F"의 벡터의 선형 결합이 고유하게 식과 같은 경우 정확하게 선형 독립적이다. 어떤 경우든 표현식으로 볼 때조차 선형 결합에 대해 중요한 것은 각 v"i"의 계수 뿐이다. 항을 허용하거나 영점 계수를 갖는 항을 추가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수정은 뚜렷한 선형 결합을 생성하지 않는다.주어진 상황에서 "K"와 "V"는 명시적으로 지정되거나 문맥상 명백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종종 계수 v1...,v"n"의 선형 결합(반드시 "K"에 속해야 한다는 점 제외)을 언급한다. 또는 "S"가 "V"의 부분집합인 경우 벡터가 집합 "S"에 속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계수와 벡터가 모두 지정되지 않은 "S"에서 벡터의 선형 결합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벡터가 "V"에 속해야 하고 계수가 "K"에 속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지정되지 않은 선형 결합에 대해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V"의 모든 벡터는 확실히 어떤 선형 결합의 값이기 때문에 한 가지는 아마도 식을 참조할 것이다.선형 결합은 정의상 매우 많은 벡터만 포함한다(아래와 같이 언급된 일반화인 경우는 제외). 그러나 벡터가 하나를 언급할 경우에는 추출된 집합 "S"는 여전히 무한할 수 있다. 각각의 개별 선형 결합은 단지 많은 벡터를 포함할 뿐이다. 또한 "n"이 0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없다. 이 경우 우리는 관례에 따라 선형 결합의 결과가 "V"의 제로 벡터(zero vector)라고 선언한다.임의의 체 을 벡터( 단위)로 설정합니다. 이러한 벡터의 모든 선형 결합 집합을 고려하는 것은 흥미로운 편이다. 이 집합을 벡터의 선형생성(예 })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의 생성 범위인 span() 또는 sp()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일부 벡터 v1...v"n"의 경우 단일 벡터는 2 가지 다른 방법으로 선형 결합으로 쓸 수 있다.이와 마찬가지로 를 빼면 중요하지 않은 결합은 영점이 된다.이 경우 v1...v의 선형 종속 또는 독립에 대해 말할 수 있다."S"가 선형 독립적이고 "S"의 범위가 "V"와 같으면 "S"는 "V"의 기저가 된다.다양한 종류의 선형 결합.선형 결합에 사용되는 계수를 제한함으로써 아핀 결합 원뿔 결합 및 볼록 결합의 관련 개념과 이러한 연산에 따라 닫힌 집합의 관련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이들은 보다 제한된 연산이기 때문에 더 많은 부분집합들이 그들 아래쪽에서 닫힐 것이기 때문에 아핀 부분집합, 볼록 원뿔, 볼록 집합은 벡터 하위 공간의 일반화이다. 또한 벡터 부분공간은 아핀 부분 공간, 볼록 원뿔, 볼록 집합이지만 볼록 집합은 벡터 하위 공간, 아핀 또는 볼록 원뿔일 필요가 없다.이러한 개념은 물체의 특정한 선형 결합을 취할 수 있을 때에 종종 발생하지만 어떤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확률 분포는 볼록 결합에서는 닫히지만 원뿔 또는 아핀 결합에서는 닫히지 않으며 양의 측정은 원뿔 결합에서는 닫히지만 아핀 또는 선형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의 정의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선형 폐쇄로 서명된 측정값을 나타냅니다.선형 및 아핀 결합은 모든 체에 대해 정의될 수 있지만 원뿔 및 볼록 결합은 "양수"의 개념을 필요로 하므로 정렬된 체, 일반적으로 실수에 대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덧셈이 아니라 스칼라 곱셈만 허용하면 원뿔을 얻을 수 있다. 종종 양수인 스칼라에 의한 곱셈만 허용하도록 정의를 제한한다. 이러한 모든 개념은 일반적으로 독립적으로 공리화되기 보다는 주변 벡터 공간의 부분 집합으로 정의된다."V"가 위상 벡터 공간이라면 "V"의 위상수학을 사용하여 특정 무한 선형 결합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a"1v1 + "a"2v2 + "a"3v3 + ⋯가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무한 선형 결합은 항상 이치에 맞는 ���은 아니다. 우리는 이 결합을 융합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더 많은 선형 결합을 허용하면 생성 선형 독립 및 기저의 다른 개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만약 가군과 같은 공간을 부른다는 것이다. K가 비가환환인 경우에도 개념은 여전히 일반화되며 한 가지 주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비가환환 위에 있는 모듈들은 왼쪽과 오른쪽 버전으로 나오기 때문에 선형 결합은 주어진 모듈에 적절한 어떤 것이든 이러한 버전들 가운데 하나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스칼라 곱셈을 올바른 측면에서 수행하는 문제이다.더 복잡한 반전은 "V"가 "K"L과 "K"R 2개의 환 위에 있는 쌍가군일 때에 발생한다. 이 경우에 가장 일반적인 선형 결합은 다음과 같다. +물리학과 수학에서 파동 방정식은 일반적인 파동을 다루는 2차 편미분 방정식이다. 음파와 전자기파 수면파 등을 다루기 위하여 음향학 전자기학 유체역학 등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등장한다. 양자역학에서 위치 에너지가 없는 경우 파동 함수는 파동 방정식을 따른다.파동 방정식은 formula_1에 대한 선형 쌍곡 편미분 방정식으로,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3는 파동의 속도를 나타내는 매개변수다. 공기중을 진행하는 음파의 경우에는 대략 300 m/s이고, 이 속도를 음속이라 부른다. 현의 진동의 경우 formula_3는 다양한 값을 가질 수 있다.formula_1는 시각 formula_6, 위치 formula_7에서의 파동의 진폭을 나타내는 함수다. 음파의 경우 진폭은 그곳에서의 공기의 압력이며, 진동하는 현의 경우엔 기준 위치에서부터의 변위를 나타낸다. 파동의 종류에 따라 formula_8는 스칼라 또는 벡터일 수 있다. formula_9는 위치 formula_10에 대한 라플라스 연산자이다.기본적인 파동 방정식은 선형 미분 방정식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두 파동의 결합은 단순히 두 파의 더한 것과 같다. 또한 파동을 분석하기 위해 파를 성분별로 나누어도 된다. 푸리에 변환을 이용해 파동은 사인함수들로 쪼개어질 수 있고, 이 방법은 파동방정식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다.formula_10축 방향으로 늘어선 1차원 (현)의 경우, 위 식은 다음과 같다.2차원에선 다음과 같다.식의 상수를 주파수에 따른 변수로 생각해 더 복잡하고 실제적인 파동방정식을 만들 수 있다. 이때의 방정식은 비선형이 된다.현악기의 떨리는 현의 파동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장 르 롱 달랑베르, 레온하르트 오일러, 다니엘 베르누이,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등이 연구하였다.비오-사바르 법칙은 전자기학에서 주어진 전류가 생성하는 자기장이 전류에 수직이고 전류에서의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한다는 물리 법칙이다. 또한 자기장이 전류의 세기 방향 길이에 연관이 있음을 알려준다. 비오-사바르 법칙은 전자기학에서 유효하며 앙페르 회로 법칙과 가우스 자기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이 법칙의 이름은 이 법칙을 발견한 장바티스트 비오와 펠릭스 사바르의 이름을 땄다.원점 formula_1에 전류 formula_2가 무한소의 길이의 전선 formula_3을 따라 흐른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무한소의 전선에 흐르는 전류에 의하여 발생하는 무한소의 자기장 formula_4은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6 은 양의 단위벡터이고 formula_7은 진공의 투자율이다.유한한 길이의 전선을 따라 흐르는 전류의 경우, 양변을 적분하면 전류로 인하여 발생하는 총 자기장을 알 수 있다.직선 전류에 의한 자기장과 솔레노이드 내부의 자기장은 앙페르 법칙을 이용해 구할 수 있고, 비오-사바르 법칙은 원형 전류 중심에서의 자기장의 세기를 구하는 데 이용된다.원형 도선 중심에서의 자기장원형 도선이 있을 때 전류 요소 Idl은 지면 앞으로 나오는 방향이고 r에 수직이다. 또 dB의 방향도 r에 수직인 방향이 된다.r2=x2+R2이므로 비오-사바르 법칙에서 다음과 같다.원형 전류의 각 전류 요소 Idl에 의한 자기장 dB를 그 회로에 따라 모두 합하면 회로축에 수직인 dB의 y성분은 상쇄되므로 dB의 x성분만 계산하면 된다.이므로 x=0일 때 formula_9 가 된다. +구골은 10의 100제곱을 가리키는 숫자이다. 즉 1 뒤에 0이 백 개 달린 수이다. 우주의 모든 소립자의 수가 대략 10의 80제곱 개이다.이 수의 이름은 1920년 미국의 수학자 에드워드 캐스너의 9살짜리 조카 밀턴 시로타에게서 지어졌다. 캐스너는 이 개념을 저서 에 수록했다.이 수의 학문적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고 주로 수학 수업에서 거론될 뿐이다. 캐스너는 이 수를 매우 큰 수와 무한대의 차이를 보이기 위해 ���안했다.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마치 무한대처럼 느껴지는 우주의 크기를 무한대와 비교하기 위하여 구골보다도 더 큰 수인 구골플렉스를 활용하여 "구골플렉스와 1이 무한대보다 작은 정도는 서로 정확히 같다."라고 했다.지금으로부터 formula_3년 후 우주는 마지막 남은 유일한 블랙홀이 호킹 복사로 증발한다.회사명 구글의 유래.인터넷 검색엔진 업체 구글(Google)은 처음에 구골(Googol)로 등록하려다가 실수로 사명을 잘못 표기한 것에서 구글로 등록하여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마운틴 뷰에 있는 구글 본사도 구골플렉스를 변형시켜 구글플렉스라고 부른다.구글 LLC는 전 세계의 정보를 체계화하여 모든 사용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다. 검색 서비스 제공을 주력으로 한다. 구글 검색은 2018년 5월 기준 전 세계 검색량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2008년 웹 페이지 인덱스 수가 1조를 돌파했다.1998년에 백럽 이라는 이름으로 검색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이후 구글로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이는 10100을 뜻하는 구골 플랙스로 등록하려다 실수로 사명을 잘못 표기한 것에서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또는 구골플랙스라는 이름이 너무 길어 하는 수 없이 유사한 구글로 바꿨다는 설도 있다. 매우 큰 유한수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엄청난 규모의 검색엔진을 만들겠다!'는 설립자들의 목표와 맞아떨어졌으나 당시 이미 '구골'이라는 사이트가 존재하여 구글이 되었다.구글은 세계 최대의 검색엔진으로 현재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이다. 특히 영미권에서는 독보적인 점유율을 보인다.2006년, 구글은 YouTube라는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및 스트리밍 사이트를 인수합병했다. 같은 해 11월, 유튜브의 하루 방문자는 2,5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2007년, google은 최고의 디지털 마케팅 회사인 더블클릭을 인수했고, 같은해 더블클릭은 하루 170000개의 광고를 집행했다. 그리하여 구글은 2008년, 증권거래위원회에 보낸 공개문서에서 구글은 고 말했다. 23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온라인 광고 시장과 540억 달러에 달하는 전 세계 Online advertisement 시장의 40%를 독식했다.구글은 PDF 포스트스크립트 Micro software 어도비 플래시 문서들을 포함한 Web 문서 검색 Service를 제공한다. 이 외에 google 이미지 검색 Google news KOREA 구글 뉴스그룹 구글 웹 디렉토리 구글 비디오 Froogle 서비스에서 이름이 변경된 상품 검색 구글 맵 구글 어스 등의 주요 검색 서비스가 있다.또한 검색 서비스 외에 추가적인 서비스들을 제공하는데 이에는 2004년 시작된 이메일 서비스인 Gmail 과 YouTube, 피카사, Google 사전, Google 리더, iGoogle, 기업 사용자를 위해서 각종 웹 애플리케이션을 제공하는 구글 앱스 등이 있다.2010년 세계 포털 사이트에 야후(Yahoo)로 제쳤고 구글에 앞질렀다.2011년 모토로라 인코퍼레이티드는 휴대전화사업과 본사의 사업부분이 불안정적으로 운영됨에 대한 걱정과 사업부 실적의 부진으로 인해 사업부가 모토로라 인코퍼레이티드의 자회사로 분리하기로 결정하였다.2011년 모토로라는 더 발전적이고 공격적인 사업을 위해 새로운 모기업을 찾게 되고 대상기업이 된 구글은 인수할때 각 주당 63%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총 125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하였다. 구글의 인수에도 불구하고 모토로라는 여전히 기존 장치의 안드로이드 버전 업그레이드 서비스와 신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2014년 구글은 모토로라의 분리된 사업부 중 '스마트폰 제조분야'를 매각하기로 결정하였고 레노버에게 총 29억 1천만 달러를 매각하기로 결정하였다.닌텐도와 구글이 콜라보로 슈퍼마리오 런을 게발했다구글봇이라는 이름의 웹 크롤러는 사용자가 검색하기 전에 수천억 개에 달하는 웹페이지에서 정보를 모아 이를 검색 색인에 정리한다.웹 크롤러는 조직적 자동화된 방법으로 월드 와이드 웹을 탐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크롤러는 과거 크롤링으로 만들어진 웹 주소 목록과 웹사이트 소유자가 제공한 사이트맵에서 크롤링을 시작한다. 웹사이트를 방문한 크롤러는 사이트에 있는 링크를 사용하여 다른 Page를 찾는다. Crawling하는 동안 새로운 사이트 기존 사이트의 변경사항 깨진 링크를 주의 깊게 살핀다. 크롤링할 사이트 크롤링 횟수 및 각 사이트에서 가져올 페이지 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결정한다. 검색 엔진과 같은 여러 사이트에서��� 데이터의 최신 상태 유지를 위해 웹 크롤링한다. 웹 크롤러는 대체로 방문한 사이트의 모든 페이지의 복사본을 생성하는 데 사용되며 검색 엔진은 이렇게 생성된 페이지를 보다 빠른 검색을 위해 인덱싱한다. 또한 크롤러는 링크 체크나 HTML 코드 검증과 같은 웹 사이트의 자동 유지 관리 작업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며 자동 이메일 수집과 같은 웹 페이지의 특정 형태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도 사용된다.웹 크롤러는 봇이나 소프트웨어 에이전트의 한 형태이다. 웹 크롤러는 대개 시드라고 불리는 URL 리스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페이지의 모든 하이퍼링크를 인식하여 URL 리스트를 갱신한다. 갱신된 URL 리스트는 재귀적으로 다시 방문한다.사용자에게 수십억 개의 웹페이지가 아닌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은 크게 여섯 가지 방법을 활용한다. 검색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를 분석하기 검색어와 일치하는 정보가 포함된 웹페이지를 검색하기 페이지의 유용성을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기 사용자의 위치나 이전 검색 기록과 같은 맥락을 고려하여 사용자에게 알맞은 검색 결과를 제공하기 검색 결과가 사용자의 검색 유형에 유용한지 고려하여 최상의 결과를 제공한다.구글은 광고주에게 구글 애즈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입찰함으로써 검색 결과 옆에 뜨는 텍스트 광고를 구매할 수 있다. 희소성이 높은 키워드는 클릭당 광고비가 더 비싸게 책정된다.애드센스를 통해서 광고를 하고 싶어하는 회사와 관련 사이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애드워즈와 유사한 자동화 프로그램을 통해 둘을 연결해 준다.구글은 클릭당 지불 데이터를 가지고 해당 광고를 클릭할 때만 비용을 내도록 한다.구글 애널리틱스(Google Analytics)는 광고주에게 해당 광고의 효과를 즉시 확인 할 수 있는 무료 툴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은 매시간 클릭수와 판매량, 해당 키워드의 트래픽, 클릭이 판매로 이어진 비율 등 광고 효과를 즉각 확인 할 수 있게 해준다.미디어 업체로 하여금 광고 판매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임으로써 롱테일(long tail)이라는 형태로 변화하도록 한다. 그렇게 한다면 기존에는 광고를 잘 하지 않던 이들까지도 타킷팅이 잘 된 저렴한 광고를 구매하도록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구글은 사용자들에게 신문이나 책, 잡지를 자유롭게 검색하도록 권장한다. 해당 발행물들 역시 검색 트래픽을 활용해서 무료로 자신들을 홍보하고 광고를 판매해 수익을 창출한다. TV 방송사나 영화사들은 유튜브를 홍보 채널 겸 온라인 배급시스템으로 활용하도록 권장한다. 광고주들에게는 구글이 2007년에 인수한 디지털 광고 서비스 업체 더블클릭(Doubleclick)을 통해 온라인 광고를 하도록 권한다.구글의 수입은 2004년 32억 달러이던 것이 2007년에는 166억 달러로 뛰었다. 세계적 불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구글은 2008년에 42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고 매출은 218억 달러로 상승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97%가 광고 수입이었다.2008년, 구글의 광고 수입은 5개 방송사(CBS, NBC, ABC, FOX, CW)의 광고 수입을 합한 것에 맞먹었다. 2011년에 이르면 미국 내 웹 광고는 600억 달러(전체 13%)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구글은 TV, 라디오, 신문에 광고를 판매함으로써 시장점유율을 가일층 확대할 사업구상을 이미 개시했다.사용자가 텍스트 광고를 클릭할 때만 광고료를 부과해서 광고주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고 무료이자 2009년 초반까지 광고가 붙지 않았던 구글 뉴스로 뉴스독자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으며 광고 수익과 신규 고객을 발생시켜 줌으로써 웹사이트와 소규모 사업자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다. 구글은 두 번째 경매 프로그램 애드센스 때부터 수입의 20%만 자기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웹사이트들에게 돌려 주었다. 2008년에 구글은 총 5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수십만에 달하는 에게 제공했다.G메일 구글 뉴스 구글 어스 구글 맵스 구글 비디오 구글 번역 피카사 구글 클래스룸 구글 북스 구글 트렌드 오컷 여기에 데스크톱이나 문서도구 구글 플레이같은 응용 프로그램까지 제공한다.구글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는 보통 PC들로 구성된 컴퓨터 클러스터들인데 이 클러스터들은 일을 병렬적으로 처리하여 방대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처리한다. 특히 여러 대의 PC를 운영하면서 계속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처리하기 위해 한 컴퓨터에 오류�� 났을 경우 그 컴퓨터는 꺼지고 다른 컴퓨터가 일을 계속 처리하도록 한다. 구글은 이러한 방식이 거대하고 비싼 컴퓨터(서버)를 대신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이러한 방식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최근에는 인공지능 사업에도 투자를 하여 알파고나 무인자동차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구글의 철학은 이다. 에 의해, 구글은 빅브라더 상의 후보가 되기도 했다.구글은 형식을 따지지 않는 자유롭고 재미있는 기업 문화로 잘 알려져 있다. 2007, 2008 구글은 가장 일하기 좋은 장소로 뽑혔다.구글 엔지니어들은 '직감'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관계나 판단력 같은 것은 정량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험보다는 효율을 중시한다. 그들은 사실과 베타 테스트와 수학적 논리를 추구한다.구글은 지구 온난화 문제에도 관심을 보인다. 구글은 사옥 지붕에 미국 기업 캠퍼스 가운데 가장 큰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여 1천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만한 전기를 생산한다. 외부 주차장에 태양발전소를 두어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충전할 수 있게 했고 연비가 좋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구매하는 직원에게는 장려금 을 제공한다. 구글은 수익의 1%를 때어내 자선사업 부문인 구글 파운데이션에 보낸다. 넓은 캠퍼스 부지 내에서의 건물 간 이동을 위해 신청에 의해 차량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고 직원들의 건강에도 이바지하기 위해 구글이 제공하는 자전거가 도처에 배치되어 있다.구글이 1999년 8월 처음 구글플렉스로 이주했을때, 거기에는 는 결의가 반영되어 있었다. 구글플렉스에는 2~3층짜리 나지막한 건물이 모여있고, 건물 밖에는 야외테이블과 벤치, 울창한 나무들, 채소 정원, 사람과 자전거로 활기 넘치는 산책로가 있다. 직원들은 무료 식사와 다과를 즐기고 (매년 구글은 여기에만 7천만 달러 정도를 쓴다), 트레이너가 대기하는 체육관과 마사지실이 붙어 있는 건물들 사이로 이동할 자전거를 지급받는다. 직원들은 커다란 카페테리아 탁자에서 식사하고, 당구대와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는 라운지에서 쉰다. 세차나 오일 교환 때문에 캠퍼스를 떠날 필요도 없다. 목요일이면 검진 차량이 찾아오고 뿐만 아니라 이발사, 세탁업자, 보모, 애완동물 도우미, 치과의사, 그리고 무료 검진 담당의도 5명이나 있다. 편안한 좌석에 무선인터넷이 완비된 바이오 디젤 통근 버스가 직원들을 멀게는 샌프란시스코까지 늦은 밤까지 실어 나른다. 노트북 컴퓨터도 살 필요가 없다. 그저 마음에 드는 모델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여성은 출산 휴가를 5개월간 유급으로 낼 수 있고, 신생아 아빠는 마찬가지로 유급으로 7주 휴가를 낼 수 있다.모든 구글 엔지니어들은 업무 시간중 20%(주 5일 근무 기준으로 일주일중 하루)를 그들이 흥미로워하는 프로젝트에 사용하도록 권장된다. 몇몇 구글의 새로운 서비스들, 예를 들어 Gmail, 구글 뉴스, Orkut, AdSense는 이러한 직원들의 독립적인 프로젝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구글의 검색 제품 및 고객 경험 파트의 부사장인 매리싸 마이어는 스탠퍼드 대학에서의 연설에서 새로 론칭되는 서비스의 50%가 이러한 20% 시간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간단히 요약하면 돈을 벌때 나쁜일이 아닌 좋은 일을 통해 돈을 벌자는 의미이다.구글 코리아()는 2003년 3월부터 한국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 한국 진출을 선언하였고 2006년에 설립한 기업이다.구글은 한국의 포털사이트인 다음, 네이버와 다르게 고객센터를 두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구글직원과 직접 연락하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포럼을 통하여 google employee와 의견 공유가 가능하다.블로그 카페 웹페이지에서 적었던 글은 구글로봇이 수집하여 보관한다. 이를 삭제하려면 웹마스터도구를 이용해야 하는데 구글의 삭제조건에 들지 않으면 삭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유럽연합에서 잊힐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인정함에 따라 이에 맞추어 구글도 지울 수 있도록 구글로봇을 수정하고 있다.블로그 검색을 통해 블로거의 글을 검색할 수 있다. 다만 블로그를 폐쇄했어도 자신이 작성했던 글에 대해선 계속 검색이 되어 삭제할 방법이 없다. 설사 웹마스터를 통해 삭제를 했어도 블로그 검색에 있던 글은 영구적으로 삭제가 불가능하며 글을 재발행하는 방법밖엔 없다.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2014년 3월 20일 구글 메인페이지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게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구글은 2009년 10월 5일부터 2010년 5월 10일까지 스트리트 뷰 서비스와 관련하여 사용자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나치의 학살 행위인 홀로코스트 희화화 논란.한국어판 구글 어시스턴트에서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나치의 만행인 홀로코스트를 재밌는 이야기랍시고 유머로서 소비하여 국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홀로코스트가 뭔지 알면 누구나 개그로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건 잘 알테다.이에 분노한 네티즌들은 한국어 어시스턴트를 설계한 담당자를 당장 구글로부터 해고하라는 등의 분노를 표출 했으며 트위터나 여러 SNS에선 구글 어시스턴트 삭제 인증을 하거나 아예 사용도 안 했으며 더 나아가 아예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쓰지 말고 아이폰을 쓰자며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결국 이 사건은 독일을 비롯한 해외에도 퍼졌으며 당장 시정하고 사과할 것을 구글에 요구했다. 다행히도 문제가 되는 회화는 어시스턴트에서 지워졌으나 이에 대한 해명은 하지 않았다.구글 계정 연령 조건.구글 계정 나이 요구 사항.구글에 가입하려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13세 이상이어야 한다. 다만 대한민국 스페인에서는 14세 이상 베트남에서는 15세 이상 네덜란드에서는 16세 이상 가입할 수 있다.제품별 연령 요구 사항.일부 구글 서비스는 특정 연령 요건이 있다. +코리올리 효과는 전향력 또는 코리올리 힘이라고도 하며, 회전하는 계에서 느껴지는 관성력으로, 1835년 프랑스의 과학자 코리올리가 처음 설명해 냈다.굵은 글꼴은 그 물리량이 벡터라는 점을 나타내고 m은 질량 v는 물체의 계에서의 속도를 는 계가 돌고 있는 각속도를 나타낸다.코리올리 힘의 발생원인은 각운동량 보존법칙에 의해 발생한다. 각운동량 보존법칙은 각운동량이 시간에 대해 일정하다는 것을 말한다.만약 어떤 원점을 기준으로 계에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이 되어 각운동량이 보존되게 된다. 이를 각운동량 보존법칙 또는 간단히 각운동량보존이라고 부른다.회전하는 좌표계 내에서 물체가 운동을 하는 경우 회전축에 대해 반지름이 줄어드는 경우에는 줄어드는 반지름에 대해 속도가 변화하게 된다. 이 결과 회전좌표계는 코리올리힘과, 가로힘이 발생한다.좌표계 x, y, z와 좌표계 x을 보자 두 좌표계의 원점은 같다. 각각의 경우에 대해 벡터 formula_4.은 두 좌표계에서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formula_5. formula_6. 벡터의 내적을 이용해 x, y, z를 , , 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내적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formula_10.formula_11.formula_12.으로 표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회전하는 벡터의 속도.벡터 formula_13.가 축 ox를 기준으로 formula_14.의 각속도로 회전하고 있다고 하자.그런경우 벡터 formula_13.의 속도 formula_16. 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회전하는 좌표계에서 벡터의 속도와 가속도.회전하는 좌표계에서 벡터의 속도.회전좌표계의 경우에는 원점을 기준으로 좌표축 x 이 회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좌표계가 서로 다른 경우 두 좌표계에서 상대적인 속도는 다음과 같다.이를 바탕으로 회전좌표계에서 x 의 단위벡터의 회전을 적용하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회전하는 좌표계에서 벡터의 가속도.축의 회전에 따른 속도는 formula_25이다. 이를 한번 더 시간에 대해 미분을 하면 다음과 같다.코리올리 정리 및 코리올리 힘.뉴턴의 운동방정식이 x y z 좌표계에서 성립한다고 가정하면 x' y' z' 좌표계에서 아래의 식을 만족한다.우변의 둘째 셋째 그리고 넷째 항을 왼쪽으로 옮기면 뉴턴의 운동 방정식과 비슷한 꼴의 운동방정식이 된다.오른쪽 둘째 항은 코리올리 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른쪽 셋째 항은 원심력이라고 한다. 마지막 항은 가로 힘이며 회전 각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경우에만 나타난다. 원심력과 코리올리 힘을 도입한다면, 회전하고 있는 좌표계에 대한 운동방정식은 고정된 좌표계에 대해서 같다. 그리고 원심력과 코리올리 힘은 실제 힘이 아니라 회전하고 있는 좌표계에서 나타나는 가상의 힘이다.북반구에서의 바람의 우측편향.적도에서 북풍이 부는 경우에도 바람은 코리올리 힘을 받게 된다. 코리올리 힘은 다음과 같은 공식에 의해 계산된다.지구는 자전 축을 중심으로 formula_33의 각속도로 회전하고 있고, 바람은 formula_34 북쪽으로 이동한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기울어져서 고위도쪽을 향하게 된다. 이때 코리올리 정리를 통해 바람이 받는 힘의 방향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코리올리 힘의 방향은 동쪽을 향하게 된다. 즉 운동방향에 대해 오른쪽으로 편향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식의 결과가 아니라 각운동량 보존법칙을 적용해보아도 쉽게 우측편향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적도를 중심으로 바람이 고위도 쪽으로 바람이 부는 경우 지구가 타원형이기 때문에 고위도쪽으로 이동할수록 자전축에 대해 거리가 줄어들게 된다. 이 때에도 각운동량은 보존되어야 한다. 회전축을 중심으로 거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각속도가 그만큼 증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위도로 바람이 불면 불수록 반지름이 더더욱 줄어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각속도는 증가하게 된다. 그결과 바람은 우측편향하여 불게 된다.코리올리의 힘이 적용되는 또 다른 예는 푸코의 진자이다. 푸코의 진자는 어떤 수직면에서 자유롭게 흔들리는 줄에 매단 추이다. 진자는 정확한 수직면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진동하는 수직축에 대해 몇 시간의 주기 동안 천천히 옆돌기를 한다. 진자가 긴 시간의 주기동안에 자유로이 계속하여 흔들릴 수 있도록 추는 무거운 것으로 하고 줄은 아주 길게 한다.질량 m인 흔들이 추의 운동의 중심을 원점으로 택하고 이때 벡터 formula_35은 진자의 작은 진동에 대해 거의 수평이다. 북반구에서formula_33는 수직과 예각을 이룬다. 줄의 장력을 formula_37 라고 쓰고, 회전좌표계에서 발생하는 원심력과 중력을 formula_38 라고 생각하면 추의 운동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전개 된다.코리올리 힘에 의해 진자는 수평방향으로 일정한 각속도formula_40로 진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formula_41 을 회전축을 삼고 formula_40로 회전하는 좌표계를 새로 도입하면 이 계에 대한 시간 도함수는 formula_43 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formula_44를 formula_45로 나타낸 것은 다음과 같다.이를 추의 운동방정식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식이 된다.각속도formula_40로 회전을 하는 좌표계를 중심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위의 식에서 오른쪽에 있는 모든 벡터는 마지막 항을 빼고는 진자가 있는 수직면에 있다. 하지만 작은 진동에 대해 formula_52 이 실제로 수평이므로, formula_53를 수평으로 만들어 마지막 항도 이 수직면에 있도록 할 수 있다.formula_56 는 돌고있는 지구의 각속도이고 formula_40 는 지구에 대해 돌고있는 좌표계의 각속도이다. formula_58 는 지구 축과 수직사이의 각이다. 수직은 formula_59 방향을 따른다.위의 식을 보면 결과적으로 지구에서 푸코의 진자는 각속도 formula_40 로 옆으로 회전한다는 것을 말한다. 북반구에서 내려다 볼 때 그 회전은 시계방향이 된다. +선형대수학에서, 벡터곱 또는 가위곱은 수학에서 3차원 공간의 벡터들간의 이항연산의 일종이다. 연산의 결과가 스칼라인 스칼라곱과는 달리 연산의 결과가 벡터이다. 물리학의 각운동량, 로런츠 힘등의 공식에 등장한다.두 벡터 formula_1 와 formula_2의 벡터곱은 formula_3라 쓰고,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식에서 formula_6는 formula_1와 formula_2가 이루는 각을 나타내며, formula_9은 formula_1와 formula_2에 공통으로 수직인 단위벡터를 나타낸다.위 정의에서의 문제점은 formula_1와 formula_2에 공통으로 수직인 방향이 두개라는 점이다. 즉 formula_14이 수직이면 formula_15도 수직이다.어느 것을 두 벡터의 벡터곱으로 할 것인가는 벡터 공간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오른손 좌표계에서는 formula_3는, formula_17가 오른손 좌표계 방향을 따르도록 정의되고, 왼손좌표계에선 마찬가지로 이 순서의 세 벡터가 왼손 좌표계 방향을 따르도록 정의된다. 이와 같이 좌표계의 방향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두 벡터의 벡터곱은 참 벡터가 아니라 유사벡터다. 벡터곱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a, b, c ∈ R3, ∈ R이라 하자.벡터곱은 벡터 미분 연산인 회전 의 정의에 등장하고 자기장에서 움직이는 전하가 받는 힘을 기술하는 로런츠 힘의 공식에 등장하며 돌림힘과 각운동량의 정의에도 나온다.고차원에서의 벡터곱.7차원 벡터 공간의 벡터곱도 사원수의 방법을 팔원수에 적용하여 얻어질 수 있다.7차원 공간의 벡터곱은 다음과 같은 성질을 3차원 공간의 벡터곱과 공유한다.빅��르 로베르토비치 초이는 소련의 록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배우이며 소련 록 음악 밴드 키노의 리더였다.빅토르 초이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 때 소련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키질로르다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관영 매체에 의해 마약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빅토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세로프 미술전문학교에 입학였으나, 결국 낮은 성적 때문에 1977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또 중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록 음악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소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엘렉트리치카"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콘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 초이의 반전음악 작품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으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의 주연으로 영화배우 데뷔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당시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런 것에 비하여 그는 소위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금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매우 충분했다.갑작스러운 사망 그리고 음모론.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트럭과 충돌하였고 그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가 운전하였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음모론에 따르면, KGB가 의도적으로 초이를 살해했다고 한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초이가 러시아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럭 기사가 종적을 감추고, 초이에게 유리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기각되었으며(초이는 졸지도 운전 규칙을 어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트럭 기사가 그에게 돌진했다는 사실), 시체가 봉인된 관에 담겨 서둘러 매장되었다는 사실 등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현재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키노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2010년 8월 16일은 그의 20주기로써 러시아 곳곳에서 추도식이 있었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2018년에는 그와 그 주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 《레토》가 개봉하였으며 대한민국에는 2019년 1월 개봉하였다. 《레토》는 칸 영화제에서 사운드트랙 필름어워드 상을 수상하는 등 쾌거를 거두었으며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가택 연금 중 만든 작품이라는 특징이 있다. +무리수(無理數 irrational number)는 두 정수의 비의 형태로 나타낼 수 없는 실수를 말한다. 즉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소수이다.이에 반해 두 정수의 비에 의해 나타낼 수 있는 수를 유리수라 한다. 이것도 소수이다.유리수의 집합은 formula_1로 정의하고무리수의 집합은 formula_2로 정의한다.무리수는 소수점 이하로 같은 수의 배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무한소수이다.무리수는 다시 formula_3와 같은 대수적 수와 formula_4 등의 초월수로 나뉜다.무리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증명한 것은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로 전해진다. 히파소스는 이등변 직각삼각형의 밑변과 빗변의 비는 정수의 비율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우주가 완벽하여 모든 것이 정수의 비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학파에 충격을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학파의 동료들이 ‘우주의 섭리에 거스르는 요소를 만들어낸’ 히파소스를 살해했다고 하며, 죽이진 않고 추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 10권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 수학책에서는 유리수를 비로 나타낼 수 있는 길이를 길이라고 불렀다. 알로고스는 글자 그대로 로고스가 없다는 뜻의 단어로, 말 없음·이성 없음 등을 뜻한다. 이것이 라틴��� 로 번역되어 지금에 이른다.몇 가지 무리수의 증명.특수한 로그 꼴의 수.가장 간단히 무리수임이 증명되는 수는 formula_5과 같은 꼴의 수일 것이다. 증명은 귀류법을 사용하며 다음과 같다무리수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일반적으로, 2의 제곱근이 유리수가 아님을 발견한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로 알려져 있다.이에 대한 증명의 한 가지 방법은 다음처럼 귀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이 방법을 일반화하여, 제곱수가 아닌 자연수의 제곱근은 무리수임을 증명할 수 있다.1761년 요한 람베르트는 탄젠트 함수를 다음과 같은 연분수로 나타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또한 formula_36가 0이 아닌 유리수일 때 위 연분수는 무리수가 된다는 것도 증명했다. 그런데 tan = 1 이므로 /4 는 무리수가 된다. 따라서 는 무리수라는 것이 증명된다.다른 수학자들의 증명은 이 문서에 나와 있다. +플랑크 상수는 입자의 에너지와 드브로이 진동수의 비 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상수 중 하나다. 이 상수를 도입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땄다. 기호는 라틴 문자 "formula_2"이다. 유니코드 기호 가 있다.2018년 11월 16일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아래의 값으로 정의되었다.새로운 정의는 2019년 5월 20일 세계 측정의 날부터 발효되었다.formula_2외에,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formula_5가 대신 쓰이기도 한다. 식에서 formula_8는 원주율을 나타낸다. 이 기호는 영어에서는 독일어에서는 ")로 읽는다. 이 상수 formula_5는 폴 디랙의 이름을 따 디랙 상수라고 부른다. 유니코드 기호 가 있다.formula_5는 각운동량의 양자이다. 계의 임의의 축에 대한 각운동량은 언제나 formula_11의 정수배의 값으로 양자화한다.formula_5는 또 불확정성 원리를 기술하는 식에도 등장한다.그래서 formula_5가 formula_2보다 더 기본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그 밖에 formula_5는 플랑크 단위의 정의에 사용된다.처음에 고전물리는 뉴턴의 역학 이론에서 시작되었지만 재능있는 수많은 학자들이 물리에 뛰어들어 그 영역을 전자기까지 확장을 시켜 모든 영역에서 승승장구하였었다. 막스 플랑크가 물리를 하던 19세기 후반, 물리는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이며 소소한 몇몇 문제만 해결되면 완벽한 학문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팽배하였다. 하지만 고전물리는 흑체 복사와 관련된 부분에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것은 고전물리가 예측하는 결과와 흑체 복사의 실험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긴 파장에서는 잘 일치하지만 짧은 파장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한 사고 실험은 다음과 같다.아주 잘 밀폐된(외부와 에너지 교류가 없는) 한 용기 안에 흑체와 한 줄기 빛을 집어넣고 용기를 다시 밀폐한다고 하자. 이 경우 흑체는 빛을 흡수하여 파장의 형태로 다시 방출을 하게 되는데 고전물리의 등분배법칙에 의하면 흑체가 방출하는 에너지는 모든 파장에 골고루 나뉘어야 한다. 이 말은 아주 작은 빛을 넣게 되더라도 상자를 열게 되면 엑스선이나 감마선이 나오게 되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모순이 생기게 된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의 물리학자들이 매달리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혁명적인 착상을 하였다. 그것은 라는 가정이었다. 즉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가정에서 에너지와 주파수를 연결해주는 비례상수가 formula_5 인 것이다. 물론 플랑크는 가정을 통해서 흑체 복사에 관한 문제를 정리하였고 그 식은 실험과 잘 일치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플랑크는 저 식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실험결과와 일치시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도입시킨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역사적으로 CODATA 플랑크 상수 권장값은 지수부를 제외하고 다음과 같다. CODATA 권장값은 새로운 측정 결과를 반영하여 몇 년마다 개정된다.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는 에너지 양자의 발견으로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이론물리학자이다.플랑크는 이론 물리학에 상당히 많은 기여를 했지만 물리학자로서의 명성은 주로 양자 이론의 창시자로서의 역할에 있다. 이는 원자 및 아원자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혁명을 일으켰다. 1948년 독일의 과학 기관인 카이저 빌헬름 협회는 막스 플랑크 협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협회에는 현재 광범위한 과학적 동향을 나타내는 83개의 기관이 포함되어 있다.��랑크는 전통적이고 지적인 가족 출신이다. 그의 부계 증조부와 할아버지는 모두 괴팅겐의 신학 교수였다. 그의 아버지는 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의 법학 교수였다. 그의 삼촌 중 한 명은 판사였다.플랑크는 1858년 홀슈타인의 킬에서 요한 율리우스 빌헬름 플랑크Johann Julius Wilhelm Planck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엠마 파치히Emma Patzig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마르크스 플랑크Karl Ernst Ludwig Marx Planck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이름 중 마르크스Marx는 "명칭 이름"으로 표시되었다. 그러나 10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막스라는 이름으로 서명하고 그후 이것을 평생동안 사용했다.그의 형제 중 두 명이 아버지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가족의 6번째였다. 전쟁은 플랑크의 초기 몇 년 동안 일반적이었고 그의 가장 초기 기억 중 하나는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동안 킬로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군대의 행군이었다. 1867년 가족은 뮌헨으로 이사했고 플랑크는 막시밀리안 김나지움(Maximilians gymnasium)에 등록했고 그곳에서 그는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수학자 헤르만 뮐러Hermann Mller는 그에게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역학을 가르쳤다. 플랑크가 에너지 보존의 원리를 처음 배운 것은 뮐러로부터였다. 플랑크는 17세에 일찍 졸업했다. 이것이 플랑크가 물리학 분야와 처음 접한 방법이다.플랑크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노래 수업을 듣고 피아노, 오르간, 첼로를 연주하고 노래와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 대신 물리학을 선택했다.뮌헨의 물리학 교수인 필립 폰 욜리Philipp von Jolly는 플랑크에게 이라며 플랑크에게 물리학에 입문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플랑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의 알려진 기초를 이해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했고 1874년 뮌헨 대학교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욜리의 감독하에 플랑크는 가열된 백금을 통한 수소의 확산을 연구하는 그의 과학 경력의 유일한 실험을 수행했지만 이론물리학으로 옮겼다.1877년 그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수학자 카를 바이어슈트라스Karl Weierstrass와 함께 1년 동안 연구했다. 그는 헬름홀츠는 준비가 제대로 된 적이 없고 천천히 말하고 끝없이 잘못 계산되어 청중을 지루하게 하는 반면 키르히호프는 주의깊게 준비되었지만 건조하고 단조로운 강의를 했다고 썼다. 그는 곧 헬름홀츠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클라우지우스의 저작에 대한 대부분의 독학 프로그램에 수행하여서 열역학을 자신의 분야로 선택하도록 되었다.1878년 10월에 플랑크는 자격 시험에 합격했고 1879년 2월에 자신의 학위논문인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하여"를 방어했다. 그는 잠시 뮌헨에 있는 이전 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1880년까지 플랑크는 유럽에서 제공되는 가장 높은 두 개의 학위를 취득했다. 첫 번째는 열역학 연구와 이론을 자세히 설명하는 논문을 마친 후 박사학위였다. 그런 다음 그는 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하빌리타치온을 획득했다.그의 하빌리타치온 논문이 완성되자 플랑크는 뮌헨에서 무급 프리바트도첸트Privatdozent가 되어 학업 제안을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에는 학계에서 무시 당했지만 열 이론 분야에서 그의 작업을 더욱 발전시켜 기브스와 같은 열역학적 형식론을 자신도 모르게 차례로 발견했다. 엔트로피에 대한 클라우지우스의 아이디어는 그의 작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1885년 4월 킬 대학교는 플랑크를 이론물리학 부교수로 임명했다. 특히 물리화학에 적용되는 엔트로피와 그 처리에 대한 추가 연구가 뒤따랐다. 그는 1897년에 "열역학에 관한 논문"을 출판했다. 그는 스반테 아레니우스의 전해질 해리 이론에 대한 열역학적 기초를 제안했다.1889년에 그는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스-대학교에서 키르히호프의 직위를 계승하는 사람으로 임명되었으며 - 아마도 헬름홀츠의 중재 덕분에 - 1892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1907년 플랑크는 빈에서 볼츠만의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베를린에 남으려고 거절했다. 1909년에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뉴욕시 컬럼비아 대학교 이론물리학의 어니스트 켐프턴 아담스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의 강의 시리즈는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A. P. 윌리스A. P. Wills에 의해 번역 및 공동 출판되었다. 1926년 1월 10일 베를린에서 은퇴했고 에르빈 슈뢰딩거가 그의 뒤를 이었다.1887년 3월 플랑크는 학교 친구의 여동생인 마리 머르크Marie Merck(1861-1909)와 결혼하여 키엘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들은 카를Karl(1888~1916), 쌍둥이 엠마Emma(1889~1919)와 그레테Grete(1889~1917), 에르빈Erwin(1893~1945) 등 5명의 자녀를 두었다.베를린에 있는 아파트 이후, 플랑크 가족은 반겐하임 거리 21의베를린-그루네발트에 있는 빌라에서 살았다. 베를린 대학교의 다른 여러 교수가 근처에 살았으며 그 중에는 플랑크의 절친한 친구가 된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도 있었다. 곧 플랑크의 집은 사회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와 같은 수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자주 방문했다. 공동 연주 음악의 전통은 이미 헬름홀츠의 고향에서 확립되었다.행복한 몇 년 후인 1909년 7월에 마리 플랑크는 아마도 결핵으로 사망했다. 1911년 3월 플랑크는 두 번째 부인인 마르가 폰 회슬린Marga von Hoesslin과 결혼했다. 12월에는 다섯 번째 아이 헤르만Hermann이 태어났다.제1차 세계대전 중 플랑크의 차남 에르빈은 1914년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장남 카를은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레테는 1917년 첫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여동생인 엠마는 그레테의 홀아비와 결혼했는데 2년 후 같은 방식으로 사망했다. 두 손녀 모두 생존했으며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플랑크는 이러한 상해들을 꿋꿋하게 견뎌냈다.1945년 1월, 그가 특히 가까웠던 에르빈은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시도 실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나치 인민법정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르빈은 1945년 1월 23일 처형되었다.베를린 대학교의 교수.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스 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t) 교수로서 플랑크는 지역 물리학회에 가입했다. 그는 나중에 이 시기에 대해 쓰기를 그의 이니셔티브 덕분에 독일의 다양한 지역 물리 학회들이 1898년에 통합되어 독일 물리학회(Deutsche Physikalische Gesellschaft DPG)를 형성했으며 1905년부터 1909년까지 플랑크는 회장이었다.플랑크는 리제 마이트너에 따르면 "건조하고 다소 비인간적인" 영국 참가자인 제임스 R. 파팅톤James R. Partington에 의하면 "노트를 사용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그는 내가 들어본 최고의 강사"라는 6학기 이론물리학 강의를 시작햤으며 R. 파팅톤은 계속하기를 "강의실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강의실은 난방이 잘 되고 다소 가까웠기 때문에 청취자 중 일부가 때때로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지만 강의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플랑크는 실제 "학파"를 설립하지 않았다. 그의 대학원생 수는 약 20명에 불과했지만 아래와 같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1894년 플랑크는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문제는 1859년 키르히호프에 의해 언급되었다. "흑체에서 방출되는 전자기 복사의 강도는 복사의 주파수 와 그 물체의 온도에 의존하는가?"라는 질문은 실험적으로 탐구되었지만 실험 값과 일치하는 이론적 취급은 없었다. 빌헬름 빈은 빈의 법칙을 제안했는데, 이는 고주파에서는 거동을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저주파에서는 실패했다.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인 레일리–진스 법칙은 저주파에서의 실험 결과에 일치했지만 나중에 고주파에서 "자외선 파탄"으로 알려진 현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많은 교과서와 달리, 이것이 플랑크를 위한 동기는 아니었다.1899년 플랑크가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제안한 해법은 플랑크가 "기본 무질서의 원리"라고 부른 것에서 따랐는데, 이를 통해 그는 이상적인 진동자의 엔트로피에 대한 여러 가정으로부터 빈의 법칙을 유도하여 빈-플랑크 법칙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다. 곧 실험적 증거가 새로운 법칙을 전혀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발견되어 플랑크는 좌절했다. 플랑크는 접근 방식을 수정하여, 실험적으로 관찰된 흑체 스펙트럼을 잘 설명하는 유명한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의 첫 번째 버전을 유도했다. 그것은 1900년 10월 19일 물리학회(DPG) 회의에서 처음 제안되었고 1901년에 출판되었다. 이 첫 번째 유도는 에너지 양자화를 포함하지 않았으며 통계 역학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1900년 11월 플랑크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볼츠만의 통계적 해석에 의거하여 이 첫 번째 접근 방식을 수정했다. 플랑크는 볼츠만의 접근 방식에 대한 그러한 해석의 철학적, 물리적 의미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말했듯이 "그것은 절망의 행위 ... 나는 물리학에 대한 나의 이전 신념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1900년 12월 14일 물리학회에 제출된 그의 새로운 유도의 중심 가정은 이제 플랑크 가설로 알려진 가정은 전자기 에너지가 양자화된 형태로만 방출될 수 있다는 것으로 다시 말해 에너지는 기본 단위의 배수일 뿐으로여기서 "h" 는 플랑크 상수이며 플랑크의 작용 양자라고도 하며 , "" 는 복사의 주파수이다. 여기서 논의된 에너지의 기본 단위는 단순히 "" 가 아니라 "h" 로 표시된다. 물리학자들은 이제 이러한 양자 광자를 부르고 주파수 "" 의 광자는 고유한 에너지를 갖는다. 그러면 해당 주파수의 총 에너지는 해당 주파수의 광자 수를 곱한 "h" 와 같다.처음에 플랑크는 양자화가 "순전히 형식적인 가정으로 ... 실제로는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였지만 오늘날 고전 물리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 가정은 양자 물리학의 탄생이자 플랑크 경력의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로 간주된다 (루트비히 볼츠만은 1877년 이론 논문에서 물리 시스템의 에너지 상태가 이산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플랑크 상수의 발견으로 그는 양자 이론의 대부분이 기반으로 하는 기본적인 물리적 상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보편적인 물리적 단위 집합(플랑크 길이 및 플랑크 질량과 같은)을 정의할 수 있었다. 플랑크는 새로운 물리학 분야에 대한 근본적인 공헌을 인정받아 191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실제로는 1919년에 수상했다).그 후 플랑크는 에너지 양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행동 양자를 고전 이론으로 어떻게든 재통합하려는 나의 무익한 시도는 몇 년에 걸쳐 연장되었고 나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몇 년 후에도 존 레일리 제임스 진스 헨드릭 로런츠와 같은 다른 물리학자들은 고전 물리학에 맞추기 위해 플랑크 상수를 0으로 설정했지만 플랑크는 이 상수가 0이 아닌 정확한 값을 갖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진스의 완고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론가의 한 예이다. 헤겔이 철학에 대해 그랬었다. 사실들이 맞지 않으면 그것들은 더욱 나빠진다."막스 보른은 플랑크에 대해 쓰기를: "그는, 천성이, 보수적인 마음이며; 그는 전혀 혁명적아지 않았고 사색에 대해서는 철저히 회의적이었다. 그런데도 사실로부터 논리적 추론의 설득력 있는 힘에 대한 그의 믿음이 너무나 강해서 물리학을 뒤흔든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세 편의 획기적인 논문이 저널에 발표되었다. 플랑크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중요성을 즉시 인식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영향 덕분에 이 이론은 곧 독일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플랑크는 또한 특수 상대성이론을 확장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고전적 작용의 관점에서 이론을 재구성한다.광전 효과에 대한 하인리히 헤르츠의 1887년 발견에 기반한 아인슈타인의 빛 양자 가설은 처음에 플랑크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는 맥스웰의 전자기학 이론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을 꺼려했다. "빛의 이론은 수십 년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감히 아이작 뉴턴의 강력한 방출 이론에 맞서 싸웠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이다..."1910년에 아인슈타인은 고전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의 또 다른 예로서 저온에서 비열용량의 변칙적 거동을 지적했다. 플랑크와 네른스트는 커지는 모순들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제1차 솔베이 회의를 조직했다 . 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플랑크를 설득할 수 있었다.한편, 플랑크는 베를린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어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불러 새로운 교수직을 만들 수 있었다 . 곧 두 과학자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자주 만났다.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플랑크는 대중의 일반적인 흥분을 다음과 같이 썼다. "끔찍한 것 외에도 예기치 않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 모든 정당의 통합 ... 선하고 고귀한 모든 것에 대한 찬사와 같은 것도 많다." 플랑크는 또한 논쟁적인 전쟁 선전의 소책자인 악명 높은 "93인의 ��명서"에 서명했다 .1915년 이탈리아가 아직 중립국이었던 때에 그는 이탈리아에서 과학 논문에 기고를 했는데 이 논문은 플랑크가 네명의 영구 회장 중 한 명으로 있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다.전후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격동의 전후 몇 년 동안 현재 독일 물리학의 최고 권위자인 플랑크는 동료들에게 "인내하고 계속 일하라"는 슬로건을 발표했다.1920년 10월, 그와 프리츠 하버는 과학 연구를 위한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독일 과학 비상기구를 설립했다. 조직이 분배할 자금의 상당 부분은 해외에서 모금되었다.또한 플랑크는 베를린 대학교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독일 물리학회 및 카이저 빌헬름 협회에서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독일의 경제 상황은 그가 연구를 거의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26년 플랑크는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이 되었다.전후 기간 동안 플랑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정당인 독일 인민당의 당원이 되었으며 이 당은 국내 정책에 대한 자유주의적 목표와 전 세계 정치에 대한 수정주의적 목표를 열망했다.플랑크는 보통선거의 도입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나치 독재가 "대중 지배의 상승"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1920년대 말 보어,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을 수행했지만 플랑크와 슈뢰딩거, 라우에, 아인슈타인도 이를 거부했다. 플랑크는 파동역학이 곧 양자 이론-자신의 아이-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와 아인슈타인의 철학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작업은 양자 이론을 확고히 했을 뿐이다. 플랑크는 젊은 시절에 오래된 견해와 투쟁하면서 는 자신의 초기 관찰의 진리를 경험했다.나치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1933년 나치가 집권했을 때 플랑크는 74세였다. 그는 많은 유대인 친구와 동료들이 직위에서 추방되어 굴욕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나치 독일에서 이주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다시 "인내하고 계속 일하려고" 노력했고, 이민을 고려하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독일에 남을 것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카인 경제학자 헤르만 크라놀트Hermann Kranold가 체포된 후 런던으로 이주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위기가 곧 진정되고 정치적 상황이 개선되기를 희망했다.오토 한은 플랑크에게 유태인 교수 처우에 대한 공개 선언을 하기 위해 독일의 저명한 교수들을 모아달라고 요청했지만 플랑크는 "오늘 그런 신사 30명을 모을 수 있다면 내일 150명이 와서 반대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지위를 물려받기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플랑크의 지도하에 카이저 빌헬름 협회는 유대인 프리츠 하버에 관한 것 외에는 나치 정권과의 공개적인 충돌을 피했다. 플랑크는 최근에 임명된 독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와 이 문제를 논의하려고 했지만 실패적이었는데 히틀러에게 "유대인은 모두 공산주의자이고 이들은 나의 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934년에 하버는 망명 중에 사망했다.1년 후 1930년부터 협회(KWG)의 회장을 맡은 플랑크는 다소 도발적인 스타일로 하버에 대한 공식 기념 회의를 조직했다. 그는 또한 비밀리에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협회(KWG) 연구소에서 몇 년 동안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1936년에 그의 협회(KWG) 회장 임기가 끝났고 나치 정부는 그에게 연임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독일의 정치 환경이 점차 더 적대적으로 변하면서 도이치 물리학의 저명한 대표자인 요하네스 슈타르크는 플랑크 조머펠트 하이젠베르크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계속 가르친다고 공격하며 그들을 "백인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나치 과학 정부 사무소"는 플랑크가 "1/16 유태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플랑크의 가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지만 플랑크 자신은 이를 부인했다.1938년 플랑크는 80세 생일을 맞았다. 물리학회는 축하 행사를 열었고 이 기간 동안 막스 플랑크 메달이 프랑스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에게 수여되었다. 1938년 말 프로이센 아카데미는 남아 있던 독립성을 상실하고 나치에 의해 인수되었다. 플랑크는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항의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주 여행을 다니며 종교와 과학에 관한 연설을 비롯한 수많은 공개 강연을 했으며 5년후에 그는 알프스의 3000미터 봉우리들을 ���를 정도로 충분히 건강했다.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베를린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 임무가 늘어나면서 플랑크와 그의 아내는 일시적으로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게 되었다. 1942년에 그는 고 기록하였다. 1944년 2월 베를린에 있는 그의 집은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그의 모든 과학 기록과 서신이 소실되었다. 그의 시골 은퇴는 양측에서 연합군의 급속한 진격으로 위협을 받았다.1944년 플랑크의 아들 에르빈은 7월 20일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7·20 음모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944년 10월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르빈은 1945년 1월 베를린의 플로트젠제Pltzensee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플랑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당부분 상실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플랑크의 두 번째 아내와 그의 아들은 괴팅겐에 있는 친척에게 갔는데 플랑크는 1947년 10월 4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괴팅겐의 에 있다.플랑크는 독일 루터교 교인이었다. 그는 대안적인 견해와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했다. 1937년 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그는 이러한 상징과 의식의 중요성은 신자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능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나 상징은 신성의 불완전성을 제공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무신론이 그러한 상징에 대한 조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한편 신자들이 그러한 상징의 중요성을 과대 평가한다고 경고했다.플랑크는 모든 종교에 관대하고 호의적이었다. 그는 루터교에 남아 있었지만 기독교나 성경적 견해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기적에 대한 믿음은 과학의 사실이 꾸준하고 확고하게 전진하기 전에 단계적으로 양보해야 하며, 그 완전한 패배는 의심할바 없이 시간 문제이다."라고 믿었다."종교와 자연과학"에서 플랑크는 신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견해를 표현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신격의 거룩함은 상징의 거룩함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신론자들이 단순한 상징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0년부터 죽을 때까지 교회 관리인이었고 전능하고 전지전능하며 자비로운 하나님을 (반드시 인격적인 신은 아니더라도) 믿었다. 과학과 종교는 모두 "신을 향하여!"라는 목표를 가지고 "회의론과 독단주의 불신과 미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1944년 플랑크는 "가장 명석한 과학 즉 물질 연구에 평생을 바친 사람으로서 원자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물질은 없다. 모든 물질은 원자 입자를 진동시키고 원자의 이 가장 미세한 태양계를 하나로 묶는 힘에 의해서만 발생하고 존재한다. 우리는 이 힘 뒤에 의식적이고 지적인 정신geist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정신은 모든 물질의 모체이다."플랑크는 신의 개념이 종교와 과학 모두에 중요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종교와 과학 모두 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신자들에게 신은 시작에 있고 물리학자들에게는 신이 모든 것의 고려의 끝에 있다. ... 전자에게 그분은 기초가 되고 후자에게 모든 일반화된 세계관의 구성체의 왕관이 된다."나아가 플랑크는 이렇게 썼다...."믿는다"는 것은 "진리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전한 길로 계속하여 발전하는 자연에 대한 지식은, 자연 과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사람이, 자연의 법칙과 모순되는 이례적인 사건과, 종교적 교리에 대한 필수적인 뒷받침과 확인으로 여전히 일반적으로 간주되며 이전에는 의심이나 비판 없이 순수하고 단순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기적에 관한 다수의 보고가,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중단없이 믿음직스럽게 진보하는 과학 앞에서 점차적으로 물러나야 하며, 우리는 이것이 조만간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저명한 과학사가 존 L. 하일브론John L. Heilbron은 신에 대한 플랑크의 견해를 이신론적이라고 규정했다. 하일브론은 나아가 자신의 종교적 계열에 대해 물었을 때 플랑크는 자신이 항상 깊이 종교적이었지만 "기독교 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신"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것을 관련짓는다. +포인팅 벡터()는 전자기장이 가진 에너지와 운동량을 나타내는 벡터로, 전기장과 자기장의 벡터곱이다.영국의 존 헨리 포인팅이 1883년에 유도하였다.포인팅 벡터 S는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다.CGS 단위계에서는 formula_2 대신 formula_3를 쓴다.포인팅 벡터의 크기는 전자기장의 에너지 선속 밀도( 단위 시간 및 단위 면적 당 에너지)의 크기와 같다. 포인팅 벡터의 방향은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향과 같으며 항상 전기장 및 자기장과 수직이다.전자기장의 운동량과 각운동량.포인팅 벡터는 전자기장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운동량 formula_4와 각운동량 formula_5과도 다음과 같이 연관되어 있다.포인팅 정리()는 전자기장을 포함한 계에서의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즉 전자기장이 한 일의 양은 전자기장이 잃게 되는 에너지의 양과 같다는 정리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우변의 첫 번째 적분은 부피 안에 저장된 전자기장의 에너지이며 두 번째 적분은 표면의 수직 방향의 전자기파로 방출되는 에너지다. 즉 포인팅 정리에 따르면 전자기력에 의하여 전하가 받은 일의 양은 전자기장에 저장된 에너지의 양의 감소량과 표면의 수직 방향의 전자기파로 방출되는 에너지량과 같다.역학적 에너지 밀도, 전자기장의 에너지 밀도 식을 이용하여 포인팅 정리 식과 발산정리를 이용하면 포인팅 정리의 미분형을 얻을 수 있다.미세 구조 상수 또는 조머펠트 미세 구조 상수는 전자기력의 세기를 나타내는 물리상수다. 원자물리학과 입자물리학에서 자주 나타난다. 1916년 아르놀트 조머펠트가 발견하였다. 원래 조머펠트가 원자 방출 스펙트럼의 미세 구조를 연구할 때 발견하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2020년 4월에 130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미세구조상수가 다른 곳이 관측되었다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는 전자기법칙이 전 우주에서 같지는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미세 구조 상수 formula_1는 국제단위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여기서 formula_3는 기본 전하 formula_4는 원주율 formula_5는 디랙 상수 formula_6는 빛의 속도 formula_7은 진공의 유전율이다. 이 값은 두 전자가 formula_8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때 그 전기적 위치 에너지와 전자의 정지 에너지 formula_9의 비로 해석할 수 있다.CGS 단위계에서는 formula_10 인자가 전하량에 포함되므로 식이 다음과 같이 바뀐다.formula_1는 차원이 없는 상수이기 때문에 그 값은 단위계에 상관없이 같다. 여기에 들어가는 기본 상수값을 대입해보면이 나온다. 이 값은 실제 측정값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양자 전기역학에서 예견하는 전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보정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전자의 자기 모멘트와 미세 구조 상수와의 관계를 통해 구해진 것으로, 다음과 같다. +선형대수학에서, 크라메르 공식(Cramer公式) 또는 크래머 공식은 유일한 해를 가지며 변수와 방정식의 수가 같은 연립 일차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공식이다. 계수 행렬과 그 한 열을 상수항으로 대신하여 얻는 행렬들의 행렬식의 비를 통해 해를 나타낸다. 둘 또는 셋 이상의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연립 일차 방정식의 경우, 크라메르 공식에 의한 알고리즘은 가우스 소거법에 의한 알고리즘보다 훨씬 비효율적이다.에서, formula_2가 정사각 행렬이며, 행렬식이 0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 유일한 해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으며, 이를 크라메르 공식이라고 한다.여기서 formula_4는 formula_2의 formula_6번째 열을 formula_7로 대신하여 얻는 행렬이다.의 계수 행렬 formula_2의 formula_13-여인자를 formula_14라고 하자. 그렇다면 라플라스 전개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이에 따라 각 formula_17번째 방정식에 formula_14을 곱한 뒤 모두 합하면를 얻는다. formula_20이므로, 양변을 formula_21로 나누면2개의 방정식의 경우.이 유일한 해를 갖는다면, 그 해는 다음과 같다.3개의 방정식의 경우.이 유일한 해를 갖는다면 그 해는 다음과 같다.크라메르 공식은 미분기하학에서 매우 유용하다. 두 개의 방정식 formula_30 formula_31이라 가정한다. 여기서 u와 v는 독립 변수이고 formula_32 formula_33라 정의한다.여기서 formula_34의 방정식을 찾는 것은 크라메르 공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먼저, F,G,x,y의 미분을 계산한다.dF dG에 dx와 dy를 대입하면u와 v는 독립적이므로 du와 dv의 계수는 0이다. 따라서 계수에 대한 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따라서 크라메르 공식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이것은 두 개의 야코비안 항이다.유사하게 formula_47, formula_48, formula_49의 공식들도 유도할 수 있다.스위스 수학자 가브리엘 크라메르에게서 유래한다. +선형대수학에��� 행렬식은 정사각 행렬에 스칼라를 대응시키는 함수의 하나이다. 실수 정사각 행렬의 행렬식의 절댓값은 그 행렬이 나타내는 선형 변환이 초부피를 확대시키는 배수를 나타내며 행렬식의 부호는 방향 보존 여부를 나타낸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formula_2 정사각 행렬 formula_3의 행렬식 formula_4는으로 표기하며 다음 방법들을 통하여 정의할 수 있다.다중 선형 형식을 통한 정의.행렬식은 행 또는 열에 대한 표준적인 교대 다중 선형 형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formula_2 정사각 행렬의 formula_1-가군을 행벡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자.즉 행렬 formula_11은 행벡터 formula_12의 튜플 formula_13으로 여기자.가환환 formula_1 위의 formula_2 정사각 행렬의 formula_1-가군 formula_17 위의 행렬식 formula_18는 단위 행렬에서의 값이 1인 유일한 교대 formula_1-다중 선형 형식이다. 즉 다음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함수이다.조건 ㈀ 아래 조건 ㈁은 다음 조건을 함의하며 만약 formula_1가 표수가 2가 아닌 체일 경우 조건 ㈁은 이 조건과 동치이다.조건 ㈁’은 formula_36 대신 formula_37 를 사용한 조건과 동치이다. 또한 조건 ㈁ 아래 조건 ㈀은 그 formula_39인 경우와 동치이다.마찬가지로 행렬식은 열벡터를 사용하여 같은 조건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위 정의와 동치이다.행렬식은 행렬의 성분에 대한 특수한 다항식으로서 정의할 수 있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formula_2 정사각 행렬 formula_3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라이프니츠 공식 ).등식의 우변은 formula_48개 항을 갖는 formula_49차 동차 다항식이며 formula_50일 경우 반은 더하는 항 반은 빼는 항이다.행렬식은 행 또는 열에 대한 라플라스 전개를 통해 작은 크기의 행렬부터 시작하여 재귀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정사각 행렬 formula_3에 대하여, formula_11의 formula_54번째 행과 formula_55번째 열을 제거한 부분 행렬을 formula_56로 표기하자.가환환 formula_1 위의 정사각 행렬 formula_3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이는 모든 행 formula_21에 대하여 같은 함수를 정의하며, 다른 정의들과 동치이다. 마찬가지로, 열 formula_62에 대한 라플라스 전개를 사용하여 정의할 수도 있다.가우스 소거법은 정사각행렬을 일련의 기본행연산을 통해 상삼각행렬로 변환한다. 행렬식의 선형성과 교대성에 따라, 기본행연산은 행렬식을 보고 알아낼 수 있는 배수만큼 변화시킨다. 또한, 상삼각행렬의 행렬식은 자명하게 모든 대각항의 곱이다. 따라서, 가우스 소거법을 통해 행렬식을 계산할 수 있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formula_2 정사각 행렬 formula_65에 대하여 다음 항등식들이 성립한다.특히 행렬식 formula_18는 환 준동형이며 일반적으로 formula_1-결합 대수 준동형이 아니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formula_2 정사각 행렬 formula_3 및 행의 집합 formula_80에 대하여 행렬식은 다음과 같은 점화식을 갖는다.마찬가지로, 열의 집합 formula_82에 대한 점화식은 다음과 같다.가환환 formula_1에 대하여, 교대 다중 선형 형식 formula_85의 집합은 1차원 formula_1-자유 가군을 이루며, 행렬식은 이 formula_1-자유 가군의 한 기저를 이룬다. 즉, 모든 교대 다중 선형 형식 formula_85는 다음과 같은 꼴로 유일하게 나타낼 수 있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formula_2 정사각 행렬 formula_3에 대하여 가역 행렬은 행렬식이 formula_1의 가역원인 것과 동치이다. 특히 만약 formula_1가 체일 경우 가역 행렬은 행렬식이 0이 아닌 것과 동치이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formula_2 정사각 행렬 formula_3에 대하여, 연립 일차 방정식 formula_99의 해 formula_100은을 만족시킨다. (여기서 formula_102는 formula_11의 formula_55번째 열이다.) 특히 만약 formula_11이 가역 행렬일 경우 그 유일한 해는체 formula_1 위의 정사각 행렬 formula_3의 행렬식은 모든 고윳값의 곱이자 특성 다항식의 상수항이다.실수 정사각 행렬 formula_110에 대하여, 실수 선형 변환가 가측 집합 formula_113의 초부피를 확대시키는 배수는 행렬식의 절댓값 formula_114이다.보다 일반적으로, 실수 행렬 formula_115에 대하여, 실수 선형 변환가 가측 집합 formula_113의 formula_49차원 초부피를 확대시키는 배수는0×0 1×1 2×2 3×3 4×4 행렬의 행렬식은 각각 1 1 2 6 24개의 항을 갖는 다항식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3×3 행렬의 행렬식 공식은 사뤼스 도식()을 통해 기억할 수 있다. 즉, 3×3 행렬의 행렬식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열을 행렬의 오른쪽에 옮겨 적었을 때, 첫 행의 세 성분을 지나는 대각선의 위의 원소의 곱의 합과 마지막 행의 세 성분을 지나는 대각선 위의 원소의 곱의 합 사이의 차와 같다. 그러나 이는 4×4 이상의 행렬에서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실수 3×3 행렬의 행렬식은 그 행벡터 또는 열벡터의 스칼라 삼중곱과 같다. 즉, 이는 행벡터 또는 열벡터로 구성된 평행 육면체의 부피를 절댓값으로 하며, 방향을 보존할 경우 양수, 반전시킬 경우 음수가 된다. 반대로, 실수 3차원 벡터의 스칼라 삼중곱은 정규 직교 기저에 대한 좌표 성분에 대한 3×3행렬식과 같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삼각 행렬 formula_3의 행렬식은 대각 성분들의 곱이다.특히 대각 행렬의 행렬식은 대각 성분들의 곱이다.가환환 formula_1 위의 방데르몽드 행렬역사적으로 행렬식은 행렬보다 앞서 등장하였다. 행렬식은 원래는 연립 선형방정식의 성질을 결정하기 위해 정의되었고 행렬식의 영어 이름 에서 유래하였다. 행렬식이 0이 아닌지 여부는 연립방정식이 유일한 해를 갖는지를 결정한다. 16세기에 지롤라모 카르다노가 formula_132 행렬식을 17세기에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일반적인 행렬식의 크기를 정의하였다. +수론에서 리만 제타 함수 formula_1는 소수들의 정수론적 성질을 해석적으로 내포하는 유리형 함수이다. 해석적 수론에서 소수의 분포를 연구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또한 L-함수 이론의 모태이다.리만 제타 함수는 실수부가 1보다 큰 임의의 복소수 formula_2에 대해, 다음과 같은 디리클레 수열로 정의된다.이 무한급수는 formula_4의 영역에서 수렴하고 위 식은 정칙함수를 정의한다. 리만은 제타 함수가 ≠ 1인 모든 점에서 정의된 유리형 함수로 유일하게 해석적 연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리만 가설에 등장하는 제타 함수는 확장된 리만 제타 함수를 뜻한다.해석적 연속과 함수 방정식.자이 함수(formula_8 function)를 얻을 수 있다.오른쪽의 적분은 모든 복소수 formula_9에 대하여 수렴하지 않으나, 다음 식의 적분은 모든 formula_9에 대하여 수렴한다.한편 여기서 세타 함수의 성질이로부터 제타 함수의 해석적 연속과 함수 방정식다음은 작은 수에 대한 제타 함수의 값이다.현재 리만 제타 함수가 실수부가 짝수인 실수에서는 formula_30의 유리수배, 즉 초월수임이 알려졌다. 홀수일 때에는 3의 제타 함수 값은 무리수이며, 5, 7, 9, 11의 제타 함수 값 중 적어도 하나가 무리수라는 것만이 알려져 있다.오일러 곱셈과 디리클레 덧셈.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리만 제타 함수가 소수와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서 우변의 모든 소수의 배수를 없애주면특정 합성수는 항상 소수의 곱으로써 나타낼 수 있다는 산술의 기본 정리에 따라서 분모가 합성수 또는 소수인 수가 모두 사라지고마지막에는 1만이 남는다. 즉이것은 디리클레 급수이다.리만 제타 함수는 규칙적으로 모든 자연수에 대한 무한급수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방법으로 성질을 탐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리만 제타 함수는 오일러 곱을 통해 소수와 연결된다. 따라서 이 식을 이용하면 소수의 비밀을 수학적으로 파헤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식은 중요하게 이용된다.즉 리만 제타 함수는 모든 소수 formula_39에 대해 위와 같은 무한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위 식은 오일러의 곱셈 공식이라 불리며, 등비급수의 식과 산술의 기본 정리로부터 유도해낼 수 있다. 그 간단한 증명은 다음과 같다.우변의 분모에서 2의 배수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계속해서 반복하면동일한 절차로 우변의 분모에서 3의 배수가 모두 사라진다.함수 방정식에 따라 리만 제타 함수는 음의 짝수 formula_48에서 영점을 가진다. 이 영점들을 자명한 영점이라고 한다. 리만 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영점들은 다음과 같은 임계 구역에 존재한다.임계 구역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집합을 임계 직선이라고 한다.임계 직선 위에는 무한히 많은 영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계산된 모든 비자명 영점들은 임계 직선 위에 존재하고 있지만 모든 영점들이 실제로 임계 직선 위에 있는지 여부는 아직 증명되거나 반증되지 못했다. 이는 리만 가설로 일컬어지는 문제로 현대 수학의 주요 난제로 꼽힌다.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들은 해석적 수론에서 소수의 분포에 대한 연구에 대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소수 정리는 리�� 제타 함수의 영점들에 대한 동치인 명제로 바뀌어 증명될 수 있다.리만 제타 함수를 일반화한 몇 가지 제타 함수가 있다. 그중 가장 간단한 것은 후르비츠 제타 함수이며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이 함수는 formula_52일 때 리만 제타 함수가 된다. +좌표계 혹은 자리표계는 유클리드 공간과 같은 다양체의 점이나 기타 기하학적 요소를 고유하게 결정하기 위해 하나 이상의 숫자인 좌표를 사용하는 체계이다. 스칼라 튜플을 이용해 n차원 공간의 각 지점을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서 스칼라는 보통 실수 경우에 따라서는 복소수나 다른 일반적인 환의 원소를 말하기도 한다. 복잡한 우주에서 스칼라는 우주 전체에 대해 효과적인 좌표계를 산출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 경우 그래프로 이 좌표계를 우주 지도 책에 함께 수집하여 둔다. 좌표를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인 직교좌표계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발명했다. 그는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직교좌표계를 발명해 냈다고 한다.함수해석학에서, 힐베르트 공간(Hilbert空間)은 모든 코시 열의 극한이 존재하는 내적 공간이다. 유클리드 공간을 일반화한 개념이다.formula_1가 formula_2 또는 formula_3라고 하자.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5은 완비 거리 공간을 이루는 formula_1-내적 공간이다. 내적 공간으로서 힐베르트 공간은 표준적인 위상 공간 및 거리 공간 및 벡터 공간 및 노름 공간의 구조를 갖는다.이와 동치로, formula_1-힐베르트 공간을 다음과 같은 평행사변형 항등식을 만족시키는 formula_1-바나흐 공간 formula_9으로 정의할 수 있다.이 경우, 내적 구조는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의 정규 직교 기저 formula_13는 다음과 같은 두 성질을 만족시키는 부분집합이다.초른의 보조정리에 의하여, 모든 힐베르트 공간은 정규 직교 기저를 갖는다. 주어진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의 모든 정규 직교 기저의 크기는 항상 같은 기수임을 보일 수 있으며, 이 기수를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 formula_17이라고 한다.일반적으로 힐베르트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는 벡터 공간의 기저를 이루지 않으며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은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보다 작거나 같다. 이는 벡터 공간의 경우 formula_18를 필요로 하지만 힐베르트 공간의 경우 formula_19가 오직 조밀 집합임이 족하기 때문이다.두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 formula_22 사이에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따라서, 힐베르트 공간들은 차원에 따라 완전히 분류된다. 또한,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즉, 분해 가능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은 음이 아닌 정수이거나 아니면 가산 무한 formula_31이다.리스 표현 정리에 따라서,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는 스스로의 연속 쌍대 공간 formula_33와 동형이며, 만약 formula_34일 경우 이는 표준적() 동형이다.formula_1가 formula_2 또는 formula_3라고 하고, formula_38가 측도 공간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렇다면 L2 공간 formula_39는 formula_1-힐베르트 공간을 이룬다.만약 formula_41가 셈측도가 부여된 집합이라면는 formula_39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룬다.만약 formula_46가 분해가능 시그마 대수이며 또한 formula_41가 시그마 유한 공간이라면 formula_39는 분해 가능 공간이다.힐베르트 공간은 해석학의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며, 특히 편미분 방정식 이론에서 널리 쓰인다. 힐베르트 공간 중 하나인 소볼레프 공간이 편미분 방정식을 다룰 때 주로 등장한다.푸리에 해석이 힐베르트 공간에서 이뤄진다.양자역학에서 양자계의 상태 공간은 분해 가능 힐베르트 공간으로 나타내어진다.1907년에 리스 프리제시와 Ernst Sigismund Fischer가 독립적으로 힐베르트 공간 중 하나인 가 완비 거리 공간임을 증명하였다. 1907년에 힐베르트 공간론에서 핵심적 정리 중 하나인 리스 표현 정리가 증명되었다.1908년에 다비트 힐베르트와 에르하르트 슈미트가 발표한 적분방정식에 대한 논문에서 제곱 적분 가능한 두 함수의 내적 formula_50이 등장한다. 이 공간은 힐베르트 공간인 formula_51공간이 된다.다비트 힐베르트가 1912년에 힐베르트 공간 formula_52을 정의하였다. 이는 유클리드 공간이 아닌 최초의 힐베르트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후 1929년에 존 폰 노이만 이 힐베르트 공간을 추상적으로 정의하였다. +양자역학은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와 미시적인 계의 현상을 다루는 즉, 작은 크기��� 갖는 계의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이다. 또는 아원자 입자 및 입자 집단을 다루는 현대 물리학의 기초 이론이다. '아무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사건이라 해도, 발생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일어난다'는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기초한다.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양자역학은 컴퓨터의 주요 부품인 반도체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등 과학기술,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20세기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론으로 평가된다.19세기 중반까지의 실험은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아원자 입자와 관련된 실험들의 결과는 고전역학으로 설명을 시도할 경우 모순이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역학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양자역학은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계기로 하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에 의해 만들어진 전적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학문이다. 양자역학에서 플랑크 상수를 0으로 극한을 취하면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으로 수렴하는데, 이를 대응 원리라 한다.양자역학은 기본적으로 불연속적인 물리량을 다루는 미시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고전역학은 주로 연속적인 물리량을 다루는 거시세계에서 탐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관찰 기준의 차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한 비유로 우리가 모래사장을 멀리서 바라본다고 하면 이는 우리가 물리현상을 거시세계에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찰에서 모래사장의 표면은 연속적으로 보인다. 이는 거시세계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물리현상에서 물리량이 연속적으로 관찰된다는 것에 비유된다. 만약 우리가 점점 모래사장에 가까이 다가가 모래사장을 관찰한다면 이는 거시세계에서 미시세계로 관찰의 단위를 줄인 것이다. 모래사장 가까이서 모래사장을 관찰한다면 모래사장의 표면은 불연속적으로 관찰 될 것이다. 이는 미시세계에서 물리현상에 물리량이 불연속적으로 관찰 된다는 것과 비슷하다.즉 '거시세계에서 특정 물리량을 관찰하면 그 물리량의 불연속성이 미시세계의 관찰 기준에 비해 너무 미세해 마치 그것이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관찰 단위가 거시세계보다 작은 미시세계에서 대상을 관찰하면 그 불연속성이 보이더라'라는 것이다.양자역학은 모든 역학 전자기학을 포함하는 고전 이론을 일반화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는 거시적으로는 관측이 어렵지만 고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 개념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드하스-판알펜 효과는 양자역학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영역에서는 분명해진다.양자역학이라는 용어는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이 처음 제시했다. 독일어 'Quantenmechanik'이 영어 'Quantum mechanics'로 번역되었고 일본에서 이를‘量子力學’라 번역했는데 이것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와 ‘양자역학'이라 부르게 되었다.양자역학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의 이론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이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평화의 회복과 더불어 물리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도의 노벨상은 패전국 독일의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에게 수여되었으며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양자론이 진전되었다. 그 주요 중심지는 1921년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개설된 코펜하겐을 비롯하여 뮌헨 괴팅겐 레이던이며 그 밖에 취리히의 에르빈 슈뢰딩거 베를린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담하였다. 이 형성기는 또한 젊은 세대의 활약이 특징적이었다.양자역학 형성의 길은 두 갈래로 되어 있다. 한쪽은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 출발하여 대응원리에서 행렬 역학으로 통한 길이다. 또 한쪽은 아인슈타인의 광자로 비롯하며, 루이 드브로이의 물질파를 거쳐서 도달하는 파동역학의 길이었다. 이 둘은 그 형성과정이나 수립된 이론이 전혀 달랐지만 얼마 안 가서 실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통일체로서의 양자학으로 간추려졌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의 형성이 일단락될 무렵, 물리학은 재차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였고, 전혀 다른 형태를 갖추고 형성되었으나, 그 이룩한 결과는 일치했다.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에르빈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에서 행렬역학의 유도를 시도하여 양자의 동등성(同等性)을 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폴 디랙과 파스쿠알 요르단()은 변환이론(變換理論)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으로 두 개의 이론은 하나로 통합되어 1926년경에는 양자역학이 성립되었다.양자역학의 형식은 성립되었어도, 그 물리적 해석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예컨대 파동의 개념에 대하여서도 파동역학의 창시자 슈뢰딩거는 이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의 반론을 받고, 보른의 확률해석이 이에 대체되었으나, 마침내 이것도 불충분하여 많은 모순으로 유도되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낡은 물리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양자론의 개념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음이 차차 확실해졌고, 드디어 1927년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등장하였다. 파와 입자의 두개의 상을 결부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이 관계는, 미시적 세계에서는 일상경험에서 만들어진 관념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어는 이 생각을 다시 자연인식 일반에 펼쳐 양자역학의 일관된 해석을 수립하려고 하여, 같은 해 상호보완성 원리를 제창하였다. 현상의 시공적인 기술과 인과적 관계와는 서로 보충하는 동시, 서로 배제한다는 것이 골자이다.아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새로운 양자론의 해석에 찬성하지 않고 일관하여 EPR 역설 등 의문을 계속 제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양자역학의 주장은 당시의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주어 물질의 부정이나 주관주의실증주의 경향의 세력이 증가하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양자역학(量子力學)의 결론들은 당시 과학자(및 일반인)들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이 이론이 실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대해 많은 해석과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많은 수의 물리학자들은 보어 등이 개발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해석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적 측면들은 우리의 지식의 부족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 실재 그 자체이며 따라서 결정론적 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양자역학을 개발한 이들 중 한 명인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의 무작위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양자역학의 현상인 도깨비 원격현상등을 강력히 부정하면서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양자역학의 근본에는 보다 깊은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이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해 여러 가지 반박을 제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EPR 역설이라 불린다. 벨은 EPR 역설을 이용해, 조건법적 명확성을 가정한 경우 양자역학과 국소적 이론 사이에 실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차이가 있음을 증명했다. 실험을 통해서, 실제 세계는 조건법적으로 명확하지 않거나 비국소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영문학 교수이자 작가인 루이스는 비결정론이 그의 철학적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양자역학을 불완전한 이론으로 보았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존재론적 비결정성이 아닌 인식론적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이유에서 숨은 변수 이론을 지지했다. 코펜하겐 해석을 둘러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당시의 양자역학을 둘러싼 논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현재 표준적인 양자역학의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이나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파동함수·불확정성 원리 등장- 앎의 한계 지적양자역학이라는 새 이론은 원자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었다. 학자들은 이 이론을 토대로 점점 더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새로운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새로 꺼내기 시작했다.를 발표한 하이젠베르크. <출처 German Federal Archive>원자와 관련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은 ‘파동함수6)’라고도 하고 ‘상태함수’라고도 하는 수학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양자역학이 제안된 초창기부터 많은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전까지 물리학에서는 대체로 수학을 이용해 방정식이나 ���식을 만들면, 그 의미를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방정식이나 공식에 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하이젠베르크는 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 안에 소위 ‘불확정성 원리7)’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 실용적으로 물리현상을 아주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 있는데, 정작 그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보다 불과 100여 년 전에 프랑스의 피에르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는 물리학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파동함수와 불확정성 원리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가 원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 개념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프랑크와 보어의 초기 양자역학은 전자의 궤도가 점프하는 현상을 강조한 반면 후기의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전자의 위치가 확률적 분포로밖에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양자역학은 원자폭탄 반도체 등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고 후기의 양자역학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후기 양자역학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성을 인정함으로써 현대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한편으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실험가능한 물리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험이 불가능한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을 내포하기도 했다. 물리학은 실제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의 21세기 초반까지 끈 이론 통일장 이론 등 여러 이론을 내놓았으나 실험이 불가능한 가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공식화는 양자역학에 등장하는 개념들과 공식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C* 대수 이론, 스튀름-리우빌 이론 등이 쓰일 수 있지만, 보통은 힐베르트 공간중 하나인 L2 공간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를 통해 기술한다. 이는 존 폰 노이만이 1930년대에 완성한 것으로, 20세기 이전에 개발된 물리학의 수학적 모형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여기에 나타나는 구조들 중 상당수는 함수해석학에서 나온 것이다. 에너지와 운동량 등의 물리적 관측량은 더이상 위상 공간상의 함수의 값이 아닌 선형 연산자의 고윳값으로 다루어진다.편의상 브라-켓 표기법과 슈뢰딩거 묘사를 쓰자. 양자역학의 공준은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16는 플랑크 상수다. 이를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대신 밀도 연산자 formula_4를 쓰면 그 시간 변화는 다음과 같다.이 수학적 틀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비가환 연산자에 대한 정리가 된다.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1901년 12월 5일 ~ 1976년 2월 1일)는 독일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양자역학의 주요 선구자 중 하나이다. 그는 1925년에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쓴 후속 논문애서는 양자역학의 행렬역학이 더욱 정교해졌다. 그는 1927년에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하다.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양자역학의 창안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난류의 유체동역학 이론, 원자핵, 강자성, 우주선, 그리고 아원자 입자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제2차 세게대전 동안 독일의 핵무기 프로그램의 대표 과학자였다. 그는 또한 1957년 뮌헨의 연구용 원자로와 함께 카를스루에에 최초의 원자로를 계획하는데 도움을 주었다.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카이저 빌헬름 협회의 소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뮌헨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그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 막스 플랑크 물리학 맟 천체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독일 연구협회의 회장, 원자력 물리학 위원 위원장, 핵 물리학 연구 그룹의 의장, 그리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의 회장이었다.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카스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Kaspar Ernst August Heisenberg와 아내인 애니 베클레인Annie Wecklein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 시스템에서 중세와 현대 그리스어 연구에 대한 독일의 유일한 오르덴틀리헤르ordentlicher 교수 (일반 교수)가 된 고전 언어의 중등학교 교사였다.하이젠베르크는 루터교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하이젠베르크는 십대 후반에 바이에른 알프스에서 하이킹을 하면서 플라톤의 를 읽었다. 그는 뮌헨 괴팅겐 및 코펜하겐에서 과학 교육을 받는 동안 동료 학생 및 교사와 원자 이해에 대한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라고 표명했다.하이젠베르크는 1년 전 수립된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과 싸우기 위해 1919년 자유군단의 일원으로 뮌헨에 도착했다. 50년 후 그는 그 시절을 과 같은 젊음의 즐거움으로 회상했다.1920년부터 1923년까지 그는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빌헬름 빈에게, 게오르그-아우구스트 괴팅겐 대학교에서 막스 보른과 제임스 프랑크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그라고 다비트 힐베르트에게 수학을 공부했다. 1923년 뮌헨에서 좀머펠트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괴팅겐에서 보른 아래에서 그는 1924년에 변칙적인 제이만 효과에 대한 하빌리타치온슈라프트Habilitationsschrift로 그의 하빌리타치온을 완료했다.1922년 6월 조머팰트는 하이젠베르크를 괴팅겐으로 데려가 '보어 축제'에 참가했는데, 조머펠트는 그의 학생들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원자 물리학에 대한 닐스 보어의 이론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흥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행사에서 보어는 객원 강사였고 양자 원자 물리학에 대한 일련의 포괄적인 강의를 했으며 그리고 하이젠베르크는 보어를 처음으로 만났는데, 이는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조머펠트 제안한 주제인 하이젠베르크의 박사학위 논문은 난류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논문은 층류의 안정성 과 난류의 성질 둘다를 논의했다. 안정성 문제는 층류로부터의 작은 교란을 위하여 4차 선형 미분방정식인 오르-조머팰트Orr-Sommerfeld 방정식을 사용하여 조사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잠시 이 주제로 돌아왔다.그는 젊은 시절에 독일 스카우트 협회이자 독일 청년 운동의 일원인 '노이파드핀데르'의 회원이자 스카우트 리더였다.1923년 8월 로베르트 혼젤Robert Honsell과 하이젠베르크는 뮌헨에서 이 협회의 스카우트 그룹과 함께 핀란드 여행을 계획했다.하이젠베르크는 클래식 음악을 즐겼고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미래의 아내를 만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37년 1월 하이젠베르크는 개인 음악 발표회에서 엘리자베스 슈마허Elisabeth Schumacher 를 만났다. 엘리자베트는 유명한 베를린 경제학 교수의 딸이었고 그녀의 오빠는 의 저자인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였다. 하이젠베르크는 4월 29일 그녀와 결혼했다. 1938년 1월에 이란성 쌍둥이 마리아Maria와 볼프강Wolfgang이 태어났으며 이에 따라 볼프강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의 -기본 입자 물리학에서 쌍생성의 과정에 대한 단어 놀이-를 축하했다. 그들은 이후 12년 동안 다섯 명의 자녀를 더 두었는데 바바라Barbara 크리스틴Christine 요헨Jochen 마르틴Martin 베레나Verena. 1936년 그는 독일 남부 우르펠트 암 발첸제에 가족을 위한 여름 별장을 구입했다.괴팅겐, 코펜하겐, 라이프치히.하이젠베르크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괴팅겐의 프리바트도젠트Privatdogent였는데, 이것은 그가 교수직이 없이 독립적으로 가르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4년 9월 17일부터 1925년 5월 1일까지, 국제 교육 위원회 록펠러 재단 연구비로써, 그는 코펜하겐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연구소 소장인 닐스 보어와 연구하러 갔다. 1925년 9월 그의 세미나 논문인 "ber quantentheoretische Umdeutung kinematischer und mechanischer Beziehungen"이 출판되었다. 그는 괴팅겐으로 돌아와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약 6개월에 걸쳐 양자역학의 행렬 역학을 개발했다. 1926년 5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서 대학 강사와 보어의 조교가 되었다. 1927년 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연구하면서 불확정성 원리를 발전시켰다. 2월 23일, 하이젠베르크는 동료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에게 편지를 써서 처음으로 그의 새로운 원리를 설명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 논문에서는 불확정성이 아닌 "Ungenauigkei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일반 교수이자 물리학부의 학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28년 2월 1일 그곳에서 취임 강의를 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된 그의 첫 번째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강자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파울리 배타 원리를 이용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와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박사과정 학생들과 대학원생 맟 연구 동료들의 높은 자질은 후에 찬사를 받는다. 여러 기간 동안에 그들은 에리히 바게Erich Bagge, 펠릭스 블로흐, 우고 파노Ugo Fano, 지그프리드 플뤼게Siegfried Flgge, 윌리엄 버밀리언 휴스턴William Vermillion Houston, 프리드리히 훈트, 로버트 멀리컨, 루돌프 파이얼스, 조지 플라제크George Placzek,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 프리츠 자우터Fritz Sauter, 존 C. 슬레이터John C. Slater, 에드워드 텔러, 존 해즈브룩 밴블렉, 빅토어 바이스코프,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그레고르 벤첼Gregor Wentzel, 그리고 클라렌스 제너Clarence Zener를 포함했다.1929년 초,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상대론적 양자장론의 기초를 닦는 두 논문 중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다. 또한 1929년에 하이젠르크는 중국, 일본, 인도, 미국을 순회 강연했다. 1929년 봄, 그는 시카고 대학교의 객원강사으며, 거기서 양자역학을 강의했다.1928년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폴 디랙이 양자역학의 상대론적 파동 방정식을 도출했는데 이것은 양극의 전자의 존재를 암시했고 나중에 양전자로 명명되었다. 1932년 우주선의 안개 상자 사진을 통해 미국의 물리학자 칼 데이비드 앤더슨은 양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자취track임을 확인했다. 1933년 중반 하이젠베르크는 양전자 이론을 발표했다. 디랙의 이론과 그 이론의 추가 전개에 대한 그의 생각은 두 개의 논문에 제시되었다. 첫 번째인 "Bemerkungen zur Diracschen Theorie des Positrons"은 1934년에 두 번째인 "Folgerungen aus der Diracschen Theorie des Positrons는 1936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디랙 방정식을 비-교환자를 포함하는 양자화 조건에 따라 스핀 /2의 모든 점 입자에 대해서 "고전적" 장 방정식으로 재해석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와같이 하이젠베르크는 그것을 전자들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장 방정식으로 재해석하여 물질을 입자 생성과 파괴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상대론적 양자 장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전자기학과 같은 기초 위에 놓았다. 행렬 역학과 노벨상.양자역학을 확립한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은 물리학자와 역사가들에게는 수수께끼였다. 그의 방법은 독자가 크라머르스-하이젠베르크 전이 확률 계산에 친숙하다고 가정한다. 주요 새로운 아이디어인 비가환 행렬은 관찰할 수 없는 양을 거부함으로써 정당화된다. 그가 당시에 행렬 수학적 이론에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응 원리에 기초한 물리적 추론에 의한 행렬의 '비-가환 곱셈'을 도입한다.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로는 1977년 매키논MacKinnon에서 재구성되었으며 자세한 계산은 아이치슨Aitchison 등에서 수행되었다.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와 헨드릭 크라머르스는 원자보다 파장이 큰 복사선 원자의 분산 혹은 산란에 관한 논문을 공동으로 작성했다. 그들은 이전에 크라머르스가 개발한 성공적인 공식이 보어 궤도를 기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전이 주파수가 일정하지 않은 레벨 간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정확한 고전 궤도의 푸리에 변환에서 발생하는 주파수는 동일한 간격이다. 그러나 이 결과는 들어오는 복사선이 원자가 또는 외곽애서는 전자를 붕괴되는 가상 상태로 들뜨게 하는 반semi-고전적 가상 상태 모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었다. 후속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이 가상 진동자 모형이 형광 복사의 편광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이 두 성공과 보어-조머펠트 모형이 비정상적인 지만 효과의 뛰어난 문제를 설명하는 데에서의 계속적 실패는 하이젠베르크로 하여금 가상 진동자 모형을 사용하여 스펙트럼 주파수를 계산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현실적인 문제에 즉시 적용하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그는 더 간단한 예인 비조화 진동자로 방향을 바꾸었다.쌍극자 진동자는 외부 전하와 같은 외력에 의해 섭동을 일으키는 스프링 상의 하전 입자로 생각되는 단순 조화 진동자로 구성된다. 진동하는 전하의 운동은 그 진동자의 주파수에서 푸리에 급수로 표현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양자 거동을 해결했다. 첫째 그는 가상 진동자 방법으로 시스템을 처리하여 외부 소스에 의해 생성될 레벨 간의 전환을 계산했다.그리고 그는 비조화anharmonic 포텐셜 항을 조화 진동자에 대한 섭동으로 취급하여 그와 보른이 개발한 섭동 방법을 사용하여 동일한 문제를 해결했다. 두 방법 모두 1차 및 매우 복잡한 2차 수정 항에 대해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계산 뒤에 한 일관된 설계가 있음을 시사했다.그래서 하이젠베르크는 가상 진동자 모형에 대한 명시적인 의존 없이 이러한 결과를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공간 좌표에 대한 푸리에 확장을 가상 진동자 방법의 전이 계수에 해당하는 행렬로 대체했다. 그는 양자역학은 관찰 가능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보어의 대응 원리와 양자역학은 관측 가능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파울리의 학설doctrine에 호소함으로써 이러한 대체를 정당화했다.7월 9일, 하이젠베르크는 보른에게 이 논문을 검토를 위해 주었고 또한 출판을 위해 제출했다. 보른이 그 논문을 읽었을 때, 그는 공식이 그가 브레슬라우 대학교의 수학자 야콥 로자네스Jakob Rosanes에게 배운 행렬의 체계적인 언어로 옮겨지고 확장될 수 있는 공식임을 알았다. 보른은 그의 조수이자 전 학생이었던 파스쿠알 요르단의 도움으로 즉시 전사 및 전개을 시작했고 출판을 위해서 결과를 제출했는데; 이 논문은 하이젠배르크의 논문이 발표된 지 60일 만에 접수되었다. 3명의 저자 모두가 연내 발표를 위해서 후속follow-on 논문을 제출했다.이때까지 물리학자들은 행렬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순수수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구스타프 미에Gustav Mie는 1912년 전기역학에 관한 논문에서 그것들을 사용했고 보른은 1921년 결정의 격자 이론에 관한 연구에서 그것들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우에 행렬이 사용되었지만 행렬의 곱셈이 있는 행렬의 대수학은 양자 역학의 매트릭스 공식화에서 같은 묘사picture에는 들어가지 않았다.1928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을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지명했다. 1932년 노벨 물리학상 발표는 그해 11월로 연기되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 그중에서도inter alia 수소의 동소체allotropic 형태의 발견으로 인도한 그 적용의 양자역학의 창안으로" 1932년 수상자로 발표된 것은 그 때였다.양자역학의 발전과 무엇이 접근access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를우리는 더 이상 관찰 과정과 독립적으로 입자의 거동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최종 결과로 양자 이론에서 수학적으로 공식화된 자연 법칙은 더 이상 기본 입자 자체가 아니라 기본 입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다루고 있다. 이 입자들이 시공간에 존재하는지 객관적으로 묻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 우리 시대의 엄밀한 과학에서 자연의 그림을 말할 때 우리는 자연의 그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을 말한다. ... 과학은 더 이상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자연을 대면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러한 상호 작용에서 스스로를 행위자로 본다. 분석하고 설명하고 및 분류하는 과학적 방법은 개입에 의해 조사 대상을 변경하고 재창조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방법과 객체는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한 직후, 하이젠베르크는 핵의 중성자-양성자 모형에 대한 세 개의 논문 중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 하이젠베르크는 언론에서 "백인 유대인" 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도이체 물리학' 또는 아리안 물리학의 지지자들은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주요 이론 물리학자들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1930년대 초반부터 반-유대주의 및 반-이론물리학 운동인 '도이체 물리학'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학 환경에서 적용되었듯이, 가장 두드러진 두 지자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필리프 레나르트와 요하네스 슈타르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요인이 학문적 능력보다 우선했다.하이젠베르크를 많은 독일 대학의 교수로 임명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실패했다. 아르놀트 조머펠트의 후계자로 임명받으려는 그의 시도는 의 지지자들 사이의 학문적 정치적 차이로 인해서 그 과정은 오래 걸렸다.1935년 뮌헨 교수단 이론물리학의 일반 교수이자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연구소 소장인 조머펠트를 대신할 후보자 목록을 작성했다. 세 명의 후보자는 모두 조머펠트의 이전 학생이었는데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하이젠베르크 1936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피터 디바이 그리고 리처드 베커Richard Becker였다. 뮌헨 교수단은 이 후보자들을 확고하게 지원했으며 하이젠베르크가 첫 번째 선택이었다. 그러나 의 지지자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한 공격은 하인리히 힘러가 이끄는 친위대의 신문인 에 실렸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는 이라고 불렸다. 유대인들이 폭력적인 공격을 받고 투옥됨에 따라서 이러한 공격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이젠베르크는 문제를 해결하고 명예를 되찾기 위해 한 사설과 히믈러에게 보내는 편지와 더불어 반격했다.어느 순간, 하이젠베르크의 어머니는 힘러의 어머니를 방문하였다. 두 여성은 하이젠베르크의 외할아버지와 힘러의 아버지가 바이에른 하이킹 클럽의 목사이자 회원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알고 있었다. 결국, 히믈러는 1938년 7월 21일 친위대 집단지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하이젠베르크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서 하이젠베르크 사건을 진정시켰다. 하이드리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힘러는 하이젠베르크가 한 세대의 과학자들을 가르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독일은 그를 잃거나 침묵시킬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히믈러는 하이젠베르크에게 이 편지가 가족의 추천으로 보내졌다며 하이젠베르크에게 전문적인 물리학 연구 결과와 관련 과학자들의 개인적아고 정치적 태도를 구별하라고 경고했다.빌헬름 뮐러Wilhelm Mller는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조머펠트의 자리를 대체했다. 뮐러는 이론물리학자도 아니었고, 물리학 저널에도 발표되지 않았으며, 독일 물리학회 회원도 아니었다. 그의 임명은 조롱거리로 여겨졌고 이론물리학자들을 교육하는데 해로웠다.하이젠베르크의 SS 수사를 이끈 세 명의 조사관은 물리학 교육을 받았다. 실제로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그들 중 한 명의 박사 시험에 참여했었다. 세 명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요하네스 줄프스Johannes Juilfs였다. 그들은 하이젠베르크뿐만 아니라 이론물리학 및 학계에서 '도이체 물리학' 운동의 이념 정책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의 지자자가 되었다.독일 핵무기 프로그램.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유대인 물리학자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가르치던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물리학계와 SS의 비판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는 본인의 명예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설을 쓰는 등 적극적으로 본인을 충실한 독일 시민으로 포장했다.1939년에 핵분열의 발견 후,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원자력 프로젝트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1년 9월 15일부터 22일까지,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지배하에 있던 코펜하겐을 방문해서 닐스 보어와 이론 물리와 핵 물리학을 논했다. 이 만남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와 하이젠베르크와 나치의 사람들의 관계는 수십 년간 과학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만남은 마이클 프레인의 연극 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전쟁전 물리학 연구.1936년 중반, 하이젠베르크는 두 개의 논문에서 우주선의 샤워 이론을 발표했다. 그 후 2년 동안 4편의 논문이 더 나왔다.1938년 12월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자연과학(The Science of Nature)》에 우라늄에 중성자들로 충돌시킨bombarding 후에 바륨 원소를 검출했고 오토 한은 우라늄의 '폭발bursting'로 결론짓는 원고를 보냈고 동시에 그해 7월에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그후 스웨덴으로 간 친구 리제 마이트너에게 이 결과들을 연락했다. 마이트너와 조카 오토 로버트 프리쉬Otto Robert Frisch는 한과 슈트라스만의 결과를 핵분열로 올바르게 해석했다. 프리쉬는 1939년 1월 13일 실험적으로 이것을 확인했다.1939년 6월과 7월에 하이젠베르크는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사무엘 구드스미트Samuel Goudsmit를 방문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여행했다. 그렇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으로 이주하는 초청을 거절했다. 그는 6년 후 구드스미트가 제2차 세계대전 끝무렵에 알소스 작전의 수석 과학 조언자가 될 때까지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우란베라인의 멤버쉽.'우란베라인(Uranverein)(HWA 육군 병기청)는 (REM 제국 교육부)에서 (RFR 제국 연구위원회)를 짜내어 군사 후원 하에 공식적인 독일 원자력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1939년 9월 16일 첫 회의를 가졌다. 이번 회의는 쿠르트 디브너Kurt Diebner HWA 고문이 주관하고 베를린에서 열렸다. 초청인으로는 발터 보테 지크프리��� 플뤼게Siegfried Flgge 한스 가이거 오토 한 폴 하텍Paul Harteck 게르하르트 호프만Gerhard Hoffmann 요제프 마타우치Josef Mattauch 게오르그 슈테터Georg Stetter가 포함되었다. 곧이어 하이젠베르크 클라우스 클라우시우스Klaus Clusius 로베르트 되펠Robert Dpel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등이 두 번째 회의를 열었다. 베를린-달렘(Dahlem)에 위치한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는 다이브너가 관리소장이 되어 HWA의 권한에 속하게 되었고 핵 연구에 대한 군사 통제가 시작되었다. 디브너가 HWA 프로그램 하에서 KWIP를 관리하던 시기에 디브너와 카를 비츠Karl Wirtz와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를 포함한 하이젠베르크의 내부 서클 사이에 상당한 개인적 직업적 적대감이 발전하였다.1942년 2월 26~28일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열린 육군 무기 사무국이 소집한 과학 회의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제국 관리들에게 핵분열을 통한 에너지 획득에 관한 강의를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핵분열의 엄청난 에너지 잠재력에 대해 강의하면서 원자핵의 분열을 통해 2억 5천만 전자볼트가 방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연쇄 반응을 달성하기 위해 순수한 U-235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위원소 를 순수한 형태로 얻는 우라늄 농축과 기계 속에서 일반 우라늄과 감속재의 대체 적층 방법 및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탐구했다. 그는 이 기계가 차량, 선박 및 잠수함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실용적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과학적 노력에 대한 육군 무기 사무소의 재정적, 물질적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두 번째 과학 회의가 이어졌다. 국방과 경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현대물리학의 문제들에 대한 강의가 들렸다. 회의에는 베른하르트 루스트 제국 과학교육문화부 장관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루스트 장관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에서 핵개발 계획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제국 연구위원회가 그 프로젝트를 맡기로 되었다. 1942년 4월, 육군은 물리학 연구소를 카이저 빌헬름 협회에 반환하고, 하이젠베르크를 연구소장으로 임명했다. KWIP에서 이 직책을 맡으면서 하이젠베르크는 첫 번째 교수직을 얻었다. 피터 디바이는 여전히 연구소의 소장이었지만, HWA가 KWIP의 관리권을 장악했을 때 독일 시민이 되는 것을 거부한 후 미국으로 떠났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아직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로베르트 되펠Robert Dpel과 그의 아내 클라라 되펠Klara Dpel에 의해 우란베라인을 위한 연구를 수행해온 그의 물리학과를 갖고 있었다.1942년 6월 4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군부수 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우란베라인 연구룰 핵무기 개발로 전환할 가능성에 대해 보고하도록 소환되었다. 회의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슈페어에게 상당한 자금력과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1945년 이전에는 폭탄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우란베라인 프로젝트는 제국 연구회의 지도 하에 배치된 후 원자력 생산에 중점을 두어 '전쟁의 중요성' 지위를 유지했고; 따라서 출자는 군대에서 계속되었다. 원자력 프로젝트는 우라늄 및 중수 생산,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및 원자로의 주요 영역으로 분류되었다. 그 후 프로젝트는 본질적으로 여러 연구소로 나뉘었고, 이 곳에서는 감독이 연구를 주도하고 자신의 연구 의제를 설정했다. 군대가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 1942년의 시점은 인원수로는 프로젝트의 절정이었다. 약 70명의 과학자가 이 프로그램을 위해 일했으며 약 40명의 과학자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핵분열 연구에 할애했다. 1942년 이후, 응용 핵분열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수는 극적으로 감소했다. 주요 연구소와 함께 일하지 않는 많은 과학자들은 핵분열 연구를 중단하고 보다 시급한 전쟁 관련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다.1942년 9월 하이젠베르크는 가본 입자 물리학의 산란 행렬 또는 S-행렬에 대한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다. 처음 두 개의 논문은 1943년에 출판되었고 세 번째 논문은 1944년에 출판되었다. S-행렬은 충돌 과정에서 입사 입자의 상태 충돌에서 나오는 입자의 상태 및 안정적인 경계 상태만을 설명하고 간섭 상태에 대한 참조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1925년에 관찰 가능한 것들만을 사용하여 양자역학의 행렬 공식화의 기초가 된 것으로 판명된 것과 같은 선례였다.1943년 2월 하이젠베르크는 프리드���히-빌헬름스-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4월에는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선출이 승인되었다. 같은 달 그는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폭격이 증가함에 따라 가족을 우르패트에 있는 은신처로 옮겼다. 여름에 그는 같은 이유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첫 번째 직원을 헤칭겐과 슈바르츠발트 가장자리에 있는 그 이웃 마을인 하이겔로흐로 파견했다. 10월 18일부터 26일까지 그는 독일이 점령한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1943년 12월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를 방문했다.1944년 1월 24일부터 2월 4일까지 하이젠베르크는 독일군이 보어의 이론물리학 연구소를 몰수한 후 점령된 코펜하겐으로 여행했다. 그는 4월에 짧은 귀국 여행을 했다. 12월에 하이젠베르크는 중립국 스위스에서 강의했다. 미국 전략사무국은 모 버그 요원Moe Berg을 보내 권총을 갖고 강의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강의에서 독일이 원자폭탄 완성에 가까워졌다는 내용이 나오면 하이젠베르크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945년 1월 하이젠베르크는 나머지 직원 대부분과 함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슈바르트발트 내의 시설로 이사했다.2차 세계대전 이후.1945: 알소스 임무.알소스 임무는 독일이 원자폭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독일의 원자 관련 시설, 연구, 물자, 과학 인력을 이용하려는 연합군의 노력이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일반적으로 연합군의 통제 하에 있던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때로는 여전히 독일군의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베를린은 많은 독일 과학 연구 시설의 위치였다. 사상자와 장비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전쟁 말기에 이 시설들 중 다수는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는 1943년과 1944년에 대부분 슈바르츠발트 끝자락에 있는 헤칭겐과 그 인근 마을인 하이겔로흐로 옮겨졌고, 결국 프랑스 점령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를 통해 알소스 임무의 미국 특수부대는 핵 연구와 관련된 많은 독일 과학자들을 구금할 수 있었다.3월 30일 알로스 임무단은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여 발터 보테 리하르트 쿤 필리프 레나르트 볼프강 거트너를 포함한 중요한 과학자들을 붙잡았다.조사 결과 오토 한은 테일핑겐에 있는 그의 실험실에 있었고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폰 라우에는 헤칭겐의 하이젠베르크의 실험실에 있었으며 하이젠베르크 팀이 베를린에 건설한 천연 우라늄 원자로는 하이겔로흐로 옮겨졌다. 이후 알소스 임무의 주요 초점은 뷔르템베르크 지역의 핵 시설에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45년 5월 3일 우르펠트에서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는 영토에서 산악 작전을 벌이다 붙잡혀 체포되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로 옮겨져 1939년 앤아버 방문 이후 처음으로 5월 5일 구드스미트를 만났다. 독일은 이틀 만에 항복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프랑스와 벨기에를 가로질러 1945년 7월 3일 영국으로 이동하면서 8개월 동안 가족을 다시 보지 못했다.1945 히로시마에 대한 반응.우란베라인의 일원으로 핵물리 연구보고서에 보고서를 발표한 저명한 독일 과학자 중 9명은 알소스 작전에 의해 체포되어 엡실론 작전아래 영국에서 투옥되었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10명의 독일 과학자들이 영국의 팜 홀(Farm Hall에 억류되었다. 그 시설은 영국의 해외 정보국 MI6의 안전가옥이였다. 구금된 동안 그들의 대화는 녹음되었다. 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대화는 전사되어 영어로 번역되었다. 녹취록은 1992년에 발표되었다. 1945년 8월 6일 팜 홀의 과학자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폭탄이 만들어지고 떨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후 몇 주 동안 독일 과학자들은 미국이 어떻게 폭탄을 만들 수 있었는지 논의했다.팜 홀 기록에 따르면 하이젠베르크는 오토 한과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를 포함하여 팜 홀에 억류된 다른 물리학자들과 함께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과학자들에게 자신은 폭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에너지를 생산하는 원자 파일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치를 위한 폭탄 제작의 도덕성도 논의되었다. 소수의 과학자들만이 핵무기의 가능성에 대해 진정한 공포를 표했고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이 문제에 대��� 논의하는 데 신중했다. 독일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원자폭탄 제작에 실패하자 하이젠베르크는 "우리는 1942년 봄에 정부에게 원자폭탄을 건설하기 위해서 120000명을 고용해야 한다고 권고할 도덕적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독일 연구 기관의 임원 직위.1946년 1월 3일, 10명의 엡실론 작전 억류자들이 독일의 알스웨데로 이송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연합군이 점령한 독일의 영국 지역인 괴팅겐에 정착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즉시 독일에서 과학 연구를 촉진하기 시작했다. 연합군 통제 위원회에 의해 카이저 빌헬름 협회가 폐지되고 영국 지역에 막스 플랑크 협회가 설립된 후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막스 폰 라우에가 부소장으로 임명되었고 칼 비르츠Karl Wirtz,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루트비히 비어르만Ludwig Biermann이 합류하여 하이젠베르크의 연구소 설립을 도왔다. 이였다. 연구소는 매주 토요일 오전에 콜로키움을 개최했다.하이젠베르크는 헤르만 라인Hermann Rei과 함께 포르슝스라트Forschungsrat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새로 설립된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합병에 이어서 하이젠베르크는 회장으로 임명되었다.1958년에 [[w: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는 뮌헨으로 이전되어 확장되었으며 [[w:Max Planck Institute for Astrophysics|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천체 물리학 연구소(Max-Planck-Institut fr Physik und Astrophysik)]](MPIFA)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 사이에 하이젠베르크와 천체물리학자 [[w:Ludwig Biermann|루트비히 비어르만Ludwig Biermann]]은 MPIFA의 공동 책임자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뮌헨 대학교|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 MPIFA의 단독 책임자였다. 하이젠베르크는 1970년 12월 31일에 MPIFA의 책임자직을 사임했다.국제 과학 협력 촉진.1951년 하이젠베르크는 유럽의 핵물리학 연구소 설립을 목표로 을 설립하는 협약에 서명했다. CERN의 창립 과학 책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대신 그는 CERN의 과학 정책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CERN에서 과학 프로그램을 결정했다.1946년에 와 함께였다.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기간에 하이젠베르크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인 기류로 잠시 돌아왔습다. 1948년에 3편의 논문과 1950년에 1편이 출판되었다. 전후 기간에 하이젠베르크는 중간자 다중 생성에 대한 고려와 함께 우주선 샤워showers에 대한 그의 관심을 계속했다. 그는 1949년에 3편의 논문, 1952년에 2편의 논문, 1955년에 1편의 논문을 발표했다.1955년 말에서 1956년 초 사이에 하이젠베르크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에서 물리학의 [[정신사|지적 역사]]에 대해 [[기포드 강연]]을 했다. 강의는 나중에 《물리학과 철학 현대 과학의 혁명 (Physics and Philosophy Revolution in Modern Science)》로 출판되었다. 1956년과 1957년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원자력 위원회(Deutsche Atomkommission DAtK)의 위원회 II "연구와 성장"(Fachkommission II "Forschung und Nachwuchs")의 핵물리학 실무그룹(Arbeitskreis Kernphysik) 의장이었다. 1956년과 1957년에 원자력 물리학 실무그룹의 다른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발터 보테]] [[wHans Kopfermann|한스 코퍼만Hans Kopfermann]] (부의장) [[wFriedrich Bopp|프리츠 보프Fritz Bopp]] [[wWolfgang Gentner|볼프강 겐트너Wolfgang Gentner]] [[wOtto Haxel|오토 학셀Otto Haxel]] [[wWillibald Jentschke|빌리발트 연트쉬케Willibald Jentschke]] [[wHeinz Maier-Leibnitz|하인츠 마리-라이프니츠Heinz Maier-Leibnitz]] [[wJosef Mattauch|요세프 마트아우흐Josef Mattauch]] 볼프강 리즐러Wolfgang Riezler [[wWilhelm Walcher|빌헬름 발허Wilhelm Walcher]] 및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볼프강 파울]]도 1957년 이 그룹의 멤버였다.1957년, 하이젠베르크는 에 서명했다. 과학자들와 정치인들 사이에 공개 토론이 이어졌다. 저명한 정치인, 작가, 사교계 명사들이 핵무기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자 각서 서명자들은 "전업적 지적 불순응주의자들nonconformists"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1957년부터 Heisenberg는 의 서명자 8명 중 하나였다.1973년 하이젠베르크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양자역학|양자 이론]] 개념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강의했다. 1973년 3월 24일 하이젠베르크는 바바리아 가톨릭 아카데미(The Catholic Academy of Bavaria) 앞에서 연설을 하여 로마노 과르디니 상(Romano Guardini Prize)을 수상했다. 그의 연설을 영어로 번역한 것은 《과학적 및 종교적 진실 (Scientific and Religious Truth)》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그 인용문은 이 기사의 뒷부분에 나온다.하이젠베르크는 와 대화한 후 고 말하기까지 했다.를 싫어했지만 은 매우 좋아했다.독실한 기독교인인 하이젠베르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보내는 마직막 편지에서 쓰기를 "우리는 선하신 주 하나님이 아원자 입자의 위치를 알고 계셔서 인과관계 원리가 계속 타당성을 가지도록 하신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불확실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양자 물리학은 불완전함에 틀림없다고 계속 주장했다.하이젠베르크가 1974년 상을 받았을 때 그는 연설을 했고 나중에 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기를:과학의 역사에서 유명한 이후로, 과학적 진리는 세상의 종교적 해석과 조화될 수 없다고 반복해서 주장되어 왔다. 나는 이제 과학적 진리가 그 자신의 분야에서 공격할 수 없다고 확신하지만, 종교적 사고의 내용을 단순히 인류 의식의 시대에 뒤떨어진 단계의 일부, 우리가 포기해야 할 부분으로 일축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따라서 나는 살아오면서 이 두 사고 영역의 관계에 대해 반복적으로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의 실재성을 결코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 1974, 213[[파일:Hund Heisenberg Born 1966 Gttingen.jpg|섬네일|upright=1.2|프리드리히 훈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보른 괴팅겐 1966년]] +하이젠베르크의 아들인 마르틴 하이젠베르크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wNeuroscientist|신경생물학자]]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요헨 하이젠베르크는 [[뉴햄프셔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60대 후반에 하이젠베르크는 대중 시장mass market을 위해 자서전을 썼다. 1969년에 이 책은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1971년 초에는 영어로 출판되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다른 언어로 출판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66년 그의 공개 강의가 철학과 종교의 주제로 점차 바뀌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출판을 위해 히르젤 베를라그와 에 관한 교과서의 원고를 보냈다. 그가 출판사 중 한 사람에게 쓴 이 원고는 그의 자서전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그는 자서전을 구성하기를 1) 정확한 과학의 목표 2) 원자 물리학에서 언어의 문제 3) 수학과 과학에서의 추상화 4) 물질의 가분성 또는 칸트의 이율배반 5) 기본 대칭 6) 과학과 종교 등으로 하였다.하이젠베르크는 회고록을 일련의 대화 형식으로 썼고, 그의 생애를 망라했다. 이 책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과학사가들에게는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서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역사적 사건을 더 간결하게 만들기 위해 요약했다고 썼다. 출판 당시 : 만남과 대화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하이젠베르크는 1976년 2월 1일 자택에서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다음날 저녁 그의 동료와 친구들은 물리학 연구소에서 그의 집까지 추모하기 위해 걸어가서 촛불을 켜고 그의 문 앞에 두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에 묻혔다.1980년 그의 미망인 엘리자베트 하이젠베르크는 을 출판했다. 그 책에서 그녀는 하이젠베르크를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사람 그 다음은 뛰어난 과학자 그 다음은 매우 재능 있는 예술가 그리고 네 번째로 의무감으로부터의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로 묘사했다.하이젠베르크는 많은 서훈을 받았다:핵물리학에 대한 연구 보고서.다음 보고서는 독일 에서 볼 수 있다.하이젠베르크의 성은 케이블 TV채널 으로 사용된다.하이젠베르크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의 암살 표적이었습니다.하이젠베르크는 [[필립 K. 딕]]의 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를 각색한 아마존 프라임(Amazon Prime) TV시리즈에서 액시스Axis가 사용한 원자폭탄을 만든 공로를 인정받는다. 이 우주에 있는 원자폭탄은 하이젠베르크 장치라고 불린다.하이젠베르크는 게임 의 2차 적대자 칼 하이젠베르크과 동명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강자성에 대한 연구는 캐릭터의 자기 능력에 대한 영감으로 공헌했다. +[[분류:양자역학]][[분류독일의 노벨상 수상자]][[분류:20세기의 자유군단 관련자]][[분류:유체역학자]]중국의 역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250년 무정의 통치기인 상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하 문명은 여러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본토에서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이래 약 5000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건국한 왕조가 흥망을 반복해 왔다. 한나라 때 중화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이라는 말이 성립되었다.한나라의 멸망 이후 위진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으며 그에 따라 변방의 이민족들이 중국 화북 지역을 정복했고 한족들은 장강 이남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며 땅을 개척하게 된다. 수나라 때는 400년 간 분열됐던 중국 대륙이 재통일되었으며 이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통일왕조를 이어간다. 당나라가 멸망한 뒤 또다른 분열기인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송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한다. 송나라는 몽골족의 왕조인 원나라에 의해 멸망해 사라지고 만다.원나라는 한족들의 반란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났으며 명나라가 중국 대륙을 다시 차지해 통일하게 된다.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중국 대륙은 청나라에 의해 정복되고 통일된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 전쟁과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 중국 본토는 "아시아의 병자"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대만과 만주는 일본 제국에 지배당하고 중국 한족의 남조의 수도로서 상징적이던 난징은 이민족에게 유린당했던 것처럼 현대에는 일본 제국에 의해 난징 대학살과 강간으로 유린당한다. 홍콩은 영국이 지배했으며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지배하였다.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무능에 반발하여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한족의 개혁파들에 의해 양무 운동과 변법 자강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힘이 없었고 열강의 지배와 간섭으로 실패했다. 한편 서태후 등 보수파의 사주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에 의해 포섭되기도 하는 각지의 군벌에 의해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고 몽골 티베트의 독립 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중화민국은 혼란에 싸여 분열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의 침략에 의해 중국 동부 지역을 잃고 난징이 유린을 당하며 중국 자체가 지배당할 뻔한 위험한 시기를 보냈다. 이 때 일본의 중국 정복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워졌으나 러시아 또한 중국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중국 영토로 남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30년대에는 국공 내전과 중일 전쟁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전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 정부가 2개 이상인 때에도 있었다.많은 중국인 가난한 농민 소작농 계급들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힘을 키웠고 그 후 중일 전쟁 중에 일본의 세력 아래에 있던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세력을 늘려 온 중국 공산당은 계속되는 오랜 내전으로 군인들에 의해 반복되던 민간인에 대한 살인과 강간 방화에 지친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었다. 1945년에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고 나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일어나던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매년 10월 1일을 국경절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삼황오제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고대의 전설적 제왕들이다. 삼황은 복희씨 신농씨 여와씨를 말하며 오제는 황제헌원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방훈 제순중화를 지칭한다.진나라 이전의 시기.중국에서는 이 시기를 라고도 한다. 하 의 경우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대체로 실존했던 국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를 무너뜨리고 세운 상 은 은허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 은이라고도 부르며, 한때 신화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은허의 유적 발굴 이후 실존했던 국가로 인정되었다.주 는 본래 상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상나라 말기 주왕의 폭압으로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을 잡은 나라다. 이 때 주의 왕을 처음으로 ‘천자’라고 불렀다. 주의 패권은 춘추 전국 시대 가 되면서 약해지기 시작한다. 춘추 시대에는 여러 주나라의 제후국들이 주의 천자를 존중하고 각자의 세력을 다투던 시기로 세력이 강한 제후국들 중에 주 왕실의 이름으로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합려 월-구천의 5제후를 춘추 오패라고 부른다. 전국 시대로 들어서면서 천자에 대한 충성마저 약화되�� 시작한 시기로 진 한 제 위 조 연 초라는 전국 칠웅이 차례로 왕을 칭하고 오로지 천하 통일을 위해 질주하였다.진(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은 한(韓) 제(齊) 위(魏) 조(趙) 연(燕) 초(楚)를 무너뜨리고 중국 본토를 통일하였다. 진은 이어 모든 제후국을 폐지하고 조정에서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처음 실시하였다. 이어 진왕 영정은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진(秦)나라의 무리한 통치와 폭압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진 이세황제의 치세에 몰락하여 그 뒤 멸망하였고 초한전을 거쳐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다. 한나라는 200년 넘게 유지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서양에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나라이기도 하다.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 - 서기 9년)은 한나라(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여 세운 신(新) (9년 - 23년)에 의해 잠시 명맥이 끊기나 신나라는 급격한 개혁이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각지의 반란으로 망하였고 한나라(전한)를 계승한 국가인 후한(後漢) (25년 - 220년)이 다시 통일 국가를 이루었으나 무제 이후의 황권은 환관들과 외척들로 인하여 크게 약화되었다. 위에게 멸망당했다.대한민국에서는 삼국 시대 라고 하지만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남북조 시대 까지 포괄하여 위진 남북조 시기라고 한다.위(魏)는 조비가 후한의 황제로부터 직접 제위를 물려받은 국가로 중원 지역을 차지하였다. 촉(蜀) 후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가 계승하였으나 세력권은 서남 지방에 한정되었다. 한편 손권의 오(吳)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장강 이남을 차지하였다. 위는 사마염의 서진(西晉) (265년 - 316년)에게 승계되며 서진이 삼국을 통일하게 되나 초기부터 황실 분란인 팔왕의 난 등으로 혼란스럽다가 흉노족의 전조에게 멸망당한다. 서진의 멸망 이후 서진이 있던 자리에 16개의 국가가 들어서 패권을 겨뤘으니 이를 십육국 시대(十六國時代) (316년 - 439년)라 한다. 비한족 국가인 전조(前趙)후조전연(前燕)후연 남연 관중(關中)에 있던 전진(前秦)후진서진 및 하투(河套)의 하(夏) 사천(四川)의 성한(成漢) 하서(河西)의 후량북량남량과 한족 국가인 북연 하서(河西)의 전량(前涼) 서량이 있었으며 전조 후조 전진 등이 한때 큰 세력권을 과시했으나 결국 북조의 북위로 통합된다. 북위(北魏)는 선비족 탁발씨의 국가로 3대 태무제의 시기에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북위는 곧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리되고 동위는 북제(北齊) 서위는 북주(北周)로 이어진다. 북제는 이후 북주에 흡수되고 북주는 왕실 외척인 양견에 의해 수(隋)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한편 서진 황실의 계승을 천명한 동진은 서진의 영토를 되찾으려 여러 차례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세력권은 주로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동진을 계승한 국가들이 이어진 왕조를 남조라고 하며 송=유송 제=남제 양 진이 있다. 수나라에게 멸망당한다.수나라 당나라 시대.수 는 북주의 외척인 양견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하나, 무리한 원정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건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고, 당 으로 이어진다.한편 당나라의 황후이던 측천무후가 조정을 장악하고 아들인 당의 황제를 황태자로 격하시키고 국호를 잠시 주 로 바꾼다. 측천무후의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공포 정치를 펼쳤으나, 인재 중심의 정치 역시 펼쳐서 백성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측천무후 이후 다시 국호를 당으로 바꾸게 된다. 후량에게 멸망당한다.오대십국 시대 는 화북의 정권을 다투던 5개의 대국과 나머지 10개의 소국이 혼재했던 시기이다.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송 이 다시 중원을 통일하였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로 상비 해군을 창설하였다. 또한 문화 정치를 펼친 왕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으며,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그러나 내몽골 지역과 만주 지역을 차지한 거란족이 세운 국가인 요 에 의해 베이징 이북의 많은 지역을 정복당하고, 요나라와 서하에 사실상의 조공을 납부하며 별 위세를 떨치지 못하다가, 요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여진족이 요나라를 정복하고 세운 금 에게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이 때까지를 북송시대라고 하고, 이후 북송의 ��실을 계승한 왕조를 남송이라고 한다. 남송은 몽골 제국을 계승한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다.원 은 몽골 제국의 적장자인 쿠빌라이 칸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 국가로 몽골 울루스라고 부른다. 한족이 건국한 남송까지 전부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유린하여 장악하게 된다. 당시 신분 차별로 핍박받던 한족의 주원장이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몰아내고 명 이라는 한족 왕조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외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과시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진왜란 등 외부 원정의 부담과 문화 침체로 쇠퇴하다가 사르후에서의 패배와 숭정제의 실책으로 멸망한다. 명나라의 몰락을 틈타 금나라의 후예인 만주족이 후금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청 은 후금을 계승한 왕조로 한족을 정책적으로 신분적으로 차별하였다. 양무 운동을 통해 근대 국가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서구 열강 세력들의 이권침탈이 심화되면서 더욱 더 쇠퇴하고 1912년에 신해 혁명으로 멸망한다. 청나라 소조정이 1912년부터 1924년까지 유지되었지만 결국 붕괴되었다. 그 사이에 청나라 복벽사건이 일어나서 1917년 7월 1일부터 청 황조가 복벽되었으나 1917년 7월 12일에 끝을 맺었다.한편 남명 은 멸망당한 명나라의 왕실을 계승한 나라로 명의 부흥을 기도하였으나 청나라에 망하였다. 남명의 신하였던 정성공은 타이난으로 건너가 정씨왕국을 설립하여 청나라에 대항하지만 3대째에 복속당한다.중화민국 은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이다. 이후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군벌로 등장하였다. 특히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거느리는 북양 군벌을 이끌고 쑨원으로부터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았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 사망하자, 이후 그의 부하들이 할거했는데, 대표적으로 안휘파의 돤치루이, 직예파의 펑궈장, 차오쿤, 오패부, 봉천파의 장쭤린, 산시파의 옌시산 등이 중국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한편 중화민국 최초의 공화정 체제인 북양 정부는 1928년까지 존속했다. 그 후 북벌이 재개되고 모든 세력이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국 국민당 주도의 국민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한편 천두슈와 마오쩌둥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냈으나 북벌 과정에서 분열이 일어나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 정부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시안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중일전쟁 중에 수도 난징이 점령당하고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해 옮겼지만 끝내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난징으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내분이 생겨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였다. 한편 국공 내전 중에 정부는 새로운 중화민국 헌법을 통과시켜 국민 정부를 헌정 체제로 격상시킨다. 1949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수도 난징을 점령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기세를 몰아 중국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이후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중화민국 정부는 패닉 상태에 빠져 국민당에 내분이 일어나 공산당 밑으로 들어가거나 타이완 영국령 홍콩 또는 국외 등지로 피난하는 국민당 관계자도 속출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은 장제스의 지도하에 현재의 타이베이 시로 정부를 이전하여 지금까지 중화민국의 법통이 계승되고 있다. 냉전 시대에 한국 전쟁 덕분에 중화민국은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어도 국제적 위상이 거의 변함없었다. 그러나 점차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실리 외교를 선호하는 세계 다수의 국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쪽으로 기울었다. 현재 중화민국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있는 나라 수는 대폭 감소했지만 서로 중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자처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중국’으로 정부가 병립된 분단 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한편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정부로 왕징웨이 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국이 있으나 국민 정부에 통합된다.국공 내전으로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주도로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이 건국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의 유대 관계를 통해 여러가지 경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국경 분쟁을 일으키는 등 소련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를 통해 중화민국을 제치고 유엔에 입성하였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널리 인정받게 된다. 1971년 '핑퐁외교'로 불리던 리처드 닉슨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마침내 1979년 중화민국의 강력한 후원국이던 미국과도 수교하게 된다. 덩샤오핑 이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 대국 반열에 진입하였다. 1990년대에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차례로 편입하였다. 2008년에는 베이징 하계 올림픽이 2010년에는 상하이 엑스포가 개최되으며 2022년에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아래의 데이터는 양학통의 에 의한다. +브라-켓 표기법은 양자역학에서 양자 상태를 표현하는 표준 표기법으로 추상적인 벡터와 선형 범함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이 표기법은 꺾쇠괄호 '⟨', '⟩'와 ,수직선 '|' 을 사용하여 표기한다.오른꺾쇠괄호로 표기한 것을 켓이라고 하며, 주로 열벡터를 나타내고 다음과 같이 쓰인다.왼꺾쇠괄호로 표기한 것을 브라라고 하며, 주로 행벡터를 나타내고, 다음과 같이 쓰인다.여기에서 는 '켓-'로 읽고, 는 '브라-'로 읽는다.유한차원벡터공간에 포함된 브라와 켓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다음이 성립한다.이때 은 의 켤레 복소수이다.브라와 켓, 그리고 연산자의 조합은 행렬 곱셈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브라-켓 표기법은 복소벡터공간에서 벡터의 스칼라곱 또는 벡터 위로의 선형 범함수의 작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내적이나 작용은 브라-켓 표기법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같은 레이블인(같은 내용물을 가진)브라와 켓은 서로에게 에르미트 수반이다.쌍대공간의 각 브라 벡터에는 꼭 한 개의 켓벡터가 대응된다는 리스 표현 정리에 의해 〈〉 와 대응되며 잘 정의되어 있다.브라-켓 표기법은 1939년에 폴 디랙에 의해 소개되었기 때문에 디랙 표기법이라고도 한다.브라-켓 표기법이 생겨나기 100년 전쯤에 헤르만 그라스만이 내적을으로 표기한 전례가 있다.브라-켓 표기법은 선형 대수학의 표기법으로, 특히 유한/무한 차원의 복소 벡터 공간에서의 벡터, 내적, 선형 연산자, 에르미트 수반, 쌍대공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으며, 특히 양자역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연산들을 쉽게 하기 위해 설계되었다.양자역학에서 브라-켓 표기법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양자역학으로 설명되는 많은 현상들이 브라-켓 표기법을 사용하여 표현된다.표기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켓 은 열벡터이며, 같은 레이블의 브라 의 켤레 전치이다. 그리고 브라, 켓, 선형 연산자를 나란히 쓰는 것은 행렬 곱셈을 의미한다. 그러나, 켓은 열벡터로 쓰여지기 어려운 불가산 무한차원 벡터 공간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숫자들의 목록으로 열벡터를 쓰는기 위해서는 기저가 필요한데, 이에 반해 로 표현될 때도 있다.일부 물리학자들이 선호하는 내적에 대한 표준 수학적 표기법은 다음의 관계로 브라-켓 표기법과 정확히 같은 뜻을 나타낸다.브라와 켓은 또한 다른 방법으로 구성되어 등의 다른 뜻을 나타낼 수도 있다. 다음의 구성은 외적을 나타낸다.또한 행렬 곱셈을 나타낼 수도 있다.만약 켓이 벡터공간의 한 원소일 경우, 대응되는 브라는 쌍대공간의 원소이다. — 리스 표현 정리를 참고하라.벡터와 켓의 차이점.수학에서 라는 용어는 대부분 실세계의 세 차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물리량들을 일컫는 데에만 사용된다. 이러한 벡터는 일반적으로 화살표를 위에 표시하거나또는 굵게 표시하여 쓰여진다.양자역학에서 양자 상태는 일반적으로 추상복소벡터공간의 원소로 표현되는데, 예를 들어 모든 가능한 파동함수의 유한 차원 벡터 공간 등이 있다. 그러나 으로 불리게 되고 켓 표기법을 사용하여 표기하게 되었다.디랙이 발명한 켓 표기법은 수직선과 꺽쇠괄호를 사용한다. 켓 표기법이 사용된 것들은 "켓"이라고 불리며, 는 "켓-A"로 읽는다. 이러한 켓들은 선형대수학의 일반적인 법칙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다음의 수식은 그 예시이다.참고로, 어떠한 기호, 문자, 숫자, 심지어 단어라도 레이블로 적절하다면 무엇이든지 켓 안에 레이블로 쓰일 수 있다. 예를 ���어, 위 수식의 마지막 줄은 각 실수 마다 있는 무한히 많은 켓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기호"는 " 자체의 의미와 관계 없이 구체적이고도 보편적인 수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는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켓 안의 레이블은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붙여진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 에너지 고유켓은 일반적이고 관습적으로 양자수를 나열한 것으로 붙여진다.내적은 일반화된 스칼라곱으로, 두 벡터의 내적은 스칼라이다. 중성 표기법에서, 내적은 으로 쓰일 수 있다. 여기에서 와 는 모두 추상벡터공간의 원소, 즉, 둘 다 켓이다.와 의 내적은 브라–켓 표기법으로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 있다.브라–켓 표기법은 "브래킷(괄호)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여기에서 는 브라로 불리며, "브라-A"로 읽고, 는 위에서와 같이 켓이다.내적을 브라와 켓으로 로 의미가 있으며 내적 밖의 다른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와 켓을 분리하는 의미는 크게 두가지가 있지만 표현 는 아래에 있는 두번째 해석 즉 선형 범함수의 작용으로 해석된다.브라와 켓을 행벡터와 열벡터로 해석.고정된 정규 직교 기저를 사용하는 유한차원 벡터공간에서, 내적은 다음과 같이 행벡터와 열벡터의 행렬 곱셈으로 쓰일 수 있다.이를 바탕으로 하면, 브라와 켓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그리고 이러한 정의에서는 브라 옆에 켓을 놓는것이 행렬 곱셈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암시한다.브라의 켤레 전치는 켓과 일치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브라가 있을 때 켤레 복소수를 취하고 행렬을 전치하면 다음과 같은 켓이 되기 때문이다.브라를 선형범함수로 해석.무한차원공간으로 일반화하기에 더 쉬운 동치의 추상적인 정의는 브라를 켓의 공간에서의 선형 범함수로 즉 켓을 입력으로 하고 복소수를 출력하는 선형 변환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브라로 표현되는 선형 범함수는 내적과 똑같이 정의된다. 따라서 만약 가 리스 표현 정리 아래에서 와 상응하는 선형 범함수라면 다음과 같이 함수로 표시할 수 있다.즉, 이것 또한 내적과 똑같은 복소수를 만들어낸다. 우변의 표현은 여전히 두개의 켓을 포함하지만 "내적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이 혼란스러울 수는 있지만, 결국 같은 숫자가 만들어지므로 내적으로 계산해도 큰 문제는 없다.수학 용어에서, 브라의 벡터 공간은 켓의 벡터공간의 쌍대 공간이며, 상응하는 브라와 켓은 리스 표현 정리에 따라 연관되어있다.규격화 불가능 상태와 비힐베르트 공간에서의 브라-켓 표기법.브라–켓 표기법은 힐베르트 공간이 아닌 벡터 공간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양자역학에서 무한의 노름을 가지고 있는 켓 즉 규격화 불가능 파동함수들은 관습적으로 쓰이고 있다. 예시로는 디랙 델타 함수나 무한 평면파가 파동 함수로 사용되는 상태 등이 있다. 기술적으로 이러한 상태는 힐베르트 공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 정의는 이러한 상태들을 포함하도록 확장될 수 있다. 브라–켓 표기법은 이러한 넓은 맥락에서도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바나흐 공간은 힐베르트공간의 다른 정규화이다. 바나흐 공간 에서, 벡터는 켓으로, 선형 범함수는 브라로 표기될 수 있다. 사실, 위상 공간이 아닌 어떠한 벡터공간에서도 벡터를 켓으로 선형 범함수를 브라로 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더 일반적인 맥락에서 꺾쇠괄호는 리스 표현 정리가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내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양자역학에서의 사용.양자역학의 수학적 구조들의 대부분은 선형대수학을 기반으로 한다.벡터와 선형 연산자를 포함한 양자역학의 모든 계산은 사실상 브라-켓 표기법으로 표기될 수 있다. 아래는 그에 대한 몇가지 예시이다.스핀이 없는 위치공간 파동함수.스핀-0 점입자의 힐베르트 공간은 위에 펼쳐져있으며, 이때 레이블 은 모든 점들의 위치 공간의 집합으로 확장된다. 이 레이블은 몇몇 기저 상태에서 작용하는 위치 연산자의 고유값, formula_19이다. 불가산 무한한 수의 벡터의 원소는 기저에 있는, 이것은 불가산 무한 차원 힐베르트 공간.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 그리고 위치 공간은 섞이지 않는다.이러한 힐베르트 공간에서 시작하는 어느 켓 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동함수로도 알려져 있는 스칼라 함수 을 정의할 수 있다.왼쪽의 은 공간��의 어느 점으로부터 복소수로의 대응이며 오른쪽의 는 켓이다.그 다음에는 관습적으로 파동함수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의한다.예를 들어 운동량 연산자 는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간혹 다음과 같은 표현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하지만 이것은 표기법의 남용이다. 미분 연산자는 반드시 위치기저에 사영되는, 켓에 작용하는, 파동함수를 미분하는 효과를 가진 추상적인 연산자로 이해되어야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량 기저에서, 연산자는 와 같이 단순한 곱셈 연산자에 해당한다.양자 역학에서 식 은 일반적으로 상태가 상태 으로 붕괴할 확률 진폭으로 해석된다. 수학적으로는 가 으로 사영될 때의 계수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상태 의 상태 로의 사영을 의미하기도 한다.스핀- 입자에 대한 기저 변환.정적인 스핀- 입자는 이차원 힐베르트 공간을 가진다. 그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여기에서 가 각운동량 연산자 의 값이 확실히 인 상태이고 는 각운동량 연산자 의 값이 확실히 인 상태이다.이러한 기저를 통해 입자의 "어떠한" 양자 상태도 두 기저의 선형결합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이때 "a" 와 "b" 는 복소수이다.다음처럼 같은 힐베르트 공간에 대한 "다른" 기저도 존재한다.이 상태들은 대신 의 관점에서 정의된 것이다.또한 입자의 상태도 위의 두 기저의 선형 결합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어떠한 기저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른 벡터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다시 말해서, 벡터의 "좌표"는 사용된 기저에 의존한다.이것은 와 의 수학적 관계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저 변환을 참고하라.표기법의 몇가지 관례와 오용이 물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러한 표기법은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같은 방정식에서 "레이블"과 상수로 같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formula_30에서 기호 formula_31는 동시에 "연산자의 이름" , "고유벡터" 그리고 연관된 "고유값" 로 사용되었다.벡터의 요소를 표기할 때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동 는 전통적으로 파동함수와 연관되었고 는 같은 맥락에서 파동함수 또는 복소상수 레이블을 표시하는데 사용되며 아래첨자에 의해서만 구분된다.주된 남용은 벡터 레이블 안에 연산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용은 벡터의 크기변환을 빠르게 표기하기 위해 사용된다. 즉, 만약 벡터 가 배 크기변환될 때, 이것을 으로 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법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 함수나 숫자가 아닌 레이블(이름)이기 때문에 연산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러한 오용은 와 같이 벡터를 텐서곱으로 표현할 때 레이블의 일부가 표기법의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뜻을 갖고있는 세 벡터의 레이블의 일부분이 아래첨자 1, 2와 같이 켓의 바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가 첫번째 벡터의 노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용되었다.켓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켓을 입력으로 하고 켓을 출력으로 하는 선형 연산자를 맵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만약 가 선형 연산자이고 가 켓일 때, 은 또다른 켓이다.-차원 힐베르트 공간에서, 는 열벡터로 쓰일 수 있으며, 는 복소수 항목을 포함한 행렬로 쓰일 수 있다. 켓 는 일반적인 행렬 곱셈으로 계산될 수 있다.선형 연산자는 양자역학 이론의 어떠한 부분에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나 운동량 같은 관측가능량은 자기 수반 연산자로 표현되며, 변화 과정은 회전이나 시간의 진행과 같은 유니터리 선형 연산자로 표현된다.브라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연산자는 브라의 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표기된다. 특히 만약 가 선형 연산자이고 가 브라이면 는 규칙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또 다른 브라이다.-차원 힐베르트 공간에서 는 행벡터로 쓰일 수 있고(이전 단락에서와 같은) 는 행렬으로 쓰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브라 는 일반적인 행렬 곱셈으로 계산될 수 있다.만약 같은 상태 벡터가 다음과 같이 브라와 켓쪽에 둘다 나타나면이 표현은 상태 에 있는 물리학 계에 대해 관측 가능한 표현 연산자 의 기대값 또는 평균을 나타낸다.힐베르트 공간 에서 선형 연산자를 정의하는 편리한 방법은 외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만약 가 브라이고 이 켓이면 외적은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라 계급-1 연산자를 나타낸다.유한차원 벡터 공간에 대해 외적은 간단한 행렬 곱셈으로 이해할 수 있다.이때 외적은 선형 연산자로 볼 수 있는 행렬이다.외적의 사용 용도 가운데 하나는 사영작용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노름이 1인 주어진 켓 에 대해 에 펼쳐진 하위공간으로의 직교사영은 다음과 같다.에르미트 수반 연산자.브라와 켓이 서로 변환될 수 있는 것 처럼, 에 상응하는 쌍대공간의 원소는 이다. 이때 는 연산자 의 에르미트 수반이다. 다시말해,만약 가 행렬로 표현된다면 는 의 켤레전치이다.인 자기수반연산자는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관측가능량은 항상 자기수반연산자로 표현된다. 만약 가 자기수반연산자이면, 는 항상 실수이다. 이것은 관측가능량의 기댓값이 실수임을 의미한다.브라-켓 표기법은 선형대수 표현의 조작을 쉽게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여기에는 조작을 쉽게 하는 몇몇 특성들을 목록으로 정리해두었다. 무엇을 다음과 같이, 과 는 임의의 복소수이고, 는 의 켤레 복소수를 의미하며, 와 는 임의의 선형 연산자를 나타내고, 이러한 특성은 브라와 켓 어느것을 골라도 적용된다.브라-켓 표기법으로 쓰여진 복소수 브라 켓 내적 외적 선형 범함수와 연관된 모든 주어진 식에서 괄호로 묶는것은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등과 같다. 식의 오른쪽과 표현은 중의적이지만 표현되는것이 허용된다. 왼쪽의 표현과 같기 때문이다. 참고로 결합성은 물리의 비선형 시간 역전 연산자와 같은 비선형 연산자 표현까지 적용되지는 않는다.브라–켓 표기법은 특히 에르미트 수반의 표현입니다. 공식적인 규칙은 다음과 같다이러한 규칙은 어떠한 표현에 대해서라도 에르미트 수반을 구하기에 충분하다. 아래는 몇가지 예시이다.두 힐베르트 공간 와 는 텐서곱을 통해 또다른 공간 을 형성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복합계를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만약 계가 각각 와 로 설명되는 두개의 부분계의 합성인 경우 전체 계의 힐베르트 공간은 두 공간의 텐서곱이다. 만약 가 에 속한 켓이고 는 에 속한 켓일 때 두 켓의 직접 곱은 에 속한 켓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표기법으로 쓰여진다.이러한 곱의 적용은 양자 얽힘 과 EPR 역설을 참고하라.인 노름이 내적인 힐베르트 공간를 고려하자.기초적인 함수해석에서, 어떠한 켓 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이때 은 힐베르트 공간 위에서의 내적이다.이것은 켓의 스칼라의 교환법칙에 따라 다음의.는 반드시 각 벡터를 자기 자신으로 보내는 '항등 연산자'여야 한다.수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표기법.브라-켓 표기법을 사용할 때 물리학자가 고려하는 대상은 힐베르트 공간 이다.를 힐베르트 공간이라고 하고 를 안의 벡터라고 하자. 물리학자들이 로 나타내고 싶은 것은 벡터 그 자체이다. 즉를 의 쌍대 공간이라고 하자. 이것은 위에서의 선형 범함수의 공간이다. 위상 동형 는 정의된 모든 에 대해 으로 정의된다.이때, , , , 그리고, 는 단지 힐베츠트 공간의 두 원소 사이의 내적을 표현하는 다른 표기법일 뿐이다.표기의 혼동은 와 를 각각 식별하는데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상징적 대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라고 하자. 이러한 가정은 다음과 같은 식을 제공한다괄호를 무시하고 두개의 세로선을 제거한 식을 얻게 된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단에 자리한 민주공화국이다. 서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황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일본과 동해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대한민국의 국기는 대한민국 국기법에 따라 태극기, 국가는 관습상 애국가, 국화는 관습상 무궁화이다. 공용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이다. 수도는 서울이다. 인구는 약 5,100만 100명으로, 전체 인구 중 절반 정도가 수도권에 살고 있다.대한민국은 헌법에 따라 1919년 3.1 운동에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였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대한민국은 한국 전쟁 이래 일명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빠른 속도의 대규모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1990년대 말 외환 위기 등의 부침이 있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2019년 1인당 국민 총소득은 명목 3만 1,430달러로 세계은행의 분류상 고소득 국가이고, 2016년 유엔의 인간 개발 지수 조사에서 세계 18위로 ‘매우 높음’을 기록하였으며, 국제 통화 기금의 분류에서 선진 경제국이다. 다만 높은 자살률, 장시간 근로 문화와 높은 산업 재해 사망률, 저출산 등의 사회 문제가 이 같은 성과와 병존하고 있다.대한민국은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 2019년 기준 23위의 8.0점을 기록한 바와 같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수준이 가장 높은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주요 20개국, 경제 협력 개발 기구, 개발 원조 위원회, 파리 클럽 등의 회원국이다.대한민국이란 국호 중 대한의 어원은 좁게 보면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다. 넓게 볼 때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낱말로서, , '칸 등 여러 해석이 있다.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으로 결정했다고 전한다.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하였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이나 "한국", "한"으로 대체하여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며,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비해 한반도 남부에 있다 하여 "남한"으로도 불리는데 특히 대한민국 한반도 북부를 점거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부른다.대한민국 내에서는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韓國) 또는 남한(南韓) 등으로도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반국가단체로 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명칭 대신에 남조선(南朝鮮)으로 부른다. 대한민국은 과거엔 구한국(舊韓國) 대한제국과 구별하여 신한국(新韓國)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국제사회에서는 관습상 대한민국을 간단히 '코리아'(Korea)라 부르며 이 이름은 동아시아의 고대 국가인 고려에서 유래하였다.코리아란 영문 국호의 어원은 동아시아의 중세 국가인 고려에서 유래하였다.고구려가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변경한 것을 918년 건국된 중세 왕조 고려가 계승하여 로 불린다.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았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 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 지방이 된 것으로부터 Chosen이라는 일본식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이라 부른다. 다만 여전히 한반도 전체를 부를 때는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대한민국은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열도와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하며 육지로는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맞닿아 있다.한반도는 제3기 마이오세 이후에 일어난 단층과 요곡운동의 결과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급경사로 동해안에 임박하고 서쪽으로는 서서히 고도가 낮아진다. 이를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라 한다. 높은 산들은 대부분 동부 지방에 치우쳐서 한반도의 등줄기라 불리는 태백산맥에 자리한다. 태백산맥의 대표적인 산이 설악산이다. 태백산맥의 남서쪽으로 소백산맥이 이어지며 그중에는 지리산이 유명하다. 제주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사화산인 한라산이 있다.하천의 유량은 극히 불규칙하여 여름에는 집중 호우로 연 강수량의 약 60% 이상이 홍수로 유출되며, 갈수기에는 강바닥을 거의 드러내는 하천이 많다. 대표적인 강은 위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등이다. 대다수의 강이 산���가 많은 동쪽에서 평평하고 낮은 구릉이 대부분인 서쪽으로 흐르며 중하류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전개된다.산맥은 교통에 적지 않은 제약을 주어, 산맥을 경계로 지역의 문화나 풍습이 크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방은 고개를 넘어 왕래했는데 영서 지방과 영동 지방을 연결하는 태백산맥의 대관령·한계령·진부령·미시령, 중서부와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소백산맥의 죽령·이화령·추풍령·육십령 등이 산맥을 넘는 주요한 교통로로 사용된다.한반도의 서쪽은 황해 동쪽은 동해 남쪽은 남해와 맞닿아 있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이며 가장 큰 부속 도서인 제주도 남쪽으로는 동중국해와 접한다. 황해와 남해 연안은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수 간만의 차가 클 뿐만 아니라 해안 지형도 꽤 평탄하여 넓은 간석지가 전개된다. 또한 수많은 섬이 있어서 다도해라고도 불린다. 반면에 동해 연안은 대부분 해안선이 단조롭고 수심이 깊으며 간만의 차가 적다. 해안 근처에는 사구석호 등이 형성되어 있고 먼 해상에 화산섬인 울릉도가 있으며 그보다 동쪽으로 약 87.4km 거리에 대한민국 최동단인 독도가 위치한다. 서쪽에는 평지가 발달됐다.북위 33도~38도, 동경 126~132도에 걸쳐 있어 냉대 동계 소우 기후와 온대 하우 기후,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난다. 겨울에 북부 지역은 편서풍으로 인해 시베리아와 몽골 고원의 영향을 받아 대륙성 기후를 띠어서 건조하고 무척 추우나 남부 지역은 이런 영향을 적게 받아 상대적으로 온난한 편이다. 여름에는 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의 특색을 보여서 고온다습하다. 계절은 사계절이 뚜렷이 나타나며 대체로 북부 지역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남부 지역은 봄과 가을이 길다.3월 초에서 5월 초에 걸쳐 포근한 봄 날씨 5월경에서 8월 초에는 무더운 여름이 8월 말에서 10월 말까지는 화창하고 건조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11월에 기온과 습도가 점차 낮아지기 시작하여 12월에서 2월까지는 춥고 건조한 겨울 날씨를 보인다. 중부 산간 지방을 제외하고 대체로 연 평균 기온은 10 ~ 16℃이며 가장 무더운 달인 8월은 23 ~ 36℃ 5월은 16 ~ 19℃ 10월은 11 ~ 19℃ 가장 추운 달인 1월은 -6 ~ 3℃이다.비는 주로 여름에 많이 내리는데 연 강수량의 50 ~ 60%가 이때 집중된다. 이를 장마라고 하며 특히 6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를 장마철이라 한다. 각 지역의 연 평균 강수량은 중부 지방이 1100 ~ 1400mm 남부 지방이 1000 ~ 1800mm 경북 지역이 1000 ~ 1200mm이다. 경상남도 해안 지역은 약 1800mm이며 제주도는 1450 ~ 1850mm이다.습도는 7월과 8월이 높아서 전국에 걸쳐 80% 정도이고 9월과 10월은 70% 내외이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부에서 연평균 28개 정도가 발생하여 이 중 두세 개가 영향을 미친다.본래 4계절이 뚜렷한 기후 환경이었으나 지구 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봄 가을의 기간이 급격히 줄어들며 게릴라성 폭우로 특징되는 열대성 호우가 잦아 아열대화가 진행되면서 어업이나 농업에 변화가 있다.한반도 전역에 동식물 10만 여 종이 분포한다. 호랑이 중에서 가장 큰 종인 시베리아호랑이가 과거 살았었으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맹수로는 반달곰과 표범이 있으며 소수 개체군이 생존한다. 그 밖에도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등의 포유류와 까치, 꿩, 참새, 비둘기를 비롯한 텃새, 두루미, 기러기 같은 철새가 서식하며 지네나 거미, 수많은 곤충류도 서식한다. 삼면이 바다여서 난류와 한류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패류와 고래도 존재한다. 또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로 한류성 어류가 감소하고 불가사리나 해파리가 급증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산삼이나 진달래, 소나무 등 많은 식물은 약용이나 기타 여러 용도로 쓰인다. 제주도에는 열대림과 비슷한 야자수가 번육하며 지리산이나 태백산맥에는 북방계형의 특산 식물들이 자생한다. 백두산에는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침엽수림과 같은 북방계 식물류가 자란다. 중부 지방에는 높은 산지로 말미암아 고산형 식물과 약용 식물 여러 종이 자생한다.시멘트 공업과 석회공업의 원료인 석회암은 한국의 주요 자원으로 각지에 대량 분포한다. 다른 자원은 양이 적거나 품질이 낮아 채산성이 맞지 않으므로 거의 생산하지 않는다. 다만 21세기에 와서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기술의 발전으로 재개장하는 광산이 있다. 석탄은 무연탄만이 있으며 삼척 태백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철광석은 양양 충주 등지에서 주로 캤다. 텅스텐은 매장량이 매우 많으며 특히 영월에 대규모의 광산이 있다.울산 앞바다에 천연가스층을 발견하고 개발중이며, 독도 부근 해저에서 메테인 하이드레이트 대규모 매장량을 발견했다. 석유는 제주도 남방 해역 대륙붕 제7광구에 천연가스와 함께 매장 가능성을 언급하나 실제로 탐사하지 않았다. 이곳은 1974년에 체결한 한일 대륙붕 협정에 따라 2028년까지 한일이 공동 관리한다.한반도에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약 70만 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현생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2만 5천 년 전부터 해안과 강가를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골 화석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상시굴과 두루봉동굴, 제천시 점말굴 등에서 현생인류로 추정되는 사람 뼈 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이후 중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빗살무늬 토기인, 무문토기인 등 여러 인종의 유입과 주변 세력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문명이 발전했다. 다만 초기 구성원들의 이동과 외부 세력 유입의 구체적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한반도 일대의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일연의 에서 그 시기를 기원전 2333년이라 하였다. 날짜는 대종교에서 임의로 음력 10월 3일로 약속하고 개천절이라 불렀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 날을 양력으로 고쳐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고조선 멸망을 전후하여 부여 옥저 동예 진국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생겨났고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로 이어졌으며 이 중 신라가 삼국을 부분적으로 통일하는 한편 북쪽의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다. 10세기 고려가 등장하면서 한민족 단일 국가의 시대를 시작했고 14세기 조선이 이를 계승했다.근대 한국의 뿌리는 1897년에 수립된 대한제국이다. 고종 황제는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에서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였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청나라 등과 수교하였다.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신식군대를 설치하고 근대적 사법토지 제도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진흥하고 근대적 병원과 학교 및 은행 등을 설립하였다.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 산업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제조철도운수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과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은 1895년 청일 전쟁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진 이래 간섭을 받아왔으며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로 일본의 한국 병합이 본격화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 고종 황제를 폐위하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국권을 빼앗기며 일제 강점기로 전환 근대적 자주국가라는 목표는 사라지고 말았다.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을 위한 31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대체로 각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장의 개장일에 맞추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일본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나 폭압 통치 방식의 한계를 느껴 헌병 경찰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4월 11일,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제와 3권 분립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군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으로 여러 인사들이 빠져나가면서 국무령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고, 일제의 방해까지 겹쳐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탈이 가속화되자 내륙으로 청사를 이전하여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에는 충칭에 정착하였다.이후 김구를 주축으로 주석중심제로 재정비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채택하였다. 한국 광복군도 조직하여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1942년 2월에는 대독 선전포고까지 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하였다. 1942년에는 좌파 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세력과 김성숙, 유림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43년 버마 전선의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자 공작대를 파견하여 일본군 포로 취조 및 암호 번역, 선전 전단 작성, 대적 회유 방송 등을 하였다. 미국 OSS와도 연계하여 1945년 9월을 기한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이 3·1운동에 따라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군정기와 해방 정국.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일제 치하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날이 바로 광복절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반도는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련과 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1945년 9월에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구 소련군이 포고령을 선포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광복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설립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9월 여운형,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에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고, 미군정은 맥아더 포고령에 따라 인공 내각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인공 내각은 해산되었다.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문제를 놓고 한반도 내에는 좌 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곧이어 1946년 5월에는 미소공위가 개최되었으나 양측의 주장이 엇갈려 결렬되었다. 이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개시하여 미소공위를 재개하고자 하였지만 한민당과 남로당 등 좌우익세력간에 불참으로 중도파 세력만의 운동으로 축소되었다.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 1947년 7월에 여운형 암살 등 해방정국의 잇단 사건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로 끝났다.대한민국 정부 수립.미군정청이 1946년 7월 서울지역 1만여 명에게 실시한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라고 밝힌 상황에서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벌인 봉기에 대한 유혈 진압과 사회주의적인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던 미 군정은 온건파인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통해 좌우 합작과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장악에서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김구, 윤치영, 박헌영, 허헌 등의 반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마저 결렬되어버리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로 이관했고, 총회에서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었다. 이에 김규식, 조소앙, 김구 등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 등을 추진하여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에서도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한 정부 수립론이 제기되면서 (정읍 발언) 사실상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한 모양새가 되었다.1948년 1월부터 한반도의 정국은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 협상을 통한 정부 수립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군을 창건하면서 분단은 사실상 불가피하게 되었다. 5월 10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제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탄생하였고,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초대 헌법인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구성되었다. 7월 22일에는 국회의 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정부"임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그러한'은 대한민국이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주민들 대다수의 자유 의사에 따라 수립되었고, 선거가 가능했던 그 지역에 대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임을 뜻한다. 이미 48년 9월 9일에 한반도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음에 미루어 그 해 12월의 결의는 대한민국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만든 새 교육과정에서 교과서 집필진이 학회에 자문한 결과 "1948년 12월 유엔 결의에서 대한민국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됐으며, 남북한이 1991년 유엔에 동시 가입했기 때문에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 명시하는 것은 시비의 소지가 있다"고 하면서 '유일한 합법정부는 1948년 정부에 한정'되어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합법 정부'를 제외했으나 정부 측의 요구로 포함시켰는데 2019년 5월 2일 공개된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 시안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이 빠졌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남침을 기도하여 공산주의화 하려는 야망을 실현하고자 준비하였다.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을 받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소련에서 지원받은 수십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이 전혀 없었고 야포와 전투기 등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총만 가진 거의 맨 몸의 한국군은 순식간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조선인민군이 침략한 3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무장한 인민군을 상대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한국군은 결국 밀려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배수진으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갔으며 많은 사상자와 인명피해가 초래되었다.하지만 유엔군이 파병으로 지원하고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해냈다.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수복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때 유엔 내부에서 맺어진 새로운 결의로 유엔군의 목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완전히 공략하려는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한국과 유엔군은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참전하고 소련이 군사를 지원하여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이후 38도선 인근 중부 지방에서 교착을 거듭하던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오전 10시에 체결된 후에 효력이 발생한 22시에 완전히 전투가 종료되고 군사 분계선이 형성되면서 오늘날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6.25 전쟁으로 20만 명이 과부가 되었고 10만여 명 이상이 고아가 되었으며 1천만여 명 이상이 이산 가족 신세가 되었다. 한반도 내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된 탓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가 도래하여 한국과 북한의 경제 수준이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국의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분단한 지 70여년에 이르고 있다.한국 전쟁이 휴전 협정을 맺은 후 19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경제원조체제가 성립되던 시기였다. 제1공화국 정권의 고위 관료는 부패해 국민의 불만을 샀다. 의원 내각제였던 제1대 내각에서 재선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이승만은 이범석과 장택상을 비롯한 측근들과 족청계,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키고 장기집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범석, 장택상 등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하고 이기붕 계열을 등용한다. 이기붕 계열은 또한 친 자유당 성향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깡패들을 활용하여 야당 의원의 집회를 탄압, 제1공화국 후반기는 혼란을 거듭했다.그 와중에 부통령 장면의 피격 사건과 조봉암 사법살인 등의 조치까지 겸해졌고 언론의 자유마저 통제당했다. 1959년의 한일회담이 끝나자 곳곳에서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집회가 시작, 1960년 3월 15일 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계기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4·19 혁명이 발생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며칠 전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제1공화국은 붕괴했다.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 내각을 거쳐 장면을 수상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제2공화국은 3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구성했고 언론 자유와 혁신계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제2공화국 당시 각계 각층의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도 했는데 집권 여당인 민주당 사이에서 신파와 구파가 나뉘어버려서 ��혁 의지가 미약한 탓에 이러한 요구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데모가 연이어 벌어졌고 장면이 단호한 조치를 계획하던 중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쿠데타로 내각 각료들이 체포되면서 장면 내각은 1년 남짓밖에 집권하지 못하고 무너졌다.그 뒤 윤보선은 형식적인 민정을 실시하였으나 군사정변 세력에게 구정치인 정화법(1962)으로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사퇴(1962.3.22)함으로써 1962년 3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516 군사정변 세력이 설립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법권행정권입법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1963년 12월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한 박정희 등에 의해 제3공화국이 수립됐다. 야당 후보인 윤보선과의 두 차례의 선거전에서 10만 표 안팎의 근소한 차로 집권하였다. 재임 초반 한일 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분을 사 일어난 시위를 무력 진압하며 강행했다. 1960년대 개발 독재의 일환으로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발전과 한일협정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통한 외화 획득으로 경제 발전을 꾀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과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저임금 노동과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도 남겼다.이후 박정희 정부는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1971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그런데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같은 해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2배로 늘어나는 선전을 이룬 데다가 제1차 석유 파동 등으로 경제성장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정권 유지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고 제4공화국을 선포하였다.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돌풍으로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해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이를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로 수정하는가 하면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할 수 있는 법안까지 통과시키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노동운동계 재야와 학생 세력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잇따른 긴급조치를 통해 억눌렀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 및 노동운동가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미국이 한국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한미 간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 제2차 석유 파동까지 겪으면서 경제위기와 내부 혼란이 크게 가중되었다.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과 YH 사건 부마 항쟁 등의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권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되면서 박정희의 17년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1026 사건 이후 유신 체제 하에서 국무총리 최규하가 이끄는 정부가 출범했다. 유신 헌법 폐지를 통해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기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함으로써 일부 정치적 억압을 완화했고 1979년 12월과 1980년 2월 1980년 4월에 대사면령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이들이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고 급기야 최규하 대통령에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0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최규하 정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붕괴되고 말았다.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세로 떠올랐고, 민주화 일정을 지체시켰다. 1980년 초부터 국회와 정부는 유신 헌법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논의를 진행했고, 대학생과 재야 세력도 정치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요구를 바탕으로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확대하면서, 이른바 등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폐쇄했다.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5·17 쿠데타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수부대 및 특전여단을 투입해 유혈진압을 하고, 5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국을 주도했다. 10월 27일에는 7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제5공화국은 경제 안정에 매진하는 한편, 1981년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유치하기도 했다. 또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내걸어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한편으로 임기 중반부터 3저호황으로 인한 수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성립하고 민주주의 탄압 및 고문·정치사찰·용공조작으로 대변되는 인권 유린행위를 자행했으며, 정경유착·부정축재·친인척 비리가 빈발했다.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치사하는 사건이 터지자 정부 퇴진과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에 정부는 호헌조치를 취하며 을 내세웠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빗발쳐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총재 노태우를 통해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국민의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1988년 2월 취임식과 함께 제5공화국은 막을 내린다.노태우 정부와 문민정부.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여야가 합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한 개헌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야권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나왔다. 민주정의당은 불리한 여론을 극복하는 돌파구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또한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조치를 단행(국정감사)하고 민간인들을 정계에 대폭 고용하기도 했다(과거와의 단절). 외교 면에서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1991년 9월 유엔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또한 1992년에는 지방 자치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그러나 노태우도 전두환처럼 군인 출신이었고 1212 사태를 주도하고 5공 성립 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노태우 정부도 정경유착은 물론 비자금 형성민간인 사찰고문 등 5공의 파쇼 정치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는 결국 민주화 시위(1991) 등으로 이어졌고 노태우는 이른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여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으며 끝내 김영삼을 후계자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막을 내렸다.1992년 치러진 제14대 대선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어 1993년에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은 이른바 문민정부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로써 윤보선 정부 이후 30여년만에 민간인 정부로 회귀했다. 문민정부는 하나회 군부 숙청 금융실명제 표현의 자유 허용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부활 OECD 가입 등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군사 정변을 주도할 위험이 있는 군 내 사조직을 숙청하고 12.12 관련자 및 5.18 관련 정치군인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항공기 괌 추락 사고 우암상가아파트 성수대교 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대형 사고가 일어나 사회적인 혼란을 겪기도 했다. 또한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와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준비없는 대규모 개방을 강행했고 외환관리에 실패해 IMF 구제금융사건을 초래하였다. 결국 국민들의 높아진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야당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IMF 위기의 극복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경제정책 추진과 금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2001년까지 외채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났으며 국제 기준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체제를 도입해 기업의 체질 개선 등을 단행했다. 국민의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서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였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억 원에 달하는 현금을 북한 정권에게 불법 송금했다는 혐의가 사후 드러나 큰 비판을 받았다. 대북유화책을 추진했지만 연평해전 핵실험 등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이 계속되어 햇볕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또한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었던 신자유주의 정책은 승자 독식의 기형적 사회구조를 구축했다는 비판이 있으며 지나친 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등으로 대량의 실업자를 양산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일부 존재��다.2002년 제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2004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겪으며 위기를 맞았으나, 여론의 반발과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으로 마무리되었다. 같은해 열린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탄핵역풍을 맞은 야당을 누르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국정 탄력을 받았다. 참여정부는 권위주의 타파, 균형 발전 등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책을 수립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설치를 통한 과거사 정리, 세종특별자치시 추진으로 균형 발전을 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보수진영의 반발이라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적 개혁과 대통령의 과격한 발언 등으로 보수층과 중도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 씨의 측근 비리 등 각종 악재로 인하여 임기 중반에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하였다. 진보진영에서 선출된 대통령이었지만 신자유주의와 친미 외교정책을 펼치는 등, 진영논리에 따른 정부가 아닌 보수, 진보를 넘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치를 추구하였다.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보수진영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이명박 정부는 선진화 원년과 747 공약을 내세워 경제 활성화를 추구하였으나,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위기와, 한미 FTA 체결 과정에서 광우병소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동시에 겪었다. 고환율정책으로 금융위기의 안정적 극복을 이뤄냈으며,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 2011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로 대표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의 비리 의혹, 국정원 여론조작과 미디어법 개정으로 인한 언론 장악 논란, 세종시 수정안 등 재임 기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2012년 제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으로 출범부터 논란에 휩싸였고 이어 잇따른 인사 실패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 대책에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창조경제와 노동개혁 국정교과서 추진 한일 위안부 합의 등 여러 정책에 대해 사회적 비판과 갈등을 겪었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에 처하면서 정치적 난관에 처한 박근혜 정부는 같은해 10월 민간인 신분인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사태가 폭로됨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고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키며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확립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된 대통령이 되었다.2017년 전임 대통령의 파면으로 조기에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진보진영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문재인 정부는 탈권위주의 정책 및 적폐 청산 노선으로 임기 초 높은 지지율을 누리는 한편으로, 코리아 패싱과 한반도 긴장 고조로 인한 외교적 난관 속에서도 경색된 남북관계를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맞물려 전개된 남북관계 화해 국면에 따라 판문점 회담과 평양 회담을 여는 동시에 북미회담을 통한 비핵화 협상 주선에 힘썼다. 이와 더불어 2020년 코로나19 유행의 방역에서 선방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고, 국정농단의 여파로 인한 야당의 입지 약화와 함께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에서 여당의 유례없는 압도적 승리라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우며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하고 탈원전 추구, 가상화폐 규제 등의 경제정책을 펼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찬반론을 불러일으켰으며, 계속되는 경기불황과 부동산 대책 실패로 비판 여론을 받았다. 또 2017년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과 2018년 여권 인사의 미투 운동 연루, 2019년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논란 등 정부와 여당의 도덕성 논란이 부정적 평가에 일조함과 동시에, 2018년 남북 단일팀 추진과 대북 석탄 밀수 사건,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한 남북관계 경색 등에 있어서도 반발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는 대통령제를 바탕으로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혼합된 모습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무총리가 존재하며 국회의원이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의 직을 겸직할 수 있는 사실은 이에 기인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입법권을 갖는 대한민국 국회와 행정권을 갖는 대한민국 행정부, 사법권을 갖는 대한민국 법원으로 구성되며 이는 권력기관의 상호 견제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다.대한민국의 정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단독 총선으로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고 제헌 국회에 의해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제정되었다. 동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대한민국 헌법 제1호로서 대한민국 제헌 헌법은 대한민국 제헌 국회에 의해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다. 이후 수차례의 군사 독재 및 민주화 운동을 수반하는 정치적 변화로 9차례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현행 헌법은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서, 5년 단임제의 대통령 직선제를 근간으로 삼권 분립을 실현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대한민국에서는 헌법 제8조에 의해 자유롭게 정당을 결성할 수 있으며, 복수정당제를 보장한다. 대한민국의 정당 정치는 비교적 정당의 수명이 짧고 정당 간 합당이나 분당이 자주 일어나는 특징이 있다.최근에 21대 국회가 2020년 5월 30일 개원하였다. 21대 국회는 문재인 정부 여당이자 현재 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제1야당으로 더불어민주당과 동일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국민의힘이 있다. 비교섭단체 정당으로는 정의당 국민의당 열린민주당 기본소득당 시대전환이 있다. 교섭단체는 국회의원 20인 이상이 모여 결성하는 단체로 20석 이상을 확보한 정당은 교섭단체의 지위에 오른다. 국회에 의석이 없는 정당은 노동당 녹색당 민생당 진보당 등이 있다. 제21대 총선 당시에 개정된 공직선거법의 영향으로 여야 위성정당을 구성하였고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위성정당) 180석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위성정당) 103석 정의당 6석 국민의당 3석 열린민주당 3석을 얻어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제1당을 유지하였다.입법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는 현재 총 300석의 단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부였던 임시의정원을 기원으로 두고 있으며 1948년 5월 10일 구성된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이다. 매년 1회의 정기회와 30일 이내의 임시회가 열리며 회기 중에 국회는 법의 의결권과 예산안의 심사 국정 감사와 헌법에 명시된 기관장의 임명 동의 및 조약의 체결 및 비준 동의 등의 활동을 한다.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임기 중 의사진행과 관한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과 회기 중 불체포특권을 가진다. 공직선거법에 따른 피선거권을 충족한 인물로 국회의원 총선거나 재선거 및 보궐선거 혹은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비례대표 의석승계 결정에 따라 선출된다.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부의장은 국회의원 중에서 본회의의 무기명 투표를 거쳐 선출되며 그 임기는 국회 회기의 절반에 해당되는 2년이다.대한민국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여 입법부에서 법률로써 정한 사안들을 실행한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국무회의의 조력을 받아 업무를 처리한다.대통령은 5년 단임으로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한 법률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한 번 거부한 법률을 국회가 다시 통과시킨다면 그 법률은 그대로 통과된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3인과 대법관 등을 임명할 수 있다.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국군을 통수하며 공무원 임명을 할 수 있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방대한 권한을 행사한다.대통령의 명을 받아 내각을 통할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서 국무총리를 두고 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되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국무총리는 내각의 구성원을 대통령에��� 임명을 제청하며 내각을 통솔한다. 대통령의 유고 시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며 국무총리가 유고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순으로 권한을 대행한다.대한민국의 사법부는 대다수의 현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재판에 있어서 공정한 심판을 위해 3심제로 이루어져 있다.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그 밑에 고등법원 지방법원 지방법원의 지원과 특허법원 가정법원 행정법원 등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법률 심사를 위해 설치된 특수법원(여기에서의 재판은 1심의 판결과 동일하다.)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군사법원법에 따라 군사재판을 할 수 있으나 최종심은 대법원이 관할한다.사법부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불의한 역사의 반성에서 1988년 헌법을 개정하여 사법권이 법원에 있는 원칙의 예외로 설치한 헌법재판소에서는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판가름하는 위헌법률심판, 대통령을 비롯한 공무원의 탄핵 소추를 심사하는 탄핵심판, 위헌 정당의 해산 여부를 심사하는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을 심사한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은 총 9명이며,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선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법관인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에 따라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법관의 임기는 헌법을 통해 보장되며 그 연한은 6년이다.사법부를 구성하는 법관에 의하여 독립된 재판이 보장되나 실질적으로 불기소 처분권을 가지는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는 사건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재판권이 보장되어 있다.이렇게 선진적인 사법 제도를 갖추고 있음에도 모든 사건은 정답이 있어 변호사의 유•무나 재판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질 수 없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 유전 무죄나 여론 재판 등으로 사법 불신이 심각하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위에 대한 분쟁.대한민국은 1919년 3.1 운동에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건국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 거주자들의 자유 선거를 통하여 1948년 공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갔다.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를 통해 유엔으로부터 한국 대다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유엔이 감시 가능한 지역(38선 이남 지역)에서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탄생한 한국 유일한 정부로서 합법 정부로 승인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실시한 한반도 남반부와 부속도서에서만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이 있다. 1991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시에 UN에 가입하였다. 한편 국제법 상의 관례와 통설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라고 판시하여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성을 원칙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어 국가 성립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인정되는 지역은 이었다는 점과 이후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등에 의하여 상호 공존을 약속하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별개의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되는 일부 국제법규와 대한민국 헌법의 시각이 대치되어 문제점이 존재한다.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이북5도위원회를 설치하고 있다.대한민국의 외교에 관한 업무는 외교부가 맡고 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한국 전쟁을 겪은 뒤 적대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햇볕 정책 곧 대북유화책을 시도했으나 차후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등 대남 도발 행위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연평도 도발 천안함 폭침 목함 지뢰 사건 등이 발생함과 동시에 대북 강경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따라 남북 관계가 상대적으로 경색되었다. 대한민국의 외교는 한국 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미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과거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였던 일본과는 1965년 수교하였다.대한민국은 현재 유엔 회원국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리아, 쿠바 등 3개국과 외교 관계가 없으며, 이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외에 서사하라, 중화민국, 팔레스타인, 코소보 등도 외교 관계가 없다. 이 중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부터 수교국이었으나 1992년에 국교가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현재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양국은 양국 수도에 서로 대표부를 설치하여 운영 중에 있고 상호 간의 왕래와 민간교류는 자유롭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대한민국이 팔레스타인에 대표부를 설치하여 운영 중에 있다.과거에는 통상에 관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외교통상부 산하 통상교섭본부를 설치해 운영하였으나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되었다.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 이어도 등에 대하여 이웃한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현재 대한민국은 유엔과 WTO OECD 그리고 G-20의 구성원이며 또한 APEC와 동아시아 정상회의의 창립 가맹국이며 미국의 주요 비NATO 동맹국이다. 한편 2007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해외에서 추방한 대한민국 국민이 2111명으로 일본에서 제일 많았다.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국가로 승인하지 않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하여 국제법상 교전단체의 지위만을 인정한다. 또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헌법을 비롯한 국내법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 일체를 대한민국의 고유한 영토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국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거하는 반국가단체로 본다.국민의 정부 당시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물자 교류는 참여정부 말까지 활발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 도발 등으로 인해 2013년 금강산 관광 산업, 개성공단까지 중지된 상태이였지만 남북회담을 통해 재가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계속해서 대남 도발, 핵 실험, 미사일 발사 등을 진행함에 따라 다시 중지되었다.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는 19세기 중반인 1871년 조선의 통상을 요구하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그러나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완강히 버티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 뒤 일본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풀고 일본을 비롯한 세계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자 미국은 1882년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다. 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미국은 특사를 파견하여 축하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1905년 을사조약 뒤부터 뒤틀어졌는데 당시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엘리스 루스벨트가 미국을 대표하여 대한제국에 방문했을 때 고종의 환대에도 없는 사람 취급하였고 고종의 아내였던 명성황후 무덤 앞의 말 조각상에서 앉아 사진을 찍는 무례함을 범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1910년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강제합병을 계기로 미국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된다.1948년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로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이래로 미국의 대량 원조를 통해 매우 광범위하게 발전하여 왔다. 미국은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휴전 이후에도 주한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에 의한 군사적 보호속에서 매우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제5공화국 때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도 있었고 2000년대 들어서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등으로 일부 반미 감정이 고조되기도 하였다.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문서 공개 이후 한동안 상당한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은 촛불 시위로 비화되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을 겪었다. 한편 이명박 정부가 출범된 이후 한미 관계가 상당히 강화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군사, 외교, 경제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양국은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양국 간에 역사 인식, 영토 등에 대한 갈등이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숭배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나 독도 문제, 동해 명칭 문제, 일본군 위안부도 민감한 문제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과 아베 신조 내각 당시에는 한일 셔틀외교가 중단되는 등 양국 관계가 멀어졌으나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일본 후쿠다 야스오·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출범과 한일 관계를 보다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관계가 개선과 악화를 반복하다가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취임하면서 한일 관계가 강화되었다. 2002년에는 양국이 공동 주관하여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이 불어 양국 간 교류가 많이 증진되었다. 그러나 역사·영토 문제 등 여러 부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강화함으로써 양국 관계도 점차 경직되어가고 있다.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적대 관계가 되었으며, 1992년까지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1992년 공식 수교하면서, 기존의 중화민국과 단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된 여러 문제가 있는 와중에도 양국은 외교 관계를 이루고 있다. 2016년 주한 미군의 배치 추진과 미・중 무역 갈등 문제 등 국제 사회에서의 충돌로 인하여 한중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러시아는 구 소비에트 연방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간의 갈등이었던 동・서 냉전으로 인해 대한민국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탈냉전 이후에 한소수교가 1990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와 경제, 문화, 우주기술협력, 군사(불곰사업) 등에서 밀접한 관계를 추진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녹둔도 문제를 포함해서 연해주 등 잠재된 영토 문제가 아직 남아있지만 남북분단으로 인해 가시화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위성인 나로호 발사도 러시아의 협조 하에 발사했다. 현재 12만 5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와 한국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아에로플로트 등 여러 항공사가 매일 운항하고 있다.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립으로 인해 일찍부터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으며 1990년대까지는 양적 위주의 성장을 추진했으나, 2000년대 들어 새로운 무기 기술의 개발과 발달로 인해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국군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다. 2020년 12월 기준 병력 규모는 현역이 약 555,000명, 대한민국 예비군은 약 3,100,000명이다. 세계에서 11번째로 탄도미사일을 독자 개발했다.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여군은 기갑, 포병, 잠수함 병과에는 진출할 수 없었으나 2014년 9월 창군이래 최초 여군 포병장교가 탄생하였고 기갑병과에도 여군이 진출함에 따라 다양한 병과에서 여군들이 활약하고 있다.대한민국 육군은 병력 약 520,000명, 전차 약 2,300대, 장갑차 약 2,500대, 견인포/자주포/다연장 로켓포 약 5,200문, 유도무기 30기, 헬기 600기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국방과학연구소는 전차 K2 전차를 개발했다. K-2 전차는 2014년 대한민국 육군에 정식으로 배치된다. K-21 전투장갑차는 2012년경 전력화하였고 복합형 소총인 K-11 소총을 운용하고 있다.2012년 1월 육군에는 현재 39개 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 해군 예하 해병대 2개 사단이 있다. 2020년까지 1군사령부와 3군사령부를 지상작전사령부로 통합하며, 5개의 지역군단과 2개의 기동군단으로 개편하고, 향토사단 자체는 존치하며, 동원사단은 4개로 줄이고 전 부대를 기계화부대로 편성한다. 병사들의 개인화기 및 개인장비, 피복을 개선시키는 중이다. 전투력 향상을 위해 고글+무릎보호대+장갑+방탄복+야간 야시장비+스코프+도트사이트+광학장비를 지급하고 보병장비, 개인장비, 장구류, 군장이 늘어나고 저격소총, 옵션장비 ,사격장, 1인당 교탄증가가 되었다. 소대장이 항공근접지원을 직접 유도할 수 있고 병사들은 무인 항공기를 수시로 띄울 수 있다. 시가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신속대응 훈련과 CQB 훈련과 시가전 훈련을 자주 진행 중이다. 실전 훈련처럼 진행한다. 현대전에 맞추기 위해 육군 전 부대 대대급 현대화가 진행 중이다. 저격수, 정찰 저격수들을 육군 전 부대에서 양성 중이다. 저격수 학교를 창설한다. 저격수 규범은 미국 저격수 규범과 똑같은 저격수 교범을 채택하였다.대한민국 공군의 장비는 F-15K 59대 KF-16 134대와 F-16C/D 35여대 F-4E 80대 KF-5E/F 와 F-5E 195대 T-103 러시아제 ���련기 IL-103 72대 KT-1 기본 훈련기 105대 KA-1 전선항공통제기/경공격기 20대 T-50 고등 훈련기 60대+98대 생산 확정 T-50B 10대를 보유 중이며 TA-50 전술입문기 22대를 운용 중이고 KF-16에 버금가는 다목적 전투기인 FA-50 60~120대를 도입 중에 있다. F-4E KF-5E/F 와 F-5E 등은 지속적으로 도태되고 있어서 F-5E KF-5E/F 는 FA-50 60대로 대체되고 F-4E는 F-35A로 대체되며 T-103 훈련기 72대 역시 기체 노후화로 한국항공우주산업이 개발한 KC-100 나라온으로 대체된다.수송기는 전략 전술 수송기인 C-130J-30 4대 C-130H 12대, CN-235-220M 18대가 있으며 VIP 수송용으로 대한항공에서 임차한 보잉 747-400 1대를 비롯해 보잉 737-300 1대, VCN-235 2대, VC-118 1대, BAe-748 2대가 있다. 정찰기로는 호커800기를 개조한 금강정찰기와 백두정찰기, RF-4C 18대, RKF-16 5대를 보유, 운용하고 있으며,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보잉 E-737 피스아이 4대를 운용 중이며 회전익 항공기 는 구조.탐색용인 HH-60 페이브호크, HH-47 치누크, 카모프 Ka-32가 있으며 병력 수송용인 벨 205, 212, 412, UH-60 블랙호크 등이 있다. 이외에도 VIP 수송용인 VH-92, VH-60, AS-362 '수퍼퓨마'가 있다. 또한 공군은 국산 헬기인 수리온을 2기 주문하였다.사병들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소화기 실탄 사격장 및 1인당 실탄사격 훈련의 내실화와 사병들의 개인 장비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공군 전력사업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인 한국형 전투기 사업인 KF-X 사업과 차기 대통령전용기 사업인 VC-X사업, 원격지원전자전기 사업, 스텔스 무인 전투기(UCAV)의 개발 및 사업을 진행 중이며 최근 KC-X 사업의 최종 후보로 에어버스 A330 MRTT가 선정, 4대 구매를 체결하였다.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8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 척 지원함정 20 척 대잠헬기 및 해상초계기 50 대를 보유하고 있고 차기 군함들을 비롯해 모든 군함들은 선체 전체에 광범위하게 스텔스 설계를 적용하고 레이다 반사율을 줄이기 위해 경사설계를 적용한다. 총 3개 함대와 4개 전단을 두고 있다.대한민국 해병대는 대한민국 해군 예하에 편성되어 있는 군으로서 국가 전략 기동군으로서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수행한다.대한민국 해군은 병력 약 69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척 지원함정 20척 헬기/해상초계기 약 50대 K1A1 전차와 K9 자주포 상륙돌격장갑차 등의 기갑 차량 상륙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초대 지휘관에 신현준 중령이 임명되고, 해군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창설되었다. 해군 예하의 국가 전략기동군으로서 상륙 작전을 주임무로 하며, 그 외 김포, 강화, 포항, 경주, 진해, 제주, 도서지역 등 방어, 상륙작전을 하고, 예비군 교육 및 훈련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2014년 기준으로, 2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보유하고 있고, 이외에도 연평도와 진해, 제주도 및 기타 여러 도서 지역들에도 해병 부대들을 주둔시키고 있다.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할 때 대한민국은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 체제를 채택하였다. 이를 1988년 헌법 개정에서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로 변경하였다.이승만 정부의 경제관료 양성으로 시작된 경제는 419 혁명으로 세워진 장면 정부가 기존에 양성된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경제 개발 계획이 준비되었으나 516 군사정변 발발로 실행되지 못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주도로 경제 개발 계획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경공업 육성을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했다.1973년 이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발전 정책으로 철강 전자 조선 산업 등이 크게 발달하며 수출을 증대 시키고 국가 경제를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 시켰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때에는 3저호황과 중화학공업 과잉 투자 조정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수준의 공업국가로 올라섰다. 1960~80년대 고속 경제 성장으로 한때 중화민국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로 불렸으며 1994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섰다.그러나 성장 촉진 정책으로 누적된 병폐는 1997년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사건을 겪으면서 한계를 노출하게 했고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정보통신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하고 세계적인 닷컴 버블 경제세 편승하여 2년 만에 상당부분 회복하고 경제위기를 해결했음을 선언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고용 환경을 낳은 고용 유연화에 따른 노동 불안정과 대량 해고 청년 실직자 문제 니트족 현상 등의 부작용이 함께 나타났다. 그 후 노무현 정부가 세계적인 거품 경제에 따른 활황 국면에서 꾸준한 경제 개혁을 통해 2007년까지 매년 백억 달러 이상의 경상흑자와 평균 4%대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명목 국민소득 2만 달러 실질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를 이루어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국제금융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2007년 골드만삭스는 대한민국이 2050년 브릭스+넥스트 일레븐+G7 1인당 명목 GDP가 90294 달러가 되어 91683달러인 미국에 이어 주요 경제국 중 2위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2015년 국제통화기금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PPP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은 3만 6601달러이며 이것은 세계 29위 수준이다.대한민국은 자본력이 부족한 환경에 따라 독특한 형태의 경제발전을 진행시켜 왔는데, 박정희 당시 계획경제체제를 시행, 수출을 통한 성장을 목적으로, 자본 및 기술적 기반이 약한 중소기업보다는 재벌기업이 주류인 대기업을 축으로 하는 기업경제구조를 세웠으며, 천연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가공무역을 핵심으로 삼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 수출과 수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며, 주요 무역 상대국은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일본, 중화민국, 독일, 영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이다.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을 비롯하여 1983년부터 세계 조선 1위를 지켜오고 있는 현대, 백색가전의 LG, 세계 철강 4위인 포스코 등의 여러 기업 집단을 가지고 있으며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 17개가 대한민국 기업이다.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상장기업에는 개인지배주주가 존재한다. 반면에 기업발전에 따른 외부자본조달로 지배주주의 지분율 하락이 불가피한 가운데 지배주주와 소수주주간 이해상충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규모기업집단의 경우 지배구조가 계열사간 피라미드 및 순환식 소유구조에 의해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는 현금권과 통제권 간의 상당한 괴리를 가져와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경영권 행사에 따른 사적 경영권 혜택이 과도하여 기업이 망하지 않는 한 경영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비효율적 산업구조는 대한민국 경제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 내의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자 기업들은 임금이 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에 진출해있는 대한민국 기업이 많으며,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도 많이 진출해 있다. 최근에 중앙유럽 국가들이 유럽 연합에 가입하여 관세가 철폐되면서 중앙유럽으로 진출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개성공단에 입주하는 기업도 늘어났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 도발로 인한 남북 관계 경색으로 가동이 전면 중단된 상태이다.대한민국의 가계부채는 1999년 ~ 2001년 급증, 2002년 ~ 2004년 감소, 다시 2005년 ~ 2007년까지 급증,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로 그 증가세가 지속되어 2011년 처음으로 가구당 가계부채가 5000만원을 넘어섰다. 이는 자산 증가보다 부채 증가가 더 빨라짐에 따라 빚을 갚을 능력이 악화됐기 때문이다.특히 소득이 적을수록 부채상환 능력이 크게 떨어졌는데, 2010년 소득 하위 20%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2009년 보다 68.2% 급증한 279.5%에 이르러 소득의 3배에 달하였다. 이는 소득이 적은 20, 30대 가구와 저소득층의 재무건전성 악화를 보여주고있다. 이는 저축은행들이 건설업체의 잇따른 부도로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이 부실해지면서 금리가 높은 가계대출 비중을 늘림과 더불어 전월세값을 포함한 물가의 급등과 교육비 지출에 따른 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축소된 가계부채 상환 능력에 대하여 이명박 정부는 고소득층의 가계 빚이 가계부채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빚을 갚을 능력이 양호하며 자산불평등도 외국에 비해 낮다는 것을 이유로 당장 한국 경제에 부���이 될 가능성이 낮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 30대와 저소득층의 가계부실이 본격화되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가계부채 대란'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정부의 부채와 공기업의 공공부분 부채는 2011년 3분기 말 한국은행이 파악한 것만 789조 3600억 원으로 1년 만에 9.2% 급증했으며 이중 공기업의 부채는 1년 만에 14.4%나 급증한 363조 8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공기업 부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정부가 보금자리 주택이나 4대강 공사 등 국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공사채 발행 등으로 마련한 결과로 보고있다.소득 양극화 지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6년 2.12%, 2008년 2.05%, 2010년 0.89%로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조금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9년 5.65%, 2010년 2.73%으로 계속 높게 나타났다. 공적연금 지출은 30개국 중 29위,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30개국 중 30위로 나타났다.경제중심도시는 서울및 광역시이며 행정도시는 세종특별자치시이다.1960년대까지의 대한민국의 주요 산업은 농업에 의존하였다. 1963년 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공업화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농업인구는 격감하여 1970년 1천4백42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44.7%였고 2010년 기준한국의 농업인구는 3백2만1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와 함께 농업인구의 고령화까지 진행되면서 나중에 식량위기가 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대한민국의 공업은 중급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산업들에 특화되었고 주요 산업으로는 조선 전자 자동차 반도체 등이 있다. 특히 조선 산업은 2008년 기준 세계 전체 점유율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전자 산업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있다. 자동차 생산력은 세계 5위이며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로봇 친환경 에너지 등의 미래형 산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 또한 늘리고 있다.반면 국가경제 발전수준에 비해 서비스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편이며 발달수준도 미흡한 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는 삼성 현대자동차와 같은 재벌 대기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한국 공업의 역사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대부터 제철 제련 공업이 발달하였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의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근대적인 공업 시설이 건립되었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유입되었다. 일본 자본의 유입에 맞서 국채 보상 운동이 자발적으로 확산되었고 1920년대에는 김성수는 자본을 투자하여 경성방직 경성직류 등 방직과 면 공업을 육성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 안재홍 김성수 등에 의해 물산 장려 운동이 진행되어 국산 공업품을 활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공업으로 일변화 된 한국의 공업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광복 이후에도 한국의 공업 수준은 미미했으나, 1960년대 이후 출범한 제3공화국 정권은 경제성장의 기반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60년대에는 수공업, 수제품 공업, 기술, 근로자 파견 위주로 진행되었고, 식료품과 담배, 섬유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수입 대체 산업이 발달하였다. 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 제조업, 수출 위주의 공업정책이 진행되었다. 1980년대 이르러 섬유, 의류 산업뿐 아니라 전자 제품, 건설,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대한민국의 골목 상권은 정부가 개입, 규제하지 않는 시장 경제를 채택하였고 군사정권 몰락 이후 이러한 시장 경제 체제가 대폭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기업형 슈퍼마켓, 빵집 등, 프랜차이즈와 대기업의 다양한 분야 시장 독과점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10년 동반성장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중소기업적합업종을 선정, 대통령이 직접 언급 하는 등 제재가 가해지고 있다. 이에 일부 대기업이 속속 사업에서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기업형 슈퍼마켓 기업은 중소 업체를 사들이는 등 여전히 많은 대기업은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대한민국에는 우측 통행을 하며, 자동차 운전석은 왼쪽에 있다. 4,000km에 달하는 31개의 고속도로 및 국도, 지방도 등의 도로가 있어 대한민국의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는 AH1 노선의 일부이며 국도 제7호선은 AH6 노선의 일부이다.전국적으로 버스의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1462만명이다.과거에는 현금과 함께 회수권과 토큰을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지역이 대부분이며 현금도 대부분 사용 가능하나 환승 혜택이 없다. 또한 교통카드를 통한 환승 할인 혜택 등으로 사용자를 유도하는 중이다. 또한 이를 통한 도시철도와의 연계를 목적으로 수도권의 버스 노선 체계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되었고 수도권 통합요금제가 수립되게 되었다. 현재 버스 체계는 크게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로 나눌수 있으며 시내버스 특정 지역의 면허에 귀속된다.또한 비교적 작은 지역에서의 운행을 위한 마을버스도 부산 서울 경기도 등에서 운행되는 중이다. 시내버스의 경우 시계를 넘어서면 시계 추가 요금이 부과되며 서울 경기도 인천의 시내버스는 거리에 따른 추가 요금이 부과된다. 시외버스는 시외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정거장에서 주로 승하차가 이루어지며 대부분 교통카드를 사용할 수 없지만 가끔씩 사용 가능한 노선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버스 회사 중에서는 KD그룹이 가장 규모가 크며 대한민국내 여객용 버스의 10%를 소유하고 있으며 경기도 노선의 절반을 관리한다.또한 현재 자가용 이용자들을 대중교통으로 유도하기 위해 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장애인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자치 단체들이 생기고 있으며 수도권의 도심 지역의 혼란이 극심한 대한민국의 상황에 걸맞은 굴절버스를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 도입하였으나 대부분 비용 문제 등으로 취소되었다.대한민국의 철도 및 광역전철의 총 연장 길이는 3,000km에 달한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철도시설은 1963년 9월 1일 교통부 산하에 철도청을 신설하여 이때부터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였으나 2005년에는 기업체로 전환하여, 공기업의 형태인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국유 철도를 관리하고 있다. 또 2016년 12월에는 한국철도공사가 자본을 출자한 민간기업 SR에서 운행하는 수서고속철도가 개통되며 철도경쟁시대가 도래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철도선에는 경부선, 호남선, 충북선, 경전선, 장항선, 전라선, 경춘선, 중앙선 등이 있다. 특히 경의선 철도는 평부선·평의선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연결을 추진하고 있다.대한민국의 도시철도는 수도권과 동남권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광주광역시 등에서 운행되고 있다. 시내를 운행하는 도시철도를 일컬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974년 8월 15일 처음으로 개통된 수도권 지역은 1~9호선을 비롯하여 총 23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1985년 개통된 두 번째로 큰 부산 도시철도는 총 길이가 100km를 상회하며 6개 노선이 운행된다. 이 외에도 대구에는 3개 노선 광주와 대전에는 1개 노선이 운영되는 등 일부 광역시를 중심으로 도시철도가 마련되었다. 요금은 지자체마다 다르나 대부분의 노선에서 복지 정책으로 65세 이상의 노인과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무임으로 승차할 수 있다.대한민국의 도시철도는 대체로 운행 시간이 정확하고 위생환경과 전반적인 이용이 쾌적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나 실내먼지 오염농도가 높고 출퇴근 시간에 사용자가 많은 일부 역에서 혼란이 빚어지는 등 개선점도 지적된다. 또한 화재 확산 방지를 위하여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이후 열차의 내부 자재를 불연성 재질로 제작하고 있으며 방독면이나 소화기 등도 역사와 차내에 비치되어 있다. 선로 추락 사고나 자살 등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으로 전국의 모든 도시철도 역에 승강장 안전문이 설치되었다.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선 공항이 대한민국 내외의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민영으로 운항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1988년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최근에는 진에어 에어부산 등 여러 저가항공사도 운행되고 있다.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 화물선 521만 4636톤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2010년 10월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주민등록상 5000만 명을 돌파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자동으로 건강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되며 국가가 피부양자로 지정된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은 무상의무교육이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한다.국민의 대부분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민족이다. 고대부터 중국 대륙 등지로부터의 인구 유입도 잦았으나 그들도 같은 민족으로 융화되었다. 다만 1990년대 이후 중국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국가에서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다민족적인 요소 또한 증가하고 있다. 2018년 통계청 기준 인구는 총 51629512명이다. 민족구성을 보면 한국인 49977951명 중국인 101만2000명, 베트남인 169,177명(0.33%), 태국인 151,104명(0.3%), 미국인 66,003명(0.13%), 우즈베키스탄인 57,998명(0.11%), 필리핀인 47,532명(0.09%), 캄보디아인 45,144명(0.087%), 인도네시아인 38,890명(0.075%), 네팔인 37,346명(0.072%), 몽골인 32,704명(0.063%), 미얀마인 25,874명(0.05%), 카자흐스탄인 25,850명(0.05%), 스리랑카인 24,727명(0.047%), 일본인 18,801명(0.036%), 러시아인 18,615명(0.036%), 캐나다인 13,602명(0.026%), 방글라데시인 13,555명(0.026%), 파키스탄인 10,550명(0.02%) 등이 있다.2016년 8월 기준 전체 대한민국의 임금노동자는 19627000명으로 그 가운데 2664000명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으로 추산됐다고 통계청은 전했다.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6년 전국 노조 조직현황'에 따르면 국내 전체 노조 조직률은 전년보다 0.1%포인트 오른 10.3%로 집계됐다. 노조 조합원 수는 196만6681명으로 전년보다 2만8136명 증가했다. 이 수치는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며 통계에서 빠진 수치이다.대한민국의 노동조합 연맹체로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이 있다.대한민국에서는 수구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계에서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등이 존재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홍석천 하리수 이시연 등의 등장 이전에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해도 주변에서 따돌림 학교 폭력에 노출되거나 취업 등에 불이익 등을 받아왔다. 성소수자들은 1992년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 성소수자 단체 초동회가 처음 결성되고 1년 뒤에는 남자 동성애자인 게이 트랜스젠더 모임인 친구사이와 레즈비언 단체인 끼리끼리로 분리되었다. 1997년에는 대학생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이 결성되고 이듬해 동성애자인권연대로 명칭 변경 2015년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로 명칭 변경하였다.1998년 5월 17일에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 오세인이 1997년 자신이 게이임을 가족에게 밝혔다가 추방당한 후, 활동하던 단체 사무실에서 자살하였고, 2003년 4월 26일에는 동성애자를 악마, 사탄 등으로 비판하는 개신교계의 공격과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 단어, 음란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 등 성소수자 혐오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는 시인 겸 작가 육우당이 끝내 자살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2000년 이후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한 홍석천을 시작으로 트랜스젠더인 하리수 이시연 등의 공개적 활동 등으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맹목적 거부감이 사회적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부 단체와 일부 사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성소수자들의 활동을 지지 성소수자 문화제 개최 등의 행사가 본격 등장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내 대표적인 성소수자 인권단체 연맹체로는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이 있다.한편 보수 기독교단체에서 는 개정안을 발의하며 논란을 낳았다.대한민국의 기득권층에서의 여성의 활약이 미미하다고 분석되는데 2017년 이코노미스트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의 고위직 여성 비율은 10.5% 기업 이사회 내 여성 임원 비율은 2.4%로 나타나 OECD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 국회 �� 여성 비율은 17%로 이는 OECD 평균보다 낮은 수치다. 근 십여 년간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이 외국인 임원과 여성 관리자를 뽑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몇 년도 버티지 못했다. 2010년 SK의 첫 외국인 여성 임원이었던 린다 마이어스는 "한국 기업은 다양성 문제에서 너무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리다"고 평가했다.중화권, 일본, 동남아시아, 아랍, 독립국가연합 등을 비롯한 세계 여러지역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한국인이 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이주가정"이라고 부른다. 특히 농촌 지역 기준 결혼 등록건수의 50%에 해당하는 1만여 건 정도가 국제결혼으로 등록되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 남아선호사상이 잔존하였으며, 1970년대의 박정희 정부의 "둘만 낳자"는 가족 계획과 1980년대 전두환 정부의 "하나 낳아 알뜰살뜰" 등의 가족 계획으로 여자 아이에 대한 낙태 현상 등으로 1970년~1990년대 초반 출생자들 사이에서는 남녀 간의 성 비율이 깨져 여성에 비교하여 남성의 수가 월등히 많은 현상이 도래하였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농촌 기피 현상으로 일부 농촌 지역 노총각들이 결혼, 연애가 어려운 것에 비관하여 자살하는 일이 증가하였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외국에서 배우자를 찾는 농촌 총각들이 증가하였다.이주노동자는 1990년대 이후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1970년대 이후 고졸이던 평균 학력이 1995년 고교평준화와 학력고사 등의 폐지 이후 대졸 내지는 초대졸로 변화하였다. 그에 따라 청년층이 "3D 업종" 또는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3D 업종과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종 외에도 중소기업과 일부 공장 등에 대한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각지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취업 비자를 받고 입국한 산업연수생과 불법적으로 들어온 불법 체류자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이주노동자라 하면 이들 둘을 통틀어 가리킨다. 201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이주노동자 수는 55만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일각에서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의 비율은 10% 대를 넘지 않고 있다.대한민국 내 난민의 대부분은 경제적 곤란 등의 이유로 북측에서 나온 탈북자로 정부에서는 이들을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한 상징적인 영토 규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영토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의 집단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영역으로 들어온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면서 국적 부여 생활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정치적 난민을 인정하기 시작하여 아프리카나 아랍권의 일부 국가로부터 정치적 혹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입국한 이들을 인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수는 일반적인 선진국에 비해 많지 않다. 2017년에는 양성애자 여성이 난민 인정을 신청하여 성 정체성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로 인해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진 사례가 있었다.한편 2018년 500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해 난민 인정 신청을 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찬반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2012년 6월 23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통계청은 총인구가 50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세계 194개국 중 26위이다. 광복 직후에는 해외 동포들이 귀국하고 6.25전쟁 때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들이 많이 월남했는데 광복 직후에는 약 180만 명 6.25전쟁에 약 100만 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1960년대 이후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하게 되는 도시화 현상이 일어났으나 최근에는 쾌적한 생활을 위한 역도시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1970년 이전까지 5백여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1988년에 1천만 명을 돌파하였다. 이후 서울의 인구 증가는 정체 상태에 있으나 인근 경기도의 인구가 급증하여 2007년 10월 말 수도권 거주 인구는 2390만 3785명으로 전국 인구의 48.6%를 차지하였다. 인구 밀도는 503명/km2이다.1990년대 들어 감소 경향을 보이던 서울의 인구는 2000년대 들어 소폭 증가하기 시작, 2009년에는 1046만 명으로 6년 연속 증가했다.인구 유입 등으로 수도권 전체 인구는 증가하는 반면 부산은 지속적 감소로 1995년 381만 명에서 2013년 356만 명으로 급감했으나 대신 인근 경상남도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대구 역시 253만 ��에서 25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인천은 약 298만 명, 대전 155만 명, 광주 148만명 울산 117만 명 등이다.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81.5%로, 전 세계적으로 매우 도시화된 국가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2020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인구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하여, 2045년에는 인구 5천만 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8년 기준으로 합계출산율은 0.98명으로 세계 최초의 출산율 0명대 국가가 되어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어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이 의무교육이다. 고등학교는 3년 과정이며, 일반계·전문계·특수 목적 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있다. 고등교육에는 4~6년제 대학교와 2~3년제 전문대학이 있다.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교육을 받는 정규학교 재학자는 1089만 명(24.7%) 졸업자는 2987만(67.8%) 중퇴자는 96만 명(2.2%)이고 졸업자는 초등학교 및 중학교 졸업자는 750만 명(24.5%) 고등학교 졸업자는 1263만 명 (41.2%) 대학 졸업 이상은 1050만 명(34.3%)을 나타내는데 이는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높은 교육수준은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에 의해서 기인된 현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현재에는 오히려 학력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청년실업의 증가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대한민국은 대학교 진학률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사람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게 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혹은 고등학교 졸업에 상응하는 학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치를 수 있다. 이 외에도 각 대학에서는 수시입학전형, 특별전형 등을 통하여 개별 대학의 요구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은 사교육 시장이 크게 발달되어 있어,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각 가정마다 월평균 70여만원을 웃돌고 있다.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우파와 좌파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한다.2000년대 들어서 이러한 갈등은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여론에 기반한 전국적인 규모의 촛불 집회로 종종 표출되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대규모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는 이념 진영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촛불 집회에 대하여 좌파 진영은 시민들의 민주 의식 신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인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냈다는 점, 인터넷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에 다가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우파 진영은 선동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왜곡과 특정 정파 이해집단의 욕구를 위한 창구로 활용된다는 점을 들어 사회 혼란,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평가한다.또한 한국의 노사갈등에 대하여 상당수의 국민들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국제경영개발원에 의하면 한국의 노사관계는 57개국 중 56위로 선정되어 시급한 문제로 꼽히고 있다.이념 대립의 연장선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방식에서 국가주도의 사회운영과 성장을 주장하는 국가주의세력과 개인의 자유에 따른 사회 운영을 주장하는 동시에 분배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 간 논리의 충돌도 있다. 이는 서방세계와 같은 좌우 대립의 이념지형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데서 기인한 사회 갈등인데 그 원인으로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반공반북을 중요시하여 좌파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환경이 장기간 지속되었고 1980년대 학생노동운동 진영에 의해 만들어진 좌우 대립의 이념지형도 1990년대 초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사라져 서방세계와 같은 이념지형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대한민국의 갈등 지수는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조사한 결과 OECD 회원국 중 4위에 해당하였으며, 이 같이 높은 사회 갈등에 따른 비용으로 국내총생산의 27%인 약 300조원을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대한민국의 소통 지수는 2011년 아시아포럼21이 조사한 결과 100점 만점 중 이명박 정부의 소통 지수는 45.8점, 한나라당의 소통 지수는 42.6점,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간 소통 지수는 36.2점으로 모두 50점 이하인 걸로 나타났다.인종 차별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 유독 심하며, 백인은 차별이 거의 없으나, 흑인 및 황인은 오히려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국어를 모르는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도 차별 대우를 하는 경우가 있으��, 유럽 같은 경우에는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경쟁 심리도 심각하다. 대한민국은 어려서부터 성적 경쟁 위주의 교육과 문화 속에서 성장하게 함으로써 경쟁과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이에 따라 남과 나를 비교하며 오직 높은 곳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성인이 되어서 학력 위주 경쟁 스펙 위주 경쟁 실적 위주 경쟁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으로 획일화된다.SBS와 한국갤럽이 2011년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우리 사회의 경쟁 수준은 평균 76점으로 10년 전보다 20점 가까이 높아져 경쟁이 계속 가속화됨을 보여주었으며, 국민 10명 중 8명이 "과도한 경쟁에 부담을 느낀다"라고 대답하여 상당수가 부담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경쟁은 모두를 스트레스 속에 놓이게 하며 장기간 스트레스는 매우 예민해지게 만들고 분노 불면증 우울증 등의 신체정신적 증상을 동반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담당하는 정신과 진료와 심리 상담 치료의 횟수가 늘어나고 있으나 여전히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불리는 등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어 상당수가 기피하는 실정이다. 또 경쟁은 다수의 패배자를 생산하게 되는데 이는 다수의 자존감 저하와 수치심 분노심 상승의 원인이 되고 있다.결국 사회 전반의 동질성 추구와 이질성 거부 심리 경쟁 심리는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외국인 차별 왕따 학교 폭력 인터넷 악플 등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피해로 정신 이상자의 수를 늘리거나 그런 정신 이상자를 방치하게 되어 자살자를 늘리거나 사회에 불만을 품고 불특정 다수에게 행하는 묻지마범죄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이에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1년 10월 라는 보고서를 통해 학생의 성적에 따른 차별과 경쟁적인 교육체제에 대해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하였다.학력 차별에 대한 대응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라디오 연설에서 를 강조하였으며, 고용노동부가 고등학교 직업 교육에 지원을 강화하는 등 능력 중심의 열린 고용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백혈병이 생겨 산업 재해로 인정 받는 학생도 있었고, 음료공장 실습중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지하철 청소 실습 중 지하철에 치어 숨지는 사고 등으로 고등학교 현장 실습이 노동력 착취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2011년 정부에 의해 명칭을 "정신과"에서 "정신건강의학과"로 변경하는 등 다양한 진료를 하는 분야임을 알리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남녀 심리치료범죄 심리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 주제로 사용하거나 교수가 직접 매체로 나와 강의를 하는 등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이러한 결과로 과거 대학교의 비인기 학과였던 '심리학과'가 상위 경쟁률을 기록하고, 관련 주제의 책이 대거 출간되고,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 중 게임이 29.9%로 가장 높았다. 연령별 연령별로는 30대 미만의 경우 역시 게임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30대 이상 연령층은 영화와 TV 시청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2013년 4.12편으로 미국의 3.88편을 제치고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자신의 여가생활에 대한 불만족 이유들로는 이라는 이유가 45.6%로 나타났다.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고대의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 등 이웃 나라에서 들어온 외래 문화와 한국 고유의 독자적 문화와 융합하여 발전했다.관습적인 공용어이자 법적인 공용어는 한국어로 그 계통이 학계에서 확증되지 않은 고립된 언어이지만 많은 학자들이 알타이어족과 연관성 있음을 주장한 바 있고 특히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대왕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으로 1446년 반포하였다. 한글은 각 자음과 모음이 하나의 기호로 표시되고 그 자음과 모음을 모아써서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이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하늘��)지(땅ㅡ)인(사람ㅣ)을 나타내는 각 부호의 조합으로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창제 원리가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써왔던 한자와 이를 당시의 한국인이 쓰던 입말에 맞는 한자의 소리만 따서 문자로 표기한 향찰 구결 이두 등이 한국어 기록 수단이었다.한자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양반층 및 관공서에서 계속 써왔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글의 이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한글 대신 한자로 직접 표기하기도 한다. 1962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되면서 표기문자의 주류로 등장했고 현재 한자 표기는 중의적 표현을 막기 위해 부수적으로 쓰고 있다.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의무 교육으로 가르치고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제2외국어로는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때 수험생이 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도 있다. 특히 일본어와 중국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 제2외국어이기도 하다.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대한민국의 일간 신문은 크게 전국지와 지방지로 나뉜다. 전국지는 대한민국 전국을 대상으로 발행되며, 지방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 지면을 할애한다.지방지는 특정 지역에 연고를 둔 신문으로 전국적인 뉴스를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해당 지역의 뉴스를 다룬다. 전국지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의 보수적인 신문 이른바 으로 분류되고 있다. 2008년 한국언론재단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시장점유율은 조선일보 11.9% 중앙일보 9.1% 동아일보 6.6% 경향신문 2.7% 한겨레신문 1.7% 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지들도 있으며 크게 경제에 관련된 소식을 다루는 경제지와 스포츠와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스포츠지를 들 수 있다. 한편 주요 도시의 공공시설에서 출근 시간대에 무료로 배포되는 무가지가 존재하며 인터넷 매체를 통한 인터넷 신문도 존재한다. 2008년 기준 대한민국 일간지의 수는 약 288종 주간지의 수는 약 2896종 월간지의 수는 약 3293종 격월간지의 수는 약 459종 계간지의 수는 약 981종 년 2회의 수는 약 325종 인터넷 신문의 수는 약 1040종 정도가 있다.방송의 경우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 FM라디오 방송 AM라디오 방송 단파 라디오 방송 케이블 방송 디지털위성방송 지상파 DMB 방송 등이 있다. 현재 전국 단위 지상파 방송으로 국공영 방송인 한국방송공사와 준공영방송인 문화방송이 있다. 지역 단위 지상파 민영 방송으로는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을 중심으로 한 계열과 서울지역의 지역민영방송인 SBS를 중심으로 한 SBS 네트워크 계열이 있으며 그외 독자적인 지방 민영방송인 경인지역의 경인TV가 있다. 그외 한국교육방송공사법에 따른 공영방송인 한국교육방송공사이 지상파 방송으로 있다. 종합편성채널 4사로는와 보도 채널인 연합뉴스TV와 YTN 등 2개의 보도 채널이 존재하며 케이블TV 최대 PP사업자인 CJ E&M과 티캐스트도 있다.라디오 방송의 경우 지상파 방송사인 KBS MBC SBS EBS가 점유하는 주파수와 기타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불교방송 평화방송 원음방송 등 종교방송의 주파수 교통안내 전문 방송인 교통방송 국악 전문의 국악방송 그리고 국방홍보 목적의 국군방송 등의 여러 방송사가 존재한다.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이 연결된 나라이며, 세계 최고 속도의 인터넷 속도를 보유하고 있다. 높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인터넷 이용률을 보이는 대한민국은 2000년 초중반 인터넷 신문을 표방한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 신문과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언론 매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인터넷 언론 매체들은 인터넷 매체 특유의 신속성과 높은 접근성 등을 강점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론 형성에 상당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단순 뉴스 전달자에 불과했던 포털사이트가 하나의 언론세력으로 성장하는 변화를 보임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인터넷 신문사, 포털사이트를 언론 기관으로 보고 법적 규제를 마련했다.대한민국에는 고대로부터의 전통적인 토착신앙으로서 무교이 있��.불교와 유교는 오래전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었으며, 불교는 5세기부터 14세기 말(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 이르는 약 1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융성하여 많은 사찰과 문화유산을 남기고 현재 단일 종교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다. 14세기 말 조선에서는 유교가 국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유교를 학문과 사상, 가치관 그리고 철학으로서 배우는 사람은 있으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유교는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의 풍습이나 습관, 습성, 가치관, 사상, 생활 방식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기독교의 경우 천주교는 조선 후기에 이승훈 등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교세가 확장되자 병인박해, 신유박해 등 대규모 박해 사건이 일어난 일 때문에 프랑스의 병인양요가 일어난 계기가 되어 조선 정부의 탄압이 거세졌다. 당시의 순교자 중 103명이 천주교회에서 시성되어 성인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학교와 개신교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 시기에 감리교, 장로회 등의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선교사가 파송됨으로써 전파되었고 양적인 성장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는 비록 짧으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종교활동 및 선교가 활발하다. 현재 성공회, 천주교와 정교회, 개신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는 전 종교 중에서 가장 많다.그 밖에 천도교, 대종교, 원불교, 증산도, 통일교 등 여러 신흥 종교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한국에서 창시되어 현재까지 신봉되고 있다.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전통 민요로는 아리랑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지방마다 다른 민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많은 가수들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권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K-POP 가수로는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비스트 티아라 인피니트 방탄소년단 핑클 등이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싸이의 로 빌보드 차트 5주 연속 1위를 기록하였다.한국 미술은 약 기원전 7천여 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조선 시기에는 제의를 위해 만들어진 비파형 동검 동경 방울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을 위한 예술이 등장하였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 백제의 금동대향로 신라의 금관이 대표적이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도자기의 일종인 고려 청자와 먹으로 그리는 문인화가 발달했다. 조선 시대 때부터 양반 사대부들을 성리학에 기반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들은 문인화와 백자를 선호하였다. 이들 문화는 다분히 사대주의적이었으나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원들이 나타나 특색 있는 미술을 만들었다. 동시에 조선시대에는 서민적인 미술인 민화가 발달했다.그 후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서양 고전 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이 도입되었고, 해방 이후 미국, 프랑스,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유학생들이 현대 미술을 시도하였다. 현대 한국 미술은 서양적 기술과 재료를 바탕으로 한 혼합된 서양화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서예, 동양화와 같은 전통미술 역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백남준은 독창적인 비디오 아트를 선보여 한국 출신 작가 중 가장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순수미술 분야는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건축, 그래픽디자인, 산업디자인, 게임 같은 상업미술 분야에서는 점차 주목받고 있다.한국의 스포츠는 고대부터 무술에 근거한 체육 활동이 발달했으며, 특히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택되기도 하였다. 태권도 이외에도 한국 전통 무술인 궁술, 택견, 씨름이 있다.대한민국은 1948년 하계 올림픽부터 올림픽에 참가했다. 또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였으며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여 종합 4위를 기록하였다.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강세를 보이는 종목으로는 양궁 사격 탁구 배드민턴 쇼트트랙 핸드볼 유도 태권도 역도가 있으며 최근 20년간 하계 올림픽의 경우 시드니 올림픽을 제외하면 메달 종합 10위 이내의 성적을 올렸다. 특히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종합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동계 올림픽의 경우 2018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5위를 기록하며 최고 기록을 세웠다.대한민국은 또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2002년 아시안 게임 2014년 아시안 게임등을 개최했으며 종합 1위는 1995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200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차지한 적이 있다.실제로 즐겨하는 생활스포츠 그리고 국가대표팀 경기와 프로 경기 포함 TV로 가장 즐겨보는 스포츠 등 각종 부분에서는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로 선정되고 있으며 축구 야구 농구 배구 e스포츠 바둑의 6개의 종목이 프로 리그를 갖추고 있다. 프로 리그에서 인기 종목으로는 야구와 축구 등이 꼽히며 한국의 발전에 밑거름에 이어 근래에는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 축구는 2002년 FIFA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며 대회 4위에 오른 적이 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원정 16강에 성공하였으며 2018년 대회까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2012년 하계 올림픽 축구에서는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야구는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우승의 경력이 있다.1990년대 말 게임 및 전자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e스포츠는 2001년 창립 후 선수 관리 경기 규칙 대회 방식이 체계화 되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대중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았다.2004년부터 파트 3 경마국으로 지정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의 서러브레드 경주마 생산은 1000여 마리였다. 경기도 과천시, 경상남도 김해시와 부산광역시 강서구, 제주도에 경마공원이 있고 32개의 KRA 플라자가 있다.한편 대한민국이 개최했거나 개최 예정인 스포츠 대회는 다음과 같다.한류(韓流, Korean wave)는 대한민국의 대중문화가 주로 아시아를 중심으로 외국에서 대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1997년 무렵부터, 문화 수출국을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책을 배경으로, 2000년 전후부터 대한민국 드라마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방송되었다.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에서도 한국의 대중문화가 널리 유입되어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애국가는 대한민국의 국가이다. 1919년 안창호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스코틀랜드 민요인 〈작별〉에 삽입해서 부르기 시작하다가 1935년 한국의 작곡가 안익태가 지은 에 가사를 삽입해서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가사의 작사자는 윤치호 설, 안창호 설, 윤치호와 최병헌 합작설 등이 있다. 윤치호의 작사설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애국가를 바꾸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의 변호로 계속 애국가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의 정부 수립 이후 국가로 사용되어 왔으며, 2010년 국민의례 규정에서 국민의례시 애국가를 부르거나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대 초에 쓰여졌다. 작사자는 크게 윤치호라는 설과 안창호라는 설 두 가지가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미상이다. 작사자 윤치호 설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가사를 1907년에 써서 후에 그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한편 안창호가 썼다는 주장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08년에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에 수록된 것을 비롯한 많은 일제 강점기의 애국가 출판물은 윤치호를 작사자로 돌리고 있는 등 윤치호 설에는 증거가 많은 반면 안창호 설에는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은 윤치호가 대한민국의 애국가 가사의 일부를 썼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은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그밖에 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윤치호가 지은 노래 중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고���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안창호가 다시 고쳤다는 것이다.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독립운동가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 안도산전서 >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 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였으나 1919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 이라는 것이다.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1896)와 김인식의 (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국가의 원작자로는 윤치호 설이 유력하다. 한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가곡인 〈올드 랭 사인)〉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가 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하여 1936년 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6년 10월호에 애국가 악보 광고가 붙기도 하였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1942년 뉴욕한인교회 이름으로 출판되었다.애국가는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전해졌고 국가로 채택되었으나 한반도에는 전해지지 못했다. 다만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을 매일 방송하였다.한반도의 독립 이후 새 애국가의 악보가 전해졌고 이후 1948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의 사실상의 국가가 되었다. 애국가의 악보는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대한민국의 성문법에서는 국가를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법령상 규정되어 있는 바는 없으나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되어 있어 국가적인 행사 따위에서 연주 또는 가창된다.라디오 방송은 해방 이후에는 1945년 9월 9일(사실상 1948년 정부 수립)부터,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 5월부터 1959년 2월까지, 1961년 12월 31일 이후부터 방송 시작맨트와 종료맨트(국명 고지)을 통해 애국가를 매일 방송하고 있다.1980년 12월 언론통폐합 이후 애국가는 KBS에서 제작한 사장조 애국가가 사용되어 현행 1995년 행정안전부의 KBS 교향악단 공식음원 배포이후에도 2000년대 후반까지 주로 사용되었다.이후 1990년대들어 SBS가 개국한 이후에는 1993년부터 선명회 합창단이 부른 애국가 사용을 하기 시작하였고 EBS도 마찬가지로 1993년에 제작한 자체 애국가 사용을 한적이 있었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SBS가 제작한 국립합창단과 선명회합창단이 부른 방송 애국가가 2009년 12월 31일까지 사용되어 이후 2010년 1월 1일에 제작한 과천시립예술단이 부른 애국가로 바뀌었고 같은해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KBS 교향악단이 배포한 YBM 서울음반의 애국가를 통해 제작 배포되어 현재까지도 행정안전부의 공식음원으로 지정되어 이후 모든 방송국에 확대 편성되었지만 2005년 저작권 기증이후에도 저작인접권으로 인해 국민의례용도로 제한적인 사용이 가능했었다. 그리고 2018년 12월 18일에 박인영이 작곡한 애국가를 편곡하였으며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서울시합창단이 공동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제작 배포하였다. 그리고 새 편곡음원 애국가는 국민의례와 더불어 상업적으로 자유로운 사용이 가능한 편곡음원이다. 2019년 3월에 최초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SBS가 처음으로 사용을 시작했으며 9월 이후에 기독교방송 가톨릭평화방송 TBS 시민의 방송으로 확대되었다. 2020년 들어 1월에 한국교통방송 3월에는 마포공동체라디오 5월에는 EBS와 YTN 국회방송이 8월 19일에 금강공동체라디오로 확대 편성되었다.2020년이후 모든 국경일과 국가기념일 기념식 실황 중계의 애국가 제창 및 연주 영상으로 나온다.간혹 2020년 현충일 및 6.10 민주항쟁 기념식, 2021년 제102주년 삼일절 기념식, 현충일 기념식 한정으로, 박인영이 편곡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제작 · 배포한 애국가를 사용하였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 연주를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홈 경기는 평양이 아닌 중국에서 치러졌었다. 다만 2013년 평양에서 열린 아시안컵 및 아시아 클럽 대항 역도선수권대회에서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 연주가 허용되었다.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초대된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서울에서 받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음악제를 추진한 안익태를 상대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면서 애국가의 가락이 도브리치 시의 시가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 많이 닮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일어날 것입니다"(If Bulgarian singers came to Korea and sang "O Dobrujanski Krai", Korean audiences would stand up!) 라고 발언했다고 한다.다만 두 곡은 첫소절이 서로 비슷하지만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약박으로 시작하는 데 비해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며, 전체적으로 가락의 분위기가 다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년이고, 그가 처음으로 유럽에 간 것은 이듬해인 1936년이었기 때문에 그가 불가리아 민요를 접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니콜로프의 논리는 1966년 안익태의 전기인 김경래의 에서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유학시절 무려 40여 개국의 국가를 수집했다. 또한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삼았다"는 증언에 맞지 않는다고 분석되기도 한다.1976년 이유선은 그의 책 에서 위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며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독립국가이니만큼 하루 속히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다”고 썼다. 이에 안익태기념사업회 측은 반론자료와 함께 정부 각 부처에 진정서를 보냈다. 문화공보부와 국회사무처는 애국가가 30년 동안 국가 역할을 한 점으로 볼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발표했다.과거에는 애국가의 저작권이 국가에 귀속되지 않고 안익태의 유족이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1992년부터 이에 따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신탁을 통해 저작권료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2003년에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는 프로축구단 경기에서 애국가를 무단으로 사용한 두 구단을 고소하였으며, 이에 따라 논란이 불거졌다.이후 애국가의 저작권을 국가에서 사들이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며, 결국 2005년 3월 16일 안익태의 유족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저작권을 기증함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애국가의 작사자로 유력히 추정되는 윤치호가 말년에 일본 제국의 관료로 일했다는 점이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 때 수감을 당한 적이 있는 근대 개화 사상을 전파한 지식인으로서 일제 초기에는 독립 운동가였지만, 105인 사건 후 전향하면서 30여년을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또한 작곡가인 안익태도 생전에 친일 활동을 했다 하여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한다.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개사하였다는 논란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도 돌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였다고 전해진다.또한 곡의 음악성에 관하여, 그 선율 자체가 처음에 못갖춘마디처럼 들려, 이로 인해 뒷부분의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YB가 편곡한 애국가에서는 첫마디만 못갖춘마디로 바뀌어 있다.1977년 한국음악협회의 회장 조상현은 애국가의 표절 의혹과 함께 가사와 선율의 불일치 소극적인 내용의 가사 등의 이유를 들어 1월 26일 총회에서 새 국가를 만들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 다음 통과되면 이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발표했다. 하지만 총회에서 새 국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국가를 새로 제정하려고 한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정부는 앞으로 국가를 새로 만들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2019년 애국가의 친일성 문제와 안익태의 친일 및 친나치 행적이 지적되면서 청와대 국민청원에 국가 교체 청원이 나와도 있다. +노벨 물리학상은 6개 분야의 노벨상 중 하나로 1년에 한 번 스웨덴 왕립 과학원에 의해 수여된다.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은 1901년 엑스선을 발견한 독일의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에게 수여되었다. 이 상은 노벨 재단이 주관하며 이 상을 수상하는 것은 물리학계에서 최고의 영예로 꼽힌다. 노벨 물리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에 스톡홀름에서 수여된다. 2007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프랑스의 알베르 페르와 독일의 페터 그륀베르크가 거대 자기저항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공동 수상하였고 상금인 1천만 스웨덴 크로나를 나누어 가졌다.노벨 물리학상은 사람들이 그 과학자의 업적의 중요성을 알기까지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다른 한 편으로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의 경우 그 이론은 이미 1930년에 이미 발표하였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50여년이 지나서야 상을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201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피터 힉스와 프랑수아 앙글레르의 경우 그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게 되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49년 뒤 그의 업적이 사실로 확인되어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이론과 발견이 사람들에게 중요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론이나 발견을 발표한 과학자가 이미 죽어버렸기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안익태는 대한민국 태생의 스페인의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는 산남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초반에는 독립운동가로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중반부터는 당시 일본과 친밀감이 있던 독일로 넘어가 만주국 건국10주년 기념 음악을 만들고, 음악회를 지휘하였다. 1941년에는 일본의 궁중음악인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하였다.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1921년에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와 커티스 음악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이때 파울 힌데미트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안 에키타이( 서양식 이름 에키타이 안)라는 일본어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로 친일 행적을 시작했다는 주장이 광복회 일부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안익태 후손은 정책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조선인이 일본식 이름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다.안익태는 1937년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1941년부터 1943년까지 주베를린 만주국 대사관 공무원인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살았다. 안익태가 작곡한 의 가사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인 일본 제국·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3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사의 일부는 에하라가 썼다고 한다. 에하라는 물밑에서 독일 내의 일본 첩보활동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독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안익태 본인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1930년대 후반에 만났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베를린에 머물렀던 1942년에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독일의 우방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1946년에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1962-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2000년에는 음악연속간행물 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지휘에 대한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에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어 논란이 일었다. 안익태의 명단 포함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고 해명하였다.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이었고 고려의 남경이었으며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이다. 중앙으로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불암산 인릉산 청계산 아차산 등의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서울의 면적은 605.2 km2로 대한민국 면적의 0.6%이고 인구는 약 950만 명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이며 25개의 자치구가 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등을 개최하였다. 2018년 서울의 지역내총생산은 422조원이었다."서울" 어원에 관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도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 원래 의미에 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 신라까지 포함하여 "설", 즉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에 관한 정확한 발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게 없으며, 그 발음은 훈민정음 창제 후 ""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서울 한자 음차 표기로는 이십일도회고시 한경지략 증보문헌비고의 서울(徐菀) 동사강목 북학의의 서울(徐蔚) 대동지지의 서울(徐鬱) 앙엽기의 서올(徐兀) 등이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 서울은 한양 한성(漢城) 외에도 서울()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예도 있다. 이 가운데 한양과 한성을 제외하면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서울'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1910년 10월 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서울 로마자 표기 "은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로 표기한 데서 비롯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또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처럼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 서브슬로건을 로 지정하였다.서울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 지명이기 때문에 서울이라는 한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중국에서는 서울을 한청이라 불렀고 1988년 서울올림픽도 한성올림픽이라고 불렀으나 2005년에 서울시가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서우얼을 서울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다. 일본어 표기는 다.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 문서에서 서울특별시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서울독립시"이나 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한국어 관점에 따라 "특별시"로 번역한 게 굳어져 'Seoul Special City'로 되었다. 하지만 서울특별시청 홈페이지에서 서울특별시 공식 영어 명칭은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이다.서울은 북위 37° 34′, 동경 126° 59′의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시의 중심으로 한강이 흐르고, 서울 도심에는 남산, 인왕산이 있다. 시 주변으로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구룡산, 우면산, 아차산, 지양산 등이 서울을 둘러싸며 경기도 및 인천광역시와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36.78 km, 남북 간의 거리는 30.3km이며, 면적은 약 605.25 km2이다. 서울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0.6%이며 남북한 면적의 0.265%이다. 서울특별시의 최북단은 도봉구 도봉동이고 최남단은 서초구 원지동이며 최동단은 강동구 강일동, 최서단은 강서구 오곡동이다.서울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을 최고점으로 한 고양양주구릉과 경기평야가 만나는 지대에 있다. 주위에는 북한산도봉산인왕산관악산 등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이 자연성벽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 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도봉산은 백운대인수봉노적봉의 3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그 산줄기는 다시 남으로 뻗어 북악산을 솟게 하였다. 그리고 북악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에 낙산 서로 뻗은 산줄기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에서 뻗은 산줄기 중 남쪽으로 뻗은 것은 숭례문을 지나 남산응봉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무악재의 안부를 지나 안산과 이어져 있는데 모두 구릉성 산지이다. 한강 남쪽에는 100m 이하의 ��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 천연의 요새와 같이 서울의 외곽에 솟아 있는 관악산 청계산 구룡산 우면산 등이 있다. 그 외에 서울 동부에 불암산 수락산 망우산 아차산 등이 있다.서울의 중심에는 한강 하류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하류이기 때문에 구배는 완만하며 물의 흐름은 느리나 홍수 때는 상중류의 유역 지방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다. 여의도는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된 하중도이다. 한강물은 서울시민의 수돗물로도 공급되는데 과거에는 뚝섬과 선유도 등에도 취수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잠실 수중보와 팔당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공급하고 있다. 한강은 일제 강점기까지 별다른 정비가 없었다가 1960년대 이후 한강을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 밤섬을 폭파한 뒤 여의도를 개발하였고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잠실 개발계획으로 잠실섬과 부리도의 남쪽 물길을 막아 육지로 만들었다. 1982년 시작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둔치를 조성하고 강변 양쪽에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놓았다. 2006년에는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한강 주변을 다시 정비하였다.한강 이외의 주요 하천으로는 불광천,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탄천, 양재천, 여의천, 홍제천 등이 있다.서울의 임야 면적은 2006년을 기준으로 157.35 km2으로 임야의 51.5%는 국공유림이고 49.5%는 사유림이다. 임야의 분포는 산이 많은 노원구에 17.73 km2 관악구에 17.53 km2 강남구에 16.11 km2가 있어서 전 임야의 32.6%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임야의 많은 부분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임야는 잘 보호되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임야 면적은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한반도 경기 지괴 내에 위치한 서울의 지반은 주로 중생대에 형성된 화강암과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화강편마암의 두 종류로 되어 있다. 중생대의 대보 화강암은 서울의 동북부인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와 북한산 관악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고 선캄브리아기 지층은 주로 서남부인 마포구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그 경계선은 대체로 서대문구 연희동-아현동-공덕동-용산구 삼각지역-동빙고동을 잇는다.화강암은 조립질이면서 다른 암석과는 다르게 절리(節理)가 잘 발달하고 풍화작용에 약하며 도봉산백운대인수봉과 같은 봉우리가 기암절벽을 만들어 서울 특유의 절경을 보여 주고 있다. 홍제동안암동창신동장위동 등지의 화강암은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건축재로 쓰이곤 했다.화강편마암은 견고한 암석이지만 접착성이 적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어 봉우리를 이루지 못하나 작은 기복을 이룬 노년기 지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동작동 부근의 화강편마암은 판형으로 쉽게 벗겨져 온돌의 구들장으로 쓰였고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된 천호동의 점토는 벽돌과 옹기 제조의 원료로서 많이 쓰였다.신갈 단층은 한반도 경기 지괴 내 연천군에서 서울특별시와 성남시 분당구 등을 지나 평택시까지 이어지는 연장 130km의 주향 이동 단층이다. 추가령 단층대의 일부이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지질도에 의하면 도봉구 성북구 동대문구 강남구 서초구 남부 등 서울특별시 동북부를 지난다.서울 도심 주변에는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계속된 침식으로 북악산과 남산에서 산기슭이 발달되어 기복이 많은 지형이 되었다. 을지로에 있던 구리개, 조선일보사 앞의 황토현이란 기복은 가로공사와 도시개발에 따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현재도 율곡로·퇴계로·을지로 곳곳에서 기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복 때문에 이 지역에는 고개 또는 현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에는 충무초등학교 부근의 풀무고개 또는 대장고개, 인현·종현·진고개, 계동 일대에 관상감현, 가회동 일대에 맹현·홍현·안현·송현·배고개 등이 있다. 이러한 지형은 조선시대에 잘 이용되었다. 풍수설에 따라 북악산 기슭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인왕산 기슭에는 덕수궁을 지었고, 궁궐 사이는 궁인·귀족·고관 들의 저택지로 이용하였다. 이 지역의 침식으로 운반된 토사는 청계천 연안에 퇴적되어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지에서 가장 평탄한 곳은 청계천 북쪽의 연안으로 동대문에서 세종로 사이의 종로이며, 이곳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삼각지로부터 해발고도 20m의 갈월동을 지나면 지형이 차차 높아져서 서울역 앞에 오면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고, 숭례문 부근은 해발고도가 40m 내외가 된다. 이곳은 분수계가 되어, 동으로는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한다.서울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 또는 온대 하우 기후에 속하며 습윤 대륙성 기후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이다. 최근 기온 상승으로 인해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 °C보다 높은 -2.4 °C로 높아져 대한민국 기상청은 온대 하우 기후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는 열섬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외곽 지역은 여전히 -3 °C 미만으로 내려간다는 점과 냉대 기후의 최한월 평균기온 기준을 0 °C 미만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온대기후와 냉대기후의 중간정도 되는 기후이다. 여름 기온과 겨울 기온의 연교차가 28.1 °C로 매우 크기 때문에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몹시 무덥다. 최근 30년 기준으로 서울의 연평균 기온은 12.8 °C 이고 최난월인 8월 평균 기온은 26.1 °C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1.9 °C이다. 특히 최한월의 평균 기온은 같은 위도 상의 다른 도시에 비해 낮은 편이다. 시내의 기온 분포는 중구와 같이 가옥이 밀집한 곳과 많은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으며 지나는 간선도로 그리고 도심부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역이 가장 기온이 높고 한강 연안과 가옥의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기온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 도심의 기온은 여름철의 6 7 8월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로 계속 기온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면 약 100년 간에 평균기온은 1.8 °C 일 최저 기온의 연평균치는 3.1 °C씩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시내의 습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계절은 여름이 가장 길고 그 다음 겨울, 봄 순서대로이고 가을이 가장 짧다. 봄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데 월평균 기온이 5 °C 이상으로 올라가고 날씨는 맑고 따뜻해진다. 그러나 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불어올 때 황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여름은 20 °C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며 7, 8월에는 30 °C 내외, 심하면 35°C 이상의 무더운 날씨가 많다. 또한 장마나 집중호우가 계속되어 많은 비가 내리므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기온은 차차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시작된다. 겨울은 최저 기온이 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100일 내외, 최저기온이 -1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29.4일로서, 추운 날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기간은 12.5일, 얼음이 어는 기간은 16.4일이나 강수량은 여름에 비하면 훨씬 적어 건조한 날씨가 많다. 최근 30년 기준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17.9mm이나, 1990년에는 2,355.5mm, 1949년에는 633.7mm가 내릴 정도로 연 강수량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계절별 강수량은 여름철에 892.1mm, 겨울철에 67.3mm로 여름철에 강수가 크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한반도는 계절풍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서울은 여름에 남동풍 겨울에 북서풍이 빈번하게 분다. 도심부에서 도로 위를 부는 도로바람은 남산의 북사면에서 발달한 차가운 공기가 충무로 지하상가 위를 지나 을지로 입구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퇴계로 2가 부근에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분다.역대 최저 기온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 °C, 역대 최고 기온은 2018년 8월 1일의 39.6 °C이다.시내에는 큰 건물과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 자동차의 배기가스 등의 오염물질이 늘어나면서 태양광선이 제대로 땅에 닿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내에 내리쬐는 일사량은 매년 감소되어 가고 있다. 비행기나 높은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연기와 먼지를 품은 오염대기층인 연진모자가 상공을 덮고 있어 서울 시야를 나쁘게 하고 있다. 2011년 환경부가 7대 도시의 대기 오염물질을 조사한 결과 전국의 미세먼지 평균농도는 51㎍/m3이고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는 49㎍/m3로 나타났다. 2013년을 기준으로 하여 서울시는 전국 16개 지방에서 8위를 하였고 광역시나 특별시 중에서는 4위를 하였다.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서울시에서는 청정연료 확대보급 경유자동차 저공해화 도로비산먼지 청소 공사장 비산먼지 관리 등과 같은 대기질 개선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오면서 대기질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나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상황과 역대 가장 긴 장마 때문에 서울의 미세먼지는 110일 동안 보통 ��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은 25개 자치구와 424개 행정동이 있다. 한강 남쪽에 11개, 한강 북쪽에 14개 자치구가 있다. 2020년 4월말 주민등록 인구는 9,726,787명이다. 가장 인구가 많은 구는 송파구, 가장 인구가 적은 구는 중구이다.21대 국회의원 선거 기준 49개 선거구로 나뉜다. 주민등록 인구에 따라 29만5천 명 미만인 자치구는 1개 29만5천 명 이상 ~ 59만 명 미만인 자치구는 2개 59만 명 이상인 자치구는 3개의 선거구를 가진다.고려 멸망 후 조선이 천도한 후 조선 태종 때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으며, 이후 1900년대까지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일제 강점기 이후 서울의 인구는 지방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서 과밀화 현상을 빚고 있다. 1919년에 인구 25만 명, 인구밀도 6,874명/km2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인구 34만 명, 인구밀도 9,297명/km, 1930년에는 인구 33만 명, 인구밀도 9,824명/km2, 1935년에는 인구 40만 명, 인구밀도 11,172명/km2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1936년에 시역을 확장하여 인구는 73만 명으로 증가하고 인구밀도는 5,430명/km2으로 감소하였다. 1945년 광복 당시의 인구는 90만 명, 인구밀도 6,628명/km2이었는데, 외국에서의 귀국, 한반도 북부지역 출신 등으로 1946년에는 인구가 127만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인구밀도는 9,309명/km2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구 171만 명에 인구밀도 12,055명/km2으로, 1949년에는 136.05 km2이었던 시의 면적이 268,35 km2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42만 명, 인구밀도는 5,284명/km2이 되었다.1951년에는 한국 전쟁으로 인구가 65만 명 인구밀도는 2416명/km2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1953년에 휴전과 환도로 다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여 1955년에는 인구 157만 명 인구밀도 5869명/km2 1960년에는 인구 245만 명(전체 인구의 10%) 인구밀도 913명/km2 1970년에는 인구 543만 명(전체 인구의 18%) 인구밀도 9013명/km2 1980년 인구는 836만 명 인구밀도 13074명/km2 1990년에는 1061만 명 인구밀도가 15532명/km2이 되었다.이렇게 계속 증가하던 인구도 1992년 인구 1,097만 명, 인구밀도 18,121명/km2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에 따른 것으로. 서울 교외에 분당·일산·평촌·중동과 산본등의 1기 신도시가 개발되었고 이 마저도 포화상태로 현재 운정, 판교, 동탄등 2기 신도시 개발에 따른 이주에 의한 것이다. 계속 감소하던 인구는 2003년 인구 1,028만 명, 인구밀도 16,975명/km2을 정점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뉴타운'으로 불리는 서울 시내 대규모 재개발로 인한 인구 유입의 영향이 크다. 2009년 12월말 기준 인구는 10,464,051명, 4,116,660세대이고, 인구밀도는 17,289명/km2이다.서울의 인구증가를 보면 1960년경부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각종 산업이 발전하면서 고용 증대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농촌인구가 급격하게 서울로 집중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생계가 어려워 무작정 서울로 온 이농 인구 덕분이었다. 서울은 자연증가보다 사회증가에 의하여 과밀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서울에는 교육기관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주로 서울에서 취업을 하거나 생활 터전을 마련한다.다만, 2010년대 들어 서울의 높은 전세로 인해 서울의 인구순유출 속도가 한국 도시들 중 가장 빠르며,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서울 인구가 1,000만명 선 아래로 떨어졌다. 사실상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1000만명을 넘어선 서울의 인구가 28년만에 1000만명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2018년 5월 기준으로 서울의 인구는 980만명이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대부분의 인구는 경기도로 이동하고 있으며, 세종시나 제주도로의 이동도 이루어지는 역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입법부행정부사법부 등 국가의 통치 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종로구에는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중앙 행정 기관과 헌법재판소 등 국가 중요 기관이 있고 중구 정동에는 각국의 외교 대사관이 밀집해 있다. 또한 여의도에는 국회가 서초구에는 대법원을 비롯한 법조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2014년 서울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327조 602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2%이다.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롯데 등 주요 대기업의 본사가 있다. 대한민국 GDP의 22%를 창출하고 있으며, 금융 기관의 5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서울의 공업은 1919년에 영등포에 세워진 방직공장을 시초��� 한다. 영등포에는 그 외에도 피혁공장과 철도공작창이 지어졌으며, 1940년대 들어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일본의 군수물자 조달을 목적으로 영등포와 용산을 중심으로 군수 산업이 발달하였다. 8·15 광복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잠시 침체 상태에 있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로 인해 서울의 공업은 급속도로 발달하였다. 1971년 형성된 구로동 수출산업공단은 섬유·전자기계·고무합성수지제품·금속·광학기기류 등의 생산으로 서울 최대의 산업단지가 되었으며, 인근의 영등포 기계공단과 묶여 경인공업지구를 형성하였다.1990년대 초까지 용산·영등포·천호동·노원구 등에 공업지구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수도권이 팽창하면서 인천·시흥·안산·부천 등 인근 지역으로 옮겨갔다. 2000년대 들어 첨단산업이 발달하면서 구로동·가산동 지역의 대규모 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탈바꿈하여 현재는 수많은 IT 벤처 기업이 있다.서울의 상업은 4대문 안 서울 도심인 종로·남대문로·충무로·명동·을지로와 청계천 등의 상가와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중부시장 등의 시장과 백화점, 대형 할인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60년대 들어 대단위 슈퍼마켓과 연쇄점·지하상가가 시내 요소에 설치되어 새로운 상가를 형성하였다. 전문상가로는 전국에 의류를 공급하는 남대문 의류상가와 동대문 평화시장,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노량진수산시장, 용산전자상가, 경동시장 등이 있다.서울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등 국공립 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 중앙대학교 경희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광운대학교 홍익대학교 국민대학교 숭실대학교 세종대학교 등 사립 대학교들이 소재하고 있다. 대학교 40개교 교육대학 1개교 방송통신대학교 1개교 전문대학 12개교 등이 있다.문화와 관광 그리고 주요시설.서울은 대한민국 문화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도서관·박물관·신문사·출판사·방송국·공원과 기타 문화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서울에는 132개의 국보 380개의 보물 61개소의 사적 11개의 천연기념물 32개의 무형문화재 46개의 중요민속자료 등이 있다. 또한 경복궁 등의 고궁과 각종 공원 등이 있어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운동경기장으로는 잠실에 잠실종합운동장 목동에 목동운동장 성산동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있다.국립중앙박물관 등 6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서울에는 시립 도서관 23개 소가 있으며, 시립 도서관의 경우 대부분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각 자치구에서 설립한 구립 도서관이 있다. 최근 구립 도서관의 숫자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장서 100만여 권을 가진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그외에도 공공 및 사립도서관, 대학도서관 등이 있다.서울의 도심 지역에는 대형 종합 신문사들의 본사가 몰려 있다. 도심인 중구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매일경제신문 종로구에는 동아일보 한국일보 본사가 있고 마포구에는 한겨레가 위치하고 있다.서울시티투어버스는 광화문을 기점으로 서울의 중심 관광지를 순환하고 있다.서울은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2002년 FIFA 월드컵의 개막전과 4강전을 비롯한 총 3경기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졌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 폐막식이 있었던 서울올림픽주경기장과 이를 기념하는 올림픽공원이 있으며 마포구에는 월드컵공원이 있다. 노원구에는 종합선수합숙훈련장인 태릉선수촌이 있다.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프로스포츠팀을 보유한 도시이며 특히 프로스포츠 양대 산맥인 프로축구 K리그와 프로야구 KBO 리그에서 1990년 럭키금성 황소 와 LG 트윈스 그리고 2016년 FC 서울과 두산 베어스의 2차례 동반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승용차와 대중교통인 지하철 버스 택시 등이 주된 시내 교통 수단이다. 주요 환승지로는 1호선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센트럴시티 동서울종합버스터미널 남부터미널 12호선 시청역 2호선 강남역 신도림역 24호선 사당역 등이 있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자동차 등록 대수는 2933286대로 수송 분담률은 2006년 기준��로 지하철 34.7% 버스 27.6% 택시 6.3% 자가용이 26.3% 등이다. 1899년부터 운행하던 전차가 1968년 없어지면서 서울의 대중 교통 수단은 많이 달라졌다. 1966년부터는 시가지의 대폭적인 재개발로 건물의 고층화와 함께 도로의 입체화가 진전되었다. 대중 교통 수단의 재배치는 서울 도시 구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왔다. 대표적인 예로 1기 지하철 특히 당초 계획과는 달리 거대 순환선으로 변경된 2호선이 서울의 공간에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경부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 등이 남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는 서쪽에 있는 인천광역시와 연결된다. 시 외곽에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다. 도시 내부에는 강변을 따라가는 강변북로, 올림픽대로, 내부순환로, 동부간선도로, 서부간선도로, 남부순환로, 북부간선도로 등의 간선도로가 건설되어 있다.강변북로는 고양시와 파주시 올림픽대로는 인천광역시와 부천시 동부간선도로는 성남시와 의정부시 서부간선도로는 안양시와 광명시 북부간선도로는 구리시와 연결된다. 서울시내의 주요 도로로는 테헤란로 세종대로 종로 강남대로 시흥대로 등이 있다.서울에서 버스가 처음으로 운행을 하기 시작한 때는 1928년으로 라는 이름으로 10대를 운영했다. 1949년 17개 회사가 서울시로부터 면허를 받고 버스 운영에 뛰어들었다. 이후로 여러 차례의 확장과 개편을 거쳤으며 2004년 서울특별시 버스 개편으로 버스 준공영제와 환승할인 제도가 도입되었다. 현재 시내버스 간선버스 마을버스 광역버스 등을 포함한 수백개의 버스노선이 시내를 연결하고 있다.서울에서 택시는 1912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고, 1919년 최초의 택시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926년에는 미터기가 도입되었다. 8·15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 1970년 콜택시가 등장하고, 1988년에는 콜택시 대체용으로 도입된 중형택시, 1992년에는 모범운전수가 운전하고 콜택시를 도입하는 등 서비스 수준을 높인 모범택시가 선을 보였다. 또한 2009년에는 소형택시 부활이 결정된 이후 2011년 12월부터 소형택시 70여대가 운행되고 있다. 2015년 10월에는 고급택시가 운행을 시작했다. 2020년을 기준으로 서울시 소형택시의 기본요금은 2100원, 중형택시는 3800원, 모범택시는 5000원, 고급택시는 8000원이다.서울은 한반도 철도의 중심지이다. 서울에서 다른 도시간을 잇는 철도 교통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역이 나뉘어 있어 서울역에서는 경부선과 경전선 KTX 용산역에서는 호남선전라선장항선 청량리역에서는 중앙선태백선영동선 강릉선열차가 출발한다. 그 외에도 영등포역 등의 중간역에서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인천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철도를 이용하여 서울역까지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철도관제센터 또한 서울에 위치해 있어 그곳에서 대한민국 전역의 모든 철도를 총괄 관리 및 명령한다.1968년 서울전차의 퇴역으로 이를 대신할 대중교통수단 건설이 논의되었고,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개통으로 본격적인 도시 철도 시대를 열었다. 1기 지하철 사업으로 2호선, 3호선과 4호선이 개통되었고, 그다음 2기 지하철 사업으로 5호선, 6호선, 7호선, 8호선이 새로 건설되어 추가되었다. 이후 9호선이 건설되면서, 2011년 현재 한국철도공사 관할 구간을 제외하고 9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다.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을 이어주며, 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의 개통은 서울의 공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의 경우에는 최초로 한강 아래로 터널을 뚫어 운행을 시작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포함한 일부 노선은 한국철도공사의 수도권 전철과 연계 또는 직결 운행하여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들을 연결한다.동아시아 단거리 국제선과대한민국 국내선은 주로 김포국제공항을 나머지 중장거리 국제선은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한다. 서울 도심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인천국제공항철도 또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과거에는 뚝섬과 마포에 포구가 있어 번창하였으나, 육상교통이 발달되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또한 노량도·양화도·한남도·송파도·광나루 등의 나루터가 있었으나 한강대교가 가설된 후부터 옛날의 나루터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강 개발 이후가 된 후 관광용으로, 또한 통���용으로 수상 교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6년 10월 26일부터 관광용 한강 유람선 운행을 시작했다. 여의도와 잠실 등 8개 선착장에서 운행하고 있다.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7년 10월 11일부터 한강 수상택시 운행을 시작했다. 여의도와 잠실 등 한강변 18개 승강장에서 운행하고 있으며 교통수단 뿐만 아니라 관광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운항정지 중이다.서울특별시는 2014년 2월 기준 20개국 24개 해외 자매도시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앙카라는 터키의 수도이다.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카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인구는 4,587,558명이고, 앙카라 주의 인구는 5,150,072명이다.앙카라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중심지로,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자, 이스탄불을 대신해 수도로 지정됐다. 앙카라는 공무원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공업의 중심지이며, 도로와 철도 교통의 중심지다.앙카라에는 중동전문대학와 앙카라대학이 있다. 또 국립도서관, 고고학박물관, 민속학박물관과 국립극장, 대통령 관현악단이 앙카라에 있다.앙카라가 수도가 된 이후의 개발로 옛 도심지였던 울루스와 신 개발지대인 예니세히르로 구분된다. 울루스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양식의 옛 건물과 좁은 도로로 대표되는 데 반해 예니세히르에는 넓은 도로 호텔 극장과 아파트 건물이 들어차 더 현대도시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부 청사와 외국 공관도 예니세히르에 소재해 있다.앙카라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700년까지 히타이트 문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1000년 경에는 프리기아인들이 이 곳에 정착했고 프리기아의 수도인 고르디움이 현재 앙카라 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포랏르에 있었다. 앙카라는 고대에 프리기아인들의 풍요한 도시였으나 후에 지진으로 고르디움은 파괴되었다. 미다스의 손 신화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프리기아의 왕이었다.프리기아의 풍습은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통치 기간에도 계승됐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로마 시대 때까지 계속됐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가 이곳을 지나갔다.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주권은 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갖고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움을 통해 앙카라에 입성했고 짧은 기간만 머물렀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마케도니아 제국은 뿔뿔히 나뉘어서 안티고노스 1세가 앙카라 지역을 차지한다,기원전 300년 경에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 폰토스가 무역거점으로 삼기위해서 이 지역에 진출했다. 그리고 앙카라의 이름의 기원이 된 안키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그 후 기원전 232년경 갈라티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의 일파인 텍토사게스족(라틴어 Tectosages)들의 중심지가 되었다.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앙카라를 점령하여 갈라티아인들에 대한 군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다른 텍토사게스 영토와 함께 한 수장 아래 두어 한동안 자치가 이루어지다가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앙카라를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주 수도로 삼았다.이때 앙카라의 주민구성은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포함하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화된 헬레니즘 도시가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기원후 19년경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앙카라를 도시가 아니라 요새라고 불러 그리스·로마 도시 수준의 공공시설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암시하고 있다.비문이나 주화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앙카라의 문화는 켈트 바탕에 로마의 사상과 관습이 얹힌 형태였다고 여겨진다. 150년경에야 진정한 헬레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기독교가 북쪽이나 서북쪽으로부터 전파된 시기는 이르면 1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앙카라의 위상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국제 도시가 되고 나서야 가까운 지리조건 덕에 크게 올라갔다. 그 후 중세에도 앙카라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을 때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다.1073년에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온 툴루즈의 레이몽 4세가 1101년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냈으나 비잔틴 제국은 앙카라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어 그 후 셀주크 튀르크와 다른 경쟁 세력들은 앙카라를 두고 서로 싸웠다.1356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2대 술탄인 오르한 1세가 앙카라를 정복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원정 때 앙카라를 포위 공격해 1402년 빼앗았다. 그러나 1403년에 앙카라는 다시 오스만의 지배하에 돌아와서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1차 대전의 종반 무렵 현재의 터키 지방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터키 민족주의 지도자 케말 파샤는 그의 저항운동 본부를 1919년 앙카라에 세웠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고 앙카라가 이스탄불 대신 터키의 수도로 정해졌다.앙카라가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된 이후, 구시가지는 울루스로, 신시가지는 예니셰히르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시대, 비잔틴시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유적들과 오래된 시장, 옛 관공서 등은 울루스에, 대로, 신식 호텔, 극장, 쇼핑몰, 신식 관공서, 대사관 등은 크즐라이를 중심으로 하는 신시가지에 위치하게 됐다. 그 이후,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924년에는 앙카라의 인구는 35,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에는 286,781명이 사는 도시가 되었고, 2014년에는 5,150,072명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가 되었고, 현재 터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됐다.2015년 10월 10일 현지시각 오전 10시 4분에(EEST) 앙카라 중앙역 앞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102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이 테러는 터키 공화국의 역사상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테러였다.앙카라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 즉 내륙에 위치하다보니 대륙성 기후를 띈다.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가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온다. 주로 가을과 봄에 비가 내린다. 앙카라는 고지대에 위치하다보니 여름에는 낮에 덥고 건조하지만 밤에는 시원하다. 연간 강수량은 402mm 이고 1월 평균기온은 0.4°C 7월 평균기온은 23.6°C이다.1923년 터키의 수도가 될 당시 앙카라는 원래 인구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로 계획이 되었다. 1927년 앙카라의 인구는 75,000명에 불과했지만,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하였다. 2013년에는 5,045,083명으로 집계되었다.앙카라는 중요한 상업공업도시이며 주변의 농업 지대에게는 중요한 시장이다.역사적으로 앙고라 염소털로 만든 모헤어, 앙고라 토끼 털로 만든 앙고라 울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 발달했었다. 또한,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특히, 카바클데레 와인이 유명하다.공업에서는 TAI, MKE, 아셀산, 하벨산, 로켓산, 누롤 마키나 등의 항공산업 및 방위산업 관련 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하여있다. 이들 업체의 수출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또한, 독일의 버스, 트럭 제조 회사인 MAN SE의 공장도 위치하여있다. 또한, 앙카라에 위치한 앙카라 대학교, 중동공과 대학교, 빌켄트 대학교 등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꾸준히 산업에 투입되고 있다.정부기관의 고용 역시 앙카라 경제에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각국의 대사관에서 일하는 외국인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장은 울루스에 위치한 츠크르크츠라르 요쿠수로 주로 양탄자 가죽 제품 등을 판매한다. 바클크라르 시장은 장식품 카펫 골동품 등으로 유명한 시장이다. 앙카라성 근처에도 향신료 말린 과일 견과류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다. 또한 스히예 광장 주변에는 매일 전통시장이 열린다.현대적인 쇼핑몰은 크즐라이나 찬카야의 투나르 힐미 에비뉴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크즐라이역 주변에는 크즐라이 쇼핑몰이 있는데 푸드코드, 스타벅스, 옷가게가 입점해있다. 아트리움 몰(Atrium Mall) 옆에 바로 옆에 있는 아타쿨레 타워의 꼭대기 층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AT역 주변에는 아르마다 쇼핑 몰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케치외렌의 에트리크 지역에 대형 슈퍼마켓, 오락실, H&M 등이 입점해있는 안타레스 쇼핑몰이 위치하고 있다.아르마다 CEPA 켄트파크 쇼핑 몰이 고속도로 변에 있고 갈레리아 알자디움 골디온이 위밋쾨이에 위치한다. H&M ZARA 등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앙카몰은 앙카라에서 가장 큰 쇼핑몰로 아크쾨프뤼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 2014년에는 넥스트 레벨과 타우루스 쇼핑몰이 오픈했다.앙카라는 정치적으로 이슬람주의 보수당인 정의개발당 케말주의 중도좌파인 공화인민당 민족주의 극우인 민족주의자운동당가 의석을 나누어 갖고 있다. 선거구 수는 25개이다. 2014년 선거 결과 공화인민당은 2개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나, 앙카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찬카야에 의석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은 2개의 의석을 갖고 있다. 전반적으로 정의개발당이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앙카라는 이즈미르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 때 앙카라에서도 이스탄불, 이즈미르 못지 않은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고, 다수의 사상자도 있었다.멜리흐 괵체크(Melih Gkek)가 1994년부터 현재까지 앙카라의 시장으로 재임 중이며 터키 복지당(RP Refah Partisi)에서 선행당(FP Fazilet Partisi)으로 그리고 정의개발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멜리흐 괵체크는 1994년 선거를 시작으로 1999년 2004년 2009년까지 당선되었으며 2014년 선거에서도 당선되면서 5선 시장이 되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에서 2009년 보수 정치인인 만수르 야바쉬(Mansur Yava)를 내세웠으나 낙선했다. 멜리흐 괵체크는 2009년 선거에서 1% 차이로 승리했으며 만수르 야바쉬는 이를 조직적인 부정 선거라고 주장했다. 만수르 야바쉬는 터키 최고선거관리위원회에 제소했으나 기각당했고 그 후에 유럽 인권 재판소에 이를 다시 재소했다. 멜리흐 괵체크가 5번이나 당선됐지만 2009년 선거는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부정선거로 인식하고 있다.앙카라 지하철과 대부분의 버스는 EGO에서 운영한다. 대다수의 버스는 교통카드만을 이용해서 사용이 가능하지만, 일부 개인이 운영하는 버스에서는 현금으로만 탑승이 가능하다. 현재 앙카라에는 경전철인 앙카라이와 M1, M2, M3까지 3개의 지하철이 운행중이며, M4가 건설중이다. 또한, 쉔테페와 예니마할레역을 연결하는 케이블카도 운행 중이다.앙카라 중앙역은 터키 철도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터키 국영철도에서 앙카라에서 이스탄불 에스키쉐히르 시바스 등 전국 각지로 여객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신잔역에서부터 카야쉬역까지 광역철도도 운행중이다. 2009년 3월 13일에 앙카라와 에스키쉐히르를 잇는 2011년 8월 23일에는 앙카라와 코냐간 2014년 7월 25일에는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3시간 30분만에 연결하는 고속열차인 YHT가 각각 개통되었다.앙카라는 또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기에 버스 교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스 터미널인 AT는 거의 모든 노선을 갖추고 있다.앙카라의 공항은 시 북서쪽에 위치한 에센보아 국제공항이 있다.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나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에 비해 노선수가 적지만 터키 국내선과 프랑크푸르트, 모스크바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다.터키의 타지역처럼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1923년 창단된 겐츨레르비를리이 SK가 앙카라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으로 쉬페르리그에서 활동중이다. 겐츨레르비를리이 SK는 1987년과 2001년에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또한 1910년 창단된 MKE 앙카라귀쥐는 가장 오래된 축구팀이지만 현재는 TTF 2. 리그에 소속되어있다. MKE 앙카라귀쥐는 1972년과 1981년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겐츨레르비르 B팀과 하제테페 SK도 쉬페르 리그에 소속되었던 적이 있다. 위의 모든 팀들은 앙카라 19 마으스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한다. 또한 오스만스포르도 앙카라를 홈으로 하는 팀으로 2010년까지 쉬페르리그에 소속되어 있었다. 홈 구장은 예니켄트 아사쉬 스타디움으로 신잔에 위치한다.또한, 신잔을 홈으로 하는 부그사쉬스포르, 에티메스구트를 홈으로 하는 에티메스구트 쉐케르스포르, 예니마할레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스포르, 찬카야를 홈으로 하는 앙카라 데미르스포르, 케치외렌의 케치외렌귀쥐, 케치외렌스포르, 푸르사클라르스포르, 바룸스포르, 알튼닥을 홈으로 하는 페트롤 오피시 스포르 같은 군소 팀들도 존재한다.또한 농구 역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앙카라에는 앙카라 아레나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과 TOBB 스포츠 홀을 홈으로 하는 카사 테드 콜레즈리레르 두 개의 농구팀이 있다.배구에서는 할크뱅크 앙카라가 통산 6회 터키 남자 배구 리그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다.아이스 스케이팅과 아이���하키 경기도 앙카라 버즈 파테니 사라이에서 열린다.1980년대 이후로는 스케이트 보드장도 많이 만들어졌다.2012년 완공된 THF 스포츠 홀에서는 터키 핸드볼 쉬페르 리그(Trkiye Hentbol Sper Ligi)와 여자 핸드볼 리그(Trkiye Kadnlar Hentbol Sper Ligi)가 개최된다.앙카라는 이스탄불과 더불어 대학교가 모여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앙카라에는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울루스에 위치한 겐츨리크 공원에는 놀이공원과 호수가 있어서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크즐라이에 위치한 귀벤 공원에는 시미트와 꽃을 파는 행상들이 많이 있으며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있다. 카바크르레데에 위치한 쿨루 공원에는 중국 정부에서 선물받은 백조와 흑조 오리 등이 살고 있다. 알튼 공원는 넓은 공원과 호수가 있으며 배를 탈 수 있다. 앙카라 외곽지역인 에르야만에는 야경과 호수가 아름다운 괵수 공원가 있다.또한 앙카라 아레나 주변에는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터키 군인을 기리기 위한 한국 공원이 있다.겐츨리크 공원은 1952년부터 1976년까지 100 터키 리라의 뒷면에 그려져 있었다. 또한 시내에 아타튀르크 오르만 치프트리이라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농장일을 하던 농원이 있는데 이 곳에는 동물원과 농장 레스토랑 등이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생가를 완벽하게 복원해 놓은 집도 있다. 농장인 치프틀리크에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농장에서 생산되는 치즈 전통 맥주 아이스크림 등을 맛볼 수 있으며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있다.앙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양이 품종인 터키시 앙고라가 살던 지방이다. 터키시 앙고라는 주로 희고, 부드러운 긴 털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품종 개량을 통해 검은털이나 붉은털을 가진 터키시 앙고라도 많다. 터키시 앙고라는 페르시안 고양이나 터키시 밴과도 가까운 품종이다. 눈은 파란색, 녹색, 황색인 경우도 있지만 간혹가다 한쪽 눈과 다른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도 있다. 귀는 크고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생겼다.앙고라 토끼는 앙카라 주변에 살던 길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이다. 앙고라 토끼는 가장 오래된 가축용 토끼 중에 하나인데 중세시대에 프랑스 왕실의 애완용 토끼로 유명하다. 미국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앙고라 토끼는 털인 앙고라 울로 유명한데 앙고라 울은 희고 길며 가벼워서 의복 재료에 많이 쓰인다.앙고라 토끼를 사육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앙고라 울을 얻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앙고라 토끼는 온순하지만 주의 깊게 다뤄주어야 한다. 여름에는 털을 짧게 깎기도 하는데 긴 털 때문에 여름에 열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속도는 시간에 따라 속도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일반적으로 물체는 속력이나 운동방향이 바뀌면서 속도가 변하는데 이와 같이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할 때 가속도가 있다고 한다. 속도와 마찬가지로 가속도는 크기와 방향을 갖는 벡터량으로 나타낸다. SI 단위로는 m/s2를 사용하며 주로 a라는 문자를 사용하여 가속도를 표기한다고전 물리학에서, 일정한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체는 뉴턴의 운동법칙에 의해 다음 식을 만족하게 된다.여기서 F는 물체에 주어지는 힘을 m은 물체의 질량을 a는 물체의 가속도를 나타낸다.속도와 마찬가지로 가속도는 시간간격 formula_2동안 속도가 변한 정도 formula_3의 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한 가속도를 평균가속도 formula_4라 한다.어떠한 순간의 가속도는 이 시간간격을 0으로 보내는 극한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하는 가속도를 순간가속도 formula_6라 한다. 이렇게 정의한 가속도는 어느 순간의 속도를 시간으로 미분한 것으로도 정의된다.등속운동은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한 운동을 말한다. 등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에 비례한다. 이에 반하여 속도 혹은 속력이 시간에 따라 일정하게 증가하는 등가속운동에서는 변위(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가속운동은 어떤 물체의 속도 혹은 속력이 증가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때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운동을 등가속도운동 또는 등가속운동이라 한다.등가속운동 또는 등가속도운동은 시간에 따른 속도의 변화 즉 가속도가 일정한 운동을 말한다. 등속운동에서 변위는 시간에 비례하지만 등가속운동에서 변위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뉴턴역학에서 힘은 질량과 가속도��� 곱이므로 힘과 질량이 일정하다면 물체는 가속도가 일정한 등가속운동을 한다. 지구 표면에서 물체는 일정한 가속도로 운동하며 이를 지구의 중력가속도라고 한다.감속운동은 어떤 물체의 속도 혹은 속력이 감소하는 운동을 말한다.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운동을 등가속도운동 혹은 등가속운동이라고 하는데,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감속하는 운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등감속운동의 용어는 사용하지는 않고 음의 등가속운동으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속도는 어떠한 물체의 위치 변화를 뜻하는 변위를 변화가 일어난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변위는 방향과 크기를 갖는 벡터이기 때문에 속도 역시 벡터이다. 단위 시간당 변위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 국제단위계에서는 미터 매 초를 사용하며 일상에서는 킬로미터 매 시간도 자주 쓰인다. 기호로는 주로 v를 사용한다.속도란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므로, 시간간격 formula_1동안 위치가 변한 정도 formula_2의 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한 속도를 평균속도라고 한다. 평균속도 formula_3는 다음과 같이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물리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속도는 물체가 갖는 어떠한 순간의 속도 즉 순간속도이다. 순간속도는 평균속도를 측정하는 시간간격을 매우 짧게 하여 0에 접근시킨 극한값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순간속도를 formula_5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위와 같이 순간속도는 변위를 시간에 대하여 미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속도라고 할 때는 순간속도를 의미한다.속도가 방향과 크기를 갖는 벡터량인 반면, 속력은 크기만을 갖는 스칼라량이다. 속력은 물체가 움직인 경로의 전체 거리에 대하여 변화가 일어난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50초 동안 앞으로 30m 전진한 다음 80m를 후진하였다고 하자. 전진할 때의 위치 변화를 양으로 후진할 때의 위치 변화를 음으로 나타내면 변위는 formula_7가 되지만, 움직인 경로의 전체 거리는 formula_8가 된다. 따라서 이 자동차의 평균속도와 평균 속력은 다음과 같이 계산 할 수 있다.순간속도는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 변화가 0에 접근하기 때문에 변위와 전체 경로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순간속도를 나타내는 벡터의 크기는 순간속력과 같다. 그러나 보다 큰 시간 간격을 고려하는 평균속도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평균속력과 다르다.상대속도는 한 좌표계 안의 두 물체의 속도를 비교한 것이다. 두 물체 A B의 속도를 각각 formula_11 formula_12라고 하면 고전물리학에서는 A에 대한 B의 상대 속도를 다음과 같이 계산 한다.예를 들어 두 자동차 A B가 직선 상에서 마주 보며 달리고 있을 때 A의 속도가 3m/s 이고 B의 속도가 -5m/s 라면 A에 대한 B의 상대속도는 -8m/s 이고 B에 대한 A의 상대속도는 8m/s 가 된다. 일차원 운동만을 고려한다면 상대속도는 스칼라값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한편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물체의 속도가 매우 빠를 때 상대속도가 고전물리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관성계가 다르더라도 빛의 속도는 일정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두 물체의 속도 관계는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위 식에서 빛의 속도 c는 매우 큰 값이기 때문에 A와 B의 속도가 충분히 느릴 경우 formula_15는 0에 접근하게 되고 그 결과 상대속도는 고전물리학의 계산과 같아지게 된다. +운동량 은 물리학 특히, 뉴턴 역학에서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운동량의 국제 단위는 뉴턴 초 또는 킬로그램 미터 매 초 이고, 통상적인 기호는 라틴 소문자 이다. 선형 운동량 혹은 병진 운동량이라고도 부른다.예를 들어 빠르게 움직이는 무거운 트럭 같은 물체는 운동량이 크다. 무거운 트럭을 빠른 속도까지 가속시키기 위해서는 큰 힘을 한참 동안 가해야 하고 반대로 그 트럭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도 큰 힘을 오랫동안 가해야 한다. 트럭이 더 가볍다거나 더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만큼 운동량도 작아질 것이다.선형 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으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에 의한 영향이 없는 닫힌계의 선형 운동량의 총합은 바뀌지 않는다. 고전역학에서는 선형 운동량 보존법칙이 뉴턴의 운동 법칙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공식을 약간 수정한 형태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은 적절한 정의를 이용하면 전자기학, 양자역학, 양자장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존 법칙이다.고전역학에서의 운동량.고전역학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갖는 벡터다. 즉, 운동량을 p, 질량을 "m", 속도를 v라고 하면, 운동량은 다음과 같다.만약 어떤 계에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계의 총 운동량은 바뀌지 않는다.두 물체가 충돌할 때도, 두 물체의 운동량의 합은 일정하다. 즉, 두 물체의 질량을 formula_2, formula_3, 충돌 전의 속도를 formula_4, formula_5, 충돌 후의 속도를 formula_6, formula_7라고 하면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이 때 formula_9를 반발 계수라고 부르고, 0 이상 1 이하의 값을 가진다. 만약 e = 1인 경우의 충돌은 탄성 충돌이라고 부르고, 이 때에는 운동 에너지 보존 법칙, 즉1차원 공간의 탄성 충돌에서 두 물체의 속도는 다음과 같다.반면 e < 1인 경우는 비탄성 충돌()이라고 하고 특히 e = 0인 경우는 완전 비탄성 충돌이라고 부른다. 이 때에는 충돌한 두 물체의 속도차 즉 입자 사이 상대 속도가 같다.충격량은 어떤 시간 동안에 운동량의 변화이다. 이에 따라, 충격량의 단위는 운동량의 단위와 같다.충돌 전후 두 물체가 주고받은 충격량의 합은 무조건 0이 된다. 힘은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운동량의 시간에 따른 변화율이므로, 일정한 시간 "t"에 대한 힘 F에 대한 충격량 I는이다. 만약 힘의 세기나 방향이 시간에 따라 바뀌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힘의 정의를 이 식에 다시 사용하면, 다음 식을 유도할 수 있다.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3차원의 운동량은 에너지와 함께 사차원 벡터를 이루는데 이를 사차원 운동량이라고 부른다. 즉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여기서 E는 계의 총 에너지이며 p는 계의 상대론적 (3차원) 운동량이다.상대론적 3차원 운동량은 정지 질량 formula_19과 로런츠 인자 formula_20, 속도 formula_21의 곱이다. 즉,여기서 formula_22는 신속도이다.광자등과 같이 정지 질량이 0인 입자도 운동량을 가진다. 정지 질량이 0인 입자의 경우, 에너지 formula_23와 운동량 formula_24는 서로 비례한다. 즉양자역학에서 운동량은 파동함수에 대한 연산자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입자의 운동량은 (입자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는 한) 항상 어느 정도의 불확정성을 갖는다.전하와 스핀이 없는 입자의 운동량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일본의 물리학자이다.양자전기역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공로로 1965년 리처드 파인먼과 줄리언 슈윙거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1906년 그는 도쿄도에서 도모나가 산주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병약하였으며 1913년 부친이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교토로 이사갔다. 1937부터 1939년까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아래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등에서 연구하였다.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이다.유카와 히데키와는 제삼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동창으로 평생의 동료이자 라이벌로 지냈다. 권위적인 유카와 히데키와 달리 도모나가는 소탈한 성품이었으며 유카와는 직관을 중시함에 비해 도모나가는 논리적인 전개를 선호했다. 학창시절에는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성적이 더 좋았으나 정작 노벨물리학상을 유카와 히데키가 먼저 받게 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유카와 히데키(, 1907년 1월 23일 ~ 1981년 9월 8일)는 일본의 이론물리학자이다. 교토부 교토시 출신이다.원자핵 내부에 있어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매개가 되는 중간자의 존재를 1935년에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1947년 영국의 물리학자 세실 프랭크 파월이 우주선 중에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 이 증명돼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 반핵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플랑크와 함께 공동 선언자로 이름을 올렸고 중간자 이론 외에 비국소장이론 소영역이론 등의 이론을 계속 발표했다. 이런 모습은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창이었던 도모나가 신이치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고 도모나가와 마찬가지로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로도 알려져 ���다. 목소리가 작고 강의가 상당히 난해했다고 전해진다.교토 대학오사카 대학 명예교수 교토시 명예시민이었다. 1943년에 문화훈장을 받았고 학위는 이학박사이다.유년 시절 ~ 학창 시절.1907년 1월 23일 도쿄부 도쿄시 아자부구 이치이베이정에서 부친이자 지질학자인 오가와 다쿠지와 모친인 오가와 고유키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1살 때 부친인 다쿠지의 교토 제국대학의 교수로 취임한 것에 따라 가족 모두가 교토부 교토시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아자부의 집에서는 출생 후 1년 2개월 밖에 살지 않았다. 1살 때부터 대학까지는 교토에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잠깐 동안 오사카나 니시노미야에 있었던 적이 있으나 인생의 대부분을 교토에서 생활했다.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나의 기억은 교토로 이사왔던 때부터 시작된다. 역시 교토가 고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밝혔다.외가쪽은 유카와의 외할아버지인 오가와 고마키쓰는 예전 기슈번의 번사였으며 또한 유카와가 자체가 선조 대대로 와카야마현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지만 유카와 본인에 의하면 교토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의 실업가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고향에 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카와의 필체에 의해서 쓰여졌지만 유카와 본인은 와카야마에서 살았던 경험은 없다.5 6세 때 외할아버지인 고마키쓰에 의해서 한문 서적을 읽고 배웠다. 고마키쓰는 한학에 대한 소양이 풍부하여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서양학문을 배워 말년까지 계속해서 런던 타임스를 구독하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해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교고쿠 보통소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에는 교토 부립 교토 제1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시절의 유카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는데 별명은 ‘곤베에’였다. 또한 사춘기 때부터는 거의 말을 안들었고 귀찮은 것들은 모두 ‘말 안하겠다’라는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등 ‘이왕 짱’이라고 불렸지만 의외로 에서 따온 별명 같다고 유카와가 스스로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 말수가 적을 정도의 과묵한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다쿠지로부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홀대를 받았고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낮다고 보여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전문학교에라도 보낼까’라고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다. 교토 제1 중학교의 동기로는 학자가 된 동기들이 대부분이었고 후에 학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똑같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교토 제1 중학교의 1년 선배이며 제3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기였다.노벨 물리학상 수상.1929년에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의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의 조수가 됐다. 1932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활동했다. 1933년,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일본 수학물리학회 연회가 열렸을 때 야기 히데쓰구와 알게 됐는데 당시 오사카 제국대학의 이학부 물리학과의 초대 주임교수로 부임한 야기에게 부탁해서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하게 된다.학생들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작고 강의는 꽤 난해했다고 전해졌다. 이 즈음에 오사카 위장 병원의 원장인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유카와 스미와 결혼해 유카와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가 됐다.오사카 제국대학으로 옮긴 후 전혀 성과가 없던 유카와를 야기는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주의를 준 뒤 “본래라면 도모나가를 오게 했을텐데 너의 형으로부터 의뢰받아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채용했으니까 도모나가에게 지지 않도록 공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질책했다. 우치야마 료유에 의하면 야기는 비수같은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1934년에 중간자 이론 구상을 했고 이듬해 1935년에는 안에서 발견됐다고 칼 데이비드 앤더슨이 발표함으로써 유카와의 중간자론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1939년, 유카와는 솔베 회의에 초청됐다. 회의 자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됐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과 친분을 가졌다. 이러한 업적에 높은 평가를 받아서 1940년에 학사원 은사상을 수상했고 1943년에는 최연소로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6월에는 일본 해군을 중심으로 한 원폭 개발 프로젝트 회의에 초청됐��나 개발이 본격화하기 전에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유카와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신문사의 의뢰를 거절했지만 전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군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이러한 배경을 기록한 일기가 2017년 12월 교토 대학 유카와 기념관 자료실에 공개된 바있다.더 나아가 1947년에 세실 프랭크 파월 등이 실제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서 194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인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작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나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에 뒤를 이은 세 번째의 수상자였고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이 뉴스는 패전과 연합국 점령하에서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에게 큰 힘을 주었다. 또한 2000년에 유카와의 노벨상 관련 문서를 조사한 오카모토 다쿠지는 추천장 대부분이 외국인 추천자로부터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노벨상 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물게 연구 성과와의 관계가 명료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전후에는 비국소장 이론과 소영역 이론 등을 제창했지만 이론적 성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한편 머리 겔만의 쿼크 이론에 대해서는 “전하가 이나 같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존재할 리가 없다”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또 한편으로는 반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 등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남겼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중에는 아라카쓰 분사쿠가 이끄는 교토 대학 그룹에서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1956년에 원자력 위원장인 쇼리키 마쓰타로의 요청으로 위원이 됐다. ‘원자로를 외국에서 구입해 오더라도 5년째까지는 실용적인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쇼리키의 지론에 대해 “기초 연구를 생략한 채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서두르는 것은 장래에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며 거세게 반발, 하루 만에 그만두려고 했으나 모리 가즈히사 등이 만류해서 사임을 철회했다. 그 이후에도 쇼리키와의 대립은 깊어졌고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이듬해인 1957년, 재임 1년 3개월 만에 사임했다.1956년 1월, 궁중에서 열린 가회시에 초대받았던 유카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1970년에 교토 대학을 정년 퇴임해 교토 대학 명예교수가 됐으며 말년에는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특히 생명 현상에 있어서 정보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에도 시대 후기의 사상가인 미우라 바이엔의 심취에 깊이 빠졌다. 휘호를 부탁받으면 자주 의 마지막 한 구절이다.1966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돼 있었다는 사실이 노벨 재단이 공표한 후보자 명단에 의해 판명됐다.교토 대학에서 정년 퇴임 후인 1975년에 전립선암이 발병돼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의해서 암의 진행은 막았지만 그 이후에는 자택에서 요양을 계속하면서 학술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양국의 긴장 격화로 제4회 과학자 교토 회의의 발기인의 한 명으로서 1981년 6월, 15년 만에 회의 개최가 성사됐다. 이때 이미 건강 상태가 나빠지면서 회의에서는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에서 참석해 핵폐기를 호소했다. 3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폐렴에 심부전 합병증으로 교토시 사쿄구의 자택에서 향년 7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소재한 지온인에 있다.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평화의 상 〈와카바〉(若葉)의 대좌에는 유카와가 지은 단카인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강한 힘의 이론중간자.4개의 힘 가운데 강한 힘을 어떻게 정식화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당시로서는 문제가 됐고 여러가지 시도가 이뤄졌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유카와는 전자의 200배의 질량을 갖는 중간자를 힘의 매개 입자를 가정해서 핵력인 강한 힘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강한 힘으로부터 페르미의 약한 힘을 이끌었다. 중간자론은 약한 힘 강한 힘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이론으로서 당시에는 가장 기본적인 장의 이론인 것으로 간주됐다. 또한 힘을 입자가 매개하는 것도 명료하게 보여주면서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을 정착시켰다.단, 전자가 강한 힘을 전달한다는 생각을 하이젠베르크가 유카와 이전에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이전부터 존재가 알려지면서 이론으로서도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은 확립돼 있지 않았다. 하이젠베���크나 보어는 관찰되지 않은 소립자로 장을 설명하는 유카와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보어는 유카와에게, 하이젠베르크는 도모나가에게 이것을 알리기도 했다.이상과 같은 이유로 유카와의 강한 힘을 낳는 중간자론은 소립자론의 길을 열었다고 당시에는 높이 평가했다. 유카와는 강한 힘의 중간자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후의 일을 장의 양자론에서 스스로 찾아낸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다.인과율 파괴의 제기.초다시간이론과 비국소장 - 유카와의 원.민코프스키 공간상에서 폐곡면에서의 확률 진폭을 정의하면 인과율이 파괴된다는 문제를 유카와가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생애를 걸었다(이 문제를 이라고 말한다. 유카와가 이 문제를 제기한 후 폴 디랙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도모나가의 기여는 있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한 미야자와 히로나리는 주장하고 있다. 물리학은 유카와의 기본 문제를 회피하여 현상론에 치우쳤다고 한다.유카와 이전에는 일정한 시간으로 확률 진폭이 정의돼 있었다.은사제자동료 및 관계자.※이 항목에서는 일본 국내에서의 저명한 인물을 둔다.제자의 제자에는 현재 활약하는 수많은 이론물리·물성물리·우주물리·천문·수리생물학자가 포함돼 있다. +정몽헌(鄭夢憲 1948년 9월 14일 ~ 2003년 8월 4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2002년 9월부터 대북 불법송금 사건 관련 조사를 받던 도중 2003년 8월 4일 현대계동사옥 12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정몽헌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주영이 명예 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정주영 사후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다.현대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는데, 이후 2002년 9월에 5억 달러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2003년에 검찰 조사를 받았고, 추진하던 대북사업의 차질과 현대그룹의 경영 악재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2003년 8월 4일, 서울시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으나 타살 의혹이 있다. 재계 인사들은 로 추측했다. 정몽헌의 사망 후 배우자 현정은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한국 조선l 또는 코리아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지역 또는 헌법상의 국가로 현대사에서는 한반도 또는 조선반도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르는 말이다. 현대에 일반적으로 '한국'은 대한민국을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르는 경우가 많으며 근현대사에서 한국은 고종이 수립한 대한제국을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넓은 의미로 한국은 고조선 건국 이후 한반도에서 설립된 여러 한민족의 국가를 통칭하는 말이다. 한국의 강역은 현재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들에 해당되나, 역사적으로 한민족의 강역은 만주와 연해주의 일부를 포함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역사를 한국사 또는 조선사라고 한다.1948년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국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가 각각 남북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헌법상 양측은 자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여기며 대립하고 있다. 한반도와 부속도서의 면적은 약 22만 km이며 인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합쳐 2019년을 기준으로 약 7700만 명에 달한다.한국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경계를 이루고 북동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및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는 서쪽으로 황해 동쪽으로 동해 남쪽으로 남해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한반도 및 부속도서의 최북단은 함경북도의 온성 최서단은 평안북도의 마안도 최동단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 섬 독도 최남단은 마라도이다.한반도의 동부 및 북부는 비교적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산지 지형을 특징으로 하고, 서쪽으로 갈수록 대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에 의해 형성된 여러 충적평야와 구릉지들이 나타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이며, 관모봉, 북수백산의 순이다. 한국 북부의 개마고원은 이라고 불리는 고지대이며, 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산맥인 태백산맥은 백두대간이라고도 불린다.한국의 주요한 섬으로는 면적순으로 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도 등이 있는데 대부분의 섬이 황해와 남해의 근해에 형성되어 있는 한편 제주도와 울릉도는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되어 비교적 고립되어 있다. 한국의 황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되어 있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한반도 전체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대한민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과 일본 등 이웃들과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했다. 전통 음악은 풍물놀이 아리랑 등이 있다.조선시대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대체로 7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조세와 부역 등을 피하려고 호구조사를 기피하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40% 가까이 누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실제 인구는 조선 시대 중기에 와서 1천만 명 내외 후기에는 약 1300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인구는 약 1312여만 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1910년 무렵에는 174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권 피탈 후 현대적 인구 조사를 한 1925년에는 1900만여 명 1935년에는 2289만9천여 명 1944년에는 259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1911년의 성비는 110.9로 심한 남초 현상을 보였으나 1944년에는 99.4로 여초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 102.1로 남초 현상을 보이다가 1955년에는 100.1로 균형이 이루어졌다.2017년 12월 말 기준으로 외국인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5천177만8544 명 이고, 2016년 12월 말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약 2천537만 명으로 추산된다. 약 700만 명인 해외 거주 한인 중 400여만 명인 외국국적자를 제외한 전체 한국인 수는 약 8천만 명이다.반도 전체의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 수화를 추가 공용어로 두고 있다.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교착어로 분류되기도 하며 또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경기 방언을 기초로 한 표준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서북 방언을 기초로 한 문화어를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다.한국어를 표기하는 글자는 한글이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말소리를 기호로 표시하는 표음 문자이고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는 음소 문자이며 발음의 유사성에 따라 형태의 규칙성을 띠는 매우 정교한 자질 문자이다. 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글자를 결합해 하나의 음절을 독립적으로 표시하는 글자를 만드는 형태로 표기한다는 점에서 다른 문자와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조선의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직접 만든 문자 체계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후 정인지·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해설서인 를 만들어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한자로 문서가 작성되었으나, 표의 문자인 한자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향찰, 구결, 이두 등 차자 표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지배층인 양반층과 관공서에서는 한자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한글은 19세기까지 주로 편지글·시조·가사·한글소설 등에 사용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한글의 사용이 억압 받았으나 1945년 해방 후 본격적으로 널리 쓰여져 한국문화 발달의 기틀이 되었다. 최근에는 동음이의어나 약어의 구별 등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의 사용이 크게 줄어들었다.한글은 처음 만들었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으나, 지금은 ㅿ, ㆆ, ㆁ, ㆍ 네 글자가 사라져서 스물네 글자가 되었다. 아하한국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므로 해당 지역이 관할하고 있는 행정구역의 체계와 형식적으로 통치를 주장하는 지역의 행정구역 체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대한민국의 행정구역.대한민국은 현재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로 편제되어 있다. 3단계 행정체계로 도/특별시/광역시 > 시/군/구 > 읍/면/동으로 구분된다. 다만, 서울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 이상 대도시 에는 시 아래에 행정구를 둘 수 있다.이들 중 도와 동급��� 행정구역은 광역시 특별시 특별자치시 특별자치도이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역 구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현재 1직할시 3특별시 3지구 9도로 편제되어 있다. 또한 3단계 행정체계로 도 > 시/군 > 동/리로 구분된다. 이는 광복 직후와는 다른 것으로 면은 통합하여 군으로 승격하고 읍은 군의 중심지역을 이르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이 외에 로동자구와 직할시에 소속된 구역 등이 있다.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직할시,특별시이며, 지구와 함께 행정상의 특혜를 받게 되어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다만 대한민국에서는 이 같은 행정구역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광복 당시의 행정구역만을 인정한다. +미분 방정식은 미지의 함수와 그 도함수, 그리고 이 함수들의 함수값에 관계된 여러 개의 변수들에 대한 수학적 방정식이다. 미분방정식의 계수는 미분 횟수가 가장 많은 독립 변수의 계수가 결정짓고, 차수는 계수를 결정 지은 독립 변수의 미분꼴이 거듭제곱된 횟수에 따라 결정된다.수학 응용에서 한 매개 변수가 다른 매개 변수에 대한 의존성을 알 수없는 문제가 종종 발생하지만 한 매개 변수가 다른 매개 변수 에 대한 변화율에 대한 표현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다른 표현과 관련된 도함수로 함수를 찾는 것으로 축소됩니다.미분 방정식은 엔지니어링 물리학 경제학 등 수학 외의 학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유체역학 천체역학 등의 물리적 현상의 수학적 모델을 만들 때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미분 방정식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있는 넓은 학문이다. 물체의 운동이 물체의 위치와 시간값의 변화에 따른 속도로 표현되는 고전역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물체의 미지의 위치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표현하고 물체의 위치속도가속도그리고 물체에 작용하는 힘 등을 그 함수에 대한 미분 방정식으로 나타냄으로써 이 변량들을 역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흔히 운동방정식이라고 부르는 이 미분 방정식은 아주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미분 방정식을 사용하여 실세계를 표현한 예로는 중력과 공기저항만 고려하여 공중에서 떨어지는 공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이 있다. 땅을 향한 공의 가속도는 중력에 의한 가속도 마이너스 공기저항에 의한 가속도이다. 중력은 일정하다고 치고 공기저항은 공의 속도에 비례한다고 하자. 이것은 공의 가속도 즉 공의 속도의 도함수가 공의 속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나타내면 이 미분 방정식을 풀 수 있다.수학에서 미분 방정식은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는데 대개 그 해―방정식을 만족시키는 함수의 집합―에 대한 연구가 흔하다. 명쾌한 함수의 형태로 해가 구해지는 것은 가장 간단한 미분 방정식들 뿐으로 어떤 미분 방정식은 명확한 해를 구하지 않고 그 특징만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만약 해를 독립적으로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컴퓨터를 이용해 수적 근사값을 구할 수도 있다. 동역학계 이론에서는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계의 질적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주어진 정확도 안에서 해를 구하기 위한 많은 수치 해석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미분 방정식의 목표는 다음 세가지이다.미분 방정식에 대해 해가 있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해가 유일한지 등의 문제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응용수학자 물리학자 엔지니어들은 대개 주어진 미분 방정식을 푸는 데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고 여기서 얻어진 해는 전기회로 다리 자동차 비행기 하수도 등을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미분 방정식의 종류.미분 방정식 이론은 잘 발전되어 왔으며 학습을 위해 방정식의 형태에 따라 그것을 의미있게 분류시키기도 한다.상미분 방정식과 편미분 방정식.상미분 방정식은 미지 함수와 종속변수가 하나의 독립변수를 가지는 함수인 미분 방정식을 말한다. 간단한 형태로 미지함수가 실수 또는 복소수 함수 형태를 가진다.미지 함수의 독립 변수가 둘 이상인 미분 방정식이다.선형 미분 방정식은 y도함수 앞의 계수가 변수가 아닌 경우이고 y도함수가 모두 1승인 것을 말한다.비선형 미분 방정식은 선형 미분 방정식과 다르게 y도함수 앞의 계수가 변수이며, 대표적 예시인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에서는 y도함수 앞의 계수가 유체의 성질을 나타내는 매개변수이다. 비선형 미분 방정식은 매개변수의 테일러 급수로 근사해를 구하는 방식이 있다.제1차 상미분 방정식.1차 제차 상미분 방정식의 일반형은 다음과 같다.여기서 formula_2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함수이며 이 방정식은 간단히 변수를 다음과 같이 양변으로 분리하여 놓아서 풀 수 있다.위 식을 적분하여 다음의 결과를 얻는다.양변에 e를 취하면 다음의 결과를 얻는다.formula_8는 임의의 상수이다. formula_2가 상수가 아닌 함수이고 어떤 함수의 경우에는 그 적분이 불가능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풀이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1차 비제차 상미분 방정식.1차 선형 상미분 방정식 중 일부는 위의 예처럼 분리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1차 비제차 상미분 방정식을 풀기 위해선 적분인자를 알아야 한다. 이 방법을 아래에 설명하고 있다.1차 상미분 방정식의 일반적인 형태를 생각해 보자.이 방정식을 푸는 방법은 특별한 , formula_11 에 달려있다.위의 1차 상미분 방정식의 양변에 formula_11를 곱하자.우리가 선택한 특별한 formula_11의 성질에 의해 위 식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모양으로 변형된다.미분에 대한 곱의 법칙에 의해 위 식은 다시 다음과 같이 변형된다.를 얻고 마지막으로 formula_19에 대해 풀고 formula_11로 양변을 나누면를 얻는다. formula_11는 formula_23의 함수이므로 더 이상 간단히 할 수 없다. +각운동량(角運動量)은 물리학에서 어떤 원점에 대해 선운동량이 돌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각운동량은 좌표의 원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 각운동량을 다룰 때에는 둘을 합하거나 그에 관련한 연산을 하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신중히 고려하며 사용해야 한다.각운동량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여러 공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고, 응용분야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각운동량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각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이 되기 때문이다. 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간의 회전대칭성 때문이다. 이러한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어떤 원점에 대한 입자의 각운동량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이다. 물리계가 여러 입자로 구성되어 있을 때에는, 한 원점에 대한 총 각운동량은 각각의 각운동량을 더해서 구하거나,좀 더 복잡한 부피를 가지는 물체의 각운동량은 미소질량에 대해 각운동량을 적분하여 얻을 수 있다.많은 경우, 고정된 특정한 한 축에 대한 각운동량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각운동량을 3차원 벡터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반시계방향의 회전은 양으로, 시계방향의 회전은 음으로 취급하여 스칼라로 놓기도 한다. 이렇게 할 때에는 벡터곱의 크기로 각운동량을 표기하게 된다.여기서 formula_10는 formula_5로부터 formula_4까지 재는 각도이다.각운동량을 시간에 대해 미분하면 돌림힘 formula_13가 된다. 만약 어떤 원점을 기준으로 계에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이 되어 각운동량이 보존되게 된다. 이를 각운동량 보존 법칙 또는 간단히 각운동량 보존이라고 부른다.각운동량 보존 법칙은 특히 중심력이 작용하는 운동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중심력이 작용하는 입자들의 운동에서 두 입자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에서 고립된 계를 이루고, 원점은 두 입자를 잇는 선 위의 한 점으로 잡는다. 서로 작용하는 힘의 방향이 언제나 원점에서 입자들까지의 위치벡터와 같은 방향이 되므로, 앞에서 잡은 원점을 기준으로 한 알짜 토크는 언제나 0이 된다. 따라서, 각운동량은 보존된다. 일정한 각운동량을 갖는 이와 같은 경우는 행성, 위성, 보어의 원자모형등의 분석에 유용하게 사용된다.관성 모멘트와 각운동량.관성 모멘트와 각운동량 사이에는 질량과 운동량사이의 관계꼴의 식이 있다. 경우에 따라 스칼라 관성모멘트 formula_19나 관성텐서 formula_20중 하나를 사용한다.회전축이 변하지 않는 경우.회전축이 변하지 않는 경우에 각운동량은 간단히 스칼라 관성모멘트 formula_19와 각속도 formula_22의 곱으로 쓰일 수 있다.위 식은 스칼라 관성 모멘트의 정의와 각속도의 공식 (formula_22와 formula_5이 수직일 때만 성립.)을 사용하여 각운동량의 정의로부터 간단히 유도할 수 있다.여기서는 입자 하나에 대해서만 유도를 하였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도 관성모멘트와 각운동량 사이에는 이와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회전축도 변하는 일반적인 회전의 경우, 각운동량과 각속도벡터는 평행하지 않다. 때문에 스칼라 관성모멘트를 사용한 식이 성립하지 않고, 좀 더 일반적인 식인 관성텐서 formula_20를 사용한 아래의 식을 사용한다.관성텐서의 각 성분 formula_31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이와 속도와 각속도의 일반적 관계를 사용하면 각운동량과 관성텐서 사이의 관계를 유도할 수 있다. 각운동량의 정의에 이를 대입하면를 얻고 여기서 삼중곱을 전개하면 아래와 같은 식을 얻는다.이제 formula_3을 성분 formula_37로 표현해 formula_38를 분리한다.관성텐서의 정의를 대입하면,가 되어 맨 처음 식이 성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양자역학에서의 각운동량.고전적인 각운동량에 대응하는 양자역학적 관측 가능량은 궤도 각운동량 formula_41이다. 다른 양자역학적 관측 가능량과 마찬가지로 궤도 각운동량의 값은 디랙 상수 formula_42의 정수 또는 반정수배로 양자화된다.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에는 고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각운동량 항이 존재하는데 이를 스핀 formula_43라고 한다. +원주율은 원둘레와 지름의 비 즉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수학 상수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그리스 문자 로 표기하고 파이라고 읽는다. 원주율은 수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상수 가운데 하나이다. 무리수인 동시에 초월수이다. 아르키메데스의 계산이 널리 알려져 있어 아르키메데스 상수라고 부르기도 하며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원주율을 계산한 이후 뤼돌프 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주율의 값은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197169399375105820974944...로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이기 때문에 근삿값으로 3.14를 사용하거나 기호 파이로 사용한다.유클리드 평면에서 원은 크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닮은 도형이다. 따라서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는 언제나 일정하며, 이를 원주율이라 한다. 즉, 원의 지름을 d, 둘레를 C라 하면 원주율 는 다음의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 는 1706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가 최초로 사용했다. 이것은 둘레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페리페레스" 또는 "페리메트론"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윌리엄 존스는 “특정 도형의 길이나 넓이를 구하는 계산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원을 예로 들면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약 3.14159…= 로 표기하는 것이다.”라고 기호 의 사용을 제안하였다.원주율은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순환마디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비순환소수이다. 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통해 만드는 난수표와 성질이 같다. 원주율은 십진법으로는 값을 정확하게 표기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계산에서는 근삿값을 이용한다.한편, 원주율은 계수가 유리수인 유한 차수 다항식의 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수를 초월수라 부른다. 이 사실은 1882년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증명하였다. 여기에서 원주율은 어떤 정수에 적당한 유리수를 곱하고 제곱근을 씌우는 등의 연산을 조합하여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주율이 초월수라는 사실을 통해, 그리스 3대 난제 중 하나였던 “자와 컴퍼스만을 사용하여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원적문제”가 유한한 대수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원과 원주율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원주율이 보이는 복잡한 수열에 비해 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라이프니츠가 정리한 다음 계산식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원주율의 값으로 3이 쓰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원주율을 3으로 계산하였고 구약성경 열왕기상 7장 23절과 역대하 4장 2절에는 직경과 둘레의 길이를 기술하여 원주율이 3정도 임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고대 중국의 수학책인 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실려 있다.구장산술의 계산은 평균값으로 이루어져있다. 원둘레가 30보인 경우 반지름은 30=2r*3.14 r=4.78 이경우의 면적은 71.74 지름이 10보인 경우 면적은 78.5. 과 의 평균은 75보. 그러므로 구장산술의 계산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잘못되었다.구장산술에 실린 계산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은 왼쪽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름이 1인 원에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둘레는 3이고 실제 원의 둘레는 그것과는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에서부터 이미 널리 알려진 문제였고 값을 보다 정확하게 구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통형 바퀴를 굴려 직접 측정해 원주율을 계산하였는데 =3.16049……를 사용하였다.한편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근대 적분이 없었던 당시에 무한소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는 소거법을 사용하여 formula_3의 근삿값을 계산하였다. 이 방법은 임의 차원의 미지항에 대해 극한을 취하는 것으로, 귀류법을 사용하여 동일한 계산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해답을 얻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변이 매우 많은 다각형이 임의의 원에 내접하는 경우와 외접하는 경우를 비교하여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즉, 임의의 원의 둘레는 그것에 외접하는 다각형의 둘레보다 짧고 내접하는 다각형보다 길다. 이때 다각형의 변이 많아질수록 외접하는 경우와 내접하는 경우의 둘레 차는 작아지므로 원의 둘레에 근사한다. 즉, 지름이 d인 원에 내접하는 변의 개수가 n인 정다각형의 둘레 Pn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함수의 극한을 취하면 원주율을 얻을 수 있다.아르키메데스는 정구십육각형을 이용하여 formula_3의 값을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아르키메데스는 이 결과에 따라 formula_3의 근삿값으로 3.1416을 제시하였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원의 면적이 formula_8임을 증명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저서 에서 어떠한 크기가 주어지더라도 임의의 크기에 적당한 수를 곱하여 주어진 크기를 초과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를 실수에서의 아르키메데스 성질이라고 한다.중국의 삼국시대 위나라 수학자 유휘는 에 주해를 달아 다시 출판하였는데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원주율을 =3.14 로 계산하였다. 유휘가 계산한 원주율 근삿값은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다.2세기에 들어 중국의 장형은 원주율을 3.1623으로 계산하였고 5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조충지는 3.141592로 계산하였다.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계산하였다. 컴퓨터를 도입하기 이전에 가장 긴 자리수의 원주율을 계산한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 샹크스였다. 그는 15년이나 걸려 1873년께 소수점 이하 707자리까지 원주율 값을 계산해냈다. 하지만 후에 그 계산은 528자리까지만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컴퓨터를 통한 원주율 계산.1949년 9월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70시간에 걸쳐 소수점 아래 2037자리까지 계산하였다. 원주율 계산에 컴퓨터를 도입한 이후 원주율 계산은 단순 알고리즘의 무한 반복에 불과한 작업이 되어 수학적 의미를 잃었다. 이 계산은 종종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2005년 일본 도쿄 대학의 가네다 야스마사 교수는 컴퓨터를 601시간 56분 동안 사용하여 원주율을 소수점 1241100000000자리까지 구하였다. 2009년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 쓰쿠바 대학 계산과학연구센터는 17일 슈퍼컴퓨터를 사용한 원주율 계산에서 2조 5769억 8037만 자리수의 세계기록을 수립했다고 한다.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2조 7천억 자리까지 계산하였다. 2010년 8월 3일에는 일본의 회사원 곤도 시게루가 소수점 이하 5조 자리까지 계산하였다. 2016년 11월 11일 스위스의 입자 물리학자인 페터 트뤼프는 105일 동안 계산하여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22조 4591억 5771만 8361자리까지 계산했다.formula_3 값의 소수점 아래 1,000자리 수는 다음과 같다.formula_3 값의 소수점 아래 100만 자리 10억 자리 1조 자리 수는 Peter Trb의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또는 다른 웹사이트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원주율은 두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또한 계수가 유리수인 다항식의 근이 될 수 없는 초월수이다.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에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람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탄젠트 함수의 연분수 전개식을 이용하여 이를 증명하였다.formula_13가 formula_14이 아닌 유리수일 때 위에 전개된 연분수를 십진기수법으로 나타내면 언제나 순환하지 않는 소수이므로 항상 무리수이다. 한편 formula_15 이므로 formula_16는 반드시 무리수여만 한다. 따라서 formula_3 역시 무리수이다.오일러 등식은 기초 수학의 ���러 개념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원주율이 초월수임은 오일러 등식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오일러 등식은이다. 이 때 가 정계수 대수방정식 formula_20의 근이라면 formula_21이다. 따라서 formula_22 역시 성립하여야 한다. 이제 y=i라 하면 =-iy 이고 -=iy 이므로, i는 다음 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정계수 대수방정식을 만족시켜야 한다.이제 formula_24을 차원의 방정식이라 하면 그 근인 y1 y2…… y에는 i가 존재하여야 하므로 식 (1)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만족하는 대수방정식의 근이 유리수라고 가정하면 무한히 약분할 수 있어서, 이를 기약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긴다. 유리수를 기약분수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유리수의 정의에 어긋나므로 가 정계수 대수방정식 formula_20의 근이라는 최초의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원주율은 초월수이다. 자세한 증명은 링크한 주석을 참고하기 바란다.개요에서 밝혔듯이 원주율은 반복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수열을 이룬다. 네덜란드 수학자 라위트전 브라우어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브라우어르는 이 수열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이 수열을 어느 정도까지만 확인한 결과만으로는 위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실제 소수점 이하 762번째에서부터 수열 999999 가 출현한다. 이 수열은 파인만 포인트로 알려져 있으며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 수열에서 확률 0.08%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경험적 방법으로는 위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브라우어르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중률 은 유한한 개수를 대상으로 한 것에만 적용 수 있을 뿐 무한한 것에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원주율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사용해 만든 난수표의 성질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 원주율의 수열이 완전한 무작위성을 보이는지는 증명되지 않았다.원주율은 무리수이기 때문에 그 값은 근삿값으로밖에 알 수 없다. 대부분의 계산에는 3.14나 22/7 라는 근삿값을 사용해도 충분하다. 355/113은 외우기 좋고, 정밀도도 좋다. 좀 더 정밀한 기술의 계산에서는 3.1416 또는 3.14159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상 예보나 인공 위성 등의 계산에는 소수점 아래 30자리까지 나아간 근삿값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불규칙적인 패턴을 가지는 원주율은 다음과 같이 규칙적인 수식을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더 정확한 값을 얻으려면 수식을 연장하기만 하면 된다.위 식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전개한 것으로 흔히 라이프니츠의 공식이라고 부른다. 이 식 외에도 원주율을 계산하는 공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17세기의 프랑스 수학자 프랑수아 비에트는 다음과 같은 무한급수로 원주율을 계산하였다.또한 스털링 근사를 사용해 원주율을 유도할 수도 있다.원주율은 다음과 같이 연분수로 표현할 수 있다.1996년 데이빗 베일리는 피터 보어와인, 시몽 플루프와 공동으로 에 관련된 새로운 무한급수를 발견했다.이 식을 이용하면 2진수 그리고 16진수로 표기한 값의 소수점 아래 -1째 자리까지 구하지 않고 바로 계산해 낼 수 있다. 베일리의 홈페이지 에선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구현한 실제 예를 볼 수 있다.원주율은 수학과 물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적용한다.아르키메데스는 원과 구의 다음과 같은 성질을 증명하였다.한편, 원은 이심률이 0인 타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타원 방정식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이 때 타원의 넓이를 A라 하면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각의 크기를 나타내는 무차원 단위인 라디안은 오른쪽 그림과 같이 정의하여 반지름과 호의 길이가 같을 때 1라디안이 된다. 따라서, 원 전체는 2라디안이고 이를 도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1687년 스위스의 바젤의 수학 교수였던 야코프 베르누이와 요한 베르누이 형제는 조화급수가 발산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조화급수의 각 분모를 제곱한 다음 식을 닫힌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며 논문의 끝에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면 알려주기 바란다고 적었다.당대의 유명한 수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이 문제는 바젤 문제로 알려지며 해석학자의 악몽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레온하르트 오일러로 1735년에 이 ��수의 값이 다음과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다.후일 이 급수는 다음과 같은 일반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이 리만 제타 함수이다.리만 제타 함수는 s가 짝수일 때 위 식을 이용하여 그 값을 쉽게 계산할 수 있으나 홀수일 때는 자명하지 않다. 1978년 s가 3일 때 무리수로 수렴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수렴값은 아페리 상수라고 한다.복소수 formula_43는 극좌표계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복소해석학에서 는 복소수 변수가 지수 함수에서 보이는 행동과 연관이 있으며 오일러의 공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의 지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오일러 등식을 얻는다.따라서 "n" 번째 단위근은 다음과 같다.이제 가우스 적분으로 나타내면이 결과는 반정수의 감마 함수가 √의 유리수 곱임을 뜻한다.확률과 통계에서 원주율이 등장하는 정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이 제기한 뷔퐁의 바늘 문제는 원주율의 근삿값을 구하는 경험주의적인 방법으로 거론된다. 길이가 L인 바늘을 일정 간격으로 그린 평행선에 떨어뜨린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평행선의 간격 S가 바늘의 길이보다 크다고 하면 바늘을 떨어뜨린 횟수 n번에 대해 바늘이 평행선 밖으로 나간 횟수 x번에는 몬테카를로 방법에 의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즉, 뷔퐁의 바늘 문제에서 바늘을 떨어뜨리는 횟수가 매우 많아지면 바늘이 평행선을 벗어나는 횟수에 대한 바늘을 떨어뜨린 전체 횟수의 비는 원주율에 근사한다.원주율 자체는 물리 상수가 아니지만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두루 사용한다. 이는 자연 현상의 상당수가 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전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등속원운동에서 각속도와 원주속도는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이 외에 물리학에서 원주율을 사용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일리야 로마노비치 프리고진는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의 벨기에의 화학자이다.벨기에 브뤼셀의 브뤼셀 자유대학(Universit Libre de Bruxelles)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산일구조(散逸構造) 복잡계 비가역성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1977년 비평형 열역학 특히 소산 구조론의 연구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89년에는 벨기에의 보두앵 1세 국왕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엔탈피는 열역학계의 성질로 계의 내부 에너지에 압력 곱하기 부피를 더한 값으로 정의된다. 대기압이나 수압과 같이 일정한 압력에 둘러싸인 계를 다룰 때 유용하게 사용되는 상태함수이다. 기호는 대개 라틴 대문자 "H"이다. 국제단위계상에서 줄이 영국 열량 단위에서 칼로리가 엔탈피를 나타내기 위한 단위로 사용된다.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하면 계의 내부에너지 변화량을 구하기 위해서는 가한 열량과 해준 일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등압과정에서는 계가 받은 열량이 계의 엔탈피 변화량과 같게 된다. 따라서 일의 양을 매번 계산하기 번거롭다는 등의 실용적인 이유로 등압과정에서 측정된 엔탈피 변화량()이 주로 사용된다. 화학 물질에 대해 엔탈피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대부분 표준상태 즉 부근의 압력과 부근의 온도를 상정한다. 엔탈피 변화량은 흡열 과정에서 양의 값을 발열 과정에서는 음의 값을 가진다.엔탈피는 다음 식으로 정의된다.여기서 는 계의 엔탈피를 는 계의 내부 에너지를 는 계의 압력을 는 계의 부피를 의미한다.엔탈피는 크기 성질로 성분이 동일하다면 계의 크기와 비례하여 값이 달라진다. 세기 성질로 사용하고 싶다면 비엔탈피 나 몰엔탈피 를 정의해 사용할 수 있다. 이 때 은 질량을 은 몰수를 의미한다.불균질한 계의 경우 총 엔탈피 값은 각 부분의 엔탈피의 총합으로 구할 수 있는데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여기서 는 총 엔탈피 값을, 는 각 부분계를, 는 그 부분계의 엔탈피를 의미한다.중력장 내에 놓인 닫힌 계를 고려해보자. 이 경우 압력 는 고도에 반비례하여 즉각적으로 달라지지만 온도 는 평행이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는다. 이 경우 엔탈피는 다음과 같이 적분을 사용해 나타낸다.여기서 는 밀도를, 는 비엔탈피를 나타내며 따라서 는 엔탈피 밀도를 나타낸다. 는 무한히 작은 부피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적분은 모든 부피를 무한히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서 각 부분의 엔탈피를 더한 것과 같다.위의 엔탈피의 정의는 그 값이 기준을 어떤 점으로 잡느냐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쓰이는 것 보다는 계의 어떤 상태와 다른 상태 간의 엔탈피 차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어떠한 과정에서 압력의 변화가 0인 경우엔, 엔탈피의 변화량은 계가 주변과 열교환의 형태로 주고받은 에너지인 열량을 나타낸다.따라서 주변의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반응의 전후 열량 출입을 나타내는 데에 많이 쓰인다.계의 엔탈피는 직접 측정할 수 없으며 계의 엔탈피 변화로 대신 측정된다 .엔탈피 변화는 다음 방정식으로 정의된다.반응 엔탈피(H) = 엔탈피 변화량 formula_4 E출입량 formula_4E 차이값 between 반응물 & 생성물 formula_4 반응열formula_8는 계의 최종 엔탈피이다.formula_9는 계 의 초기 엔탈피이다.H의 구성 = 부호 + 크기- 부호 : 흡열 반응- 부호 : 발열 반응H 크기의 의미 - E 출입량 = E 차이 between 반응물 & 생성물역반응 H = -정반응 H엔탈피는 온도와 압력에 따라 달라지므로 온도와 압력을 표시한다. 온도와 압력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 25도씨 1기압 상태이다.엔탈피 변화는 화학 반응을 일으킬 때 열역적 계 또는 주위에서 관찰된 엔탈피의 변화를 설명한다.화학반응이 완료된 후 엔탈피 값은 달라진다. 이는 생성물과 반응물간의 엔탈피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엔탈피 변화값 은 - 으로나타 낼 수 있다. 일반적인 엔탈피 변화의 예로서는 표준 생성엔탈피가 있다. 이러한 엔탈피의 측정은 표준화된 환경 또는 표준 조건에서 측정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다.물질 1몰이 완전 연소하여 가장 안정한 생성물이 될 때 방출하는 열량보통 연소 엔탈피는 음수이다.물질 1몰이 가장 안정한 원소로부터 생성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생성열 formula_4 생성반응식의 E 차이홑원소 물질 생성열 =0 -> 예외 : <chem>O3</chem> 다이아몬드(C)의 생성열 formula_110생성열 = 연소열인 반응 -> C + <chem>O2</chem>-> <chem>CO2</chem> H=C 연소열 = <chem>CO2</chem> 생성열-> <chem>H2 + 1/2O2 -> H2O</chem> H=<chem>H2</chem> 연소열 = <chem>H2O</chem> 생성열25도씨 1기압에서의 생성열 = 표준 생성열 formula_4 생성열일부 표준 형성의 열은 아래 표에 열거되어 있다.물질 1몰이 가장 안정한 원소로 분해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분해열 = - 생성열산과 염기가 중화되어 <chem>H2O</chem>1몰이 생성될 때 방출하는 열량-산과 염기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정 물질 1몰이 다량의 물에 용해될 때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열량간이 열량계에 의한 연소열 측정.원리 : 연료가 연소할 때 방출한 열 = 물이 흡수한 열연소열 = 물이 흡수한 열량/연소한 물질의 수 = (물의 ) / ()통 열량계에 의한 연소열 측정.원리 연료가 연소할 때 방출한 열 = 물과 열량계가 흡수한 열= ((물) + (열량계) / ( / ) +운동 에너지 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 또는 입자가 갖는 에너지이다. 주어진 물체의 어떤 속도에서의 운동에너지는 그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그 속도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의 양으로 정의된다. 가속이 되어 운동 에너지를 얻게 되면 속도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 한 그 운동에너지를 유지한다. 또한, 그 운동 상태에서 정지 상태까지 감속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 또한 원래 그 물체의 운동 에너지와 같다.고전 역학에서 질량이 m인 비회전체의 속도의 크기가 v일 때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formula_1이다.고전역학에서 "E ∝ mv2" 라는 원리는 처음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이 때 운동 에너지를 "살아있는 힘()" 라고 묘사하였다. 네덜란드의 는 이 관계의 실험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물체를 점토 블럭에 떨어뜨리면서 그라브산드는 그들의 관통 깊이가 충돌 속도 크기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브르퇴유는 실험 결과가 암시하는 바를 인지하였고 자신의 설명을 발표하였다."운동 에너지" 와 "일" 이라는 용어의 현대의 과학적 의미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리올리는 1829년에 "Du Calcul de l'Effet des Machines"를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려고 시도하였다. 윌리엄 톰슨은 약 1849-51년도에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에너지는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전자기 복사 중력 에너지 전기 에너지 탄성 에너지 핵 에너지 정지 에너지 등과 같이 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바로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이다.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어떻게 전환이 되는지 살펴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는 음식에서 제공되는 화학 에너지를 자전거를 가속 시키는데 사용한다. 평평한 표면에서 이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 저항과 마찰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을 빼면 더 이상 필요한 일이 없다. 이 과정에서 화학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지만 그 과정은 완전히 효율적인 것이 아니고 열을 부가적으로 생산하게 된다.운동하는 사이클리스트와 자전거의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가 충분히 높은 언덕을 만나 페달을 밟지 않은 채로 언덕 정상에서 멈추게 되었다고 하자. 그럼 운동 에너지는 완전히 중력 위치 에너지로 변환되게 되고 이것은 언덕을 다시 내려오면서 운동 에너지로 바뀌게 된다. 마찰 때문에 에너지의 손실이 생기므로 추가적으로 페달을 밟지 않는 한 원래의 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마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다. 이번엔 싸이클리스트가 바퀴 하나에 발전기를 연결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하강하는 과정에서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게 된다. 그럼 발전기가 없었을 때보다 싸이클리스트는 언덕 아래에서 더 적은 속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원래 가지고 있던 에너지 일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환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브레이크를 밟게 될 경우 운동 에너지는 마찰에 의해서 열로 빠르게 전환 될 것이다.다른 속도의 함수인 물리량과 같이 물체의 운동 에너지 또한 물체와 관찰자의 기준계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물체의 운동 에너지가 불변량인 것은 아니다.우주선은 공전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운동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부터 얻는다. 완벽한 원 궤도의 경우 지구 근방의 우주 공간은 마찰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운동 에너지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하지만 다시 우주선이 지구로 돌아올 경우 운동 에너지는 열로 전환된다. 만약 궤도가 타원형이거나 쌍곡선의 형태라면 공전하는 동안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교환된다. 근일점에서 운동 에너지는 최대 위치 에너지는 최소가 되고 원일점에서는 운동 에너지는 최소 위치 에너지는 최대가 된다. 그렇지만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의 합은 보존된다.운동 에너지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전달될 수 있다. 당구에서 플레이어가 당구공을 큐로 치게 되면 그 공에게 운동 에너지를 전달하게 된다. 만약 그 공이 다른 공과 충돌한다면 에너지가 전달 되기 때문에 멈춰 있던 공은 가속되고 다른 공은 급격하게 느려진다. 당구에서의 충돌은 탄성 충돌에 가깝다. 따라서 운동 에너지는 보존된다. 비탄성 충돌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로 분산된다.플라이휠은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는 운동 에너지가 회전 운동의 형태로 저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어떤 물리적 상황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뉴턴 역학에서의 mv 공식이 가장 적합하다. 하지만 물체의 속력이 빛의 속력에 가까워지면 상대론적인 효과가 나타나며 상대성 이론이 필요하게 된다. 만약 물체가 원자나 아원자 수준의 크기라면 양자 역학적인 효과가 두드러지며 양자 역학이 필요하게 된다.강체의 운동 에너지.고전 역학에서 점 입자 혹은 비회전 강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의 속력과 질량에 의존한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과 질량의 곱에 1/2을 곱한 것과 같다. 따라서이고, 여기서 formula_3은 물체의 질량 formula_4는 물체의 속력이다. SI 단위에서 질량은 킬로그램, 속도는 m/s로 측정된다. 그리고 운동 에너지의 단위는 이다.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80kg의 물체가 18m/s로 운동할 때 운동에너지를 계산하려고 한다면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을 던진다면 당신은 공을 가속시키기 위해 을 가할 것이고 그 공이 어떤 물체에 부딪히고 그 물체를 움직이게 한다면 부딪힐 때 공이 그 물체에게 일을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운동 에너지는 정지 상태에서 어떤 속력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이므로 알짜힘 x 변위 = 운동 에너지인 것이다. 즉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물체의 속력이 두 배가 된다면 운동 에너지는 네 배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차가 다른 동일한 질량의 차보다 두 배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고 하자. 두 차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 마찰력이 동일하다고 하면 속력이 두 배 빠른 차가 네 배더 많은 거리를 브레이크를 밟아야 완전히 멈출 수 있다. 이는 감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네 배인 것을 의미한다.물체의 운동에너지는 또한 과도 관계가 있는데 이는 다음을 만족한다.여기서, formula_8는 물체의 운동량, formula_3은 물체의 질량이다.의 선형 운동에서의 운동 에너지 또한이다. 여기서 formula_3은 물체의 질량 formula_4는 강체의 의 속력이다.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에 의존한다. 하지만 에너지가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는 고립계에서의 전체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켓 엔진에서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는 화학 에너지는 기준계에 따라 우주선체와 배기 가스에 다른게 나뉜다. 이를 오베르트 효과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떤 기준계를 선택하든지 운동 에너지 연료의 화학 에너지 등을 포함한 전체 에너지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기준계를 따라 움직이는 서로 다른 관측자들이 관측한 전체 에너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기준계에 따라 계의 운동 에너지는 달라지는데 운동량 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기준계에서 측정할 때 운동 에너지는 최소값을 가진다. 이는 이 기준계에서 계의 총 운동량이 0이기 때문이다.극소 시간 의 과 같다. 따라서,이고 여기서 formula_14 라고 가정하였다. 내적의 성질을 이용하면이므로 질량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다음과 같다.따라서 이것은 전미분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적분]]하여 운동 에너지를 구할 수 있게 된다. 물체가 0초 일 때 정지해있다고 가정하고 0부터 t까지 시간에 대해 적분하면이다. 이 식은 운동 에너지가 과 같음을 의미한다. 또한 물체는 처음에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가정한다.회전체의 운동 에너지.강제 Q가 질량 중심을 통과하는 어떤 선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면 회전 운동 에너지가 존재하게 된다. 이는 움직이는 부분들의 운동 에너지 합과 같다. 따라서이 식에서 모멘트는 질량 중심을 통과하는 회전축에 대해 측정되어야 하며 각속도 또한 그 회전축에 대해 측정되어야 한다. 물체의 편심된 모양때문에 생기는 떨림 운동이 있는 물체의 관한 좀더 일반적인 식도 존재한다.계에서의 물체는 계와의 상대적인 운동에 의해 생기는 내적인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에서는 행성과 미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 가스 탱크 안에서는 분자들이 거의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때 계의 운동에너지는 계가 포함하는 모든 물체의 운동 에너지의 합이다.정지한 거시적인 물체(즉, 물체의 운동량 중심을 따라 이동하는 기준계)는 원자 또는 분자 수준에서 분자의 병진, 회전, 진동이나 전자의 병진과 스핀 또는 핵 스핀 등 때문에 운동 에너지 형태의 다양한 내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이들 모두는 물체 질량을 구성하게 된다. 거시적인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때 운동 에너지는 거시적인 운동에만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형태의 내적 에너지들은 물체의 질량, 관성, 전체 에너지를 구성하게 된다.한 물체의 속력 혹은 위치 에너지는 계에 의존적이며 어떤 를 선택하든 음수가 아닌 값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측자 옆으로 총알이 지나간다고 해보자. 그럼 총알은 관측자의 기준계에서 운동 에너지를 갖게 된다. 이번엔 관측자가 총알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고 해보자. 그럼 그 관측자의 기준 계에서 총알의 운동 에너지는 0이 된다. 한편, 계의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한 어떤 관성계를 선택하든 전체 운동 에너지가 0이 되도록 할 수 없다. 즉, 관성계를 정했을 때 그 안에서 모든 물체가 정지한 상태가 아니면 전체 운동 에너지는 0이 아닌 최소값을 가진다.계의 전체 운동 에너지는 관성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운동량 중심을 기준계로 하였을 때 전체 운동에너지와 같거나 혹은 전체 질량이 질량 중심에 집중 되었을 때 그 전체 질량이 갖는 운동 에너지와 같다.이것을 간단히 나타내보자. formula_25를 어떤 기준계 의 상대적인 속도라고 하자. 그런데,이다. formula_28를 질량 중심 기준계에서의 운동 에너지라고 한다면 formula_29는 단순히 전체 운동량이 될 것이고 이것은 질량 중심 기준계에서 정의에 의해 0이 된다. 그리고 formula_30는 전체 질량이므로 다음을 얻는다.그러므로 계의 운동에너지는 운동량 중심 기준계 즉, 질량 중심이 정지해있는 기준계에서 최소값을 가진다. 이외에 다른 기준계에서는 질량 중심의 속력으로 이동하는 전체 질량에 해당하는 추가적인 운동 에너지가 존재한다. 운동량 중심 기준계에서의 계의 운동 에너지는 불변량이다.가끔 물체의 운동 에너지를 물체 질량 중심의 병진 운동 에너지와 질량 중심에 대한 회전 에너지로 나누는 것은 편리한 방법이다. 즉,이고 formula_33는 전체 운동 에너지 formula_34는 병진 운동 에너지 formula_35은 질량 중심을 관통하는 선을 회전축으로 하는 회전 운동의 에너지이다.강체의 상대론적 운동 에너지.만약 물체의 속력이 에서 선형 운동량의 표현은 고전 역학에서와 다르다.물체의 [[불변 질량|정지 질량]]을 formula_3, formula_37와 formula_4를 각각 속도와 속력, formula_39를 진공에서의 빛의 속력이라고 한다면 선형 운동량은이고 formula_43 이므로이다. formula_45는 이다. 표현을 간단히 하면이다. formula_45는 formula_48일 때 formula_49인 것을 대입하면이다. 이 공식에 의하면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도록 가속할 때 필요한 일의 양이 무한대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물체를 빛의 속도 보다 빠르게 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이 식의 부산물은 바로 -정지한 물체는 formula_52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가지고있다-이다.formula_53일 때 상대론적 운동 에너지는 고전 역학에서의 운동 에너지와 거의 일치한다. 이것은 이항근사나 의 앞 두 항만을 취할 때 얻을 수 있다. 즉따라서 낮은 속력에서 전체 에너지 formula_55는 정지 질량 에너지 더하기 뉴턴 운동 에너지로 나뉜다.빛보다 매우 낮은 속력으로 운동할때(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운동) 첫 테일러 전개의 첫 두항이 지배적인 값을 차지한다. 테일러 전개의 다음항까지 근사를 하면인데 여기서 맨 오른쪽 식의 두번째 항은 낮은 속력에서 매우 작다. 예를 들어 10km/s로 운동하는 물체의 경우 두번째 항은 0.0417J/kg이다. 100km/s 일때는 417J/kg이다. 따라서 첫번째 항에 비해 매우 작은 값을 가짐을 알 수 있다.상대론에서 운동 에너지와 운동량의 관계는로 주어진다. 이 또한 테일러 전개를 할 수 있으며 첫번째 항이 뉴턴 역학에서의 표현과 일치한다.양자 역학에서의 운동 에너지.에서 하나의 항으로 나타나며 좀 더 기본적인 연산자인 운동량 연산자 formula_58를 사용하여 정의된다. 운동 에너지 연산자를 formula_59라고 하면이다. 이는 고전 역학에서 운동 에너지와 의 관계와 유사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에서 formula_58는 각각의 위치 좌표에 대해 미분을 취한 형태인 formula_63이며 따라서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운동 에너지 기대값 formula_65는 각 전자의 운동 에너지 기대값의 합이다.formula_67는 전자의 질량이며 formula_68는 i번째 전자에 대한 라플라시안이다.양자 역학에서 [[밀도범함수 이론|밀도범함수]] 형식화(formailsm)에서는 오로지 전자 밀도에 대한 정보만 필요로한다. 다시 말해서 보통 파동 함수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자 밀도 함수를 formula_69라고 하면 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운동 에너지 범함수는 알 수 없지만 1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formula_71는 의 운동 에너지 범함수이다.입자의 운동 에너지.열을 가진 모든 입자 또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T" 에 비례한다. 즉와 같다. 여기서 은 이다. +가타카나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음절 문자 중 하나이다. 히라가나와 함께 가나라고 부른다. 가타카나는 해당하는 음을 갖는 한자의 일부분을 가져와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한문을 뜻으로 읽기 위해 신라의 각필구결 일부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가타카나를 히라가나보다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라 일본 유아들이 가나를 배울 때 히라가나를 먼저 배운 뒤에 가타카나를 배우고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쓴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한영 자판 상태에서 가타카나 입력을 하려면 ㅃ+한자 키를 써야 한다. 히라가나가 ㄸ과 한자 키의 조합 방식과 유사한 개념이 될 수도 있다.일본어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 쓰인다.이밖에도 일본에서 어떤 항목들을 열거할 때 그 순서를 구별해 나타내는 기호 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 이로하순 대로 적는 경우가 많다.과거 메이지 유신기부터 태평양 전쟁기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제국 시대에 작성된 공문서와 법령은 무조건 가타카나와 한자만 사용하도록 하였다.가타카나라는 말 자체는 '片仮名'라는 한자 표기로 되어 있으나 이를 다시 가타카나로, 즉 ''라고 적는 경우도 있다. 또 'v'음을 나타낼 때 쓸 수 있는 가나는 가타카나의 '' 뿐이며, 그 활용형인 ', , , ' 역시 가타카나로만 적을 수 있다.한편 일본어 이외에도 아이누어를 표기할 때 주로 사용되며 과거 일제 점령기의 대만에서도 대만어를 표기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대만어는 한자 내지는 알파벳 표기법을 따라 쓰이고 있다.로마자 표기는 헵번 표기법을 한글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의 어중/어말 표기법을 따랐다. 회색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들 또는 사용이 드문 글자들이다.고대 일본에서 한자의 일부 획을 따서 문자로 삼은 것은 일찍이 7세기부터였으나, 오늘날 가타카나의 직접적 기원은 9세기 초 나라 지방의 고종파 에 속한 학승들이 불경에 쓰인 한문을 일어로 훈독하기 위해 만든 글자 체계에서 비롯됐다. 이들이 만든 글자는 한문 옆에 작게 붙여 쓰는 일종의 훈점 으로, 한자음만 빌려 쓰는 만요가나의 일부 획을 다시금 생략하여 만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의 왼쪽 부분을 따서 만들었다. 초창기만 해도 경전의 각 행간 여백에 오코토텐 과 같이 쓰였으나 점차 빠르고 조그맣게 적기 위해 형태의 간략화가 이뤄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 쓰는 가타카나의 원형이 된 것은 물론, 오코토텐의 역할을 대신하여 훈독에 널리 쓰이기에 이르렀다.가타카나는 그 유래에서 짐작되듯이 승려나 박사들이 한자의 음과 훈을 주기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가 많았으며 꽤 초창기부터 현대 일본어처럼 한자와 가나를 번갈아 쓴 사례도 발견된다. 나중에는 한문의 주석 역할을 벗어나 노래 가사집이나 이야기집과 같이 일상 속 필기에도 쓰이는 등 사용 범위가 넓어졌지만 히라가나로 쓰인 글이 미적 가치를 평가받고 감상하는 수준에 이른 것과 비교하면 아직까지 기호적인 성격이 강했다. 초창기 가타카나는 그걸 쓰는 개개인과 집단마다 글꼴의 차이가 컸고 1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체자 의 종류가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글꼴이 통일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모습에 가깝게 되었다.가타카나가 히라가나와 같은 하나의 문자 체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 시대 중기이다. 이때 쓰여진 <우쓰호모노가타리> 에서 보이는 서술은 기본적으로 허구인 이야기에서 쓰인 특수한 사례이며 실제로는 가나 를 아릅답게 쓸 수 있게 배우는 것이 당대 여성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메이지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서양 외래어 유입에 따라 그 활용 빈도가 한층 높아졌으며, J. C. 햅번이 지은 일영사전인 <일영어림집성> 의 도표에서 메이지 초의 가타카나 글꼴을 찾아볼 수 있다. 1900년 소학교령 시행 규칙으로 한 소리 한 글자라는 원칙에 따라 표준 글꼴만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 지금의 가타카나가 확립되었다. 한편 가타카나는 히라가나에 비해 학문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보다 정식적인 문자로 취급되어 법령과 기타 공문의 표기 문자로 쓰였고, 교육상으로도 히라가나에 앞서 가르쳤다. 그래서 이 당시 교과서를 보면 가타카나와 한자로만 서술된 것이 많다. 하지만 신문이나 문예집 등 민간 분야에서의 서술법에까지 가타카나 사용이 강제되진 않았다. +위상수학과 기하학에서, 다양체는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과 닮은 위상 공간이다. 즉, 국소적으로는 유클리드 공간과 구별할 수 없으나, 대역적으로 독특한 위상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음이 아닌 정수 formula_1에 대하여 formula_2차원 국소 유클리드 공간 formula_3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이다.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네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을 다양체라고 한다.만약 어떤 위상 공간 formula_3가 formula_13차원 다양체이자 formula_2차원 다양체이며 formula_15이라면 formula_3는 공집합이다.모든 ���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모든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모든 콤팩트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양체이다.국소 유클리드 공간 formula_17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모든 제2 가산 다양체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모든 파라콤팩트 분해 가능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낮은 차원의 다양체의 분류.위상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위상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다양체의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다양체가 아닌 국소 유클리드 공간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비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다양체는 제2 가산 공간이 아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다양체에 대하여 제2 가산 공간인 것은 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것과 동치이다.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은 현대그룹을 창업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전직 정치인이다.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였던 1940년대 초반 시절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뛰어난 상업과 기업경영능력으로써 현대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다.1992년 초 김동길 등과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선출되었으며,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해 12월에 제14대 대선에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듬해 2월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을 추진하였다. 1998년 6월 16일을 기하여 1차 소 500마리, 10월 27일 2차 소 5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와 함께한 동창생은 27명이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 이 유일하다.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사실 상대적으로 보면 대충 4% 안에는 들었다.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3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만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 중구 신포동(도로명신포로)에 위치한 인천항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부기를 할 줄 아는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아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여사를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경일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경일상회 는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복흥상회를 폐업해야 했다.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계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창업 전반기와 전후 복구 사업.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중공업에도 진출하였다.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 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197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차남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되어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1978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여, 1969년 1월에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74년 6월에는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의 한사람에 선출되었고, 1970년대 중근동 지역 ���설, 개발 사업을 성사시킨 뒤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1977년부터는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제13대 회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아프리카 친선협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되었다.올림픽 유치 추진 활동.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주도로 88 올림픽의 서울특별시 유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1년 3월에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조직되자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 설득 작업을 추진했다.1981년 11월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고,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서울올림픽 사전 준비와 86 아시안게임 사전 준비활동을 추진하였고, 1982년부터 1987년에는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에 선출되었다.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그해 5월에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그해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92년 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김영삼과의 경쟁구도 때문에 생긴 감정 때문인지 김영삼 정권 아래서는 별 다른 행적이 없다가, 이후 김대중정권을 적극 도우며 방북을 한다던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6년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의 한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1994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방북과 금강산 개발.그러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가 실시한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정부의 햇볕정책을 따른다는 뜻 외에도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이 남한이 아닌 북한영토인 강원도가 고향이라는 사실도 북한에 소를 가져간 이유이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을 성사시켜 그해 11월 18일 첫 출항하였으나 북한의 사업장 몰수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년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다. 한편 현대그룹은 각기 분산되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한편 정주영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아내 변중석이 입원해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나중에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그의 사후인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1992년 11월에는 MBC 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진행자의 한사람인 최병서가 사회 저명인사를 흉내 풍자할 때 그의 성대 모사와 함께 풍자를 하기도 했다. 1992년 12월에도 14대 대통령 선거를 전에 두고 다른 대통령후보자들과 함께 최병서의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했다.현대그룹 회장으로 재직시 아들들과 함께 평소에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에 위치한 현대그룹 본사까지 걸어서 출근하였다. 평소에 일찍 기상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매일 아침 6시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아침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주로 미역국을 준비했으며 이 때문에 현대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2004년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가 제작되었다.2021년 아산사회복지재단은 20주기를 맞아 자서전 독후감 대회를 개최했다. 책에 담긴 기업가 정신과 역경 극복 사례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함이며, 2021년 1월 5일부터 2월 25일까지 접수 후 3월 중에 시상이 진행된다. 시상은 중/고등학생 부문, 대학생/대학원생/일반 부문 총 2개 부문으로 나뉘며, 총 49명을 수상한다. +마틴 가드너는 미국의 과학 저술가이다. 특히 유희수학 분야의 저술로 이름이 높다.오클라호마주 털사 태생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유희수학 분야를 집대성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수학을 비롯한 과학뿐 아니라 마술 문학 유사과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져 6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제임스 랜디와 함께 회의주의 운동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미국 노스캐럴라이나 주의 헨더슨빌에 만년을 보내다가 2010년 5월 22일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노먼에서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그는 미국의 대중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 1956년부터 1981년까지 수학 게임 컬럼을 연재하였다. 그가 연재를 그만둔 후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컬럼을 물려받았는데 마틴 가드너에 대한 존경의 뜻에서 의 애너그램인 란 콘퍼런스를 열기도 한다.그는 자신의 컬럼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주제들을 대중에 소개하였다.65권의 책을 썼으며 초정상주장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이비과학을 반박하는 책과 글을 다수 발표했다.프리먼 존 다이슨은 영국 태생의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양자전기역학의 이론적 기반을 닦은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저명한 물리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평생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프리먼 다이슨은 1923년 12월 15일 영국 버크셔주 크로손에서 태어났다. 1936년에서 1941년까지 윈체스터 칼리지를 다녔다. 18살이던 1940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아래에서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입대하여 20살의 나이에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에서 분석가로 일했다. 전쟁이 끝나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7년에는 두 개의 정수론 논문을 출판했다.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47년부터 코넬 대학교 박사과정에 등록하여 한스 베테의 지도 아래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연구에 뛰어들면서 이후 평생 동안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프리먼 다이슨의 가장 널리 알려진 학문적 업적은 양자장론의 이론적 기반을 닦은 작업들이다. 그는 1949년에 양자전기역학을 기술하는 두 가지 방법 즉 리차드 파인만의 파인만 도표를 이용한 경로적분과 줄리안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제안한 연산자 계산이 동치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파인만 도표를 가지고 재규격화 계산을 구현한 논문을 최초로 썼다. 또한 다이슨 급수라는 기법을 발명했으며 이것은 워드-다카하시 항등식으로 확장되는 기반이 되었다.1957년부터 1961년까지는 핵추진기를 이용한 우주비행 계획인 오리온 계획에 참여하였다. 시험 기종은 보통의 폭발물을 사용했으나, 우주에서의 ��무기 사용 금지 조약에 의해 계획은 중도에 파기됐다. 이후 제러드 오닐이 설립한 우주학 연구소에서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생애의 후기에 다이슨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항성계의 태양을 완벽히 둘러싸 항성에서 나오는 복사 에너지를 완전히 사용하고 바깥쪽으로는 적외선을 복사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르면 밤하늘에서 적외선을 복사하는 거대한 물체를 찾아보는 것이 외계 문명체를 탐사하는 SETI 계획의 한 방법이 된다. 다이슨은 복사 차폐물로 자그마한 운석들의 구름을 생각했지만 과학 소설에선 이어진 고체 구조물이 선호되어 왔다. 이러한 상상 속의 구조를 다이슨 구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다이슨 나무라는 것도 제안했는데 이는 유전자 조작으로 혜성에서도 자랄 수 있는 식물을 말한다. 다이슨은 혜성을 조작하여 내부에 생물이 숨쉴 수 있는 대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며 태양계 밖으로 인간을 보낼 수 있는 서식지를 조성할 수 있다고 했다.프리먼 다이슨은 2020년 2월 28일, 98세의 나이로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딸 에스더 다이슨은 기업가이자 투자자이다. 아들 조지 다이슨은 역사가로 과학사를 연구한다. +만프레트 아이겐은 독일의 생물리학자이다.괴팅겐 대학교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괴팅겐의 막스 플랑크 생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 1967년에는 매우 짧은 간격의 에너지 펄스로 유도된 극히 빠른 화학 반응에 대한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로널드 조지 레이퍼드 노리시 조지 포터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에는 영국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린 마굴리스는 미국의 생물학자로서 매사추세츠 대학 앰허스트 대학교의 지구과학과 교수이다. 세포 생물학과 미생물의 진화 연구,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굴리스는 미국항공우주국 우주과학국의 지구생물학과 화학 진화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NASA의 지구생물학에 관한 실험들을 지도하였다.마굴리스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의 기원을 진핵세포로 들어간 외부 조직 공생적 관계를 이루다 정착했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러한 세포 내 공생설은 당시 충격적인 가설로 생물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100여 종의 논문과 더불어 10여권의 책을 펴냈다.그는 영국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주창한 가이아 이론을 지지하며 가설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그는 또한 칼 세이건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도리언 세이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사람은 영장류의 일종이다. 지구상의 사람을 통틀어 인류(人類) 인간(人間 Human)이라고도 한다. 사람은 사유 언어 사용 자기반성 문제 해결을 쉽게 할 수 있고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지니고 있으며 이로써 인간은 개인이 스스로를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지적 심리적 능력과 함께 직립 보행을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팔을 이용해 다른 종보다 훨씬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은 2019년 12월 기준으로 약 73억 명으로 추산된다. 사람은 현재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대륙에 살고 있으며 이 중 약 85%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프로-유라시아 구세계)에 살며 나머지 15%는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신대륙)에 살고 있다.대부분의 고등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자기표현, 생각의 교환, 사회적 조직화를 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비롯한 의사소통 체계를 이용하는 데 능숙하다. 사람은 XY면 수컷, XX면 암컷이다. 즉, 조류 등과 달리 정자에 의해 성별이 결정되는 동물이다.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태동한 단일 종이 전 세계로 이주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 여러 대륙에서 동시에 인류가 진화했다는 다지역 기원설 등이 있다. 오늘날에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비롯한 여러 과학적 증거를 통해 학계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사람은 다른 동물보다 지식의 축적면에 있어서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문명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기원전 수천 년 무렵에 황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강 등에 최초의 도시와 초기의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외에 세계 곳곳에서 특징적인 문화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명의 발전은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몽골 제국와 같은 거대한 제국을 이루기도 하고 자금성 피라미드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적인 문화 유산을 남기기도 하였다. 인류는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에 의한 파괴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원자폭탄과 같이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무기를 만들어 이용하기도 하였다.문화는 예절 의상 언어 종교 의례 법이나 도덕 등의 규범 가치관과 같은 것들을 포괄하는 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다른 동물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이다.사람은 대부분 여러 개체가 모여 살며 이러한 군집을 사회라고 한다. 사회의 단위는 작게는 가정 또는 가족에서 크게는 국가로 나뉜다. 서기 2012년 기준으로 세계에는 200여 개의 국가가 있다.이러한 군집 생활에서 사람은 서로를 구분하고 부르기 위해 사람마다 이름을 부여한다. 또한 이름과 함께 자손을 따라 대대로 이어지는 공통의 이름인 성씨가 사용되며 이를 통해 혈통을 구분하거나 서로 호칭을 한다. 성씨는 남성 쪽을 따라 이어지는 부계성이나 여성 쪽을 따라 이어지는 모계성이 있으며 부계성과 모계성을 모두 갖거나 아예 성씨를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사람은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 남녀가 짝을 이루며 이를 결혼이라고 하는데, 문화권에 따라 다르나 한 쌍의 남녀가 짝을 이루는 일부일처제와 한 남성과 여러 여성이 짝을 이루는 일부다처제가 흔하고 이외에 한 여성과 여러 남성이 짝을 이루는 일처다부제, 여러 남성과 여러 여성이 짝을 이루는 다부다처제의 경우도 나타난다.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언어와 문자를 이용하며 이는 사람의 사회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분류에 따라 다르나 대략 6천여개로 알려져 있는데 점차 쓰이지 않는 언어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언어를 표기하고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체계는 5천년 전부터 쓰여온 것이 확인된다.1977년 보이저 1호에 실려 우주로 보내진 보이저 금제 음반에는 115개의 그림과 파도, 바람, 천둥, 새와 고래의 노래와 같은 자연의 소리,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의 음악, 55개의 언어로 된 인삿말이 실려 있다. 이는 외계의 생명체에게 보내는 인간에 대한 안내서다.키(신장)는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 성인의 경우 보통 남자는 160 cm~195 cm 여자는 145 cm~175 cm 정도이다.직립보행으로 이동하며 손을 사용하여 물건을 이용하거나 여러 가지 일을 한다.뇌의 무게는 태어날 때는 약 300g이고 만 5세 무렵에 성인의 뇌 무게인 1300~1400g에 이른다. 성인 기준으로 몸무게에 대한 뇌 무게의 비율은 약 2%이다.털은 퇴화되어 피부 부위에 따라 털이 없거나 매우 짧아 피부를 완전히 덮지 못한다. 단 머리 윗부분 겨드랑이 생식기 주위에는 각각 머리카락 겨드랑이 털 음모가 나 있는데 이 털은 피부를 덮을 만큼 길고 많다. 머리카락은 어린이 시기부터 있으나 겨드랑이 털과 음모는 이차성징 이후로 자란다. 또한 이차성징 이후로 남자에 한해서 입술과 턱 주변에 수염이 난다. 털의 색깔은 검정 갈색 금색 붉은색 등으로 다양하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이르면 점차 멜라닌이 퇴화되어 흰색으로 바뀐다.야행성이던 원시 영장류가 주행성으로 바뀌면서 청각보다 시각에 의존하게 돼 귀를 움직이는 능력은 쇠퇴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이 낯선 소리를 들었을 때 귀 주변 근육으로 향하는 신경반응의 강도는 씹기, 미소 짓기, 의도적으로 귀 움직이기 등을 할 때보다 10분의 1∼100분의 1 수준 정도로 약했지만, 사람도 다른 동물처럼 무의식적으로 귓바퀴를 관심 있는 소리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사람의 평균 수명은 86세 정도이며 보통은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긴 편이다. 인간의 성에 따라 나뉘는 남성과 여성은 성행위를 통해 생식하며 성행위를 통해 수정된 배아는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 임신 기간을 거친다. 보통 한 번에 하나의 태아를 임신하며 드물게 둘 이상의 태아를 동시에 임신하기도 하는데 이를 쌍둥이라고 한다. 임신기간은 38주 로 이 기간을 지난 태아는 출산과정을 거쳐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영아가 된다. 영아기의 사람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하며 젖을 떼는 시기는 개체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략 생후 1년에서 6년 사이의 사람을 유아라고 하며 이 시기에 기초적�� 언어 습득이 이루어진다. 이후 대략 만 20세까지는 그 초기를 어린이 또는 소년 후기를 청소년이라고 하며 이 시기에 대부분의 외형적 성장이 끝난다. 또한 이 시기에 이차성징이 일어나 남성과 여성의 외형적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며 초경이나 사정 몽정을 경험하는 등 생식 능력을 갖추게 된다.이후 대략 만 20세에서 만 40세 사이를 청년 대략 만 40세에서 만 50세 사이를 장년 대략 만 50세에서 만 60세 사이를 중년 만 60세를 넘어서면 노년이라고 하나 이러한 시기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장이 끝난 사람은 청년기 이후로 조금씩 노화되기 시작한다. 중년에서 노년 정도가 되면 노화의 결과로서 신장의 축소 각종 감각 기관들의 둔감화 생식 능력의 감퇴 등의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생식 능력의 경우 남성은 늦게는 70세 이후까지도 생식이 가능하나 청년기를 정점으로 고환에서 생성되는 정자의 수와 운동능력이 점차 감소하기 때문에 임신 성공 가능성도 같이 떨어지며 여성은 중년기 에 폐경이 일어나 난자의 배란이 중지되므로 이후 생식이 불가능하게 된다.사람은 주행성 동물로 대개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잔다.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지는데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자며 성인은 하루에 대략 6시간 ~ 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하며 사람에 따라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현대인은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의 3가지를 기본요소를 필요로 하고 이외에도 사회로의 적응과 능력 향상을 위해 교육도 필요로 한다. +아놀드 알로이스 슈워제네거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의 배우 보디빌더 정치인이다.배우가 되기 전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보디빌더로 활동했으며 38대 캘리포니아 주지사이기도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 보디빌더로서는 전설적인 존재이며 그의 이름 자체가 근육질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오스트리아 태생의 헐리웃 근육질 배우. 20살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보디빌딩대회 미스터 올림피아를 7번이나 우승했고 전성기는 <코난> 으로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속편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터미네이터> 샤론스톤과 공연한 <토탈리콜> <터미네이터2> 와 <트루 라이즈>에서 인기의 정점을 찍었었다. 스탤론과 비슷한 나이 이미지로 항상 비교되던 액션배우. 47년생 188센티.슈워제네거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탈에서 오스트리아 헌병 부사관 출신으로 지역 경찰서장이었던 구스타프 슈바르체네거의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961년 보디빌더가 됐으며 1970년까지 미스터 유니버스 1위 5회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미스터 올림피아 1위 7회 등 역대 최다 우승 타이틀을 얻었다. 병역은 무거운 물건을 들어나를 기회가 많다는 이유로 전차병으로 이행했으며 실제로도 전차 조종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1968년 미국 이민 후 1983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본래 이중국적을 허락하지 않아 다른 국가로 귀화한 오스트리아 시민권자들은 국적을 포기해야 하지만 슈와제너거는 미국 시민권 취득 전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 오스트리아 국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로 불리던 슈워제네거는 1973년 기네스북에 에 기록되기도했다. 어렸을 때 보디빌더 출신 영화 배우 레그 파크가 헤라클레스 영화에 나오는 걸 보곤 그를 롤모델로 삼고 보디빌더를 시작했다고한다.1969년 <뉴욕의 헤라클레스>로 데뷔했으나 초기 10여년간은 배우로서는 무명의 시간을 보냈다. <터미네이터> 로 할리우드에서 인기배우로 자리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1988년 1990년 1991년 1994년 1996년 1997년 2000년 2003년 가 되어 본인 스스로가 최고 기록인 자신의 기록을 또다시 갱신하는 등 헐리우드에서 수 십년간 1인자의 위치를 지켜왔다. <> 는 슈워제네거에게 최고의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로 꼽힌다. 액션 장르에만 만족하지않고 <트윈스> <유치원에 간 사나이> <솔드 아웃> 등의 코미디와 <배트맨과 로빈> 의 악역에도 도전하여 모두 크게 성공하여 배우로서의 연기의 폭을 넓혔다.원래 슈워제네거는 레드 소냐를 촬영하면서 만난 브리짓 닐센과 ���인 사이였으나 평소 슈워제네거는 미국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탓에 브리짓 닐센과 결별하고 1986년 존 F. 케네디의 조카이자 NBC의 유명 언론인이자 기자인 민주당파 마리아 슈라이버와 9년 동안 연애 끝에 결혼했다.슈워제네거는 사업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하다. 1989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상금이 주어지는 보디빌딩 대회 에 선정되었으며, 美의회 도서관에 영구 보존되기 시작했다. 2008년 미대선에선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을 공식지지했다. 슈워제네거는 2010년 12월 17일 LA Times 인터뷰에서, 퇴임후 오바마 행정부에 입각할 의사도 있다고 말했다. 8년간의 주지사 임기 중에는 몇몇 영화의 카메오 출연을 제외하곤 를 비롯하여 모든 영화의 제의를 거절해왔다.정치성향은 중도우파 성향으로 여겨진다. 또한 녹색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민주당과 연대하여 친환경주의 정책들을 기용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스웨덴 출신 10대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와 독대를 가지기도 했다.2011년 1월 4일 주지사에서 퇴임하였고, 다시 헐리우드 복귀를 공식 선언했는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5탄과 6탄을 비롯하여 30여편의 제의를 받아 기나긴 공백과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해 5월 일명 '가정부 스캔들'로 이혼 소송제기를 받았는데 재산이 7500억원 정도로 이는 이전까지의 역대 최고의 위자료 액수였던 마이클 조던의 기록도 훨씬 뛰어넘는 신기록이였으며, 헐리우드 최고의 갑부로 드러났다. 첫 컴백작 <라스트 스탠드> 촬영에 앞서 친구 실베스터 스탤론의 요청에 따라 <익스펜더블 2> 에 카메오로 4일간 촬영했는데 그 대가로 1천만달러를 받았다. 2012년 8월에는 스스로 2천만 달러를 기부하여 "남가주대 슈워제네거국가 및 국제 정책 연구소"를 설립하여 고문위원회 회장과 교수가 되었다. 같은해 8월, 'The Sun'지는 "최고의 액션 히어로는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했고, 슈워제네거가 '최고의 액션 히어로' 에 뽑혔다. 2013년 1월 개봉의 김지운 감독의 헐리우드 진출작으로도 화제가 됐던 <라스트 스탠드> 와 실베스터 스탤론과 공동 주연을 맡은 <이스케이프 플랜> 등을 시작으로 다시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 본격 복귀하였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새로운 리부트 3부작의 첫번째 영화 <> 에 주인공 터미네이터로 돌아오는데, 이는 지난 2003년 개봉한 블록버스터 <> 이후 12년 만이다.2015년 1월 26일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차지한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일종의 자유문서를 위한 저작권 라이선스의 한 형태로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GNU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착안되었다. GFDL에 따라 만든 문서는 자유롭게 복사 수정 재배포가 가능하며 2차 저작물 역시 GFDL을 따라야 한다. GFDL을 따르는 문서는 기본적으로 무료로 배포되지만 대량으로 제작된 경우 유료로 판매될 수도 있다. 현재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에 따라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가장 큰 프로젝트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 바로 위키백과다. 위키백과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와 GNU 자유 문서의 2중 라이선스를 따른다.사용 허가서는 소프트웨어의 문서와 다른 이와 유사한 지침서를 대상으로 한다. 이 허가서에 따르는 모든 문서의 복사 및 변경은 역시 이 사용 허가서의 규준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복사 및 변경된 소프트웨어나 자료는 다시 변경되거나 배포 및 판매될 수 있다.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1999년 말 의견 수렴을 위한 초안이 발표되었으며 검토와 수정을 거쳐 1.1 버전이 2000년 3월에 1.2 버전이 2002년 11월에 1.3 버전이 2008년 11월 3일에 공표되었다. 현재의 최종 버전은 1.3이다.다른 라이선스와의 호환성.여기서의 이라는 의미는 다른 라이선스의 저작물을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는 저작물과 섞어 쓸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CC-BY-SA와의 호환성.두 허가서가 비슷한 저작권 방침을 가지고 있지만 GFDL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와 호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1.3판에서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고 있는 특정 웹 사이트의 저작권을 CC-BY-SA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이 예외 조항은 다음의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GFDL 기반의 다중 저자 협력 프로젝트 사이트 에서 CC-BY-SA-3.0으�� 변경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라이선스의 재허용을 허가하는 11장의 조항은 2009년 8월 1일 이후에는 효력이 상실된다.GPL과의 비호환성.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와 호환되지 않는다.또 다른 자유 콘텐츠 사용 허가 유형.아래 목록들 중 몇 가지는 GNU FDL과는 별개로 발전해 온 것들이다. 그리고 몇 가지는 GNU FDL의 결함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GNU는 운영 체제의 하나이자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모음집이다. GNU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이 GNU 프로젝트의 GPL로 라이선스된다.GNU는 "GNU's Not Unix!"(GNU는 유닉스가 아니다!)의 재귀 약자이며 이렇게 선정된 이유는 GNU의 디자인이 유닉스 계열이지만 자유 소프트웨어인 점과 유닉스 코드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을 두려는 것이다. GNU 프로젝트에는 운영 체제 커널인 GNU HURD가 들어있는데 원래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에서 거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그러나 허드(Hurd) 커널이 아직 산업용으로 사용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서 그 대신 GNU가 아닌 커널(리눅스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을 GNU 소프트웨어와 함께 사용할 수 있다. 현재 GNU와 LINUX를 결합하여 너무나 많이 사용되므로 이 조합을 짧게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으며 GNU/LINUX라고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삽화에 나와있는 GNU는 생물의 종 이름이다.프로젝트의 창립자 리처드 스톨먼은 GNU를 "사회에 대한 기술적 수단'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Lawrence Lessig는 스톨먼의 책 제2판에서 스톨먼은 소프트웨어의 사회적 관념과 어떻게 자유 소프트웨어가 공동체와 사회 정의를 조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썼다고 언급하였다.오늘날 GNU의 안정판은 리눅스 커널이 포함된 GNU 패키지로 구성되어 동작하며 기능적인 유닉스 계열 시스템을 만들어준다. GNU 프로젝트는 이를 GNU/리눅스로 부르며 제공되는 기능들은 다음과 같다GNU 자유 시스템 배포 가이드라인.GNU 자유 시스템 배포 가이드라인(GNU Free System Distribution Guidelines, GNU FSDG)은 GNU/리눅스 배포판과 같은 설치 가능한 시스템 배포판이 자유적인 특성이 있고 배포판 개발자들이 배포판들을 해당 특성에 맞출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 배포 약속이다.GNU 프로젝트가 GNU 운영 체제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을때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의 결과물 카테고리인 자유 소프트웨어 디렉터리에서 보이는 것과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추구하고 있는 바가 운영 체제의 핵심인 커널 즉 GNU 허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러한 소프트웨어적인 면과 하드웨어적인 면을 통해 온전한 자유로운 운영 체제를 만드는 것이 GNU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한다면, GNU Hurd는 하드웨어를 통괄 제어하는 GNU 운영 체제의 커널이 되겠다. +셀빅(CellVic)은 대한민국에서 생산했던 PDA의 일종이며, jTel에서 개발하였다. 후일 코오롱이 인수한 후 Cellvic으로 개명되었다.jTel은 팜 파일럿을 벤치마크하여 한국 내 환경에 맞게 자체 O/S를 제작해 한국 내 최초의 PDA OS로서 의의를 가졌다.jTel은 1년에 4회의 애플리케이션 공모전을 통하여 애플리케이션 확보에 박차를 기했으며, 개인개발자에 대한 지원과 이에 힘입은 개인개발자들의 노력으로 다수의 애플리케이션을 확보하였다. 또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대표적인 커뮤니티로는 CoolView(후에 상표등록 문제로 셀북으로 개명됨) 제작자인 연승훈씨가 운영하는 kcug.net(현재 운영중단)을 들 수 있다.셀빅은 팜 파일럿에 비하여 대한민국 기업의 제품인만큼 한글 지원은 원활하였다. 세계 최소, 최경량 PDA인 CellVic i부터 휴대폰과 카메라 모듈탑재가 가능한 CellVic XG, 더 발전된 형태로서 스마트 폰 mycube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으나, 코오롱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 PocketPC를 탑재한 스마트폰의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끝내 2004년부터 더 이상 후속 지원을 중단하였다.밀러 실험 혹은 밀러-유리 실험()은 초기 지구의 가상적인 환경을 실험실에서 만들어 그 조건에서 화학진화(chemical evolution)가 일어나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실험이다. (오파린과 홀데인의 가설에 따르면 원시 지구는 무기 화합물이 유기화합물로 합성되기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유리-밀러 실험은 이 가설을 검증하려 했다.) 이 실험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전적인 실험으로 여겨��며 1953년 시카고 대학의 스탠리 밀러와 해럴드 클레이턴 유리가 처음 실행했다.실험에는 수증기, 메테인 , 암모니아 , 수소 가 사용된다. 화학물질들은 살균된 유리관과 플라스크로 이루어진 루프형의 실험기구 안에 밀봉된다. 실험기구 중에 플라스크 하나에는 물이 반쯤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에는 한 쌍의 전극이 들어있다. 물은 가열하여 기화시키고, 수증기가 포함된 내부 공기중에 불꽃을 튀겨, 자연의 번개를 흉내낸다. 그리고, 다시 공기는 식혀져서 수증기는 물이 되고 처음 플라스크로 돌아가는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일주일 동안 계속 실험을 행한 결과, 유리와 밀러는 10 ~ 15%의 탄소가 유기물질로 합성되어 있는 것을 관찰하였다. 더욱이, 2%의 탄소는 살아있는 세포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에 몇 종류의 형태라는 결과도 얻었다.결론적으로 밀러는 원시대기의 조성을 기초하여 원시지구의 모형을 만들고 결과 반응을 조사하는 것이 연구의 테마였다.생성된 분자들은 완전한 살아있는 생화학적 시스템을 이루기에는 상대적으로 모자란 단순한 유기물질이었다. 그러나 실험은 이미 있는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고 자연적인 과정만으로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립시켰다.이후의 연계 실험들.스탠리 밀러는 이후에 원시대기에 관한 연구를 좀더 진행하여,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하였으며, 사망시까지 연구에 손을 놓지 않았다. 밀러가 사망한 뒤 그의 제자이자 오랜 동료였던 제프리 베다 교수는 밀러의 유품에서 1950년대 실험에서 얻은 물질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담긴 박스를 발견했다. 최신 분석 장비로 이 물질의 조성을 분석한 결과 당시 밀러가 확인했던 것보다 더 많은 유기분자가 들어있음을 확인해 2008년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2008년, 제프리 베다 교수는 화산 분출의 구조와 스파크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더 많은 아미노산이 발견됨을 보여주었다. 이 실험에는 고출력의 액체 크로마토그래피와 질량분석기등이 이용되었다.그 결과 22가지 아미노산, 5 종류의 아민을 비롯한 수많은 수산화물이 생성되었다.이 실험은 2010년에 황화수소 스파크 실험으로 재현되었으며, 발견된 아미노산은 아래에 표기한다.폭스의 실험으로 아미노산 같은 간단한 유기물은 폴리펩타이드, 핵산과 같은 복잡한 유기물로 합성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밀러(Miller, S.)와 유리(Urey, H.)의 실험은 오파린(Oparin, A. I.)과 홀데인(Haldane, J. B. S)의 원시 수프 모델에 의한 화학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일부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들.한국창조과학회 등의 운동 단체들이 밀러의 실험에는 오류들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타당한 근거는 없으며 모두 반박되었다.1. 이들은 원시 대기 환경이 수소 메테인 암모니아 등 환원성 기체가 아닌 질소 와 이산화탄소 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페리스 박사와 첸박사가 원시 대기의 재료로 산화성 대기를 사용했고 그 결과 아미노산은 생성되지 못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2. 이들은 원시 지구암석에서 발견된 산소 또한 원시 대기에 포함이 된다면 밀러의 실험대로 아미노산이 생성되어도 금방 파괴되어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원시대기에는 풍부한 산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하지만 이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된다.3. 이들은 원시대기에는 오존층이 없었기 때문에 대기중에서 합성된 유기물에 자외선이 쪼여지면 복잡한 분자들이 파괴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 역시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되었다.1. 밀러의 실험에선 L-형 아미노산과 D-형 아미노산 두 가지가 생성되었다. 창조설자들은 D-형 아미노산은 죽은 생명체에서 L-형 아미노산이 변화하여 서로 분자의 수가 같아지는데 밀러의 실험에서도 L-형과 D-형의 아미노산이 발견되므로 생물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2. 밀러-유우레이 실험을 이산화탄소 질소 수증기로만 이루어진 조건에서 실험하면 어떠한 아미노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스탠리 밀러의 오리지날 화학진화 실험은 20개의 아미노산에서 오직 4개만이 생성되었으마, 후에 그럴 듯한 조건에서 실험을 다시하여도 아미노산 20가지를 모두 생성하지는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이다:4.밀러 유우레이 실험은 시아나이드나 포름알데하이드와 같은 독성 물질을 생성하지, 아미노산을 생성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사실과 어긋난다:창조설자들은 밀러는 원시 대기환경을 실험관에 그대로 옮긴 후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하려 했으나 밀러의 시험 장치와 실제 번개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한 이유는 아미노산 합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함이다. 결과로 보면 이는 번개보다 에너지가 적지만 그보다 적은 에너지로도 충분히 아미노산이 합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물 또는 워터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것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화학 물질이다. 화학식 를 가지며 표준 온도 압력에서 무색 투명하고 무취무미하다. 물은 지구 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며 지표면의 10% 정도를 덮고 있다. 물은 가장 보편적인 용매로 보통 액체 상태의 물을 가리킨다. 고체 상태인 것을 얼음 기체 상태인 것을 수증기라고 부른다. 흔히 '김'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수증기와 혼동하는 경우도 있으나 김은 엄연히 액체 상태의 작은 물방울들이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수증기와는 다르다.물 분자는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공유결합을 한 H-O-H의 굽은형의 물질이다. 물 분자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가 각각 전자를 내놓아 전자 쌍을 만들고, 이 전자쌍을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써 결합되어 있다. 화학식은 H2O이다.물은 자연적으로 세 가지 물질의 상태로 나타나며 지구상에서 여러 형태를 지닌다. 수증기와 구름은 하늘에 있으며 바닷물과 빙산은 극지 바다에 있고 빙하와 강은 산에 있으며 대수층의 물은 땅속에 있다.물은 화학적으로 많은 성질을 갖는다. 대표적인 성질은 공유결합, 산과 염기의 생성, 그리고 금속과의 산화이다.물에서의 수소결합은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수소 원자가 약한 세기의 양이온의 성질을 띠고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산소원자가 강한 세기의 음이온의 성질을 띰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물은 극성 공유결합 물질이다. 또한 중심 원자로 작용하는 수소 원자의 비공유 전자쌍과 산소와의 결합 고리인 수소결합의 작용력을 비교할 때 쌍극자 모멘트 값이 0이 아니므로 극성 분자로 분류된다.한편 물은 높은 비열을 갖는데 이 또한 수소결합에 그 원인이 있다. 물을 가열할 때 쓰이는 에너지의 일부는 수소결합을 끊는 데 쓰이고 나머지의 에너지가 물의 온도를 높이는데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물이 다른 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정한 열에너지의 첨가로 온도를 올리기 어려운 물질이 되는 것이다. 수소결합으로 인해 물은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물질에 비해 녹는점, 끓는점, 융해열, 기화열이 크다. 물의 비열과 기화열이 크다는 점은 생물체의 수분과 체온이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물보다 얼음의 밀도가 작은 것은 수소결합에 의한 육각형 구조와 관련된다. 또한 표면장력과 모세관 현상도 수소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은 다른 분자와 달리 그 점성에 비교해 표면장력이 큰데, 표면에 있는 물 분자가 공기 중으로 끌려가지 않고 내부에 있는 물 분자의 수소결합력을 받기 때문이다. 모세관 현상은 수소나 산소원자를 포함하지 않은 물질에서는 잘 안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물이 모세관 현상을 일으킬 때 그 관을 이루는 분자와 수소결합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은 보통 금속류를 녹여 염기를 만들고 비금속류를 녹여 산을 만든다. 산과 염기의 기준은 양이온으로 하전된 수소 이온과 음이온으로 하전된 수산화이온이며 수소이온이 많으면 산성이고 수산화이온이 많으면 염기성이며 두 이온의 값이 0에 가까우면 중성이 된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염산 질산 황산 등이 있으며 이 3가지의 산은 모두 강한 산이다. 대표적인 알칼리로는 수산화나트륨 수산화 칼륨 암모니아수 등이 있으며 3가지 모두 강한 염기이다. 한편 산과 염기는 수소이온이나 수산화이온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전해질이고 이온 물질을 갖는 모든 물이 전해질이다.금속과의 결합 및 부식.물은 산소와 함께 금속을 잘 부식시키는 성질이 있다. 철의 경우 반응성이 크나 직접적으로는 산소와 잘 반응하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산화철을 생성한다. 하지만 물이 묻은 철은 상황이 다른데 그 원인은 물이 철을 이온화하면서 전자를 내놓고 이 전자를 받은 산소원자가 양이온으로 하전된 철 분자와 결합을 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화는 물기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아 결국 속까지 모두 산화시키고 만다. 금속의 산화를 막기 위해 기름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기름과 물 사이의 반발력을 이용한 것이다.한편 찬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포타슘 칼슘 소듐 등이 있고 뜨거운 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마그네슘 알루미늄 아연 등이 있다.수리학에서 1기압 하에서 물의 단위 중량은 보통 나 w로 쓰며 1000kg중/m으로 나타낸다. 지구상에서 물의 단위중량을 다룰 때는 편의상 을 빼고 1000kg/m으로 쓴다.맛과 냄새 그리고 색깔.물은 수많은 물질을 녹일 수 있어서 맛과 냄새가 다양하다. 사람과 다른 짐승들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부패한 물을 피하기 위하여 마실 수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진보된 감각을 갖고 있다. 샘이나 광천수로 광고하는 맛은 그 안에 녹아있는 광물에서 비롯한 것이다. 순수 H2O는 무취무미하다. 물의 색깔과 냄새는 식수로서 일차적인 주요한 판단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물은 생명체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지구 이외의 천체에서 물이 발견되면 항상 관심을 받게 된다.수증기는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액체로 된 물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얼음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물과 거주가능 영역.우리가 알고 있듯이 액체와 기체 고체로서의 물은 지구 위에 사는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지구는 태양계의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에 위치하여 있다. 태양으로부터 살짝 더 가까이 있거나 살짝 더 멀리 있었더라면 기체 고체 액체라는 세 가지 형태가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적다.지구의 중력은 물이 대기를 지탱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대기 속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는 온도에 대한 완충 작용(온실 효과)을 제공하므로 표면 온도를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지구가 더 작았더라면 대기가 더 얇아져 온도가 극단으로 치우칠 것이므로 화성과 같이 극관을 제외한 물의 형성을 막는다.지구의 표면 온도는 들어오는 태양 복사 수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는 온실 기체와 표면 및 대기 반사가 동반되면서 지구 온도가 유동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질 시대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이를 가이아 이론이라고 부른다.한 행성 위의 물의 상태는 주위 압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한 행성의 중력이 결정한다. 어느 행성의 용적이 충분히 크다면 그곳 위의 물은 온도가 높아도 고체 상태를 유지한다. 그 까닭은 중력이 높은 압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인데 글리제 436 b와 글리제 1214 b 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수문학은 지구를 지나는 물의 이동 물의 분포 수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의 분포를 연구하는 것을 수로학이라고 한다. 물의 분포와 이동에서 지하수의 경우 수문지질학으로 빙하의 경우 빙하학으로 내륙수의 경우 육수학 바다의 경우 해양학으로 부른다. 수문학을 동반한 생태학적 과정을 생태수문학이라고 한다.한 행성의 표면 위 아래와 공중에 떠 있는 총체적인 물을 수권이라고 부른다. 지구의 물은 대체적으로 1360000000 km3 이다. 물은 지구에서 대부분 바다에 액체 형태로 존재한다. 인공적으로는 수소와 산소를 혼합한 뒤 방전을 일으켜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물의 분포는 바닷물 빙하 지하수 호수와 강 그리고 기타 로 이루어져 있다.지하수와 민물은 수자원으로서 인간에게 실질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유용하다.물의 순환은 수권 안의 물이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대기 토양의 물 지표수 지하수 식물 사이에서 물은 이동한다.물은 물의 순환 속에서 이러한 지역을 돌며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다음의 과정을 이룬다.표면 유출한 일부 물은 이를테면 호수와 같이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갇히게 된다. 높은 고도에서 겨울 동안 극북과 극남에서 눈은 만년설, 설괴빙원, 빙하 안에 모인다. 물은 또 땅에 스며들어 대수층으로 이동한다. 그 뒤 지하수는 샘이나 온천, 간헐천 표면으로 거슬러 흘러간다. 또, 지하수는 우물로 말미암아 인공적으로 뽑아낼 수 있다. 이러한 물은 깨끗한 민물이며 사람과 길짐승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만큼 중요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민물은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조석은 달과 태양이 대양에 미치는 기조력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대양 표면이 오르내리는 일을 가리킨다. 조석은 바다와 삼각강 수체의 깊이 변화를 일으키며 조류를 만들어낸다. 특정 장소에서 바뀌는 이러한 조석은 지구 회전의 영향과 지역적인 수심측량에 따라, 지구 기준에서 태양과 달의 위치가 바뀌어 일어난다.바닷물은 평균 3.5%의 염분에 적은 양의 기타 물질을 포함한다. 바닷물의 물리적 속성은 민물과 비교하여 몇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더 낮은 온도 에서 얼고 온도를 어는 점으로 낮추면 밀도가 올라간다. 일반적인 바다의 염도는 발트 해의 0.7% 정도에서 비롯하여 홍해 페르시아해의 4.0%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생물학적 관점에서 물은 다른 물질과 구별되는 점으로 생명의 증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수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물은 비열용량이 매우 큰 편이기 때문에 생물이 체온을 조절하는 데에 도움을 주며 바다와 호수, 강은 물로 이루어져 있기에 생명 활동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한다. 유기 화합물이 궁극적으로 복제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들은 물에 의존한다. 물은 체내의 수많은 용질이 녹이는 용매일뿐 아니라 또 체내의 물질대사에 필수적인 부분이므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물은 광합성과 호흡에 필수적이다. 광합성을 하는 세포는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의 수소를 산소에서 분리시킨다. 수소는 기체나 물에서 흡수한 CO2와 결합하여 포도당을 형성하고 산소를 내뱉는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들은 이러한 재료를 이용하고 수소와 산소를 산화시켜 태양 에너지를 포획하며 그 과정 가운데 물과 CO2를 다시 형성한다. 지표의 물에는 생물로 가득하다. 생물의 최초의 형태는 물에서 발생하였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예외 없이 물 속에서 살며 돌고래, 고래와 같은 수많은 종류의 해양 포유류가 있다. 양서류와 같은 특정한 종류의 짐승들은 물과 땅을 오가며 산다. 켈프, 말과 같은 식물들은 물에서 자라며 일부 물속 생태계를 위한 기반으로 자리잡혀 있다. 플랑크톤은 일반적으로 바다 먹이 사슬의 토대가 된다.바다의 척추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산소를 보유하여야 하며 보유 방법은 다양하다. 물고기는 허파가 아닌 아가미를 가지고 있으나 폐어와 같은 어떠한 종류의 물고기들은 아가미와 허파 둘 다 지니고 있다. 돌고래, 고래, 수달, 물개와 같은 해양 포유류들은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지표로 올라와야 한다. 일부 양서류들은 피부를 통하여 산소를 마실 수 있다.문명에 미치는 효과.문명은 역사적으로 강과 주된 물길을 중심으로 번성하여 왔다. 이른바 문명의 요람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민족은 나일 강에 온전히 의지하였다. 로테르담 런던 몬트리올 파리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하이 도쿄 시카고 홍콩과 같은 거대 도시들은 물에 다가가기 쉬운 곳에 있고 결과적으로 무역이 팽창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도 이와 같은 까닭으로 번성하였다. 물이 더 부족한 북아프리카와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은 인간 발전에 주된 요인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음료수라고 한다. 마시기에 알맞지 않은 물은 걸러내거나 정제하는 등의 다양한 물 처리로 말미암아 마실 물로 바꿀 수 있다. 마실 수는 없으나 헤엄을 치거나 몸을 씻는 데 사람에게 해가 없는 물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를 안전한 물로 부른다. 개발도상국에서 모든 폐수의 90%가 정화 및 처리되지 않은 채로 지역 강과 개울로 흘러간다.또한 물의 섭취는 동물의 기초대사량을 증가시켜 체중감량과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다.농업에서 물은 관개에 이용하며 이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는 주된 요소로 자리잡혀 있다. 관개는 몇몇 개발도상국에서 최대 90% 물을 차지하며 선진국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잡혀 있다. 사람의 몸은 체형에 따라 최저 55%에서 최고 95%의 물을 지닌다.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날마다 1~5리터의 물을 마시어야 탈수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섭취하여야 하는 정확한 물의 양은 활동 수준 온도 습도 등의 요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은 물을 직접 마시는 것보다 음식이나 음료수를 통하여 소화시켜 물을 흡수한다. 건강한 사람이 물을 얼만큼 섭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은 없으나 날마다 6~8잔의 물 (거의 2리터)을 마시는 것이 최소한의 적절한 양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옹호자들의 생각이다.시베리아의 바이칼 호는 식수에 적합한 최대의 민물 원천이다. 이곳은 소금과 칼슘이 매우 적으므로 상당히 깨끗하다. +외계어는 통신언어의 일종으로 컴퓨터 문서상에서 쓰이는 한국어의 변칙적인 표기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2000년대 초 정보화의 발달과 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화로 통신언어가 발달하였고, 통신언어의 한글 변용 정도가 심하여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는 경우를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에 빗대어 외계어라 한다. 주로 청소년 층에서 자주 쓰였으며, 일본의 갸루 문자와 유사하다.통신언어의 일종인 외계어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보통, 어미에서 -ㅗ와 -ㅛ가 -ㅓ와 -ㅕ로 변화되는 등의 통신체와 병행해서 쓰인다.이모티콘과 닿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표현과 인터넷에서 쓰이는 유행어 등의 표현을 통신에서 쓰는 사람은 위의 것만을 외계어로 여긴다. 하지만 유행어와 닿소리 표현, 이모티콘까지 통틀어서 외계어로 보는 시각도 있다.외계어를 일부에서는 ‘언어 파괴’라고 비판하지만 이를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 청소년층 안에서도 외계어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만 비판하는 대상인 ‘외계어’의 범주의 차이는 다양하다. 외계어는 2000년대 초반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외계어에 대한 논의도 많이 줄어들었다.한편 미술가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한글이 아닌 문자로 한글을 표현하는 실험을 한다.콜라츠 추측은 1937년에 처음으로 이 추측을 제기한 로타르 콜라츠의 이름을 딴 것으로 3n+1 추측, 울람 추측, 혹은 헤일스톤 수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콜라츠 추측은 임의의 자연수가 다음 조작을 거쳐 항상 1이 된다는 추측이다.예를 들어 6 에서 시작한다면 차례로 6 3 10 5 16 8 4 2 1 이 된다.또, 27에서 시작하면 무려 111번을 거쳐야 1이 된다. 77번째에 이르면 9232를 정점으로 도달하다가 급격히 감소하여 34단계를 더 지나면 1이 된다.이 추측은 컴퓨터로 268 까지 모두 성립함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모든 자연수에 대한 증명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 500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던 에르되시 팔은 는 말을 남겼다.다음과 같은 통계적인 설명을 생각하면 이 추측은 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콜라츠 추측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콜라츠 추측의 공식 표현.콜라츠 추측의 함수표현 공식콜라츠 추측 공식의 합동산술 표현식1 부터 200 까지 핸드링콜라츠 그래프의 분기.콜라츠 그래프에서 특정 짝수는 홀수에대한 formula_21의 수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formula_22수가 되는 분기점이 된다.만약 콜라츠 추측이 성립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formula_25을 제외한 모든 자연수가 formula_9과 연결되기 위한 마지막 분기점이다.따라서 홀수에 대한 formula_21의 수 이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formula_22수가 되는 분기점 짝수 formula_31은 formula_32 에서 formula_33의 수이다.콜라츠 그래프 분기점 수열.콜라츠 그래프의 분기점 짝수 formula_31은규칙적으로 출현한다.최초 출현 수열은 다음과 같다.이러한 콜라츠 그래프 분기점 수열은 6씩 증가하는 수열이다.또한 십진수 30을 주기로 5개의 자리수 formula_37이 순환적으로 출현한다. +전자 게시판은 일반적으로 대학의 게시판 또는 중세 도시의 지역 사회 광고판을 컴퓨터 네트워크에 적용한 시스템으로, 보통 특정 전자게시판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말한다. 사용자들은 전화선과 터미널 프로그램을 써서 시스템에 접속하고 소프트웨어를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고 게임, 뉴스, 메시지 교환 등을 할 수 있다. 전성기인 1980년대 처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BBS들은 아마추어 시삽들이 여가 시간에 운영하는 무료 서비스였으며 몇몇 BBS들은 사용료를 요구하기도 하였다.BBS는 여러 면에서 현재의 월드 와이드 웹과 인터넷의 다른 프로토콜들의 전신이기도 하다. BBS는 친교 목적으로 많이 쓰였으며 논문을 발표하거나 자유 프로그램이 퍼지는 경로이며 게임과 기타 다른 응용 분야에서 사용되었다.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BBS는 인터넷 프로토콜 ���는 웹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바뀌어갔다.공개 게시판의 전신은 1973년 8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시작된 커뮤니티 메모리(Community Memory)였다. 유용한 마이크로컴퓨터가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모뎀은 비싸면서도 속도가 느렸다. 이러한 까닭에 커뮤니티 메모리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구동되었으며 여러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주변 지역들에 위치한 터미널들을 통해 접근되었다.정보(情報 )는 컴퓨터공학에서 특정 목적을 위하여 광(光) 또는 전자적 방식으로 처리되어 부호 문자 음성 음향 및 영상 등을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자료 또는 지식을 말한다.한편 정보는 일반 용어에서 전문 용어까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언어, 화폐, 법률, 자연환경 속의 빛이나 소리, 온도나 신경, 호르몬 등의 생체 신호등 정보 원천으로부터 비롯한 모든 것을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넓은 의미로 정보의 원천을 다루기위해 정보가 다루어지는 상황도 정보와 연관지을수있다.요즘에는 컴퓨터의 정보 처리를 기반으로 한 정보가 많이 대두된다. 정보의 원래 뜻에 따라, 정보와 자료를 구별하고, 정보를 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러한 분야에서는 전체적으로 정보의 뜻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경우는 별로 없으므로, 특별히 정보와 자료는 구별하지 않는다. 구분하자면, 데이터를 모아 둔 것이 자료라면 자료를 특정한 목적의 의사결정을 위해 가공한 형태를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훌륭한 정보는 목적 적합성과 신뢰성 및 적시성을 유지해야 한다. 적시성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첩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하며 가공을 통해 비교적 장기간 활용이 가능한 정보를 지식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와 자료는 다른 의미이다.정보는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그 속도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개인이 하나의 정보를 선택하게 되면 변화에 의해서 불확실성이 커지게 되고, 정보의 가치가 적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된 정보보다 선택되지 않은 정보가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불안감을 갖게 한다. 맥도너는 '정보란 사실 내지 자료에 지적인 처리를 가하여 얻어진 지식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보는 자료에 특정 의미가 주어진 것으로서 직접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모든 정보는 자료이나, 모든 자료는 모든 정보라고 할 수 없다. 포레스터는 '경영은 정보를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이다.'고 하였다. 이는 경영상의 의사결정에 정보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모든 자료가 정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자료는 정보의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정보는 가치지향적이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고 어느 정도의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이어야 정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결국 정보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정리해 놓은 자료의 집합이며,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이용자, 즉 어떤 목적을 갖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료가 처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보는 이용자를 위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재배열, 요약, 삭제하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프랑스어의 renseignement를 번역한 말로 사용된 것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정보를 신식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첩보라는 뜻도 있다.정보는 상대방에게 사건을 알릴 때 전달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집에 불이 났는지 아닌지 알리는 것도 정보 전달의 한 예이다. 전달 형태가 불이 의 두 가지 방법만 존재한다면 1 비트로 전달이 가능하다. 동전도 마찬가지다. 던진 동전이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알려 주면 되기 때문에 1 비트로 표현된다. 16가지의 경우가 나오는 회전 룰렛을 사용하여 경기를 한다면 그 결과를 위해 4 비트를 할당해야 한다. 앞서 말한 3가지 사건에서 사건 요소인 formula_1는 불이 났는지 앞면이 d던져졌는지 회전 룰렛에서 1번 칸이 선택되었는지에 해당한다. 각각의 확률을 생각해 보면 각 사건의 경우의 수가 가지는 확률인 formula_2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순서대로 1/2 1/2 그리고 1/16이 된다. 이때 비트 단위 정보량은와 같이 구해지고 각각 값은 1 1 4가 된다. 물론 불이 날 확률formula_4이 불이 나지 않을 확률formula_5보다 높은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불이 나지 않을 확률 formula_6이 되어 이를 나타내는 정보량도 formula_7이 된다.대한민국의 전자거래기본법에 따르면, 라 함은 정보처리시스템에 의하여 전자적 형태로 작성, 송신ㆍ수신 또는 저장된 정보를 말한다(전자거래기본법 제2조 제1호).신용정보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융거래 등 상거래에 있어서 거래 상대방에 대한 식별신용도신용거래능력 등의 판단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정보로서 대통령이 정하는 정보를 말한다. +위키낱말사전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공개된 위키 형식으로 다언어 사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최종 목표는 "모든 언어의 모든 낱말을 정의하는 것"이다.대니얼 올스턴과 몇몇을 포함한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현재의 모양새를 갖춘 프로젝트를 처음 출범시켰다.위키낱말사전 프로젝트는 2002년 12월 12일 시작되었고 2002년 12월 26일 공식 주소를 얻어 2003년 6월 20일 위키미디어 재단의 일원이이 되었다.2016년 2월, 한국어 위키낱말사전은 20번째로 표제어 수가 많은 위키낱말사전이었으나2018년 7월, 21번째로 표제어 수가 많은 위키낱말사전이 되었다.채팅은 네트워크에서 두 명 이상의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글을 주고받는 행동을 말한다. 채팅은 본래 PC통신 때부터 즐겨 쓰던 방법으로, 대화방으로 사용자들이 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웹캠의 발달로 음성 채팅 및 화상 채팅 등의 새로운 기술이 널리 퍼졌다. 또한, 대화방을 사용하지 않는 간편한 인스턴트 메신저도 널리 쓰인다.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나누는 대화와 같이 인터넷이나 온라인서비스에 접속한 이용자끼리 서로 메시지를 입력해서 주고받는데, 이런 개인적인 대화를 위한 통신망을 대화방이라고 부른다. 온라인 서비스, 즉 PC통신으로 하는 채팅은 주로 국내에서 한정되지만 인터넷으로 하는 채팅은 전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이라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으면 온라인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인터넷에는 대화방 채널이 많이 있다. 어떤 대화방은 어린이끼리만 있고, 또 어떤 곳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이야기를 한다. 우리말을 사용하는 곳도 프랑스어, 일본어 등을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대분분의 대화방은 영어를 사용한다.최초의 온라인 채팅 시스템은 1973년 일리노이 대학교의 플라토 시스템에서 Doug Brown과 David R. Woolley에 의해 개발되었다.소프트웨어 프로토콜.여러 개의 프로토콜을 지원하는 채팅 프로그램캠(cam)은 기계공학에서 동력 전달 장치의 하나로 회전 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꾸는 철덩어리이다. 원동축의 정속(定速) 회전에 대응하여 종동 링크를 복잡한 경과를 더듬게 왕복직선 운동과 왕복 각운동을 부여하는 데는, 운동의 성질에 응해서 각종 기구가 쓰인다. 그중에서도 임의의 경과를 더듬는 운동을 가장 재빠르게 행하게 하는 데에는 캠장치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평면 캠과 확동 캠, 입체 캠으로 분류할 수 있다.캠은 회전운동에서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철덩어리로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예는 자동차의 캠축으로, 엔진의 회전 운동을 실린더의 흡배기 밸브 작동에 필요한 왕복운동으로 변환한다.순/역방향 운동이나 원형운동을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크랭크라는 철덩어리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 휠의 동작에 필요한 회전운동을 전환시키고,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취하는 자동차의 크랭크축은 그 예이다.캠은 또한 저장된 정보와 도구전송 정보를 볼 수 있게 한다. 스크류 머신의 다양한 도구와 척의 움직임 또는 뮤직 박스의 노트를 지시하는 'CAM-DRUM'은 그 예이다. 캠에 의해 전송되고 저장된 정보는 ‘어떤 행동이 일어나고 언제쯤 일어날까?’ 라는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 어떤 캠은 축에 대해 회전하는 캠으로 만들어진 롤러 follower의 변화가 반영되는 변위 다이어그램에 의해서 특별할 수 있다. 이 다이어그램은 반경변위의 그 위치에서 각도 위치와 관련된다. 몇 가지 주요 용어는 플레이트 캠의 구조와 연관성이 있다.변위 다이어그램은 전통적으로 음수가 아닌 값을 그래프로 표시된다.캠장치는 인도할 운동에 상응한 윤곽을 지닌 회전체을 일정한 속도로 돌리고, 둥글거나 또는 평면의 단면을 가진 종동절을 그것에 대해 밀어붙임으로써, 필요로 하는 운동을 하게끔 한 것이다. 하트캠은 판캠의 일종으로, 종동절의 끄트머리가 나이프에지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캠의 회전 중심을 통과하는 직선상으로 왕복운동 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캠장치이다. 캠은 각종 자동 기계류에 많이 쓰이고 있는데, 엔진 등의 연료판이나 흡배기 밸브의 작동을 제어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배력장치는 원동절의 변위에 비교해서 어떤 종동절의 변위가 매우 작을 경우는 그 종동절에 현저하게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다.엄밀히 직선을 그리는 링크장치는 포슬리에 기구(機構) 외에 여러 종류가 있지만 미끄럼기구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기구가 복잡하게 되므로 기구를 간단하게 해서 근사적(近似的)인 직선운동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도 여러 종류의 기구가 있는 데 〔그림〕-39는 그 일종으로서 점 P가 그리는 렘니스케이트곡선(雙葉曲線)의 일부가 직선을 거의 닮고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선박용 하역크레인으로 짐을 거의 수평으로 이동하도록 한 기구이다.구면링크장치의 응용.구면링크장치에서는 축선이 이루는 중심각이 평면링크장치의 링크의 길이에 상당하며 중심각이 90°인 것은 평면링크장치의 슬라이더 즉 미끄럼자에 상당한다. 구면링크장치에서도 4절의 것이 기초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실제로 쓰이고 있는 것은 중심각이 90°인 링크 3개를 지니는 구면양미끄럼자 크랭크 연쇄로부터 고정링크의 교체로서 얻어지는 회전미끄럼자 기구와 요동미끄럼자기구 등이 주이다. 예전에 기차의 천장에 설치된 천장선풍기의 목흔들기 기구도 이의 응용이다.초기 캠은 기원전 3 세기부터 헬레니즘 문명의 수력식 자동화기기에 내장되었다. 후에 캠축에 캠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랍 발명가 알 자자리에 의해 채용되었다. 유럽기계에는 캠 및 캠축이 14세기부터 나타났다. +PC통신은 개인용 컴퓨터를 다른 컴퓨터와 통신 회선으로 연결하여 자료를 주고 받는 것을 말한다. 전화망을 사용하여 문자, 숫자, 영상, 음성 데이터 등을 전송한다. 개인용 컴퓨터끼리 서로 연결한 통신 형태도 포함되지만, 보통은 정보 서비스 제공을 위한 호스트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설치하고 여기에 가입한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로 접속하여 이용하는 형태의 전화 회선을 통한 통신 네트워크 서비스를 가리킨다. 이때 통신 회선은 주로 전화 모뎀을 통한 전화 회선이 사용되지만 ISDN 등의 다른 회선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개인용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1990년대에 게시판과 대화방 그리고 자료실을 제공하는 PC통신 서비스 회사가 설립되었다.대한민국의 PC통신.대형 PC통신 서비스.대한민국의 PC통신은 천리안과 하이텔 서비스로 시작되었다.먼저 천리안은 1984년 5월에 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하여, 1985년 10월 생활정보DB, 1986년 9월 화상정보서비스 가 통합하여 천리안이 되었다.한편 하이텔은 1986년 11월 1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뒤 1991년 12월 한국통신과 합작으로 한국PC통신를 설립하면서 1992년 3월 서비스를 코텔로 변경하고 같은 해 7월에 명칭을 하이텔로 변경하였다.케텔 당시 한국경제신문사에서는 컴퓨터 통신을 홍보하고 회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가입자들 중 추첨을 통해서 1200 BPS모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모뎀은 상당히 비싸서 10~20만원의 고가 장비였으며, 구입하여 집에 직접 와서 설치도 해주었다. 1994년 나우누리, 1996년 유니텔이 영업을 시작하면서 PC통신 서비스는 다양해졌으며, 접속프로그램인 터미널 에뮬레이터도 큰사람 정보통신의 이야기 위주에서 새롬 데이타맨, 특정 PC통신회사의 전용 에뮬레이터 등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또한, PC통신은 MUD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즉, PC통신을 통하여 현재의 온라인 게임 및 커뮤니티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VT모드의 PC통신은 일부 기존 업체에서는 서비스가 유지되고는 있으나,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은 PC통신 사용자가 드물다. 하이텔 서비스는 2007년 2월 28일에 완전히 종료되었다.VT모드 텍스트 기반 서비스는 다음과 같다.그 밖에 민간주도의 지역 기반 PC통신망은 다음과 같다.199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전용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제공되는 인터넷 기반 통신망도 생겨났다.이와 같은 대형 서비스 이외에도 특정 분야 또는 지역에 특화된 통신망도 존재하였고 소규모 기업 및 단체 심지어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BBS도 상당수 존재하였다.사설 BBS는 개인 또는 단체가 운영하는 주로 비영리 목적의 소규모 PC통신 서비스였다. 자발적으로 발생한 이러한 사설 BBS들은 상용 PC통신 서비스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PC통신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대한민국 사설 BBS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도 있었다.이렇게 출발한 사설 BBS들은 외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주로 와일드캣—을 한글화 해서 사용했는데 1990년 10월에 최초의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인 '카페'가 조병철에 의해서 공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성욱의 '곰주인' 김성철의 '밀키웨이'가 나왔고 이와 별도로 1991년 최오길의 '호롱불'이 등장하여 전국적인 사설 BBS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당시 유명 사설 BBS는 다음과 같다.한편, 흔히 01410으로 알려진 한국통신하이텔은 전화망을 활용한 부가통신 서비스의 일종이며, 처음에는 접속번호 157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014XY 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01410을 접속번호로 하였다.서비스 방식은 접속망 "하이텔"을 한국통신이 운영하면서 "인포샵"이라는 명칭으로 개별 정보제공업체이 정보서비스를 판매하는 형태이며 현재는 "파우와우"로 이름이 변경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프랑스의 미니텔 서비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미니텔과 마찬가지로 문자 및 비디오텍스가 지원되는 전용 단말기 하이텔 단말기를 도입하여 전화가입자들에게 무상임대하였다.이 하이텔망은 인포샵 서비스 이외에도 다른 여러 PC통신 서비스의 접속 관문의 역할도 하였고, 아울러 전화접속 패킷망으로서 HiNET-P, HiNET-F 등의 네트워킹 서비스도 제공되었다. 나중에는 종량제 PPP 접속서비스도 제공된다.서비스 명칭 "하이텔"이 PC통신 하이텔과 공유되어 있으나, 서로 구분되는 별도 서비스이다. 이 서비스 내에는 한국PC통신의 하이텔 이외에도 한국통신이 직접 운영하는 소규모 PC 통신으로 HiTEL-POP도 함께 존재했는데, 이것은 이후 미래텔로 이름이 바뀌었었다가 나중에 PC통신 하이텔로 흡수되었다.014XY 접속번호.5자리로 구성된 014XY 전화번호는 전기통신번호 관리세칙에 의한 부가통신사업자 식별번호로서, 전화회선을 이용한 데이터 통신에 할당되는 전용 접속번호이다. 처음에는 PC통신용 접속 번호로 도입되었으나 나중에는 다이얼업 PPP 접속 번호로도 활용되었고, 음성통화에 비하여 40% 요금 할인 또는 정액요금제 등의 혜택이 있었다.현재는 광대역망의 보급으로 모뎀 사용이 격감하여 대부분의 014XY 번호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공식 서비스는 2017년 8월 31 종료되었으며 다음해까지도 01410 파우와우 서비스는 낮은 접속 성공률로 매회 수분간 접속이 되었으나 더이상 제공되는 컨텐츠와 서비스는 없었으며 2018년 7월 경 일자불상에 모든 014xy 전화번호가 퍠쇄되었다. 따라서 2018년 7월 현재 이하 명기된 모든 일체의 서비스는 더 이상 접속이 불가능하다.아울러 1544 국번으로 시작하던 관련 서비스는 현재 타 기업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2007년 1월 기준으로 부여되어 있는 식별번호는 다음과 같다.별 표시는 2007년 12월 기준으로 접속 불능ASCII 아트 및 ANSI 아트.ASCII 아트는 문자를 조합하여 한 화면상에 그림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문자 기반 표시장치만 존재했던 초창기 컴퓨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한편 ANSI 아트는 터미날의 제어코드(ESC 이스케이프)를 활용하여 색상 표시 화면 갱신들을 이용해 동적인 화면을 구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통신체(通信體)는 컴퓨터를 통해 발달한 한국어의 독특한 문체와 그 형태를 의미한다.1980년대 말에서 2000년대~2000년대 말까지 PC통신이 널리 쓰이던 때에는 자판을 한 번 치는 시간도 전화요금으로 청구되었다. 그래서, 시간과 돈, 노력을 절약하는 수단으로 통신체가 각광받으며 널리 퍼졌다. 당시 유행하던 '통신체'로는, '어솨요, 리하이, ^_^/^-^', '방가방가'등이 있었다.그 이후 리니지 등의 게임이나 디시인사이드같은 유저포탈의 생성으로 즐 원츄 아햏햏 뷁 등의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다.문화관광부 연구보고서인 “바람직한 통신 언어 확립을 위한 기초 연구”에 따르면 통신 언어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네트워크(network) 망(網)은 다음을 가리킨다.햄버거는 샌드위치 패스트 푸드의 일종인 음식이다. 또한 햄버거는 양념, 빵가루 등에 고기를 갈아 넣고 버무린 뒤 구워낸 햄버그 스테이크, 채소, 양념 등을 두 장 이상의 동그랗거나 길쭉한 빵 사이에 넣어 만들며, 보통 손으로 쥐면서 들고 먹는다.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사먹는다. 수많은 패스트푸드 식당들은 햄버거, 감자 튀김, 콜라 등을 하나로 묶어서 세트로 판매하기도 한다.독일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이 지난날 몽골에서 독일로 가져온 음식이었던 타르타르 스테이크를 모방하여 그 지역 요리사가 다진 육회를 재료로 반죽하여 뭉친 것을 불에 구운 것으로 햄버그 스테이크 또는 라 한다. 18세기 초 미국으로 이민온 독일 출신 이민자들에게서 이 스테이크가 미국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함부르크에서 온 스테이크라는 이름인 햄버그 스테이크로 불리게 된다.이후 미국 각지에서 햄버그 스테이크를 사용하여 햄버거라는 요리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시초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을 뿐 정확히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큰 이견이 없다. 햄버거의 시초를 둘러싼 주장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한 요리사가 샌드위치를 만들던 중 너무 바쁜 나머지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일반 고기 대신 샌드위치 빵에 넣어 판매한 것이 오늘날 햄버거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들어가는 패티의 원료나 양념에 따라서 치킨버거, 불고기버거, 비프버거 등으로 구별해 불리기도 한다. 또 패티 이외의 소에 따라 치즈버거로도 불린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채소만 넣어 만들거나 콩을 원료로 한 패티로 만든 샌드위치역시 햄버거로 불릴 때가 많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치의 맛을 낸 김치 버거와 밥을 뭉쳐 모양을 낸 것을 빵 대신 사용한 라이스 버거도 존재한다. +놀이 또는 유희는 인간이 재미를 얻기 위해 하는 활동을 말한다. 물질적 보상 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행위이며 외부의 강제에 의한 행위도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이나 일과 구별되지만 노동에도 유희적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일반적으로 놀이는 기분전환을 위한 여가 활동으로 규정되며, 서양 기원의 승부와 관련 있는 놀이는 게임으로 불리기도 한다.즐거움 외에도 민첩성이나 사회성 등 성장에 필요한 경험을 얻기 위해 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놀이를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관해서는 종래 많은 학설이 있다. 잉여정력설생활준비설반복설휴양설생물학설 등이 있다. 놀이를 작업과의 대립개념으로 했을 때 그 본질은 분명해진다. 작업은 진지한 것이며 피곤함과 고됨이 따른다. 또한 의무적강제적인 것임에 반해서 놀이는 자기목적적이며 자기충족적 운동으로 활동에는 쾌감이 따르고 또한 자발적해방적인 것이다.놀이에는 기본적인 요소로 참여자와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rule)이 추가 요소로 포함될 때도 있다. 근대의 놀이는 기본적으로 방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놀이의 핵심은 등의 건강한 정신 상태를 말한다.유아기에는 작업과 놀이가 미분화상태이기 때문에 놀이에 대해서 어른의 작업에 대한 것과 같이 진지하다. 이 미분화성 때문에 이 시대에서는 놀이 가운데서 작업을 시키는 일도 가능하며 또한 완구를 보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도구가 그 역할을 한다.유아에게는 혼잣놀이나 평행놀이가 많다. 아동기의 중기부터 후기는 집단적 놀이가 특징이며 소위 갱시대를 이룬다. 유희집단의 성원 수도 연령과 함께 변화한다. 집단참가의 인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2~4명이던 것이 고학년에 가서는 6~10명으로 증가한다. 그 후 청년기가 됨에 따라 다시 감소한다. 동일유희라도 발달에 따라서 그 구조가 변화한다.오가와타로(小川太郞)에 의하면 유희는 혼자서 가능한 조직없는 유희로부터 단순한 규칙을 가진 단순한 조직놀이로 다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복잡한 조직놀이로 변화한다. 아동기부터 청년기에는 놀이가 집단적으로 행해지며 규칙이 정해진 그룹조직이라든가 운동경기 등이 왕성하게 실시된다. 이 놀이집단을 통해서 협조성이나 자기통제와 같은 성격형성이 가능해지며 신체의 훈련 규칙 존중 등의 사회성의 증진이 학습될 가능성이 많다.뵐러는 놀이를 기능놀이 상상놀이 구성놀이 수용놀이등으로 분류하여 발달을 고찰한다.파텐은 사회적 행동양식에 의해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행동, 방관적 행동, 혼잣놀이, 평행놀이, 연합놀이, 협동놀이로 분류한다.유아기의 놀이 형태.유아기의 놀이의 형태는 대개 유희활동의 경과형식(經過形式)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그 발달 차이를 알아보고 있다.가장 원시적인 유희활동. 거의 2-3분 간격으로 다른 활동을 나타내며 더욱이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유희라고 이름붙일 수 없을 정도로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1세아에 많다. 대부분 적응적 목적을 위해 습득한 어떤 하나의 기제로 순환적 반응을 반복하는 행위가 주를 이룬다. 이 시기는 심상이 아닌 기능적 동화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단계와 구별된다.단편적 유희행동이 모자이크식으로 접합한 것이다. 10분간 정도씩 유희가 계속되나 다음 유희와의 관계성이 없이 이루어지는 놀이 방법으로 1시간에 4~9종의 놀이가 나타난다. 2~3세아에 가장 많다. 이 시기에 이르른 아동은 단순한 감각운동적 면에서 탈피해 상징적 가작화를 통한 놀이에 집중한다. 하지만 아동은 사진의 행동을 가작화로써 이해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의식화하는데에만 머무르며 이는 누적형놀이와 연속형 놀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같은 종류의 유희가 1시간 가까이 연속된다. 하나의 유희가 그것과 관계 있는 유희로 발전한다든지 혹은 다른 유희를 도입하여 잡다(雜多)하게 하나의 유희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5세아에 비교적 많다. 이 때에부터는 놀이가 습관화된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징적 도식의 형태를 취한다.정지된 유희활동이 1시간에 2가지나 3가지의 비율로 실시된다. 4~6세아에 많다.분절형의 유희가 다시 오래 계속된다. 1시간 내의 대부분이 하나의 유희이다. 분절형 놀이의 상위유희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언뜻 보기에는 연속형 놀이와 비슷해보이지만, 각각의 유희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것으로 연속형 놀이와 구분된다.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없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있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비디오 게임은 컴퓨터가 비디오 게임 사용자의 입력을 받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처리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를 출력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전자게임이다. 비디오 게임은 글자나 그림 소리만으로 출력될 수도 있지만 많은 비디오 게임이 영상표시장치를 이용한 시각적 출력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 들어 급성장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2016년에는 영화 음악시장을 합한 규모보다 더 크게 성장했다."플랫폼"이라는 용어는 전자 부품의 특정한 조합이나 컴퓨터 하드웨어를 가리키는데 여기에 소프트웨어와 결합하여 비디오 게임이 동작할 수 있게 한다. "시스템"이라는 용어 또한 흔히 사용된다. 아래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으며 하나 이상의 플랫폼을 연결하는 게임이 있을 수 있다. 개인용 컴퓨터뿐 아니라 게임을 즐길 수 있으나 전용 비디오 게임 머신이 아닌 다른 장치들도 존재한다. 비디오 게임은 여러 종류의 입력 장치를 사용하여 사람의 행위를 게임에 번역, 전달할 수 있으며, 가장 흔한 게임 컨트롤러는 PC 게임의 경우 키보드, 마우스이며, 콘솔의 경우 게임패드, 휴대용 콘솔의 경우 버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의 게임 컨트롤러는 일반적으로 레이싱 휠, 라이트 건, 댄스 패드가 있다. 디지털 카메라 또한 플레이어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게임 컨트롤러로 사용할 수 있다.이스터 에그는 개발자들의 메인 게임의 일부가 아닌 곳에 남겨둔 숨겨진 메시지나 농담이다.비디오 게임은 게임으로서는 드물게 혼자서 하는 게임이 많았다. 그것은 컴퓨터 자체가 여러 사람이 함께하기 어려우며,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도 컴퓨터가 알아서 적절한 상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혼자서 하는 게임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처리하고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서사적 특징을 띠기도 한다. 다른 참여자와의 상호 작용에 크게 의지했던 기존의 게임과는 달리, 다른 참여자가 없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게임이 제공하는 내용이 그 경험 수준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그러한 서사적 특징의 하나는 주인공의 존재인데 보통의 게임은 여러 인간 참여자가 이루어내기 때문에 특별한 주인공이 없던 반면 혼자 하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유일한 인간 참여자에 그 비중이 맞추어진다. 그래서 모든 게임 환경과 컴퓨터 참여자들이 주인공인 인간 참여자의 행동에 맞추어 작용함으로써 의도된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나아가 컴퓨터가 더는 참여자로서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인간 참여자 개인에 맞추어지는 환경으로서 제공되는 게임도 많다. 그를 위해 비디오 게임은 영화와 소설 등의 다른 서사 매체의 문법을 빌��와 게임 참여자에게 높은 수준의 경험을 제공하려 하기도 한다.그러나 통신 기술의 발달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함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온라인 게임이 대두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전의 게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사람들이 동시에 게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의 저자인 라프 코스터는 2007년 게임 개발자 회의에서 과거 1인용 게임들의 성행은 놀이의 기형적인 변화였고, 온라인 게임의 시대가 오면서 진정한 놀이로서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주장했다.반면 비디오 게임을 새로운 서사 형태의 출현으로 보는 사람들은 혼자서 하는 비디오 게임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비디오 게임은 종종 다양한 전자 매체가 결합한 멀티미디어의 궁극적 형태로 언급된다. 현대의 비디오 게임은 영화, 문학, 음악 등 여러 표현이 모두 결합하여 상호 작용의 형태로 제공되는 경험 매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게임의 본질은 그 구조이며 영상과 음악, 문학 등의 표현은 그것을 돕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임의로 연산된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상 세계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으로 재미를 제공하며 일련의 학습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디지털의 특성상 널리 배포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교육이나 선전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과도한 비디오 게임은 심각한 게임 중독 문제로 이어진다. 한편 게임의 효과에 대한 연구결과들도 있다. 2013년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2개월 이상 하루 30분 이상 슈퍼 마리오 64 게임을 한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하여 일부 뇌 부위가 커졌다. 물론 모든 게임이 이런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고 논문에서 제시하는 한계점들도 있다.2013년 또다른 논문에 따르면 실시간 전략 게임이 인지 유연성을 향상시킨다고 한다.그러나 폭력적인 게임을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게임을 한 사람보다 폭력성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 게임을 많이 하는 아이일수록 문제 행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 등 비디오 게임의 부정적 효과에 주목하는 연구결과들도 많이 있는 상태다.비디오 게임은 원시 인공지능 기술이 들어간다. 그 이유인 즉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적들은 가만히 냅둬도 자기들이 알이서 움직이며 플레이어의 유닛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위치와 스킬을 파악하고 그에 대응해서 움직이는 것이 원시적인 인공지능이다.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는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진화생물학자 및 대중과학 저술가이다. 그는 1995년부터 200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중의 과학이해를 위한 찰스 시모니 석좌교수"직과 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2009년에 정년 퇴임하였다.그는 역시 많은 저명한 언론매체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엔카르타 백과사전과 진화백과사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 무신론적 박애주의자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수석편집위원으로 칼럼을 쓰고 있으며 과학적 회의론 잡지의 창립멤버로 편집이사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왕실이 수여하는 패러데이 상의 심사위원, 영국TV 아카데미상 심사위원을 맡고 있으며 영국과학발전협회의 생물학 부문 수장이기도 하다.도킨스는 진화에 대한 유전자 중심적 관점을 대중화하고 밈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1976년 저서 《이기적 유전자》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1982년 그는 표현형의 효과가 유기체 자신의 신체만이 아니라 다른 유기체들의 신체를 포함한 넓은 환경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준 저서 《확장된 표현형》으로 진화생물학계에서 폭넓은 인용을 받았다.도킨스는 무신론자이며 철저한 인본주의자 회의주의자 과학적 합리주의자 및 브라이트 운동 지지자이다. 그는 미디어에서 여러 차례 "다윈의 로트바일러" 로 불렸는데 이는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가 자연 선택을 지지하면서 "다윈의 불독"으로 불린 것에서 유추되었다. 2006년에 발표한 그의 책 의 영어판은 150만 권 이상 판매되어 그의 책들 중 1위를 기록했으며 31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도킨스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대중과학서를 집필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기도 했다.2004년 옥스퍼드의 베일리얼 칼리지는 그의 이름을 딴 도킨스 상을 만들어 인간에 의해 멸종���기에 빠진 동물의 행동양식과 복지에 기여하는 논문을 발표한 사람에게 수상하고 있다.리처드 도킨스는 1941년 3월 26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클린턴 존 도킨스는 2차대전중 연합군으로 영국에서 케냐로 이주하였으며 도킨스가 8세가 되던 1949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부모 모두 과학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도킨스의 질문들에 과학적 언어로서 답을 해 주었다고 한다.도킨스는 그의 어린시절을 전형적인 평범한 영국 소년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략 9세 되던 무렵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는 자연에 있는 방향성 규칙성 목적성 질서와 이런 것들의 조합등을 인식하고 다시 신의 존재를 믿도록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영국성공회의 관습들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신보다는 윤리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후에 그가 생물의 진화과정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종교적인 관점은 다시 변화하게 되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 없이도 진화론의 자연선택이 생명의 복잡성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느꼈다.도킨스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온들 스쿨을 다녔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동물학을 수학했는데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동물행태학자 니콜라스 틴버겐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962년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다. 그 후 틴버겐의 지도하에 옥스퍼드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1966년에 받게 된다. 틴버겐은 동물행태연구의 개척자였는데 특히 본능의 문제들, 학습과 선택에 있어 선구자이다. 이 시기에 도킨스의 연구는 동물결정모델에 관한 것이었다.1967년부터 1969년까지 도킨스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물학 조교수로 재직한다. 이 시기 UC 버클리에서는 당시의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운동이 거세었는데 도킨스도 행동가로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 깊이 개입했다. 그는 1970년에 다시 옥스퍼드로 동물학을 강의하러 돌아 왔으며 현재까지 옥스퍼드 교수로 재직중이다. 1995년에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찰스 시모니가 과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며 기부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1976년 그의 저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으로 도킨스는 생명과학을 일반대중에 쉽게 설명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1967년 도킨스는 동료 학자 매리언 스탬프와 결혼했고 1984년에 이혼했다. 그 해 도킨스는 Eve Barham과 재혼했으며 사이에 딸 Juliet Emma Dawkins를 두었으나 역시 이혼했다. Barham은 1999년 암으로 사망했다. 1992년에 그는 여배우 랠라 워드와 결혼했다. 도킨스와 워드는 그들의 공통 친구인 더글러스 애덤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워드는 도킨스 책 중 절반 이상의 삽화를 그렸으며 두 책의 오디오버전의 나레이터를 맡았다.2009년 그는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창조과학에 대한 비판.도킨스는 만물은 신이 창조했다는 종교적 믿음인 창조과학에 단호한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창조과학을 불합리하고 지성을 축소시키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1986년에 나온 책 에서 창조론자의 중요한 논점인 설계론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18세기 영국신학자 윌리엄 패일리의 저서 "자연신학"에서 주장되어 유명해진 시계공비유에 대해 반박했다. 패일리는 그의 저서에서 "시계는 너무 복잡하고 기능적이어서 단순히 우연의 산물로 출현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도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설계되었다"라고 확언했다. 하지만 도킨스에 따르면 진화론의 자연선택도 생물계의 규칙성과 복잡성, 그리고 기능성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에 있어서 지성을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자동 시계제작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1986년에 도킨스는 옥스퍼드 헉슬리기념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젊은 지구 창조론자인 A. E. 윌더-스미스(A. E. Wilder-Smith), 성경적창조론회 수장인 에드거 앤드루스(Edgar Andrews) 등과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이라며 만류한 그의 동료 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충고를 따라 이후 창조과학자들과 공식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 도킨스는 토론을 제의하는 창조과학자들이 그런 논쟁에서 완패당하든 아니든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에 따르면 그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화학자와 논쟁을 벌임으로써 얻어지는 명성이었던 것이다.2004년 12월 미국 언론인 빌 모이어스와 인터뷰할때 도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진화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느 과학만큼이나 확실하다." 모이어스가 그에게 "이론"이란 단어의 사용에 대해 질문했을때 도킨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화는 이제까지 관측되어 왔다. 단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을 관측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그것은 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경찰이 그 범인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 형사는 당연히 살인이 일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형사는 많은 실마리와 엄청난 양의 상황증거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진화는 진정한 과학자에게 마치 영어단어게임에서 하나 하나 스펠링을 불러주는 것 만큼이나 마찬가지로 명확하다."도킨스는 아이들의 과학교육에 지적설계를 포함시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으며 단지 종교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라고도 표현했다.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한 책인 의 저자 런던 대학교 교수 스티븐 로즈는 도킨스를 초다윈주의자로 명명하면서, 유기체가 아닌 유전자 수준에서 여러가지 자연 선택과정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도킨스의 유전자론은 유기체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유기체를 유전자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개체로 격하시켜 진화의 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여기에 대해 도킨스는 로즈가 비판하는 유전자 결정론이란 사회생물학자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이념임을 지적하고 로즈의 주장은 정치적 목적이 담겨있다고 답했다. '에덴 밖의 강'은 사이언스북스에서 '에덴의 강'으로 제목을 바꾸어 재판했다.도킨스는 또한 수많은 연설과 강의를 했는데 그중엔 헨리 시즈위크 기념연설 , 첫 번째 에라스무스 다윈 기념강의 , 마이클 패러데이 강의 , T.H. 헉슬리 기념 강연 , 어빈 기념 강의, 쉘든 도일강의 , 틴베르헨 강연 , 그리고 태너 강의등이 대표적이다. 1991년에 그는 어린이를 위한 왕실학교 크리스마스 특강을 했고 이것은 2007년에 이란 DVD 타이틀로 나왔다. +막스 루트비히 헤닝 델브뤼크은 독일 제국 베를린 출신의 미국의 생물학자이다. 1969년에 바이러스의 복제 기작과 유전적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앨프리드 허시, 살바도르 에드워드 루리아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델브뤽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천문물리학을 공부하다가 이론물리로 전향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영국과 덴마크 스위스 등 여러 나라들을 순회했다. 볼프강 파울리와 닐스 보어를 만나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32년 베를린에 돌아와 리제 마이트너의 조수가 된다.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초파리(drosophila) 유전자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테네시주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며 미국에 머물렀다. 1941년 매리 브루스(Mary Bruce)와 결혼하면서 나중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네 아이를 얻었다.1942년 살바도르 에드워드 루리아와 함께 박테리아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잘 조절된 변화가 아닌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공로로 1969년 앨프리드 허시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1950년대 이후 델브뤽은 유전학보다는 생리학쪽의 연구에 집중했고 또한 쾰른 대학교에 분자유전학 연구소를 세우기도 하였다.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손녀였다.수학에서 유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 또는 분수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이다. 단 분모가 0이 아니어야 한다. 특히 분모가 1일 수 있으므로 모든 정수는 유리수이다. 유리수체의 기호는 formula_1이며 몫을 뜻하는 영어 quotient에서 따왔다.유리수체 formula_1는 정수환 formula_3의 분수체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집합으로 생각할 수 있다.엄밀히 말해 유리수체 formula_1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시키는 (동형 아래 유일한) 체이다.유리수체 formula_1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집합 formula_10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 formula_11를 줄 수 있다.유리수체 formula_1는 집합으로서 몫집합 formula_14이며 그 위의 덧셈과 곱셈은 다음과 같다.체가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인 각종 연산 법칙과 덧셈 항등원 formula_17 및 각 유리수 formula_18의 덧셈 역원 formula_19 및 곱셈 항등원 formula_20 및 0이 아닌 각 유리수 formula_21의 곱셈 역원 formula_22의 존재가 성립하므로 이는 체를 이룬다.정수환과 유리수체 사이의 표준적인 단사 환 준동형은 다음과 같다.각 유리수 formula_18를 분수 꼴 formula_26으로 나타내면, 유리수를 마치 두 정수의 비율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유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이므로, 나눗셈 기호와 의미가 같은 분수 기호를 통해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과 3의 비를 분수로 나타내면 이다. 분자와 분모를 동시에 그 공약수로 나누어 원래와 값이 같지만 꼴이 더 단순한 분수를 얻는 과정을 약분이라고 한다. 분자와 분모가 서로소이어서 더 이상 약분할 수 없는 분{sfrac|12|18}}을 최대 공약수 6으로 나눠 약분하면 기약 분수 을 얻는다. 분자가 분모보다 작은 분수를 진분수, 작지 않은 분수를 가분수라고 한다. 가분수는 정수와 진분수의 합으로 표현한 것을 대분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의 대분수 표현은 1이다.무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분수 표현이 불가능하다.유리수의 진법 전개는 유한 소수이거나 순환 소수이다. 십진법 전개가 가장 흔하며, 그 예는 다음과 같다.분수를 소수로 전환하려면 나머지 있는 나눗셈을 통해 순환 마디를 구하면 된다. 유한 소수나 순환 소수를 분수로 전환하려면 = 0.1 = 0.01 = 0.001 및 = 0.111... = 0.010101... = 0.001001001... 따위를 이용하면 된다.반면 무리수의 진법 전개는 비순환 소수이다.유리수는 유한 연분수 표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분수를 연분수로 나타내려면 분자와 분모에 유클리드 호제법을 응용하면 된다.무리수의 경우 연분수 표현은 항상 무한 연분수이다.두 유리수가 같을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어떤 유리수가 다른 어떤 유리수보다 작을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두 유리수의 덧셈에는 통분 기법이 쓰이며 이는 다음과 같다.유리수의 반수를 구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두 유리수의 뺄셈은 반수를 더하는 것과 같다.분모의 최소 공배수를 공분모로 취하여 통분하면 더 간단히 구할 수 있다.두 유리수의 곱셈은 다음과 같다.0이 아닌 유리수의 역수는 다음과 같다.두 유리수의 나눗셈은 역수를 곱하는 것과 같다.집합 formula_1는 정수의 집합 formula_3으로 만든 분수체이며 따라서 formula_1는 사칙연산이 자유로운 체이다.집합 formula_1는 표수가 0인 가장 작은 체이다. 즉 표수가 0인 체는 formula_1와 동형인 체를 반드시 포함한다.서로 다른 어떤 두 유리수 사이에도 또다른 유리수가 존재하므로 집합 formula_1는 조밀 집합이다. 그러나 formula_1와 formula_3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므로, formula_1는 가산 무한 집합이다.유리수체에는 표준적인 절댓값과 p진 절댓값을 줄 수 있으며 이들에 의한 완비화는 각각 실수체와 p진수체이다. +피시방은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LAN 게임 카페이자 다중 PC 카페이다. 보통 피시방은 시간당 요금 또는 정액 요금을 내고 컴퓨터로 인터넷, 온라인 게임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장소다. 또한 피시방의 시간당 요금은 지역마다 다르다. 대부분은 40~80분에 1000원 정도로 가격을 책정한다.대한민국 최초의 전자 카페는 혜화동에 김형준이 개업한 피씨카페이다. 피씨카페는 1988년 3월에 첫 개장하여 1991년에 폐장된 엠팔의 멤버였던 안상수와 금누리가 홍익대학교 근처에서 만든 ‘일렉트로닉 카페’이다. 당시 16비트 컴퓨터 두 대를 놓아 전화선으로 PC통신을 이용할 수 있었다.이후 세계 최초의 인터넷 카페는 1994년 4월에 정민호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BNC라는 이름으로 첫 개장한, 인터넷카페이다. BNC 인터넷 카페는 당시 최초의 인터넷 카페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언론에서 소개한 인터넷 카페들은 전부 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1995년 여름에 종로, 홍대 등지에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지면서 대학생들이 인터넷 카페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인터넷 카페에서는 ISDN과 전화모뎀을 이용한 PC통신으로 하이텔에 연결하여 텍스트 위주의 통신이 가능하였으며, 대형 텔레비전 모니터에 PC와 TV를 연결하여 모르는 사람이 통신을 이용한 바둑을 둘 수 있었고 쥬라기 공원같은 통신을 이용한 게임을 할 수 있었다.그 뒤, 1996년 여름에는 PC방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다음해인 1997년 11월, IMF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피시방의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이 IMF라는 커다란 혼란으로 침체된 상태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장인 PC방 창업에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1998년부터 1999년까지는 창업 열풍에 맞추어 상승세를 타게 된다. 또한 1998년에 발매된 미국의 컴퓨터 게임 제작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는 5년 동안 대한민국의 피시방 2만 곳을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PC방의 대중화로 인하여 1998년 여름부터는 PC방의 창업이 대한민국의 컴퓨터 산업이 호황세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업체들이 PC방을 시장으로 이용하였고 많은 사업들이 성공할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 생각되었다. 비디오 게임산업이 발전하면서 그 비디오 게임에 맞는 컴퓨터 사양이 필요하였고 PC의 고사양화가 가속화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2001년부터는 PC방 개인사업의 통신선 설치가 일반 가정집까지 연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대한민국의 피시방은 미국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1998년 4월 발매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함께 널리 퍼졌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터넷에 연결되었고, 컴퓨터 게임을 하기에 적합해졌다. 2000년에 들어서는 화상 채팅이 퍼지면서, 많은 피시방들이 웹캠을 설치하였다. 또한 넥슨, 넷마블 등의 온라인 게임 서비스 업체들은 피시방을 중심으로 자사가 서비스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을 이벤트 등의 방식으로 홍보하기도 하며, 피시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이용할 경우 보너스 경험치 같은 혜택을 주기도 한다. 피시방은 컴퓨터를 비치하여 방문자가 이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스낵이나 음료수를 판매한다. 그러나, 2002년 이후 각 가정의 인터넷 접속 방법의 발달과 증가로, 현재 피시방은 사라지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이용료 인하, 시설의 고급화·대형화, 또는 플레이스테이션 4 같은 비디오 게임기를 비치하는 등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피시방은 어린 학생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이용자의 상당수가 청소년 및 어린이지만, 상당수의 피시방이 금연구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지않아 간접흡연의 피해를 입고 있다. 또, 인터넷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피시방에서 장시간 사용하면서 생활을 망치는 경우가 있으며, 간혹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일부 피시방 사장들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학생들에게 노동착취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또한 금연법의 시행으로 2014년 1월 1일부터 100m이상의 전 사업장 2015년 1월 1일부터는 100m이하의 전 사업장이 실시대상이 된다.또 주민등록번호나 개인 정보가 유출될 수도 있다. 일부 PC방에서는 회원가입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생일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수집하고 있으며 PC방의 메인 관리 컴퓨터가 해킹당하거나 업주의 악의적인 이용으로 피해를 받을 수도 있다.그러나 2014년 8월 7일부터 주민등록번호의 수집이 금지되면서 PC방에서의 주민등록번호 수집 역시 불법이 되었다. 이로 인해 회원가입 수단이 문자 인증으로 바뀌는 추세이긴하나 인증으로 인한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15세 이용가 게임인 오버워치가 유행할 당시 일부 PC방 손님들이 오버워치를 하며 PC방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신고하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 이로 인해 PC방 업주들과 경찰과의 갈등이 많이 벌어졌고 현재 PC방은 게임 이용등급을 지켜서 게임을 하라는 안내판을 부착하는 곳이 많다.피시방은 저녁 10시 이후에 청소년 출입이 불가능하며 20살이 되어도 고등학교 졸업을 해야지만 저녁 10시 이후에 출입이 가능하다.학교 근방에서 PC방 설치금지.PC방 업주들이 PC방은 더 이상 청소년유해시설이 아닌데도 학교정화구역 안에 일률적으로 설치를 금지하는 것은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다. 헌재는 PC방을 학교 근방 200m이내에 설치할 수 없다는 법규가 기본권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또한 직업수행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다.사이버지식정보방 (知識情報房)은 대한민국 국군에 장병 복지를 위해 설치된 이용 시설로 사지방 혹은 싸지방이라 부른다. 사이버지식정보방 (사지방)에 개방형 리눅스 OS인 하모니카가 도입되었다.피시토랑은 피시방+레스토랑의 합성어로 피시방에서 게임을 즐기면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옛날처럼 컵라면과 같은 즉석식품만 있는게 아니라 직접 조리해서 주는 여러 종류의 덮밥과 라면, 핫도그, 떡볶이, 튀김 등 다양한 음식이 있고 음료수도 스무디, 에이드, 커피 등 종류가 다양하며 자리에서 주문하고 계산까지 편하게 할 수 있다. 가격도 일반 식당보다 저렴해서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으며 피시방에서 게임도 하고 밥과 커피 등을 같이 해결할 수 있다. +노동조합 또는 노조은 노동자들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만든 노동자의 사회단체를 말한다.인간의 노동은 선사시대 이래 계속되어 온 것이나 임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임금 노동자 계급의 출현은 산업화 이후의 일이다. 노동자는 기업가와 더불어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산업혁명 초기부터 기업가에 비해 매우 불리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후 자본가와 국가에 대하여 집단적인 조직체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시드니 웹에 의하면 노동조합의 정의는 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조직적인 기초가 되며, 직업·기업·산업별로 조직된다.시드니 웹의 정의에서 암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계급분화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질서에 도전하기 보다는 이를 인정하면서 협상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등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본가와 대립하는 노동자 진영의 주요 조직으로 파악한다.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의 성격을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체로서 노동자의 여러 이익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나 연합단체로 보고 있다.산업혁명 이후 기계에 밀려 직조공과 같은 숙련 기술자들이 사라진 대신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산업화 국가의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근로하였으나 이들은 아무런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게 되었다. 초기 노동조합 활동은 자본가와 국가의 탄압을 받았으며 법률적으로 엄금되었다. 최초의 노동조합은 17세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결성한 우애조합, 공제조합 등이었다. 영국 의회는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조합의 결성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이들 조직은 비밀 결사의 형태를 띠었다. 초기 노동조합의 주요 활동은 일정한 조합비를 걷었다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급하는 일종의 상호부조였다.미국에서는 19세기 여러 단위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자본가들은 최악의 경우 노동조합 간부를 청부살인하는 등 악랄하고 극심한 탄압을 하였으나 노동운동의 발전을 막지는 못하였다. 1869년 결성된 노동자 기사단은 후일 세계산업노동자로 개칭하였으며 이 단체의 마더 존스와 같은 노동운동가들은 미국 노동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8시간 노동제 쟁취.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는 8만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미시건 거리에서 파업집회를 가졌다. 19세기 미국 노동자들은 10-12시간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 임금삭감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석유사업 및 탄광사업가인 록펠러가 고용주인 슈일킬 탄광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과 관련된 문제인 임금삭감에 항의하다가 주동자들이 교수형으로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즉,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한 단결이었다. 이 날 노동자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으나 경찰은 이들을 폭도로 몰아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포가 있었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미국의 보수언론들도 미국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빨갱이 딱지 붙이기 곧 공산주의 딱지를 붙이기를 했다. 이후 제2 인터네셔널은 이날을 노동절로 기념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은 큰 사회적 반향을 가져왔고 결국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8시간 노동제가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다.수 많은 노동자들의 노력끝에 1820년대 영국은 노동조합을 금지하는 법률을 폐지하였고 노동조합 활동이 합법화되었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 산업화된 국가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계속되어 1890년 무렵에는 서구 열강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이 합법화 되었다. 1890년 5월 1일 첫 노동절 기념집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어 노동조합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었다.산업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노동운동 역시 파급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를 겪은 일본은 1912년 일본 노동운동 역사 처음의 노동조합인 우애회(友愛會)가 설립되었고 1925년 무렵에는 457개 노동조합에 25만여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었다.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이던 192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친목회 노동회 노우회와 같은 지역합동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또한 인쇄공과 같은 숙련노동자들은 직업별 노동조합을 세웠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1924년 4월 조선노동총연맹이 출범하였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인권 쟁취를 위한 단결투쟁과 함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노동계에서는 부두에서 짐을 배로 실어나르는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에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하는 등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이 단결투쟁만이 노동인권을 쟁취하는 수단임을 깨닫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대표적인 노동조합 관련 운동으로는 1929년의 원산의 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투쟁이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가 된 제3세계에서 노동조합의 독립운동 참여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또한 1930년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도 있다.고무공장 주주들은 15~20%의 배당이익을 챙기면서도 노동자 임금 10% 삭감을 결의하여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130원의 저임금을 받아 3~4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사용자들의 임금삭감은 곧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고무노조는 단체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파업투쟁으로써 단결투쟁을 하였다.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1930년 8월 7일 국제고무공장을 시작으로 11개 공장 1천8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사용자들과 경찰은 대체인력 투입 빨갱이 딱지 붙이기 활동가 체포 용역 불량배를 통한 폭력으로써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방해하고 탄압했으나 노동자들은 현장복귀 거부와 선전전으로써 저항하였다. 또한 강주룡이라는 노동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미로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1970년대-80년대.1970년대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 이들의 편에 선 관리자들로부터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였으므로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탄압 및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악선전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함으로써 노동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인권을 쟁취하여갔다.1980년대 노동자들도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여갔다. 당시 노동자들은 단결함으로써, 시간외 수당 또는 초과노동수당을 주지 않는 착취근절, 어용노조 폐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불량도시락 거부투쟁, 임금인상 투쟁등을 실천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 활동가에 대해 노무관리라는 구실로 회사에서 감시, 가압류, 임금에서의 불이익, 회유를 하여, 2003년 1월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 열사가 분신자살을 하는 등 곧 헌법에서 보장된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자본에 의해 탄압되는 등 노동조합은 해결할 과제가 많이 있다.20세기에 들어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같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이 생겨나면서 노동조합의 영향력 역시 증대되었다. 1924년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램지 맥도널드는 최초의 노동조합 출신 영국 총리가 되었다. 또한, 1919년 국제노동기구가 설립되어 국제적인 노동 인권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다.1930년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사회민주당의 활동과 노동조합의 활동을 전면 엄금 시키는 등 독���에서는 노동조합 운동의 큰 위기가 있기도 하였으나 2차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한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조직 대상에 따른 구분.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을 기업별로 하여 결성된 노동조합을 기업별 노동조합이라 하고 산업 직군에 따라 조직된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이라 한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산별노조라고도 한다.산업별 노조는 산업직군 곧 하는 일이 같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해 만든 노조이다. 해당 산업직군에서의 노동을 위해 구직하거나 공부하는 노동자까지도 가입할 수 있는 산업별 노조도 있다. 본문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 산업별 노조를 소개한다.예를 들어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자동차 기계 조선업 IT 전자 전기같은 금속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만든 산업별 노조이다. 금속노동자들은 정규직 사내하청 등의 비정규직 한국인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의 구분없이 누구나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으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은 일다니는 회사에 어용노조나 유령노조가 있더라도 회사와 단체협약 곧 노동조건과 임금에 대한 약속을 체결할 수 있다.민주노총 건설노조는 건설업에 종사하거나 일하려는 노동자들의 산업별 노조이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들은 단체교섭을 일다니는 회사와 체결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건설노동자는 거의 대부분 일용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별 노조가 아닌 산업별 노조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것이다.한편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과 같이 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동조합이 된다.가입 유형에 따른 구분.노동조합은 조직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오픈 숍의 형태로 운영된다. 클로즈드 숍의 인정은 각 나라의 법률에 따라 다르다. 영국은 산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는 반면, 미국은 1935년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와그너 법을 제정하여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였으나 1947년 새롭게 제정된 노사관계법인 테프트-하틀리 법에 의해 금지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항운노조연맹이 클로즈드 숍으로 운영되고 있다.특수 정체성에 따른 노동조합.대한민국에서 노동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노동자 이른바 이주 노동자들은 차별 열악한 노동환경 대한민국 정부의 출입국 정책 등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므로 민주노총 이주노동자 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또한 대한민국에는 소속 조합원 노동자의 연령에 일부 제한을 둔 대신 고용 형태나 소속기업을 따지지 않는 노동조합이 있는데 대표적인 조직은 청년유니온이다. 청년유니온은 상급단체를 두지 않은 독립된 노동조합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전 세계 최대 노동조합 연대 기구로는 국제 자유 노동조합 연맹과 세계 노동 연맹을 합병하여 2006년 11월 결성된 국제 노동조합 연맹으로 전 세계 국가별 노동조합 305개, 노동자 1억 7,500만명이 151개국에서 가입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조합 국제 연대 기구는 세계 노동조합 연맹이 조직되어 있다.대한민국의 노동조합 연맹체.대한민국에는 다음과 같은 노동조합 연맹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